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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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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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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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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쪽

사문유관 7 - 개꿈의 반대말은 고양이 꿈

DUMMY

5.

아주 잠깐, 꿈.


그게 아니면 인간 외면의 의식이 절대로 인식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뇌내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심연 속.


언샤의 의식은 그곳에서 꿈을 보았다.


언샤는 서울 훈련도감의 사령부 건물인 북영(北營)의 연병장 위 연설대에 서있었다.


그곳에서 언샤는 자신이 뽑은 수많은 예비 착호갑사들이 나란히 서 그 무예를 연마하며, 어떻게 하면 나찰과 싸워 승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연설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대충 1년 전에 직접 경험하고 보았던 광경이었다.


언샤는 백성들이 더는 나찰들에게 고통받지 않기를 원하고, 백성들이 더는 나찰의 간을 씹어먹을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착호갑사대를 더욱 증설해 거대한 군단과 같은 편제로 확장시켰다.


그렇기에 그곳에 있는 모든 갑사들은 황제인 언샤의 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교육하며 연설을 하고 있었던 건 언샤 본인이 아니었다. 연병장의 모든 신입 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던 건 착호갑사대 대장 겸 훈련도감 착호훈련대장인 무관 벵골 장군이었으니.


벵골 장군은 나이가 여든이 넘은 노인으로, 사실 나라의 벼슬아치로 임명된지는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전에는 돼지 간을 팔아먹는 요리점이나 하던 구 천민이었기에 그런 그가 처음으로 원래 품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이례적이며 높은 임시 관직 자리에 갑자기 임명되었을 때는 수많은 관리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그 노인은 고작 1년 만에 구시대적이었던 착호갑사대의 편제를 완벽히 뜯어고치고 그들 모든 군인에게 실전에서 완벽하게 쓸 수 있는 나찰 사냥 방법과 기마술, 궁술, 무술을 때려 박는 데에 성공하며 그 능력을 확실히 보였기에 이제 와서는 그 누구도 군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어째서 고작 고기나 팔아먹던 구 천민인 벵골이 그러한 위업을 이룰 수 있었냐면, 애초에 벵골은 평범한 천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찰사냥꾼 출신이었다.


노인은 과거엔 아주 전설적인 나찰사냥꾼으로 이름 날렸던 존재였으며 그 당시 서울에 있던 모든 나찰사냥꾼들을 지휘하고 통괄하며 자신의 아래에 두고 수많은 나찰을 사냥한 공이 있는 자였다.


그렇기에 그 공적과 능력을 높이 산 황제가 노인을 갑자기 높은 관직에 꽂아 넣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벵골은, 연설대에 지팡이를 짚고 서 새로운 부하들을 향해 나찰 사냥의 중요성에 대해 목청을 크게 드높여 설교하다가, 황제가 자신의 옆에 선 것을 눈치채고는 연설을 멈추고 황제를 향해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개똥만도 못한 아기 강아지 언샤 황제님 아니야?"


"네, 벵골 장군님. 제가 그 개똥만도 못한 언샤 황제입니다."


"뭐? 장군님? 장군니이임이라고? 이 죽일 놈이! 이 천하에 둘도 없을 패륜아 자식!"


벵골 장군은 그렇게 말하며 그 지팡이를 휘둘러 황제의 머리를 아주 사정없이 후들겨패기 시작했다. 황제는 머리를 손으로 싸매고 최대한 지팡이에 덜 아프게 맞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할 뿐 그것을 피하거나 막지는 않았다.


이는 한 나라의 장군이 황제를 두들겨 패는 놀라운 장면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이 할아비를 장군으로 임명해놓고 자긴 여신님이랑 단둘이 여행을 나갈 계획이라고? 감히 내 꿈을 나보다 먼저 이뤄버려? 거기에 더해 이 늙은이를 대원군으로 추존해 남은 여생을 호의호식 할 수 있도록 해주지는 못할망정 고작 장군직 무관으로 앉혀 부려먹을 생각을 해?"


아무리 그 위용이 하늘과 같다고 하는 황제라 해도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대체 어떻게 대들 수 있겠는가.


"아니, 할아버지. 그래도 착호갑사 대장직은 엄청나게 명예로운 자리 아닙니까. 착호갑사대는 이 알 실라의 군대 중 유일하게 황제의 어명 없이 대장이 직접 움직이고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예외적인 무력 조직이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품계 같은 걸로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명예직이니, 아무나 앉힐 수는 없는 자리인 걸 잘 아실 텐데요."


"그럼 이 할아비 말고도 더 잘나고 젊고 믿을 수 있는 부하를 앉혀 놓으면 되는 거 아니었느냐! 이게 감히 한 나라의 황제가 되어서는 빌어먹을 가족경영으로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했나!"


"아니, 그래도 대원군보단 장군이 낫지 않습니까. 예전에 돈 많이 벌어서 절에 크게 시주해보시는 게 꿈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월봉과 녹봉도 엄청나게 높게 책정해놨는데. 이건 모두 황족인 할아버지께서 황제 간을 빼서 팔아먹는 옛날 생활이나, 대원군이 되어 궁에 거주하며 백성들의 혈세를 축내기만 하는 것보다는 더 의미 있고 큰일을 하라는 황제 폐하의 큰 뜻입니다."


언샤는 제법 그럴듯한 변명을 그 자리에서 생각해냈으나 벵골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네가 바로 그 황제 폐하 본인이잖아 미친놈아!"


지팡이 세례가 더욱 거세게 쏟아부어졌다.


"악, 악. 제발. 제발. 그만 좀 때리세요. 그런 구시대적인 훈육방식이 손주를 망치는 법이라구요!"


"덩치는 멀대같이 다 큰 놈이 아주 입으로는 못하는 소리가 없지! 아이고, 허리야. 뒷목이야. 아이고. 혈압, 혈압."


언샤의 할아버지인 벵골은 계속해서 지팡이로 언샤를 두들겨패다가, 제풀에 지쳐 떨어졌다. 벵골은 그 분노를 삭힐 생각은 없었으나 계속 화를 내다간 중풍으로 쓰러질 기세였기에 더는 화내지 않았다.


그리고 언샤는, 지팡이로 두들겨맞는 그 고통이 마치 구름 방망이로 치듯 비현실적이고 가벼운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화신은 그 모든 감각이 아주 예민했기에 고통 역시 더 예민하게 느끼면 느꼈지 고통에 둔감하지는 않았기에 이는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언샤는 바로 그러한 비현실적인 감각 때문에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 자신이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직접 겪었던 일과 대충 비슷한 기억을 그대로 재현한 꿈속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챘다.


꿈속에선 고통을 느낄 수 없으니.


이곳은 꿈, 그리고 현실의 자신은 어둑시니와 싸우던 중 맞고 기절했다. 죽은 건 아닌 게 분명했다.


화신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고, 죽은 존재가 계속해서 사유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


언샤가 그곳이 꿈속이란 것을 깨닫자마자, 연병장에 선 모든 병사들의 움직임은 그대로 정지했으며, 배경은 마치 먹물을 너무 엷게 색칠한 산수화처럼 흐릿하고 뿌옇게 변해버렸다.


마치 시야의 변두리에 검은 안개가 낀 느낌이었다


언샤가 자각몽은 처음 꿔본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주변의 모든 광경이 암전 되었다. 마치 어두운 방 안의 호롱불이 꺼진 듯 풍경이 한 번 깜빡이고, 그다음 다시 밝아졌다.


새롭게 눈에 들어온 광경은 산속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드높은 바위산.


상상화에서나 나올 법한 깎아지를 듯이 높은 절벽, 깊고 깊은 산세, 끝도 없이 쏟아지는 폭포.


오색 깃털을 가진 봉황이 날아다니고, 호수 위에는 흐드러진 연꽃, 그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보리수, 마치 구름 속에 들어온 듯 주변 모든 공간이 물안개로 둘러싸여 있고, 하늘엔 금빛 구름이 떠다니고 있다.


언샤가 서 있는 곳은 호수 한가운데에 송곳처럼 솟아올라 홀로 고고히 높게 서 있는 절벽 위였다.


그리고 그 절벽 위에는 하나의 아름다운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나란히 서있는 흰 기둥 위에 흰색과 검은색의 두 색이 조화로운 단청이 새겨진 처마가 있고 그 위로 검은 기와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지붕이 얹힌 누각이 호수 위 절벽 위에서 군자와도 같이 위풍당당히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참으로 고즈넉했다.


그렇기에 그곳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리 꿈속에서 맥락 없이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그 모든 광경은 기억의 찌꺼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단순한 환상에 불과할 텐데.


꿈속의 배경은 원래 실제로 보았던 기억이 헝겊처럼 기워져 만들어지는 것이라 아주 적당히 대충 만들어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 조화롭고도 동시에 말이 안 되는 광경은 대체 무엇인가.


알 실라에 이러한 산은 존재하지 않았고, 언샤가 가본 대륙 어디에도 이런 장소는 없었으며, 언샤는 산수화 속에서도, 상상화 속에서도 이러한 곳이 그려진 그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곳 모든 것은 꿈 속임에도 아주 선명하며 동시에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그렇게 창조하기라도 한 듯한 공간이었다.


"언샤야, 올라오너라."


누각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언샤는 돌계단을 밟고 누각 안으로 올라갔다.


누각 안 마루에는 한 사람이 한쪽 팔꿈치를 받침 삼아 옆으로 누워 있었다.


흰모시 적삼에 간결한 상투를 틀고 입에는 곰방대를 물고 있는 노인.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기기라도 한 듯이 계속해서 입에서 희고 검은 원형의 연기를 뱉어내는 아슬란족.


그 세상 모든 것에 초탈한 분위기는 군자와도 같으며, 신선과도 같으며, 동시에 나한 같기도 하다. 그 얼굴은 아주 익숙했으나, 그러한 분위기는 도저히 익숙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여기서 뭘 하세요?"


"뭐 하긴, 옆으로 누워서 남초를 피고 있지."


그건 분명히, 언샤의 할아버지인 벵골이었다. 그렇기에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양반은커녕 천출에다, 군자 같은 존재와는 일천만 리 정도의 거리가 있는 성격인 자신의 할아버지가 누각에 앉아 상투를 틀고 새로 짠 듯이 덧댄 자국 하나 없는 모시 적삼을 입고 앉아있다고?


아무리 언샤가 할아버지를 관직에 앉혀 이제 그 품계나 재산이 옛 양반과 비교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어졌다고 해도 평생을 사냥꾼답게 살아오며 그것에 긍지를 가진 할아버지가 갑자기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 어울리게 그 차림은 뭐래요? 양반 흉내라도 내는 거예요?"


"흉내는 무슨. 만약 누군가 흉내 낸 사람이 있다고 친다면, 그건 내가 그들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흉내 낸 것이지."


그렇게 대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온화했다. 하지만 언샤가 아는 벵골은 원래 매우 격정적인 사람이었다.


그 감정과 분노를 표현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고, 마치 불과 같이 세상 모든 걸 태우는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눈앞에 있는 꿈속의 할아버지는 그러한 평소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그 표정은 전혀 분노를 담고 있지 않았으며 아주 평온한 것이었기에, 마치 세상만사에 달관한 듯이 해탈한 존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이 귀찮은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록 늙긴 했으나 아직도 정열이 넘치며 절대 이 세상을 지루한 곳이라 생각하지 않던 그 노인이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저를 지팡이로 때리고 계시지 않았어요? 갑자기 왜 이런 곳에 계신 거예요?"


"그건 과거의 기억 파편이 만든 환상일 뿐이고. 네가 그곳이 어딘지 깨닫는 것으로 그 기억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너와 내가 여기 있게 된 것이지."


"여기가 어딘데요?"


"어디긴 어디야, 꿈속이지."


참으로 현학적이고도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꿈속의 등장인물이 이곳은 꿈속이라고 말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궤변인가.


"그럼 그 꿈속에 계시는 할아버지는 누구신데요?"


"누구긴 누구야, 네 조상님이지.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네, 할아버지."


언샤는 벵골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벵골이 아니며, 할아버지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인 누군가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언샤는 그 할아버지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아니, 거스를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그였기에.


"앞에 앉거라."


"네."


언샤는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았다.


반쯤 누워있다시피 했던 할아버지는 그대로 일어나, 두 발과 다리를 포개 가부좌를 틀며 언샤와 마주 앉았다.


그러고는 계속 피고 있던 곰방대를 허공으로 집어던졌고, 곰방대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 없었다는 듯이 공중에서 그냥 맥락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언샤야, 네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겠느냐?"


"글쎄요. 방금 전까지 어둑시니라는 별명이 붙은 나찰과 싸우다가 기절한 건 기억이 나는데요. 기절하고, 꿈을 꾸다가, 그게 꿈이란 걸 깨닫는 순간 자각몽이 되었고. 그 후 여기 있게 되었죠."


"아니, 그건 '어떻게'고. '왜'가 아니다. 대체 왜인지, 이유를 말하고, 목적을 정해라. 그래야만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단다."


"왜냐뇨. 저는 이곳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언샤가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멀어지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안개에 묻혀있던 그곳 모든 광경이 그 위에 검은 먹선을 그은 듯이 길게 늘어지고 흐려져 언샤의 눈앞에 있음에도 절대 닿지 못할 정도로 먼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작 그것으로 꿈이 끝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대답을 하면 자신이 바로 이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라는 불가사의한 직감이 들었다.


"아니, 그게. 실은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요!"


언샤가 그렇게 대답하자, 일그러졌던 공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현실과 도저히 구분히 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지만 그럼에도 흐릿한 그 미묘한 감각이 다시 돌아왔다.


박제된 별처럼 멀어 보이던 할아버지 역시 다시 평범하게 앉아 있게 되었다.


"그래, 네가 이 늙은이를 찾아 이런 곳까지 온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할아버지는 아주 유명하고 경험도 많은 나찰사냥꾼이시잖아요. 그러니 뭔가 조언 좀 받을 수 없을까요?"


"나는 사냥꾼은 아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자보다 많은 생명을 죽인 자이기는 하다. 그러니 직접 도울 순 없어도, 싸움에 관해서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그러니 물어보거라.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그, 얼마 전에. 할아버지께서 위험하다고 경고해 주셨던 여러 별명 있는 고위 나찰 중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말씀하셨던 '어둑시니'라는 놈과 만났거든요. 전에도 가르쳐주셨잖아요. 그놈은 어둠이랑 동화할 수 있고, 어둠과 동화되고 나면 절대 추적할 수도 없고 공격할 수도 없으니 만나면 절대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고 하셨었는데."


"별명? 어둑시니? 요괴 어둑시니를 말하는 게냐? 요즘엔 나찰에게도 별명을 붙여주고 그러나 보군. 미지의 존재에게 반드시 이름을 붙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건 또 그 자체로 나찰을 신처럼 경외시하는 것과 같으니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구먼."


언샤는 벵골에게 직접 들었던 설명을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었지만, 눈앞의 할아버지는 그 말을 처음 듣는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역시 이 할아버지는 외모만 같을 뿐 벵골 본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언샤의 할아버지가 아닌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것은 절대 거짓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건 왠지 모르게 확신할 수 있었다.


참으로 꿈속 다운 궤변이자 모순이었다.


"그런데, 여기가 진짜 꿈속이 맞고. 제가 기절한 게 맞으면 저희 이렇게 느긋하게 얘기하고 있을 시간 없지 않나요? 저 분명히 턱을 맞고 기절했는데, 그럼 진작에 더 공격받고 죽었어야 정상인 게 아닌지?"


언샤는 그런 자연스런 의문을 표명했고, 이런 꿈을 꾸기보다 빨리 깨어나 반격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인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이곳은 꿈속이라고 방금도 말하지 않았느냐. 꿈속 시간은 무한하지는 않으나 바깥보다는 아득히 넓다. 꿈속에서 한 사람의 생로병사를 모두 겪고 수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쳤음에도, 잠에서 깨고 보니 그것이 한 밤의 일장춘몽에 불과했던 경험을 해본 적이 없지는 않을 것 아니냐. 이곳 꿈속에서 언샤 네가 공간과 시간이라 느끼는 것은 결국 네 무의식의 발로일 뿐. 그 모든 것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고로 네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있을 것이요. 없다고 생각하면 없게 될 것이다. 꿈이란 결국 네 사고가 낳는 부산물일 뿐이니. 이 공간에서 의미가 있을 현상은 오로지 하나, 너의 사유와 사고밖에 없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래요? 시간의 넓이? 무의식? 사고의 부산물? 분명 설명해 주셨는데 바로 그 설명 때문에 더 이해가 안 가는데요?"


"뭐, 그럼 그냥 꿈이라 그렇다고 생각하거라. 어차피 그 원리를 설명한다 해도, 네 호두 같은 두뇌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사실 너뿐만이 아닌 세상 모든 인간이 꿈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 부끄러워할 건 없다. 이 세상엔 감히 인간 따위가 이해하려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경할 터인 범접 불가능한 자연 현상이 수백만 가지는 존재하고 있으니."


"아니, 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 내 뇌 보고 호두만 하다고 그러지? 다들 내 머리 열어서 직접 내 뇌 크기가 얼마만 한지 본 적이라도 있어요? 왜 다들 나를 바보로 몰아가는 거야?"


언샤는 평생 동안 자신의 누이에게, 그리고 지난 몇 년간은 마키와 여신과 외사촌 누이에게 대충 비슷한 얘기를 들어오며 자신이 진짜 바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들으면 괜스레 찔려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 역시 설명을 해주고 있기는 하나 이해는 전혀 되지 않는 그 사고방식이 그 여신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고, 질문이나 하거라. 시간이 넓다고 했지 시간이 무한하다고 하지는 않지 않았느냐. 네가 그 사고를 고작 분노 따위에 낭비할 수록, 우리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저변 또한 줄어든다. 너도 아직 죽고 싶진 않을 거 아니냐. 네겐 그 작은 가슴에 품기엔 너무나도 큰 대의가 있으니."


언샤는 그 말을 듣고 더는 시간을 끌지 말고, 아니 생각을 낭비하지 않고 그냥 궁금한 것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애초에 그냥 꿈 아닌가.

아무리 자각몽이라 해도 꿈인 이상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법이었다.


그러니 그냥 묻지 말자. 궁금증을 가지지 말자. 이해하려 할수록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그럼, 방금 전에 어둑시니의 능력에 대해 들으셨잖아요. 그건 대체 뭐죠? 어떻게 화신도 아닌 일개 나찰이 그런 신의 권능에 가까운 능력을 쓸 수 있는 거예요?"


"흠. 이건 설명하자면 아주 복잡한데. 네가 알아봤자 싸우는데 방해만 될 것 같구나. 그러니 대충 개괄적인 사항만 말해주도록 하마. 대충 나찰에게도 그들이 따르는 악신 같은 게 있고, 나찰에게도 신이 있으니 그 신의 힘을 내려받은, 너와 똑같은 화신도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단다. 그냥 고위 나찰은 좀 많이 기괴하게 생겼을 뿐 그 본질은 너랑 다를 바 없는 화신 같은 거라고 생각하거라. 고위 나찰이란 신체 능력이 다른 나찰들보다 뛰어나고, 회복력도 더 뛰어나고, 신의 권능도 쓸 수 있는 존재인 게지. 마치 너처럼."


할아버지는 나름대로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듯했지만, 그 태도와 설명 내용은 아주 적당함 그 자체였다.


아까 전 설명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자, 그냥 설명 자체를 포기해버린 듯한 형세였다.


제대로 구색을 갖춰 말하면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상대 눈높이에 정확히 맞춘 설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배려심 있지도 않았으니 그냥 설명 자체를 하지 않고 아예 다른 관념을 들고 와서 그걸 사실인 마냥 말해버리는 것이다.


"본인이 말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말을 아예 안 믿고 있는 티가 나는구만요. 그거 방금 생각해낸 거짓말이죠?"


"그래, 방금 생각해냈단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믿거라. 믿음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으니. 설명해 준 내용이 전부 다 거짓말인 것도 아니고. 네가 나찰을 상대하고 죽이는 데에는 그거면 충분하지 않느냐. 너도 고작 저런 나찰 하나에 죽어줄 생각은 없을 테니. 아무리 강하다고 하나 고작 한 마리일 뿐이고.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저따위 잡놈에게 벌써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그냥 믿는 것 가지고는 죽일 수 없잖아요. 간절히 기도한다고 우주가 나서서 들어줄 리도 없고."


"그래. 그래서 이 할아비가 네 뇌의 얼마 되지도 않는 자원을 활용해서 타개책을 같이 고민해 주고 있지 않느냐. 됐고, 그 나찰이 사용한 권능의 상세 요소에 대해서 더 설명해보거라. 그 어둑시니라는 나찰이 쓰는 권능은 구체적으로 어떻지? 상대하면서 약점 같은 게 있다곤 못 느꼈나?"


하지만 할아버지는 언샤의 불만을 해소해 주는 것보다는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타개책을 제시하는 데에 더 신경을 쏟고 있는 듯했고, 일단 살아남아야 불만을 말할 수 있는 처지였기에 언샤는 그가 유도하는 대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음, 그게. 사실상 능력이 발동되고 나면 거의 말 그대로 무적이었어요. 존재 자체가 완벽히 세상에서 사라지고 어둠과 하나도 달라질 게 없게 되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권능이었다고 해야 할지. 약점이라고 해봐야 아마 밝은 낮에는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능력을 쓰기 전에 일격에 죽여버리면 될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 약점은 완벽히 의미가 없는 것들이로구나. 애초에 해가 뜨려면 7시간 정도 남았고. 그 나찰은 그 능력을 써서 언제든 도망칠 수 있음에도 도망칠 필요성을 못 느끼니 도망치지 않는 것뿐이고. 오늘 밤 쓰러뜨리지 못하면 계속 언샤 너를 쫓아다니며 내일 밤, 그다음 밤, 그다음다음 밤에도 또 습격해오게 될 테지.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넌 무조건 죽게 될 거다."


"그럼, 그 괴물이 어둠 속에 녹아들지 못하도록 한 번에 죽이면요?


"놈을 일격에 죽인다는 건 완전히 논외다. 너는 무술은 뛰어나나 권능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냥 갓 걸음마를 뗀 아이에 불과한 수준이니. 그정도 허섭스레기 수준의 권능으로 녀석의 심장이나 두 머리를 노려서 한 번에 파괴하려다가, 실패하게 되면 녀석은 능력을 사용해 도망친 후 너를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될 게다. 즉 권능을 쓰면, 넌 무조건 죽는다."


"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까 전에도 권능을 섣불리 안 꺼내서 다행이라고 안심했었는데. 그럼 뭐 다른 파훼법이라도 생각 안 나세요? 제 호두만 한 두뇌로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나서."


언샤는 그렇게 비꼬며 대답했지만 할아버지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생각에 아주 골똘히 전념했다.


그리고 그 주름투성이에 털도 빠질 대로 빠진 늙은 노안을 한껏 찌푸려 세상 모든 고통을 품기라도 한 듯 온갖 역경을 다 담은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언샤는 노인이 드디어 그 나찰의 능력을 완벽히 분석하여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해답을 밝혀냈나 싶어 한껏 부풀어 오른 기대를 품었다.


"좋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놈 능력은 천하무적이야."


그리고 노인이 생각해낸 대답은 아주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네? 뭐라고요?"


"이 할아비가 꼭 두 번이나 말해야만 하겠니? 그놈 능력은 천하무적이니, 절대 그 능력을 상대하지 말거라."


"아니, 그게 대체 무슨 궤변이신지······."


"이해 못 하겠으면 한 번 더 말해주마. 아마 나선성신들의 권능을 쓰더라도, 어떤 사멸신장의 능력을 쓰더라도 어둠 속에 동화한 그놈을 찾아내거나 공격할 수는 없을 거다. 고위 나찰이라면 모두 하나같이 화신에 비견될 만한 능력을 최소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지만, 그놈은 그중에서도 특히 더 골치 아파 보이는구나. 능력의 규모가 큰 건 아닌데, 능력 특징이 너무나 성가신 거야. 그러니 그 능력에 맞설 생각 자체를 하지 마라."


그 말을 듣고, 언샤는 아주 허망해졌다.


그럼 뭐 어쩌란 것인가.


권능을 쓰더라도 죽일 수 없다는 확언을 들었고, 거기에 더해 우연히 만난 괴물이 말도 안 되는 강자라고 띄워주기까지 하다니.


"애초에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져 버린 걸 어쩌냐. 동등한 조건이라면 인간보단 나찰이 월등히 강력하단다. 괜히 이 지구가 나찰로 뒤덮이게 되고 인간이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게 된 게 아니란다."


언샤는 그냥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 허무한 소리나 할 거면 대체 왜 이 장황한 꿈속 공간을 만들어서 되도 않는 농담 따먹기나 하게 시킨 것인가. 이 할아버지는 자신을 놀리려고 나타난 것인가?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구요? 그냥 얻어맞아서 죽으라구요? 도망쳐도 저 놈 능력이 그런 것인 이상 결국 언젠가는 따라잡혀서 죽임당할 텐데. 저를 놀리려고 이 이상한 곳으로 부르신 거예요? 내 조상님이시라며? 조상신님이란 거 원래 이렇게 무능해?"


"아니, 손주야. 그걸 대체 왜 그렇게 알아듣니? 나는 그냥 맞아주라는 말이나 도망치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않느냐. 너와 내 목숨이 걸린 이 중요한 순간에도 사람 말을 그렇게 배배 꼬아서 해석하는 언샤 네 쪼잔함에 새삼 감탄하게 되는구나."


"하지만, 결국 아무 도움도 안 되셨잖아요."


"아니, 방금 해법을 알려주지 않았느냐. 대체 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게 대체 왜 해법이 된다는 건지를 모르겠다니까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반응은 아주 아리송할 뿐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대화에 함축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와 대화했던 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아주 잘 이해하는 사람밖에 없었던 듯이 말하는데.


절친한 가족이나 십 년은 알고 지낸 둘도 없는 친구, 아니면 그 제자쯤 되지 않고서야 대체 누가 그런 화법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흠, 그래. 그럴 수 있겠구나. 그러고 보니 난 지금껏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나와 사고방식이 너무 닮은 자들만 상대해왔어. 세상 사람은 원래 대체로 언샤 너와 같은 정도이며, 네가 나와 달리 평범하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구나. 그럼 이렇게 말해주도록 하마."


할아버지는 지금까지의 삼라만상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듯한 그 태도를 버리고, 두 눈에 힘을 주고, 풀렸던 동공에 생기를 불어 넣고, 최대한 평범한 사람과 같이 말했다.


"어둑시니의 능력이 확실히 무적이긴 하나, 그럼에도 그대가 그놈에게 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아니, 그래서 구체적으로 대체 어쩌란 건데요."


"아까도 몇 번이나 말했듯 그놈의 능력 자체는 천하무적일 게다. 하지만 천하무적인 것은 그놈의 능력이지, 그놈 자체가 천하무적인 것은 아니란다. 그렇기에 그놈을 죽일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을 테지. 네가 아무리 강한 화신이라도 결국 인간에 불과하듯이, 그 어둑시니란 놈도 아무리 강한 능력을 갖고 있을지라도 결국 나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놈의 능력에 이기려 들지 말고, 그놈 자신에게 이기면 되는 것이다."


"그 말은 바로······."


언샤는 그 말의 의미를 이제서야 이해했고, 언샤가 대답하기 전에 할아버지가 다시 선수를 쳤다.


"그래. 그놈의 약점은 다른 모든 나찰의 약점과 똑같다."


꿈속의 존재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이 동시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그 모든 게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듯이 모든 게 텅 빈 부존재가 되어 사라졌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21.5.29)


‘망할세계’ 독자님의 지적에 대한 부연 설명



(독자님의 날카로운 지적 아주 감사드리며,



이 부연 설명을 읽지 않아도 스토리를 이해하시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으시니 흥미가 없으시다면 읽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줄요약 : 


1. 작중에서 전부 설명하고 묘사하기엔



2. 너무 자잘한 설정이며 메인 스토리와도 관계 없어서



3. 설명을 대충 생략한 부분이 설정오류로 보이는 문제가 있었지만 설정오류는 아닙니다.




1. 반천제로 인해 작중 천민 양반의 구분이 사라졌는데 
왜 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관리 추천에 반대될 수 있는가?



  1)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착호갑사대 대장이라는 자리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휴브리스 세계관에 나오는 착호갑사대는 나찰을 사냥하기 위한 군대로,



  나찰을 사냥하는 게 아주 긴급히 이뤄져야하기 때문에



  갑사대장은 황제의 어명 없이 군대를 사용하고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굉장히 중요한 직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현실 조선시대에 실존했던 호랑이 사냥조직인 착호갑사대에서 따온 설정으로,


  현실의 착호갑사대 역시 빠른 호랑이 사냥을 위해서



  왕의 어명 없이 군대를 사용하는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조직이었고.



  이러한 구조가 반정을 위해 악용되는 등 여러 부작용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조선에서나 알 실라에서나 착호갑사대의 대장이 될 사람은



  정치적으로 다른 세력에 얽매이지 않는 투명한 인물인 게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나찰을 사냥해 백성들 생명을 책임져야할 중요한 조직의 대장으로



  갑자기 황족이 앉게되면, 누가봐도 명백히 문제있는 인사 선정으로밖에 안보일 겁니다.



  즉 황제나 황녀 입장에서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벵골을



  황족이 아닌 천민 출신의 유명한 나찰 사냥꾼이라 소개하며



  아무튼 자신들과 관련없고 아무튼 능력만 보고 뽑은 거라고 주장하는 게



  대의명분상으로 가장 깔끔한 변명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명한 나찰사냥꾼이라는 식으로 자신들 할아버지인 벵골을



  착호갑사대장으로 앉혔고, 실제로 벵골은 유명한 나찰 사냥꾼이 맞긴 했기에



  이게 완전 새빨간 거짓말도 아니게 됩니다.



  거기에 자신들의 친할아버지이기에 손주들을 위협할 반정 계획에



  군대를 빌려줄 확률이 가장 낮으니, 믿을 수 있는 인물이란 점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에 한 수 거들었구요.





  2. 반천제로 인해 20여년간 천민 구분이 없고



  사람을 차별하면 전부 사형 당했는데, 어째서 천민 출신이란 이유로 반대되는가?




  이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지 않을 수 있으나, 황궁의 관리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으며, 반천제가 시행되기 전 시대부터 살아온 사람들이란 걸 생각해야합니다.



  반천제로 인해 모든 양반이 다 죽고 차별 의식이 사라졌으면 좋았겠지만...



  언샤가 판테라 황제에게 지적했던 것처럼 사람은 억압하고 지배하며



  법과 제도로 강제로 바꾸려고 한다고 해서 쉽게 본성이 바뀌는 존재가 아닙니다

  



  일단 황궁의 관리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좌의정 고이처럼 구양반이었으나 노예를 부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잔반, 잡다한 시골 양반 출신이라 살아남은 이들도 많습니다.



  거기에 사문유관 에피소드가 시작되자마자 나온 이 문장



  ‘자신은 양민이었으나 너는 천출이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상놈이라 부르며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미워하게 되었다.’



  에서 나오는 묘사처럼, 사람은 계급이 사라지더라도



  서로간에 있지도 않을 벽을 만들고 서로 차별하는 생물입니다.



  저희들이 사는 현대 역시 계급은 사라졌지만



  계급을 대신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서로를 차별하도록 만들고 있구요.




  거기에 일본 같은 경우 메이지 유신때 공식적으로 계급제가 폐지되고



  천민과 노예도 모두 사라졌습니다만



  구 천민이었던 사람들을 ‘부라쿠민’이라고 부르며 계속해서 차별하길



  멈추지 않았던 것 처럼.



  휴브리스 세계관은 나찰들 때문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영토가 극히 제한되는 환경이라



  인구 이동이 매우 적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20년간 반천제 때문에 입밖으로 꺼내지만 않을 뿐



  과거에 누가 천민이었던 지를 계속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나찰 사냥꾼 같은 경우 거의 대부분이 천민이었으니,



  유명한 나찰 사냥꾼 = 당연히 천민 출신 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구요.



  그리고 이렇게 반천제로 인해, 판테라의 억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억눌려있던



  사람들의 차별 의식은 호랑이가 누른다, 호압이라는 이름대로 눌려있다가.


  상대적으로 덜 억압적이며 자유로운 편인 설련황 언샤 치세에서



  다시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언샤가 자신의 아버지 판테라에게 말했듯, 



  사람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요소인 겁니다.




  3. 그럼 직접적으로 공표한 적이 없는데 왜 다들 벵골이

  황제의 할아버지임을 알고 있는 가?



  이는 황실이 하나의 작은 사회임을 보여주는 장치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옛 속담처럼



  작은 사회에서 절대적인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막에서 나왔던 ‘바보 황태자 언샤’에 대한 소문 역시



  앞에선 조용해도 뒤에서는 할말 다 하고 사는



  작은 사회의 모순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치이구요


 

  언샤가 파르다 황녀가 유능하다는 소문을 아주 쉽게 주워들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같은 이유 입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인데,



  군대에서 무슨 사건이 터지면



  그게 간부 관련이든 병사관련이든



  심지어 군단장이나 참모총장쯤 되는 사람들 근처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도



  다음날이 되면 군부대 안 모든 사람들이 전부 그 얘기를 알고 있더군요...



  작은 사회에서 소문의 힘이란 굉장히 무섭다는 제 경험담이 담긴 설정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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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99 망할세계
    작성일
    21.05.29 22:45
    No. 1

    반천제로 인해 천민양반구분이 사라졌는데도 천민출신이라고 반대한 관리들은 뭐고
    태황후의 혈연이라 황족이라고 여기는데도 황제의 할아버지를 천민으로 여긴이유는 뭔가요?
    설정오류인가요?
    20년넘게 사람차별하면 사형이었는데 3년만에 신분구분하다니 대단한 관리들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니알아서.
    작성일
    21.05.29 22:55
    No. 2

    계속 읽어주시면서 동시에 심도있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지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작중에 언급만 되는 관리들을 유교적 사고방식에 빠진 구시대적 사고 방식을 지닌 인물들로 부정적으로 묘사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사람이 아무리 법과 제도로 그 본성을 억압하려 해도 쉽사리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메이지 유신 때 공식적으로 천민과 노예가 사라졌음에도 구천민들을 여전히 '부라쿠민'이라고 부르며 계속해서 차별했다는 얘기가 있지요. 휴브리스 세계관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지역이 극히 제한되어있어 인구 이동이 그렇게 흔치 않고, 그렇기에 구천민이었던 자는 반천제가 실행되는 도중에도 사람들 기억속에서는 여전히 천민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뿌리깊은 차별 의식은 그렇게 20년간 호랑이가 누른다는 표현, 호압이라는 말 그대로 억눌려있다가, 상대적으로 정상적이고 덜 억압적인 정치를 펼치는 설련황 언샤 시기에 다시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문유관 스토리 가장 처음 부분에 ' 자신은 양민이었으나 너는 천출이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상놈이라 부르며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미워하게 되었다.'라는 묘사가 있는데 이게 바로 그러한 인간의 뿌리깊은 고정 관념을 나타내는 대사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니알아서.
    작성일
    21.05.29 23:01
    No. 3

    또한 황제의 할아버지를 천민이라 여긴 이유는 처음에 관리로 등용 시킬 때 황족이라는 얘기를 안하고 그냥 유명한 나찰 사냥꾼이라고 소개하며 장군으로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작중에서 착호갑사대는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고 먼저 나찰을 사냥할 군을 움직인 뒤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조직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실제 조선시대의 호랑이 사냥부대인 착호갑사대가 왕의 어명 없이도 먼저 움직여 호랑이를 사냥하고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조직이었던 것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입니다. 이 착호갑사대의 구조는 조선시대에 반정을 일으키기 위한 용도로 악용된 적이 여러차례 있으며, 그렇기에 그 대장에는 투명한 인물을 앉히는 게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는 휴브리스 작중 세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고 언샤의 대사로 이 점이 언급됩니다. 즉 그런 요직에 황족을 앉히겠다고 선언하면 조직 구성의 투명성이 너무 떨어지니 천민이지만 유능한 사람이니 앉혔다고 주장한 겁니다. 작중에서는 이런 자잘한 것까지 모두 설명하면 너무 설명이 늘어지고, 스토리상 중요한 요소도 아니니 적당히 언급만 하고 넘어갔습니다만... 설정오류로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작가 후기에 본편에 넣기엔 너무 자잘한 설정이라 언급 안했다고 명시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니알아서.
    작성일
    21.05.29 23:03
    No. 4

    아 그리고 황실에서 직접 공표하지 않았음에도 작중 인물들이 뱅골이 모두 황제의 할아버지인 걸 알고 있는 건 황실이 하나의 작은 사회임을 보여주는 장치로, 작은 사회에서는 어떤 소문이든 쉽게 퍼져나간다는 걸 보여주는 설정입니다. 서막에 나왔던 '바보 황태자 언샤' 소문이나 언샤가 주워들었다는 황녀 파르다에 대한 여러 소문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망할세계
    작성일
    21.05.30 08:09
    No. 5

    과연 반천제여도 비공식적인 신분제는 여전했다는거군요
    한편 주인공이 진짜 정치를 못한다는게 느껴지기도하네요
    정통성때문에 선황의 업적을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태평성대를 꿈꾸는 주인공도 신분제를 부활시켰을것같진않은데 신분을 언급한걸로 역공이 가능할텐데도 신하들에게 약한게 웃기기도 하네요
    옆에서 누나가 도와줄수 있지만 남매의 정으로 괴롭히는것같기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니알아서.
    작성일
    21.05.30 12:15
    No. 6

    넵 아주 정확한 분석이십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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