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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연재수 :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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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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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호질 10 - 나찰사냥꾼

DUMMY

언샤가 짐을 챙긴 후 담벼락을 넘어 빠져나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애초에 호압궁의 담벼락은 보통 인간이 넘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지만.

언샤는 모든 고양잇과 생물 중에서도 가장 도약력이 뛰어난 눈표범의 정수를 아주 짙게 타고난 짐승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그가 뛰어넘지 못하는 벽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천혜의 요새인 호압궁 주변을 둘러싼 앞산을 나뭇가지를 타고 계속해서 도약하는 것으로 십여 분도 안 되어 쉽게 주파해내고.

그 후론 평범한 여행객 행세를 하며 어린 시절 형과 함께 내려오던 대문 시장을 향했다


궁궐 밖에 혼자 나온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지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마음으로 나서자 혼자란 점은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가뿐하며 편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을 감시하지도 않으며.

자신에게 어떠한 관심도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홀가분하며 기분 좋은 일이었다니.


언샤는 상쾌한 기분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오전의 대문 시장에 도착해, 탈출 전에 잠시 생각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돈이라면 다 쓰지도 못할 만큼 잔뜩 들고 나왔으니.

먼저 그 돈으로 식량과 말을 구매하면 된다.


그리고 성문 지기를 때려눕힌 후, 문을 강제로 열고 성문 밖의 나찰의 영토로 탈출한다.


그리고 밤이 되기 전까지 동으로, 최대한 동쪽으로 달린다.


그리고 한 달 후쯤 성벽 밖의 땅 중 유일하게 안전한 곳인 장성에 도착하면.

그 장성을 타고 북이든, 남이든, 어디든 간에 알 실라 제국의 세력 범위가 아닌 곳까지 계속해서 도망친다.


그러면 그걸로 끝이다.

이 드넓은 대륙에서 그 누구도 언샤를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터무니없이 단순해 보이는 계획이었지만 그 단순함이야말로 계획의 핵심이었다.


애초에 이 대륙에서 드높은 성벽이나 아니면 최소한의 목책이라도 없는 나지의 땅, 수많은 나찰들이 득실거리는 미개척지로 혼자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을 의미했다.


누군가가 혼자서 인간들이 사는 지역 사이를 왕복했다는 얘기는 전설에나 나오는 것이었다.


성벽 밖의 땅, 나찰들의 영토는 그만큼이나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언샤가 말과 식량을 구해 성문 밖으로 도망치면.

그것만으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되었을 게 뻔한 단 한 사람을 수색하기 위해 수백, 수천의 병사들을 동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 대륙에서 혼자서 성문 밖으로 나간 사람은 모조리 자살한 것으로 처리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언샤는 망할 아버지가 자신에게 화신의 무력과 그로 인한 참상을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 수백 명의 갑사를 붙여 수많은 전장으로 그를 끌고 다녔고.

그 결과 언샤는 마치 보부상이나 용병, 사냥꾼들처럼 정확한 지도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찰의 영토와 그 길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도망칠 수 있다.

그는 살아서 도망칠 수 있으며.

그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은 채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적어도 대문 시장에 도착하기 전까진, 언샤의 단순한 계획은 무엇 하나 흠잡을 게 없이 완벽해 보였다.


십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대문 시장은 언샤의 기억 속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분명 대전쟁에 승리했기에 또다시 승전식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고.

그 축제의 열기 속에 파고들면 아무도 자신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쉽사리 말과 식량을 구하고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문 시장엔,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도, 가게도, 손님도, 시장 거리도, 무엇도.


너무 이른 시간에 나왔나 싶어 언샤는 반시진 가까이를 불안한 걸음걸이로 시장 주변을 서성였으나, 개미 한 마리도 시장 거리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대문 시장은 분명 서울에서도 가장 큰 시장일 텐데.

어찌하여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한참을 기다리던 언샤는 시장 한가운데서 길게 줄을 늘어뜨린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그 사람들에게 말과 식량을 구매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마치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노망이 들었다며 혀를 쯧하고 찼다.


언샤가 자신은 외지인이라 이곳 물정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 나라의 멀쩡한 말은 황실과 군에서 모조리 사갔고, 그나마 있는 늙은 말도 다 잡아먹어서 없다고 말했다.


언샤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대문 시장 이외에도 한참을 다른 시장이란 시장은 모조리 돌아보았으나, 어떤 시장에서도 상인 그림자 하나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이 마치 집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질 않는 듯.

언샤가 돌아다니는 거리, 집집마다 모든 집들이 그 대문을 걸어놓고 잠그고 있었으며 성벽 내부의 밭과 농지는 텅텅 비어 잡초 이외엔 식물 한 포기도 자라지 않고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길거리 모든 곳에 수많은 인파가 가득했으며.

무르익은 벼와 쌀과 황금물결이 온 들판에 가득했던 추억 속 서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그곳이 수도 서울이 아닌, 이매망량들이 가득한 유령의 도시이며.

자신은 이미 죽어 그곳 한가운데에 떨어졌음에도 자신이 이미 죽었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목공소, 포목점, 정미소, 술집, 심지어는 음식점까지.

그 어떤 가게도 문을 열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구할 수 없었다.


가끔씩 마주치는 모든 사람은 늙은 노인들 뿐이었으며.

그들은 마치 신기한 것이라도 보았다는 듯이 언샤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자신이 가던 길을 향했다.


평생을 살아온 서울인데,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거의 정오가 다 되어서야, 언샤는 헤매다 다시 돌아온 대문 시장 안에서 문을 연 가게를 하나 발견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게 무슨 가게인지도 모른 채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 언샤는 궁궐 밖으로 나온 후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것 같은 냄새, 즉 음식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그건 고기 삶는 냄새였다.


"어서 오시오. 보고 싶지 않은 손님이 오는 건 오랜만이군. 거기 앉으시게."


그리고 언샤는 그곳에서 낯익게도 생긴 노인인 주인장 얼굴을 보자마자 이곳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과연 이토록 이상해진 서울에서 아직까지 장사를 할 수 있으려면.

이 정도 사람쯤은 돼야 하는 걸까.


주인장은 이곳 서울에선 아주 흔한 종족인 아슬란족이었으며.

정수 또한 흔하디흔한 호랑이의 것을 타고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샤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아는 척조차 하는 게 용서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미 의절한지 오래였고, 친근하게 부르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래서 언샤는 평소 습관 그대로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여긴, 식당인가요?"


"그럼 당연하지. 보면 모르오?"


"아니, 그게. 한참을 돌았는데. 그 어떤 가게도 열지를 않았길래. 여긴 어떻게 열었나 싶어서 말이지요."


노인은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언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호랑이를 닮은 그 강렬한 눈빛은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해.

마치 벌거벗고 나신으로 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흠, 자네, 외지인인가?"


"아니. 그, 외지인은 아닌데. 고향에 좀 오랜만에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요."


"흠, 고작 변명을 그렇게 밖에 못하다니. 참으로 형편없군."


"······."


언샤는 노인이 하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괜히 섣불리 행동했다가 분노를 사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냥 입다물고 있기로 했다.


"음식이 나오려면 20분 정도 걸리니, 좀 기다리시게나."


노인은 그렇게 말한 후.

분주하게 움직이며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는 솥에 물을 올려 끓이기 시작했다.


"아니, 저, 아직 아무것도 주문 안 했는데요? 이 가게는 차림표가 없는 건가요?"


언샤는 그렇게 말하며 한참을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이 가게에는 차림표가 없는 것인지 도대체 어떤 음식을 파는 것인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입구에서부터 고기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고기 요리를 판다는 것 정도야 누구라도 알 수 있었겠지만.


"이 서울에 사는 사람이면 모두 이 가게를 알 텐데, 도대체 몇 년이나 이곳을 떠나 있었던 겐가?"


"서울 거리에 잘 안 나오게 된 건, 음, 그게, 얼추 12년 정도 전부터······."


12년은 언샤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노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후 흐른 시간이기도 했다.


"12년이라. 강산이 바뀔 정도의 시간이로군. 그러니 이 서울 토박이면서도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저 궁궐에서 보내는 무의미한 시간은 즐거웠나, 언샤 황태자님?"


솔직히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줄은 몰랐기에, 언샤는 당황하여 대답했다.


"즐거웠을 리가······. 없지요."


노인은 제대로 대답조차 못하는 황태자를 마치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볼 뿐이었다.


"자네, 요즘 세간에서 바보라고들 부르더구먼."


"네.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 지 좀 됐지요······. 전 헛소문이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하지만 자네 지금 모습을 보면 바보 황태자라는 소문을 부정하긴 힘들 거 같군. 인간 같지 않은 큰 덩치에, 새하얀 눈표범의 정수, 잘 먹고 잘 지냈는지 아주 윤기가 넘치는 은빛 털에, 거기에 본인은 최대한 수수하게 차려입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아주 부티가 나도록 질이 좋은 흰 비단 옷. 굳이 내가 아니라도, 지나가는 3살짜리 꼬맹이도 자네 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이 나라의 황태자란 걸 알아볼 걸세."


"아······. 면목 없네요······. 다음엔 좀 더 잘 위장해 볼게요. 죄송합니다······."


언샤는 노인의 그 말을 듣고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나를 보러 온 건지, 아니면 우연히 이곳을 방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신분으로 혼자 돌아다닐 거면 좀 조심해서 다니게."


"네, 뵈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들어왔는데 여기 계셨던 것뿐이지만요."


노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자신에 대한 소문은 이미 서울 전체에 가득한데.

그 누가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도망칠 거면 좀 더 철저한 위장을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더 많은 준비를 했어야만 했다.


언샤는 괜스레 무안함을 감추고자 꼬리를 입에 물고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지금껏 저지른 바보짓을 모르는 척했고.

노인은 애초부터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건지 묵묵히 계속 요리를 준비할 뿐이었다.


그리고 십여 분이 더 지나자.

노인은 드디어 솥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릇에 담아 내주었다.


옅은 갈색에 기름기가 가득한 그것은 핏줄이나 여러 손질 안된 기름 덩어리가 그대로 붙어있어.

누가 보기에도 동물의 내장으로 보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삶은 간을 그대로 내놓은 것처럼 보이는 음식이었다.


"자, 이게 이 가게에서 파는 유일한 음식인 '판테육'이오. 더럽게 맛없겠지만 맛있게 드시오."


"판테육? 그게 대체 뭐예요? 그리고 수저는 없어요?"


"그건 판테라 놈의 고기요. 줄여서 판테육. 그리고 수저는 없소. 그걸 맨손으로 집어 들어 입으로 씹어먹는 게 판테육을 먹는 유일한 방법이니."


노인이 퉁명하게 내뱉는 말은 아주 무심했지만 동시에 아주 기가 막힌 것이었다.


"판테라? 판테라 황제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판테라라는 이름을 가진 놈이 세상에 둘이나 있으면 세상은 그날로 멸망할 테니, 판테라라면 곧 황제를 말하는 것이지 대체 누구겠소."


노인은 자신이 하는 말이 이치에 전혀 맞지 않고 괴이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판테라 황제는 두 눈을 뜨고 멀쩡히 살아있는데 대체 어떻게 그 고기를 먹는다는 겁니까?"


"하아, 이래서. 우리 바보 황태자 놈이란. 이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다니. 아침부터 아주 재수가 옴 붙었군. 자네는 나중에 돈을 두 배로 받을 테니 알아두시게."


노인은 자신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는 자각은 전혀 없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오히려 상식적인 소리를 한 언샤를 바보 취급 하였다.


"당연히 비유적인 이야기이지. 그게 진짜 판테라 놈의 고기일 리가 없지 않잖소. 이건 그냥 요 몇 년 사이 서울에서 또 유행하고 있는 전통문화요. 삼십 년 전쯤엔 폐왕 호해 놈의 간을 아주 씹어먹고 싶다고 해서 호해육이 유행했었고, 지금은 판테라가 황제니 판테육이 유행하는 거지."


"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그야. 우리 같은 평범한 백성들은 왕이니 황제니 하는 놈들이 마음에 안 들어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 외엔 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그냥 대리만족하는 차원에서, 임금의 주리를 뒤틀어버리고 싶다는 의미에서 조랭이 떡 같은 걸 만들어 먹고, 임금의 이름을 딴 고기를 팔아먹고 그런다오. 수백 년째 이어져 온 알 실라의 유서 깊은 전통 중 하나지."


노인이 태연자약하게 하는 이야기는 아주 기가 막힌 것이었지만,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언샤 자신도 아버지를 죽이고 그 몸을 아주 갈아 마셔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망상이 자신의 삶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란 걸 깨달았을 때.

그런 불가능 그 자체이며 어떤 유익함도 없이 정신을 망칠 뿐인 것을 생각하는 건 그만뒀지만 말이다.


"······그거 참 살벌한 전통이군요."


언샤는 황제의 고기를 씹어먹고 싶어 한다는 백성들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기면 고기인 거지, 하필이면 간을 씹어먹는 이유는 뭡니까?"


"그냥 그대로 그 판테육을 씹어먹고 가버리면 될 것을, 궁금한 것이 참 많기도 하군. 자네는 원래 값의 4배를 받을 테니, 그렇게 알아두시오."


"겨우 질문 좀 했다고 왜 자꾸 가격을 올리는 겁니까······."


"어차피 우리 바보 황태자님은 돈이 남아돌아 썩어날 지경이라 어디에도 쓸 곳이 없을 것 아니요. 이 노친네는 죽기 전까지 돈을 잔뜩 모아 백만장자가 된 후, 그걸 전부 루카신께 시주하고 죽고 싶다는 원대한 꿈이 있소이다. 그러니 내겐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오. 그리고, 마침 여기 수상할 정도로 돈이 썩어넘쳐 아무 쓸모도 없는 황태자와, 그리고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 노인이 있지."


"그거 참 절묘한 만남도 다 있군요."


"그래. 그러니 자네는 자네에겐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인 돈을 내게 주고, 나는 그 대신 세상에서 가장 값진, 노인이 가진 유일한 보물인 지식과 얼마 남지도 않은 소중한 인생의 시간 중 일부를 당신에게 내주는 거요. 이것만큼 공정한 거래가 세상에 어딨겠소?"


노인은 참으로 달변이어서.

듣는 사람이 변명할 여지가 없도록 만드는 데에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몰래 성에서 빠져나와 이 노인에게 그런 얘기를 듣는 걸 아주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그 얘기를 한 번 들으려면 돈을 줘야 할 정도로 관계가 틀어져 버렸다니.


대체 어쩌다 이 노인과 자신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노인은 언샤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후, 돈을 4배나 받는 대가로 하나의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간을 씹어먹느냐고?

왜 원수의 간을 씹어 먹어야 하느냐고?

왜 그것이 복수를 의미하는 것이냐고?


옛말에 이런 말이 있소.


'인간이란 존재는 일 년의 절반을 나찰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제사를 지내며 살고, 나머지 일 년의 절반은 나찰을 죽이기 위해 사는 존재'라고.


이건 나찰사냥꾼 혹은 착호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사이에서 통하는 격언이오.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나도 옛날엔 이름 날리던 나찰 사냥꾼이었기에.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지.


그런 찬란한 과거가 무색하게도 지금은 늙어서 이렇게 길고양이만도 못한 신세가 됐소만.


아무튼. 이 서울 주변에, 아니 이 대륙의 전체에.


사람이 살지 않는 모든 곳에는 나찰이라는 어떤 상식과 이치도 통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잔뜩 살고 있다는 건.

바보 황태자인 당신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판테라 황제 놈 시대에 이르러 성벽을 높게 쌓았기에 지금은 훨씬 더 안전해지긴 했으나.


성벽이 더 낮았던 과거의 서울이나.

혹은 성벽 없이 목책만을 세워둔 시골 마을에 살았던 이들은 밤이 되면 언제나 그 벽을 넘고 도시에 숨어들어 사람을 납치해가는 나찰들을 아주 두려워했지.


그리고 사람들은 밤의 그늘 속에서, 호롱불과 촛불 밑에서.

이불 밑에 숨어 벌벌 떨며.


자신들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공포의 존재 그 자체인 나찰에 대한 수많은 전설과, 수많은 이야기들을 꾸며내고 만들어내기 시작했소.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창귀(倀鬼)에 대한 전설이었지.


우리 알 실라의 사람들은, 나찰에게 끌려가 죽은 사람들의 혼은 창귀라는 귀신이 된다고 믿어 왔다오.


창귀란 마치 물귀신처럼 자신의 죽음에 원통해하며 다른 모든 인간들 역시 자신처럼 나찰에게 죽고 똑같은 창귀가 되기를 바라는 끔찍한 존재요.


창귀들은 다른 인간들도 자신처럼 비참하게 죽게 만들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죽인 나찰의 노예가 되어 그 괴물에게 자신의 가족, 친척, 이웃이 사는 곳을 일러바치는 존재라고 전해진다오.


그들은 심지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생전의 자신과 친했던 다른 인간들을 유혹해 나찰 앞에 바치기도 한다고 하오.


참으로 끔찍하고, 잔혹한 전설이지.


나찰의 희생자가 된 이들을 위로하며 불쌍히 여겨주진 못할지언정.

오히려 또 다른 가해자로 여기며 그들 역시 괴물이라 조롱하기 위한 이야기라니.


어쨌든. 그러한 전설이 있기에.


알 실라에는 나찰에게 죽임 당한 자의 가족은 그 3대를 멀리하여 절대 가까이 두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소.


나찰에게 가족이 죽임 당한 자들은.

가족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조차 없이 다른 인간들에게도 배척 당해 성벽이나 목책 밖으로 쫓겨나서.

또다시 나찰의 먹이가 되는 악순환이 이 나라 전체에 마치 역병처럼 널리 퍼져 있었지.


그리고 그게 나 같은 사람들.

나찰사냥꾼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였다오.


결국 모든 게 온전히 나찰의 잘못만은 아니었으며.

문제 중 절반은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의 미신,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것이었으니.


······각설하고, 나찰은 아주 강한 존재요.


아주 강력한 짐승의 정수를 타고난 데다가 평생 동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강자가 활과 창으로 무장하고도 목숨을 걸고서야.

겨우 평범한 나찰 한 마리 잡아낼 수 있을 만큼.


그런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나찰사냥꾼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모든 기술을 동원해 사람을 죽인 나찰을 사냥한 후, 그 시체를 희생자의 가족에게 가지고 왔소.


그러면 그 가족들은 나찰의 배를 갈라 그 생간을 나눠 먹는 것으로 복수는 완료되고.

창귀는 극락왕생하여 더는 다른 희생자를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라 믿었지.


희생자 가족을 멀리하던 다른 이들도.

그들이 나찰의 간을 나눠 먹으며 나찰의 시체와 함께 창귀의 혼을 불태우는 호식장(虎食葬)을 치른 후엔 그들을 더 이상 차별하지 않고 다시 평소처럼 대해주었다오.


그렇기에 나찰사냥꾼들은 비록 그 신분은 신량역천 만도 못한 천민임에도.

그 어떤 주인도 섬기지 않고 노비의 삶을 살지 않고 긍지 높게 살며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아왔지.


즉, 이 판테육이란 것도 그런 오랜 풍습에서 유래된 거요.


이건 판테라의 간이 아니며.

당연히 나찰의 간도 아니며.

사실 그냥 돼지 간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생간은 기생충이 득실거려서 먹을 게 못되니까 삶아서 내주긴 하지만.


어쨌든 그 빌어먹을 황제 판테라에게 가족을 죽임당한 이들에겐 판테라 역시 나찰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원수인 게요.


그렇기에 희생자의 가족들은 웬수 판테라의 간을 씹어먹고 죽은 이의 원통함을 풀고 싶다는 의미로.

너도 나도 '이건 임금 놈의 간이다, 천자 놈의 간이다'라며 이를 씹어먹기 시작한 거요.


그게 바로 이 판테육이올시다.



"······그래서, 직접 먹어보니 어떻소? 판테육은 맛있소?"


"아니, 끔찍할 정도로 맛없네요. 간을 씹어 먹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았지만······."


"그럼, 이제 어찌할 것이오? 당신의 아버지, 잘나신 황제님께 대문 시장의 노친네가 당신의 간을 빼다가 팔고 있더랍니다 하고 일러바칠 것이오?"


"나 참, 할아버지,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럼, 물론. 당연히. 이런 장사를 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소. 지금까지 수천 명도 넘는 이들에게 이 판테육을 팔았는데 아직도 내 목이 붙어 있다는 게 믿기질 않거든."


"확실히 이 더럽게 맛없는 걸 이 돈 받고 파는데 아직도 손님들에게 살해당하지 않은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 어떻게 살아있는지 모르겠단 그 심정은 잘 이해가 가긴 하네요. 하지만, 왜 목숨을 내놓고 이런 의미도 없는 장사를 하는지는 이해가 잘 안 가는걸요."


"의미가 없긴 왜 없소. 많은 의미가 있지."


"결국 황제가 이를 알게 되고, 당신 목을 뒤틀러 올 텐데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 웃기는 소릴 하시는 구려. 판테라? 그 어린놈이? 뭐? 목을 비틀어? 그 겁쟁이 놈이? 이 나라 백성들 모두가 그놈이 더 어릴 때 고작 자라 한 마리에 놀라 하루 종일 지 어미 치마폭에 안겨서 절대 놓지 않던 꼴을 봤어야 하는데."


"······."


이 노인은, 어린 시절의 판테라를 그 누구보다 많이 봐왔던 사람이었을 것이기에.

어찌 보면 그가 화신이며 수많은 사람을 죽여온 황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 꼬맹이가 지금 당장이라도 이 늙은이 목을 비틀러 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요. 그럼 만천하가 저 판테라 놈도 자기를 욕하는 놈을 잡아 죽일 뿐인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될 테니."


노인은 제법 호탕하게 웃었지만.

언샤는 그러한 태도가 전혀 이해가지를 않았다.


"할아버지께선 꼭 오늘 하루 사실 것처럼 행동하시는군요. 목숨이 안 아깝습니까? 하루라도 오래 살면 좋은 일 아닙니까? 대체 왜 그렇게 못 죽어서 안달인 거죠?"


"하, 이 비참한 내 모습을 보시오. 한때는 이름 높은 나찰사냥꾼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고 살던 이 내가, 지금은 이 꼴이오. 늙고, 비참하고, 덧없지. 하늘이 내린 천명 120년 중 80년 밖에 살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나 볼품없게 변해버렸소."


"글쎄요, 관록 있어 보이도록 제법 멋지게 늙으신 거 같은데."


"외모 얘기가 아니라 인생 얘기요. 아내는 죽었고. 자식 놈은 천하에 둘도 없을 불효자고. 손자 놈은 더럽게도 멍청하고. 죽지 못해 하루하루 살고, 날이 갈수록 삶이 더 비참해질 뿐이지. "


"그래서 한다는 게 고작, 이런 걸 팔면서 황제를 조롱하는 겁니까?"


"그래. 아주 멋진 일이지. 그러니 이 판테육에 대한 소문이 황궁까지 퍼져서. 그 잘나신 황제 놈이 날 다시 만나러 와서 직접 죽여주기라도 한다면 이 얼마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겠소.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비참하게 늙어 죽는 것보단 훨씬 인간적이고 멋진 죽음일 테니. 비단, 이 늙은이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거요. 여기 와서 판테육을 씹어대는 인간들은 아주 젊은 사람조차 내일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이니."


"세상에 내일 당장 죽어도 되는 생명 같은 건 없습니다."


"아니, 당장 죽어도 되는 생명은 아주 많지. 특히 폐왕 호해 놈이나, 타인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판테라 같은 놈은. 지금 당장 죽어도 시원찮을 테니."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언샤는 노인의 증오심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점.


자신은 그러한 증오를 표출하지 못하고, 황제를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


그 사실이 부끄러워 이에 전혀 공감하지를 못하였다.


"폭군 판테라의 폭정이 천지를 분노케하고, 만인이 그를 증오하고 미워할진대 그러한 세상 그러한 서울에서 한낱 목숨 따윌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목소리는 분노가 가득 차 있기는커녕.

오히려 젊은 시절 두려울 게 하나도 없던 용맹한 나찰 사냥꾼과도 같이 자신감 넘칠 뿐이었다.


"그렇군요. 얘기 잘 들었고, 아주 잘 먹었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언샤는 판테육, 즉 판테라 황제의 간을 씹어 먹는다는 행위.

평생 꿈도 꿔보지도 못한 기행을 끝마치고는 도저히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오묘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부터 비싼 가격에서 4배나 비싸진 판테육의 가격은 터무니없을 지경이었지만.


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는 천금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들이었기에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혜란 것에 값을 매길 수 있다면.

그건 이 세상의 모든 금을 합친 것보다도 무거울 테니.


"그래서, 바보 황태자여, 지금부터 바로 황궁으로 쪼르르 달려가, 내가 황제의 간을 빼서 팔고 있더라고 일러바칠 것이오?"


"할아버지,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아니. 참으로 아쉽군. 우리 바보 황태자님이라면 드디어 내 목을 달아나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대는 그냥 바보가 아니라. 바보 온달이었나 보군."


노인의 말투는 마치 자신이 죽지 못해 아쉽다는 식이었지만.

그 표정은 오랜 해후에 만족했는지 참으로 온화했다.


그들 두 사람은 비록 오래전에 의절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피를 이은 한 가족이었으니.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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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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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문유관 7 - 개꿈의 반대말은 고양이 꿈 +6 21.05.27 48 1 29쪽
30 사문유관 6 - 세상 모든 힘 21.05.27 27 1 34쪽
29 사문유관 5 - 늘어선 세계 21.05.26 27 0 27쪽
28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21.05.26 29 2 25쪽
27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21.05.25 67 1 27쪽
26 사문유관 2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21.05.25 36 1 17쪽
25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2 21.05.24 43 2 24쪽
24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2 1 25쪽
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6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2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2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6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1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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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호질 13 - 용의 꼬리 21.05.17 47 3 23쪽
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8 2 29쪽
11 호질 11 - 사사로운 인간사 21.05.16 47 2 17쪽
» 호질 10 - 나찰사냥꾼 21.05.16 48 3 27쪽
9 호질 9 - 해후 21.05.15 54 2 20쪽
8 호질 8 - 박제가 되어버린 여신을 아시오? +2 21.05.15 52 1 18쪽
7 호질 7 - 세상 끝의 불꽃 21.05.14 64 3 29쪽
6 호질 6 - 종이호랑이 21.05.13 144 4 37쪽
5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21.05.12 211 6 25쪽
4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21.05.12 134 6 23쪽
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3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5 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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