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거래
아샤트리아의 상황보고를 받은 후, 오토의 안내에 따라서 크로우는 바로 영주 성으로 향하였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릴 줄은 정말 몰랐다.
‘식량 지급은 물론이고, 이 지역의 영주와 동맹관계까지 맺게 되다니 정말 대단한데? 내가 할 일이 중간에 없어져 버린 것 같아서 조금 허탈하긴 하지만..’
나름 노력을 하긴 했지만. 결국 그가 손을 대기 전에 아이들이 나서서 문재를 해결해 버렸다.
아빠 입장에선 분명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겠지만 가장으로서는 약간의 아쉬움도 느껴지는 상황.
그런 감정을 느끼며, 크로우가 도착한 영주성
그곳에선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무리의 선두에선 아샤트리아가 정중하게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이시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거창한 인사를 받는 다는 사실에, 크로우는 자기도 모르게 괜히 어색하고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 했던 것 이상으로 조금 쪽팔린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를 대놓고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
백색 투구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크로우는 작은 목소리로 아샤트리아에게 말하였다.
“···.음..음.. 일단 자잘한 부분은 생략 하고 곧바로 이동하도록 하자.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크로.. 오즈 님.”
미리 이야기 해두었던 가명으로 자신을 부르며 아샤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바로 그의 안내에 따라 크로우는 이곳의 영주라는 소년 진과 대면하였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샤트리아의 주인인 오즈 입니다.”
“브레멘의 영주 진 안드라스 호른호스트 입니다.”
대표로서 간단하게 인사를 한 두 사람이지만, 이미 대부분의 내용은 아샤트리아가 끝내 놓은 상황인 만큼, 크로우가 할 일은 말 그대로 도장만 찍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거 고민하느라 고생한걸 생각하면 많이 허무한 결말이네.. 진짜로 우리 딸들 너무 유능한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크로우는 문자 번역 아이템- 정확히는 고대어 분석기라는 게임 내 존재하는 각종 문자들을 해석해주는 안경을 닮은 아이템을 사용해서 내용들을 한번 쭉 살펴 보았다.
복잡한 말장난 같은 것들은 사안들로 인해서 읽기가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이런 쪽에 지식이 부족한 그가 보기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카알론 측에 딱히 손해 보는 것들은 없었으며, 오히려 차후 다방면으로 이득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과연 아테나야. 이래가지고선 누가 부모인지 모르겠네..’
허무함과 더불어 아빠로서 자식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며 크로우는 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
검은 여전사인 아샤트리아의 주인.
오즈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던 남성과의 계약이 채결된 후, 영주성의 개인실로 돌아온 진은 수하들과 함께 회의를 시작했다.
그가 이 자리에 앉은 지는 겨우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본래부터 영주의 아들로서 신하들과도 친분을 두텁게 쌓아 왔던 진인 만큼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자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부담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럼, 오늘 있었던 일.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나름 똑 부러지면서 약간의 위엄 역시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진.
이에 이슬레이가 가장 먼저 현 상황에 대한 언급을 시작했다.
“네, 영주님. 우선 병사들의 피해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전체 병력 중 70%가 전멸을 당했으며, 방어 시설 역시 복구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그 부분에 대해선 일단 검은 전사와 그의 주인과 계약을 채결해 시간을 벌어놓았으니 약간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복구해 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언제까지고 저들에게 의지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백성들 쪽의 피해는 어떤지요?”
진의 말에, 시가지의 수비를 맡고 있던 오토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쪽의 피해는 다행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수비병력이 거의 전멸하고 대피장소로 적들이 밀고 들어오려던 시점에서 그 백색의 갑옷을 입은 남성.. 오즈라는 자가 개입해서 적들을 몰살시켰기 때문이지요.”
“오즈라···”
그의 이름이 나오자 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아샤트리아의 주인으로, 오토의 보고에 따르면 단 일격에 수천에 달하는 적병들을 몰살시켰던 존재.
둘 다 워낙 초월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확신을 어렵지만, 일단 보이는 것만 따지면 그 오즈라는 자의 힘은 아샤트리아보다 한층 더 강력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오토, 내가 검은 전사와 만나고 있을 때 그자와 이야기를 했다 들었는데.. 그 오즈라는 자의 성품은 어떻지?”
“네, 그다지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할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본론을 이야기 하기 전에 대화가 중단되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일단 그 압도적인 힘에 비해서 상당히 겸손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알고 말이지요.”
학살을 했을 당시의 냉혹한 전사의 모습과는 달리. 자신과 대화를 할 때는 최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자신이 했던- 본의 아니게 제법 길어진- 이야기들을 꼼꼼히 들으려 노력하는 듯 보였던 그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토가 말했다.
아울러, 썩 좋지 않은 인상에 비해서 묘하게 얌전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의외로 소심한 면모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오토는 이것 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얼굴에 그만한 힘을 지닌 강인한 전사였다.
행적과 외모하고는 정말 어울리지 않은 인상이었기에 오토는 아마 자신이 너무 긴장한 탓에 한 순간 착각을 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거만한 성격인 것 보다는 훨씬 좋군요.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쓸 줄 아는 지혜로운 인물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무릇 진정으로 위험한 것은, 단순히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지혜를 사용하여 신중하게 접근하는 존재들.
그런 점에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신중하기 까지 한 오즈라는 인물에 대해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으며, 이는 아샤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또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한 자들이 일단은 우리편이 되었다는 점에선 천운이 따랐다 할 수 있겠지.’
저들의 진정한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불안요소로 남아 있었다.
아울러, 자신들과 같은 강력한 힘을 알려주겠다는 점은 더더욱 수상하기 짝이 없는 행동.
하지만, 그럼에도 진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선 억지로라도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저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레멘의 앞날을 위해서.
그리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
브레멘에서의 상황이 얼추 종료된 후.
크로우는 아샤트리아를 자신들에게 배정된 저택에 남겨둔 채 이동마법을 사용해서 카알론으로 되돌아 왔다.
‘뭐랄까.. 내 집 마련이 그렇게 힘들다고들 하는데, 이 세계에선 그렇지도 않네. 전이되면서 대마법사가 된 이쪽의 스팩이 워낙 사기적인 부분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꼬마녀석 제법 하는걸?’
숙소를 사용해 달라며 계약 체결과 동시에 제법 넓은 집은 한 채를 내려준 영주 진. 어린 소년 치고는 상당히 대범한 행동에 크로우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확실히 크로우가 보기에도 자신들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면 그 정도 배려는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를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방금 전과 같이 계약 채결을 비롯한 일들을 진행해 나가는 과정은 제법 많은 잡음과 삐걱 임을 동반하면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진은 불과 수시간 전 아버지를 잃고 막 영주가 된 풋내기라 할 수 있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일을 밀어 붙이고 잡음 없이 성사시켰다는 것은 그 나이에 이미 지지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으며 단호한 결단력 역시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람들을 휘어 잡는 능력과 일을 추진하는 힘까지.. 꼬맹이 이지만 오히려 내가 배울 점이 많겠어..’
안 그래도 팔자에도 없던 지도자 노릇을 해야 하는 만큼 보고 배울 수 있는 롤모델이 있다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 진이라는 소년을 자주 살필 필요가 있다 여기며. 크로우는 천천히 중앙 홀로 향하였다.
*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옥좌에 앉아있는 크로우의 앞에서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정원사들.
그 중에서 특히 이번 일에 결정적인 공언을 한 아테나의 얼굴에선 눈에 띄게 반짝이는 기색이 엿보였다.
‘저건.. 꼭 엄마 한태 칭찬받기 직전의 장미 같은 얼굴인데.’
현실에서 여동생이 수학시험 만점을 맞아 왔던 날을 떠올리며 크로우는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선 바쁜 와중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주어서 고맙구나. 그럼 지금부터 이번 일을 통해 우리가 거둔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우선 아테나.”
“네, 크로우님.”
“아샤트리아를 도와 협상을 완벽하게 진행해 주었더구나. 정말 훌륭했다. 카알론의 정원장 다운 멋진 활약이었어.”
“과.. 과찬이십니다 크로우님.”
크로우의 말에 얼굴에 홍조까지 띈 채 고개를 숙이는 아테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감격해 하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크로우는 그냥 평범하게 부모님이 자신에게 해줬던 식으로 칭찬을 하는 쪽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전의 아샤트리아도 그렇고, 대부분 내가 너무 친근하게 대하려 하면 어쩐지 부담을 느낀단 말이지..아무래도 진짜 자식들처럼 살갑게 대하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
아무래도 대놓고 양녀로 설정한 데다 나이도 어린 메닐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NPC 들은 자신을 신하로서 대하는 걸 더 편하게 여기는 듯 하였다.
이에 크로우는 아이들을 딸로서 여기고 있는 자신의 본심과 별개로, 일단은 그 군신관계 라는 것에 태도를 맞춰주고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단순히 칭찬을 하는 일에도 부담과 어색함을 느끼게 만드는 이런 상황은 가능한 정리하고 싶었다.
‘뭐..내가 조금씩 다가가 준다면 언젠가는 편한 사이가 되겠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실제로 대화를 학 된 지는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이니까.’
그렇게 이 문제에 대해선 일단 미루기로 결정하면서 크로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울러, 이번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정찰 일을 완수해준 자미엘과 이 자리에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힘내준 아샤트리아에게도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정말 고맙구나. 자미엘.”
“망극하옵니다 크로우님.”
아테나 보다는 비교적 얌전한 모습으로 자미엘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일련의 논공행상이 끝난 후. 크로우는 아테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하였다.
“그럼, 이것으로 식량과 정보 수집에 대한 부분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듯 하니.. 아테나, 앞으로 샤트리아를 통해서 그 영주와의 관계를 계속해서 진전 시키도록.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들과 우호적으로 관계를 맺은 첫 장소인 만큼 확실하게 그들을 아군으로 묶어둘 필요가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크로우님!”
칭찬의 효과 덕분인지 방금 전보다 한층 더 의욕적인 반응을 보이는 아테나.
그렇게 앞으로의 당부에 대해 이야기한 뒤, 크로우는 회의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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