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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크 님의 서재입니다.

미쳐버린 아들이 축구는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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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크
작품등록일 :
2024.08.06 21:38
최근연재일 :
2024.08.2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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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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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
글자수 :
136,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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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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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돌이킬 수 없는 선택

DUMMY

[아빠! 혹시 내년 생일에도 같이 놀아줄 거야? 이제 선수 은퇴했으니까?]

[아마도? 유스팀 감독은 시간 내려면 낼 수 있던데? 왜.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우리 둘째가 좋으면 아빠도 좋다. 까짓것 생일 말고도 자주 놀러 다니지, 뭐.]


그날의 꿈이다.

나의 축구인생이, 아니,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그 날.

미션의 페널티로 인해 최소 수천 번은 반복 재생된 그 날의 기억.


아버지 한세훈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1958년생, 183cm, 78kg의 탄탄한 체구.

82년 레버쿠젠으로 이적해 큰아버지 선부용과 함께 팀의 전성기를 이끈 당대 분데스리가 탑클래스 스트라이커.


위대한 스트라이커였지만, 사실 대표팀에서는 성적이 빼어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전력이 워낙 약하다 보니 기회가 많이 없기도 했고.


나의 트라우마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정신 나간 미션도 어떻게 보면 그때부터 시작된 거지.’


게다가 당시의 한국 축구는 지금보다도 훨씬 뒤떨어져 있었고, 사람들의 애국심은 지금보다도 훨씬 강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라서 대표팀에서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부담감이 필요 이상으로 강했고, 퍼포먼스가 실망스러웠을 때 받는 충격도 지나치게 강했다.


실제로 분데스리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군림하던 아버지는 1990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당신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슬럼프에 빠졌다.

당시로서는 노장 축에 속하는 30대 초중반의 나이까지 겹치면서 2부리그 마인츠 이적으로 이어졌고.


이적 첫 시즌인 92-93시즌 종료 후 은퇴를 결정했으나 협회의 설득과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선수생활 연장.

그렇게 참가한 1994년 월드컵에서 골대 앞 홈런과 양발 태클 퇴장 등 호러쇼..


‘축구협회, 참 마음에 안 들어. 안 들지만...’


협회도 협회지만, 아들인 내가 봐도 변명할 수 없는 호러쇼였다.

86년, 90년의 경험으로 욕먹는데 익숙해진 아버지도 그때는 못 버티시더라.


그리고 1996년 5월 5일, 나의 열 번째 생일.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하루.


‘진짜 행복하게 시작한 날이었는데.’


보통 시즌 막바지 순위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시기.

덕분에 어린이날과 생일 모두 아버지와 함께 진득하게 보내본 적이 없었다.


[어이, 우리 막내! 어때? 맛있었어?]

[응! 완전 맛있어! 이거 독일 가서 또 먹으면 안 돼?]

[으하하하, 둘째가 아빠 아들은 맞나 보다. 아빠가 여기 단골이었는데 집에선 아무리 해도 이 맛이 안 나더라고.]

[으음... 그거는 좀 아쉬운데...]

[그럼 네가 엄마한테 황태구이 좀 맛있게 해달라고 해볼래? 대신 아빠가 말했다는 건 비밀로 하고. 그렇게 되면 너나 나나 둘 다 좋은 거잖아.]

[히히히, 우리 둘이 비밀로 하고? 좋아!]

[거기 두 사람. 나 듣고 있는데?]


은퇴한 아버지와 처음으로 보내는 생일 겸 어린이날.

오랜만에 귀국해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도 한껏 받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생일 당일도 더없이 행복하게 시작했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쁘게, 신나게 놀다가 아버지의 오랜 단골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한 뒤 도착한 주차장에서..


[어? 개발이다, 개발! 개발에 개태클, 병X새끼!]

[오오, 진짜네? 저 새끼 아직 살아있어? 콱 죽어버렸어야지!]

[방금 뭐야? 구라파 말인가? 쟤 마누라가 독일 년이랬지? 그럼 독일말?]

[씨X, 그럴 거면 독일가라고! 왜 독일 안 가고 우리나라 대표팀에서 그 개X랄을 떠는 거야?]


질 나쁜 인간들과 마주쳤다. 심지어 머리끝까지 취해있던.

아버지를 향해 온갖 욕설과 비아냥이 쏟아졌고, 우린 애써 못 들은 척하며 서둘러 차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아주 약간의 커피와 몇 개비의 담배꽁초가 들어있는 종이컵이 아버지의 이마로 날아왔다.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평생 못 잊어버리지.’


내 기준에선 그게 벌써 40여 년 전인데 당시 아버지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미션의 페널티가 없었어도 뚜렷하게 기억했을 거다.

그림만 잘 그리면 지금 당장도 완벽하게 그릴 수 있을 만큼.


담배꽁초 때문에 어두워진 커피가 이마부터 눈을 타고 흐르고, 그 길을 따라 담뱃재가 점점이 박히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 아버지의 표정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페널티도 별것 아닌가. 돌아가실 때의 표정이 아무리 처참해봤자 그때만큼 비참하진 않으니.’


강인하고 위대했던 한 남자의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진 순간.

항상 강하고 위대해서 우리 형제의 자랑이었던 아버지의 처음 보는 초라한 모습.

심지어 그날 밤 처음으로 목격한 엄마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그날 이후 득점 찬스만 되면 시야가 좁아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더라.

그게 중앙 미드필더 전향의 이유였다.

마지막 월드컵에서 네 경기 연속 골을 터뜨릴 때까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서.



언제나와 같은 장면에서 꿈이 끝나고 잠에서 깨어났다.

같은 꿈을 수도 없이 꾼 덕분에 큰 영향까진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간인 터라 기분이 살짝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이렇게 안 보여줘도 평생 잊지 못할 텐데.’


그날의 기억은 아버지에게도 트라우마겠지.

원래도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지만, 그날 이후로는 거의 목숨 걸고 일하셨거든.

오죽하면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진출을 다시 보지 못해 아쉽다고 하셨을까.


‘득점 관련 미션은 나의 미련, 월드컵 4강 미션은 아버지의 미련이려나.’


그래서 1996년 5월 5일이 나의 축구인생뿐 아니라 인생 전체가 꼬인 날이다.

트라우마는 물론이고 사실상 미션까지 시작된 날이니까.


한숨 한 번으로 익숙하게 남은 감정을 털어낸 뒤 욕실로 향한다.

페널티의 꿈을 꾼 날은 찬물로 정수리부터 물 한 번 끼얹으면서 털어내는 게 루틴.


이럴 땐 감정이 망가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인가.’


이럴 때를 대비해 감정이 망가진 건가.

하긴, 인간의 몸이 얼마나 정교한데 이유도 없이 망가질 리 있나.


‘미션 성공에 효도까지 할 수 있으니 차라리 잘됐어. 그렇게 생각하자.’


샤워를 끝내고 스킨, 로션을 바르며 거울 속의 나를 가만히 뜯어본다.

20여 년 뒤의 내 모습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여기저기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이 보이는.


20년 넘게 미션 하나만 보고 달리는 중인데 이제 와서 불만을 토로할 생각은 없다.

나의 미련과 아버지의 미련 때문에 시작된 게 맞다면 더더욱 최선을 다해 성공시켜볼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


‘누가 날 이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공하면 꿈에서든 어디서든 얼굴 한 번만 좀 보여줘라.’


진짜 딱 한 대만 어떻게든 때려보고 싶으니까.

기적의 기회를 선물 받은 건 사실이니까 딱 한 대만.


나의 정신 줄을 붙잡는 몇 안 되는 미련 중 하나다.


***


모든 준비는 지난 세계선에서 끝내고 넘어왔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이번 세계선이 시작되자마자 문서로 정리까지 했으니 진짜로 끝났고.


‘그러니까 훈련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첫날 한지온에게 말했던 것처럼 훈련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결국은 역효과가 난다.

득점왕과 월드컵 최다 골 기록이야 고점만 높여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월드컵 4강 1회 or 8강 3회 진출은 나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확인한 상황.


커리어를 길게 볼 수밖에 없고 롱런에 방해되는 모든 걸 철저하게 피해야만 한다.

결국, 훈련량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


‘차라리 훈련이라도 하면 낫지. 잡생각은 안 드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사람이다.

타고난 성격인지는 모르겠는데 트라우마가 생긴 게 초등학생 시절이었으니 긍정적으로 살았던 기억 자체가 거의 없다.

이 정도면 뭐 타고난 성격이나 마찬가지지.


안 그래도 트라우마가 생긴 그 순간을 뚜렷하게 기억하는데 미션의 페널티로 수천 번을 반복했으니 사람이 어두워지지 않고 배길까.


‘이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일 뿐.’


어쨌든.

평범한 취미 같은 것도 사라진 지 오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점점 미쳐가기만 할 뿐.


별 수 있나.

영상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해야지.


‘사실 그것도 만족스럽지 않지만.’


말했다시피 모든 준비는 이전 세계선에서 다 끝내고 돌아왔다.

실패를 확신한 이후 마지막 5년 정도는 이번 도전을 준비하는 데만 오롯이 투자했기 때문에 당연히.


훨씬 발전한 축구를 훨씬 발전한 영상과 장비로 분석하다가 2005년의 영상으로 공부하려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하긴 하다.

심지어 전부 다 본 것들이기도 하고.

복기가 나쁜 건 아닌데 아무래도 집중력이 생각만큼 올라오지 않는다.

다른 생각 안 들게 집중하려고 하는 건데 집중이 안 되니...


딱히 더 좋은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답답할 뿐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필리포 인자기가 나랑 비슷하긴 해. 내가 그보단 조금 더 축구를 잘할 뿐.’


가장 먼저 재생한 영상은 필리포 인자기의 것이었다.

나와 가장 비슷한 재능을 타고난 선수가 있다면 아마도 인자기겠지.

피지컬이나 축구력 같은 걸 내가 조금 더 타고났을 뿐.

그러니까 그와 달리 발롱도르 포디움에도 여러 번 들었던 것일 테고.


다만, 이번 세계선에서의 목표는 그보다 미로슬라프 클로제, 디에고 밀리토 같은 스타일의 스트라이커가 되는 것.


‘직전엔 컴플리트 포워드하겠다고 설치다가 망했지. 주제도 모르고.’


월드컵 4강에 가려면 팀을 혼자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판단 자체는 맞는데 컴플리트 포워드를 고집한 게 문제였다.


타고난 스트라이커는 맞지만 다른 능력들은 아무래도 좀 부족한 편이었거든.

그래도 시간을 투자하니 나중엔 볼만한 수준까진 올라왔는데 이미 늦었지.


‘무엇보다 딱 맞는 옷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이번엔 ‘포처’가 되어볼 생각이다.

다 잘하는 컴플리트 포워드가 아니라 적당히 다재다능한 피니셔 타입의 스트라이커가 목표.


한국 대표팀의 공격을 혼자 이끄는 것까진 가능하지만 그 팀으로 4강을 노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일찌감치 인정했다.

그러니 내가 가장 잘하는 것, 개떡 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골로 이어가는 데 집중해보겠다는 뜻.


빈 공간을 보고 미리 위치를 잡든 침투를 하든, 그건 세계에서 제일 잘할 거란 확신이 있다.

슈팅도 미친 듯이 갈고닦아 이젠 꽤 차는 편이고.

50년 동안 축구만 했어도 여전히 단점이 남아있는 부족한 재능이지만, 지난 세계선에서 이미 발롱도르 포디움까지 들었으니 이번엔 발롱도르도 몇 번은 받아볼 수 있겠지.


‘한국을 이끌고 4강까지 갈 방법 같은 건... 또 따로 준비가 되어있고.’


이번 선택은 꼭 정답이었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정답이 아니면 진짜 답도 없으니까.

첫 번째 세계선의 나도 꽤 훌륭한 선수였고 은퇴 후 적당한 명성, 돈과 함께 여유롭게 살 수 있겠지만.


글쎄.

이런 상황에서 미션에 실패하고 돌아가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난 못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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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미쳐버린 아들의 사회생활 +1 24.08.27 268 17 11쪽
24 탐욕과 집념 24.08.26 292 19 11쪽
23 타임어택 24.08.25 325 18 11쪽
22 지긋지긋한 도전 24.08.24 337 18 12쪽
21 나는 집착한다 +1 24.08.23 347 19 12쪽
20 전성기의 팀을 상대할 땐 24.08.22 403 18 12쪽
19 배고픔 +1 24.08.21 410 19 12쪽
18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 +1 24.08.20 426 21 11쪽
17 그녀의 품 안에서 +1 24.08.19 473 24 12쪽
16 따뜻한 마음으로 +1 24.08.18 463 21 12쪽
15 편하게 쉴 수 있는 곳 +3 24.08.17 478 21 13쪽
14 당신들이 적응해야지 24.08.16 492 24 13쪽
13 최고의 시작 +1 24.08.15 548 22 12쪽
12 축구만 잘해주면 +2 24.08.14 560 23 13쪽
11 마인츠 5형제 어셈블 +1 24.08.13 622 23 15쪽
10 마지막 컨셉 +2 24.08.12 653 25 13쪽
9 또 한 명 재꼈다 +2 24.08.11 667 26 13쪽
8 기분 좋은 날의 시작 +1 24.08.11 726 23 12쪽
7 나의 도시에서 24.08.10 795 25 13쪽
»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24.08.10 865 23 12쪽
5 충분한 시간, 20분 +1 24.08.09 910 24 12쪽
4 여유는 없다 +2 24.08.08 1,044 29 11쪽
3 이번에야말로 자신 있다 +2 24.08.07 1,268 35 13쪽
2 이런 게 총체적 난국이라는 건가 +6 24.08.06 1,549 31 11쪽
1 익숙한 모습이었다 +12 24.08.06 1,831 40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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