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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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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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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호질 22 - 비취와 청금

DUMMY

그리고, 웃었다. 판테라가 웃었다.

지난 이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웃어보지 못한 사람이 웃었다.


머리를 붙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런가, 이제 그대가. 화신인가. 나에게서 아슬란의 권능을 앗아갔는가. 내가 지난 수십 년간, 유일하게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엔 일어나고야 말았는가. 그렇다면, 나를 죽여라! 아슬란의 새로운 화신이여! 이 천자(賤者)의 목숨을 빼앗고, 이제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걸 증명하거라!"


판테라는 권능을 사용해 자신을 죽이라 말했다.


언샤는 자신이 화신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완전히 자각할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대폭태쇄, 즉 아슬란 신의 권능은 도저히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여섯 번째 감각, 존재할 수 없는 세 번째 손을 조종해야만 하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가 그런 걸 해낼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잠깐, 망할 아버지. 당신은 화신이 되자마자 능력을 썼다고 했잖아. 근데 나는 왜······."


언샤는 그렇게 말하다가, 자신이 큰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판테라는 또다시 웃었다. 그는 화신이란 존재의 무게를 잃고 나서야, 이제서야 스스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실소 밖에 안 나오는구나. 기껏 여신의 도움까지 받아 화신의 권능을 손에 넣었음에도, 그 능력 중 단 하나도 사용하질 못하다니!"


"아, 아니라고. 아무튼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는 거야."


언샤는 그렇게 말한 후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당황한 표정을 최대한 감추며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힘은 수많은 무고한 자들을 학살한 힘, 화신의 힘 같은 거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당신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


"아, 참으로, 그대는 광대의 아들 답구나. 정말 최고의 광대로다."


언샤는 즉석에서 그럴듯한 명분을 지어내는 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당연히 그런 이유로 권능을 쓰지 않는 게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권능을 써서 판테라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언샤가 아무리 용을 써도 권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건, 본디 화신의 자격이 없는 존재가 여신의 축복 덕에 강제로 화신으로 각성한 부작용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당신은 이제 인간이고, 나는 화신의 힘을 안 쓰는 화신. 이제야 조건이 동등해졌어. 당신을 죽이는 데는 인간의 힘만으로 충분해, 아니, 당신은 반드시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죽어야 해."


"그래, 마음대로 지껄여보거라. 그저 어리석은 태자로 계속 남아있었다면 황제의 비호 아래 그 천수를 모두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만용을 용기라 착각한 네 섣부른 행동이 죽음을 부를 것이다."



두 맹호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단절했다.

더는 말을 나눌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호랑이가 결코 이 하늘 아래 양립할 수 없는 존재임이 지금 증명되었기에, 두 범은 둘 중 하나의 목숨을 앗는 운명 이외엔 그 무엇도 남지 않게 되었다.


밤하늘 아래의 궁궐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두 마리의 범, 백호와 설호만이 서있었다.


화신의 능력이 이미 여러 번이나 휘둘러진 정전의 지붕과 기와는 이미 여러 곳이 부서져있었고, 그 틈새로 별빛과 달빛이 조금 새어 들어왔다.


태양의 그림자인 달은 백호를 비췄으며,

머나먼 저 너머의 태양인 별은 설호를 비췄다.


두 야수는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만물을 전율시킬 만한 패기가 담긴 사자후를 내뱉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주먹이 휘둘러지고, 손톱으로 벤다.


두 주먹이 맞부딪힐 때마다 울려 퍼지는 파열음에 대지가 경련한다.


손톱으로 벨 때마다 붉은 선혈이 솟구친다.


백호와 설호의 새하얀 털과 은빛 털이 아름다운 적색으로 물든다.


두 호랑이의 가슴에 다섯 개의 붉은 선이 교차된 십자 형태로 새겨진다.



백호가 그 주먹을 휘둘러 설호의 안면을 강타하고, 설호 역시 그 주먹을 휘둘러 백호의 안면을 강타한다.


도저히 생물의 육체가 서로 부딪히는 걸로 날 수 있는 것이라 믿을 수 없는 둔탁하면서도 거대한 굉음이 하늘을 떨게 만든다.


교대로 한 번씩 주먹을 계속 주고받을 때마다, 그 지지대인 두 범의 발톱이 마루를 파고들며 정전의 바닥을 부쉈고 부서진 나뭇조각이 정전의 곳곳으로 날아가 박힌다.



수 십 번의 주먹이 오간 후, 고작 주먹을 맞교환하는 것만으로는 서로를 제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백호와 설호는 그다음 순간 서로의 손을 맞잡고 깍지를 쥐어 서로의 악력을 겨룬다.


몇 초나 이어지던 치열한 힘 싸움에도 힘의 균형은 전혀 무너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무의미함을 깨달은 백호가 한쪽 다리를 들어 설호를 앞으로 걷어 찬다.


걷어 차인 설호는 놀라울 정도로 먼 거리를 날아, 정전의 정문을 부수고 밖으로 날아간다.



궁궐의 마당 한가운데에 설호가 추락하고, 그곳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백호가 도약하여 정전의 지붕을 부수고, 흙먼지를 뚫고 날아와 그 양손을 깍지 끼고 철퇴처럼 내려친다.


설호는 간발의 차이로 머리를 돌려 이를 피하고, 철퇴가 내려쳐진 곳엔 지름 몇 미터쯤 되는 거대한 구덩이가 패인다.



설호는 엄청난 순발력으로 백호가 휘두른 팔을 붙잡아 그대로 송곳니로 물어뜯는다.


생물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가죽과 근육을 뚫고 송곳니가 박힌다.


1000KG이 넘는 치악력으로 물어뜯어진 팔은 그다음 순간에 바로 너덜너덜한 육편으로 변해야만 했지만, 백호는 이를 내버려 두지 않고 역으로 자신이 팔에 매달린 설호의 목을 물어뜯는다.



경동맥을 물어 뜯긴 설호의 목에서 도저히 현실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피가 치솟는다.


마치 참수되고 나자 그 목에서 새하얀 피가 치솟아 호수를 이루었다는 순교자 거차돈의 모습과 같다.


당장에 숨통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설호는 그럼에도 머리를 옆으로 격하게 움직여 자신의 목덜미 가죽을 일부러 뜯어지도록 내어준 후, 자신 또한 백호의 목을 물어뜯는다.


백호의 목에서도 비현실적일 정도로 많은 붉은 피가 치솟아 오른다.



뜨겁게 맥동치는 혈류 때문에 도저히 서로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던 두 맹수는 서로를 밀쳐 그대로 거리를 둔다.


보통 생물이라면 진작에 수십 번은 죽었을 중상에도 두 범은 전혀 투지를 잃지 않고 서로를 노려본다.


이 하늘 아래에 설 수 있는 건, 이제 단 하나의 승자밖에 없다는 것을 굳이 더는 언어로 표현할 이유가 없다.



비취와 청금.

두 귀기 서린 눈빛이 어두운 밤 속에서 뜨겁게 불타오른다.

두 범이 역동할 때마다, 소름 끼치는 안광이 이를 뒤따른다.


더는 그곳에 인간은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죽음을 원하는 두 맹수뿐이다.



설호의 주먹이 휘둘러지자 이를 미처 막지 못한 백호가 그대로 하늘을 날아 정전의 정문에 처박힌다.


부서진 기와 조각과 나무판자들 속으로 설호가 도약해 그 발을 내리꽂는다.


백호는 빠르게 몸을 굴려 옆으로 피한 뒤, 설호의 꼬리를 잡고 전돌담으로 내팽개쳐버린다.


수십 개의 전돌이 부서져 날리다가 그대로 먼지가 되어버리고, 그렇게 방향을 바꾸며 연달아 세 번을 마치 철퇴처럼 휘두른다.



주변 벽이 모두 무너질 때까지 꼼짝없이 둔기로서 휘둘린 설호는 그 길고 근육질인 꼬리로 백호의 팔을 휘감아, 그 반동으로 몸을 일으켜 백호의 머리에 주먹을 꽂는다.


마치 바위가 부서지는 듯한 소음이 궁궐 전체에 울려 퍼진다.


설호는 뇌진탕을 일으켜 정신을 잃은 백호를 넘어뜨리고 그 상반신에 올라타 계속해서 그 머리에 주먹을 휘두른다.



주먹이 다섯 번쯤 휘둘러졌을 때, 백호가 그 비취색 눈동자를 다시 뜨고는 한 손으로 손목을 잡아 이를 비틀고, 다른 손의 손톱을 설호의 배에 꽂아 내장을 휘젓는다.


설호는 비명 대신 사자후를 내지르고는, 다른 한 손으로 백호의 머리를 붙잡아 바닥에 몇 번 내려친 후, 힘이 빠진 백호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내던진다.


백호는 동쪽으로 높이 날아가 추락하며 몇 개나 되는 담과 건물벽을 부수고는, 바닥에 부딪힌 반동으로 다시 한번 하늘을 날아 동쪽 태자궁의 지붕에 꽂힌다.



설호는 그대로 도약해 수십여 미터를 날아 백호에게 손톱을 휘두른다.


백호는 휘둘러지는 손톱을 간발의 차이로 여러 차례 계속 피한 후, 그 빈틈을 파고들어 어깨로 설호의 몸통을 쳐 그대로 넘어뜨린다.


백호는 넘어진 설호의 머리를 붙잡고 앞으로 달려나가며 태자궁의 지붕 기왓장에 그 머리를 쥐어 짜내듯 비빈다.


설호의 머리가 끌려가는 곳마다 모든 기왓장이 부서지고 벗겨져 와륵으로 변해버렸고, 그대로 달려 지붕 끄트머리에 도착하자 백호는 그 기세를 몰아 설호의 머리를 아래로 한 채 지면을 향해 추락한다.



설호는 그 머리가 지면에 닿기 직전, 두 팔로 머리 앞을 감싸 충격을 완화하려 시도했으나 그럼에도 모든 충격을 막지는 못해 머리에 뇌진탕이 일어난다.


땅은 움푹이 패여 자갈과 부서진 흙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설호는 흐릿한 의식 와중에도 흙바닥에서 충격을 받아 튀어나온 거대한 화강암을 하나 빠르게 잡아채 백호의 머리를 향해 휘두른다.


바위는 백호의 머리에 닿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어져 사라져버렸고 얇은 두피에 생긴 옅은 상처에서 과할 정도로 많은 피가 흘러 시야가 가려지게 된 백호는 크게 분노한다.



그렇게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온몸이 검붉게 굳은 피로 범벅이 된 두 범이 서로의 숨통을 끊기 위해 아무리 쓰러져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장면은 눈 뜨고는 차마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두 범은 그렇게, 반 시진에 가까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죽이지 못한 채 계속해서 공방을 주고받았다.


엄청난 굉음과 파열음, 충격음, 그리고 사자후가 끝도 없이 궁궐 내에 울려 퍼져 그곳 사람들 중 이 소리를 듣지 못한 이가 아무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


황녀에게 제압당해 조용히 몸을 사리고 있던 모든 관리, 신하, 궁녀, 갑사들이 이 천재지변 같은 재앙에 놀라 버선발로 마당에 튀어나와 두 호랑이가 막상막하로 다투며 궁궐 내의 모든 것을 부수는 장면을 보았다.


계급과 나이 성별 종족을 막론한 모든 이들이 입을 벌린 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피로 붉게 물든 두 호랑이가 싸우고 있는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도저히 구분하지를 못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싸움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게 만드는 광경이었으며, 그곳에 있던 어느 무관도 살수도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싸움에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경악한 그들조차도, 그것이 단순한 황위가 아닌 천하의 미래와 세상의 안녕을 걸고 싸우는 신성한 의식이었으며 이날의 승자가 곧 자신들의 지배자가 된다는 것만큼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로도 막연한 이해를 나눌 수 있었다.


알 실라는 무신 아슬란의 나라.

그러니 가장 강하고 용기 있는 자가 지배자가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궁의 모든 것이 오로지 단 두 생물이 가진 순수한 파괴력과 무력에 의해 잿더미로 돌아갔을 때쯤, 하늘 아래 존재할 단 하나의 태양이 대체 누구인지 정해졌다.


두 범은 한 시진에 걸친 싸움 끝에도 서로를 죽이지 못하였으나, 싸움을 너무나도 오래 끈 것이 결국엔 승부를 가른 것이다.


승자는 판테라 황제였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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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6 1 20쪽
»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3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2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6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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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4 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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