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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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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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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DUMMY

밤 하늘 아래에 서서 달과 별빛을 모두 받고 있는 하늘의 자식은 판테라 한명뿐이었다.


패배자 언샤는 바닥에 축 늘어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판테라가 승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본디 판테라 황제란 화신이 되기 이전에도 이 대륙의 그 누구조차 대적할 수 없는 천하무쌍인 자.


그에게 화신의 능력이란 단순히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것에 불과했으며, 날개가 없다 해서 그가 범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평생을 나찰과 싸우며 쌓아올린 무수한 경험과 임기응변을 이제 갓 성인이 된 어린 자가 고작 몇 년 수련한 무술에 화신의 신체 능력과 여신의 축복을 더해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정도로 따라 잡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모든 짐승의 왕인 백호에 맞선 그 몸에 깃든 정수는 고작해야 눈표범의 것.


눈표범은 비록 호랑이와 아주 비슷한 동물이나, 그 위용도 위세도 위엄도 덩치도 힘도 기술도 진짜 호랑이에는 미치지 못했다.


삼인성호, 세 사람의 거짓말이 계속되면 없는 호랑이마저 만든다는 말은 완전한 거짓이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아슬란의 권능을 썼다면, 이 천자 따위는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사실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야. 나는 진짜 재능이 없나 봐. 타고난 재능 하나만큼은 참 부럽다, 망할 아버지."


"······그런가."


여신의 축복으로 아드레날린을 끌어올린 언샤는 그 효과로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부족한 경험을 덮고 판테라에 비견될 수 있을 만한 강함을 얻었으나, 본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세상의 순리였다.


언샤의 육체는 아드레날린의 작용을 통해 본래 있을 수 없는 힘과 반사 신경을 끌어올린 부작용으로, 몸의 모든 정기와 활력을 평소의 몇십 배나 소모해버렸고 결국 두 사람이 입은 상처는 거의 똑같았음에도 언샤 한 명만이 체력을 모두 소모해 꼼짝도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


쓰러진 언샤의 몸에서는 마치 과열된 화로처럼 계속 끝도 없이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드레날린 과분비의 부작용으로 인해 지나치게 빠르게 뛰게 된 심장 박동이 온몸의 미세혈관을 파괴하고 뇌혈관을 파열시켜 어마어마한 두통을 일으키고 있었고, 저혈당 충격으로 인해 식은땀을 끝도 없이 흘렸으며 그 정신은 아주 혼미했다.


혈관 내의 모든 당과 산소를 모두 소모한 후에도 계속 움직이며 한계를 초월할 대로 초월한 육체가 피와 살, 근육마저 그 연료로 바꿔 사용해버린 결과물이었다.


인간이라면 진작에 죽는 것이 당연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숨이 붙어있는 건, 단순히 화신의 말도 안 되는 생명력 덕분이었다.


"언샤, 이 조루 같은 놈아! 어서 일어나 움직이거라!"


"아바마마도 치명상을 입은 상태야!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길 수 있다고!"


여신과 누이가 그렇게 외쳤으나 언샤는 손발 하나도 꼼짝할 수도 없었다.


"아들아, 아주 훌륭했다. 비록 그대는 화신이 될 재목은 아니었으나, 한낱 인간으로 태어나 이 천자를 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몰아붙인 것 하나만큼은 인간을 초월한 영웅의 위업이라 칭송받을만 하구나. 그대의 이름 역시 죽은 좌승상처럼, 짐이 이뤄낼 태평성대의 시대에 영원토록 칭송받으리라."


"아까 전엔 그렇게 날 싫어하더니 이젠 칭찬하는 거야? 그냥 죽이면 될 걸 쓸데없이 혓바닥이 참 길구만. 만약 아버지가 죽게 된다면, 그건 그 재앙 같은 주둥아리 때문일 테니 잘 알아둬."


"부전자전,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판테라는 그렇게 말한 후, 쓰러진 언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그 격렬한 싸움에도 결코 부러지지 않은 손톱을 꺼내, 쓰러진 아들의 심장을 겨눴다.


"무수한 전투와 전쟁으로 가득했던 삶에서, 짐을 이처럼 죽음에 가깝게 몰아붙인 상대는 그 나후라 이후 그대가 처음이구나. 그리고 그대 덕분에, 짐은 또다시 한 계단 성장해, 이제 그 무력이 저 나찰황에게도 닿을 것이란 확신이 들게 되었다. 아들아, 고맙다. 그대는 어느 의미로는 짐을 초월한 존재였도다."


"어느 의미라니? 아니. 모든 면에서 당신을 뛰어넘었지. 당신은 이제 끝났어."


"······. 아직도 그런 망언을 하는가."


판테라는 완벽히 패배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그 망언을 더 들을 이유가 없다 생각하며 손톱으로 아들의 심장을 관통하려 했으나,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토혈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판테라는 여러 차례 계속 기침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단순히 전투로 얻은 내상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의 많은 피가 쏟아졌다.


싸움 때문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해 내장이 뒤틀리고, 머리에 격렬한 두통과 현기증이 일었으며, 끝도 없는 식은땀이 쏟아지고, 싸움 도중 얻은 어떤 고통보다도 더한, 마치 천 개의 바늘이 전신을 찌르는 듯한 격통이 온몸을 급습했다.


"아들이랑 같이 산보 한 번 격렬히 했더니, 이제 슬슬 온몸에 피가 잘 돌지 않나, 망할 아버지!"


"······내게 무얼 했지?"


판테라가 물었다.


"내가 아냐. 파르다 누나가 했지."


언샤의 대답은, 자신이 아닌 완전히 엉뚱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 내가?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망연자실하여 두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파르다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놀라며 대답했다.


"아까 사멸신장을 찾을 때 지하에서 말했잖아. 누나가 황상의 음식에 지난 몇 년간 매일 같이 독을 태웠다며."


"그야, 그렇긴 했지만. 화신한테 독이 들을 리가 없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상황을 이해했다.


너무나도 강력한 화신의 권능과 그 완벽한 육체 때문에 현실감각을 완벽하게 잃은 황제는 자신의 권능을 새로운 화신이 가져가는 것만큼은 무엇보다 경계했지만, 그 외에는 그 어떤 위협조차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이다.


자신 이외의 다른 화신은 아무리 많이 나타나더라도 모두 싸워 죽일 자신이 있었으며, 사멸신장 역시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인 이상 그 무구 만을 파괴하면 아주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즉, 그는 너무나도 강하며 완전한 나머지 죽음의 공포란 걸 전혀 몰랐다.


본래 세상의 모든 왕이란, 대체 언제 암살 당할지 모르는 공포에 떨며 언제나 자신의 목을 내놓고 사는 존재인데.


어떤 존재보다도 강력한 화신인 판테라만큼은 그 법칙에서 유일하게 예외였던 것이다.


지나친 강함은 마치 호해가 마시던 양귀비주처럼 판테라의 모든 공포를 마비시켰다.


참으로, 공포라고는 모르는 용기의 화신다웠다.


그렇기에 화신은 자신의 주변에 기미상궁 따위를 둘리가 없었으며, 어의 역시 두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유흥거리에도 흥미를 잃어 자신이 먹는 음식 따위 수라상이나 돼지 죽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여기며 그 맛과 내용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파르다 황녀가 황제의 수라상에 넣던 수많은 종류의 독을 점차, 계속 조금씩 대범하게 늘려나가며.


결국은 보통 인간의 치사량을 한참 넘은 독을 계속해서 매끼마다 올릴 지경이 되었음에도 황제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나 많은 독으로도 화신의 육체엔 일말의 손상조차 입히지 못했지만, 몇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매일같이 독을 먹어온 판테라의 몸에는 아주 조금씩, 수많은 독성분이 계속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에서야 나타났다.


그가 영원토록 계속 화신이었다면, 그는 천년의 기간 동안 매일 같이 독약을 삼켜도 어떤 기별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화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긴 해도 판테라는 엄연히 인간이었고, 언샤는 비록 그 권능은 쓰지 못하지만 엄연히 화신이었다.


"······꾀를 썼구나. 내 육체를 최대한 지치게 만들고, 최대한 많은 시간을 지체하도록 만들어 내 몸에 독이 퍼지도록 유도한 것인가. ······그러나, 소용없다! 아무리 많은 독을 먹어도! 내장이 녹아내려도! 그럼에도 살아남는 것이 화신이란 존재다! 지금 당장 그대를 죽이고, 다시 화신으로 돌아간다면, 이깟 내상쯤 결국에는 회복된다."


독에 내장이 녹아내리는 판테라의 육체로도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는 언샤를 죽이는 것 정도는 아주 쉽게 가능한 일이었기에 판테라는 언샤의 심장을 향해 또다시 손톱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손톱은 철선과 은장도에 의해 가로막혔다.


지금까지 싸움을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던 파르다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부상과 독에 의해 약해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황녀가 황제의 앞에 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황녀여, 그대는, 나에게 무릎 꿇지 않았는가. 나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는가? 짐이 그대에게 세상 모든 권세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날개를 주었거늘. 그대는 그저 내 곁에 서서, 짐의 패도와, 짐이 이룩할 태평성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이 아비를 배반하는가?"


판테라는 더는 분노할 힘도 없었기에, 아니, 아내가 죽은 이후 텅 빈 껍데기와 같았던 자신이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존재인 유일한 딸에게 분노하고 싶진 않았기에. 그저 조용히 그 행동의 이유를 물을뿐이었다.


그러자 황녀가 대답했다.



나는, 옛날 옛적부터. 아바마마가 싫었어.


아바마마는 확실히, 나를 사랑해 주고,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줬으며.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서 애정을 나눠줬지.


그런데도 나는 아바마마를 미워했어.

그 이유는 나도 몰랐지.


내가 왜 아바마마를 내심 미워하는지, 그 애증에 대해서, 참 오랫동안 고민해야만 했거든.


일단 가장 알기 쉬운 큰 이유는, 다른 형제들에 대한 차별 대우 때문이었어.


당신은 모든 인간의 차별을 금지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식들 간에도 격차를 두고, 대놓고 차별하는 걸 감추려 하지 않았지.


당신한테는 셋이나 되는 자식들이었는지 몰라도. 그 두 사람은 나한테는 둘도 없는 소중한 가족이었는데.

당신은 그런 내 가족을 괴롭히며 학대했잖아.


처음에는 단순히 아들인 그들은 화신의 자리를 뺏을 수 있는 위협이니 홀대하는 것뿐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히르 오빠가 그렇게 죽고 나서, 당신의 행동은 단순한 차별이나 홀대 정도가 아니란 걸 깨달았지.


황상은 어째서 황태자를 죽였는가?

왜 황태자를 죽인 황상이 황녀인 나에겐 모든 것을 베푸는가?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몇 년이나 계속 고민했어.


그리고 조금 전 지하 방에 있던 적삼 안을 들추다가 우연히 어머니의 영정을 보고 나서, 거기에 당신에게서 방금 전 어머니 얘기를 듣고 나서.

드디어 평생의 의문이 풀렸거든.


내가 당신을 혐오하는 이유는.

당신이 나를 한 번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이야.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 착각한 이유, 그건 내가 화신이 될 위험성이 없는 자식이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어머니와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인걸.


나는 그냥 죽은 어머니의 대용품.

우연히 죽은 아내와 닮았을 뿐인 딸.


당신은 어머니가 죽은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냥 껍데기.

호원 이외의 세상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텅 빈 존재가 된 거야.


나는 조금 전 언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꿨어.

더는 당신 같은 사람한테 겉으로라도 복종하지 않기로 했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고.


아무리 어머니의 죽음이 비통하고 슬퍼도, 결국엔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의 원한보단 당신에게 죽은 오빠나, 그리고 죄 없이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원통함 쪽이 더 중요해.



"아, 그런가······."


자신의 힘에 취해, 패도에 묻혀.

자신이 사랑한다며 믿었던 존재마저 자신을 증오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다니.


자신의 딸에게 껍데기라 비난받아도, 무엇 하나 돌려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딸을 너무 사랑해서 딸을 의심할 생각조차 못 한 것이 아니라, 딸 따위는 진정 아무래도 좋았던 것, 사실은 어떠한 관심도 없었던 것에 불과했을는지도 몰랐다.


"아, 참으로. 어찌나 올곧은 눈빛인가. 이런 부덕한 아비 밑에서 훌륭하게도 자라주었구나."


판테라 황제는 철선에 막히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자신의 앞에 선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 두 눈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그리곤 그다음 순간 팔을 휘둘렀고, 고작 그 한 번에 철선은 부서져 하늘에 날리고, 파르다 황녀는 그대로 돌담으로 날아가 그곳에 부딪혀 미동도 못하게 되었다.


전돌담은 터져나온 피로 흥건히 젖었다.


이제는, 더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상이나, 패도나, 태평성대 따윈.


그저 하려던 것을 계속할 뿐, 독으로 마비된 뇌수는 더는 어떠한 생각도 쥐어짜내지 못했고, 사고는 성립조차 않은 채 희미해지는 의식을 겨우 붙잡는 게 한계였다.


바로 앞에 쓰러진 눈표범은 여전히 그 입만 살은 채 쓰러진 누군가의 이름을 세차게 불렀지만, 대지의 선 호랑이의 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호랑이는 움직였다.


평생 하던 것처럼, 손톱으로 원수의 간을 뽑아내면 자신의 복수는 그걸로 끝이다.


오로지 나찰사냥꾼으로서의 본능만이 남아 몸을 움직였다.


자세를 숙여, 손톱을 뽑고, 그 배에 손을 뻗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한 손을, 이번에는 어느 낯익은 호랑이가 붙잡고 있었다.


대체 오늘 하루에만 원래라면 막힐 일이 없을 자신의 공격이 몇 번이나 가로막혔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도대체, 몇 번이나 짐의 패도를 막아야······."


지난 몇십여 년간 그 팔을 가벼이 휘두르는 것만으로 수많은 생명을 재조차 남기지 않고 없앨 수 있었던 자신의 팔은 이제 마치 천근의 아귀가 매달린 듯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래서 그는 돌처럼 굳은 팔을 움직이려 하는 걸 포기하고, 정지한 생각을 계속해서 쥐어짜 내 자신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눈 앞의 호랑이의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기억해 냈다.


그것은 자신의 맏아들 히르카니아였다.


하늘이 내린 그 무시무시한 재능이 두려워 자신이 직접 죽음을 내리고, 불태웠으며, 그 시체는 조각내어 나찰들에게 먹이로 던져준 황태자.


호랑이의 정수를 물려받은 아슬란족 답지 않게도 그 몸은 아주 작았으나, 그럼에도 그 작은 가슴에 하나의 세계를 넘은 저 너머의 우주를 품고 있던 소년.


호원이 이 세상에 남긴 것 중 가장 가치 있던 존재.


호랑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죄악과 직접 마주했다.


그것은 유령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허깨비일 뿐이었다.


황제는 눈앞에 나타난 죽은 황태자가 단순히 독 때문에 죽기 직전의 뇌가 만들어내는 주마등, 단순한 환각에 불과함을 알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팔을 붙잡은 작은 황태자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어미를 꼭 닮은 그 눈으로 굳세게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저 하늘과 같이 푸른 눈동자였다.


호원이 이 세상에 남긴 세 아이들이 모두.

자신이 나아갈 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서 자신의 남은 딸과 아들까지 모두 죽여버리면.

그럼 이 세상엔 대체 어떤 가치가 남는 것일까.


사랑하는 아내 호원은 죽었으며, 제일 가는 충신 고이도 죽었으며, 가장 뛰어난 아들도 죽었으며, 남은 딸도, 아들도 자신의 손에 죽는다.


그렇게 된다면 미래의 어느 순간 자신의 패도가 실현되더라도, 세상에 이를 끝까지 지켜봐 줄 이가, 진정 가치 있는 존재가.


그 누구도 남지 않게 된다.


자신이 그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호원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세 존재가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남는 건 고작 피 묻고 풍화된 낡은 적삼밖에 없게 된다.


그게 자신의 팔에 얹힌 무게였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지금에 와서?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생명을 죽이고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와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인가?


그 무게에 짓눌렸는지, 아니면 독이 이미 퍼질 대로 퍼져, 그 몸은 더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된 것인지.


그는 더는 그 피 묻은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말했다.


"독살인가······. 참으로 군주다우며, 그렇기에 흔해 빠진 죽음이로군······. 이 인류 역사상 대체 얼마나 많은 지배자가 고작 독 몇 방울에 그 목숨을 잃었는가. 스스로를 천자라 칭했으나······. 나 역시 인류 역사에 널리고 널린 수많은 이름 없는 왕 중 하나에 불과했는가······."


"뭐야, 죽이지 않으려고? 항복 선언인가?"


언샤는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으면서도 그 저주받을 혓바닥을 놀리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는지 밑도 끝도 없이 허세를 부렸다.


"내 아들아. 나를 기억하라거나, 나의 유지를 따르라는 말 따윈 하지 않겠다. 나는 이제 너희 남매를 이기지 못한 패배자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악인이니.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그러니 부디 그대들에게 펼쳐질 미래에 마음껏, 나의 악행을 널리 퍼뜨리고, 영원토록 나를 학살자라 비난하도록."


"······."


"······이는 모두 나의 죄요, 나의 약함과 부덕함의 결과요. 그러나, 그렇기에. 역으로. 너희 어미는 아무 잘못도 없다. 호원은 순전한 희생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의 죽음을 잊더라도, 내 시체에 침을 뱉더라도. 너의 어머니의 죽음은, 그 원통함은 잊지 말아 다오. 세상이 너를 새로운 화신이라 부르며, 무신 아슬란과 같다고 칭송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해 죽어간 그 현실을 잊지는 말아 다오."


"······. 내가 당신에게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어. 그런 건 당신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잘 알고 있고. 이 알 실라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아는 사실이니. 당신은 사람들 간의 평등을 노래하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인 나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다뤘잖아. 그런 당신이 지금 와서 내 아버지 행세하려 하지 말아 줘. 당신이 내게 준 건 오로지 고통밖에 없으니. 나는 당신이 내게 한 짓도, 당신 때문에 죽은 히르형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


"······. 이 아비에게서 물려받은 건, 정말이지 그 방정맞은 주둥이밖에 없구나."


"남이사. 집안 내력이겠지. 할아버지도 입담이 장난 아니시더구먼."


언샤는 온갖 헛소리를 하며 시간을 질질 끌어댄 끝에 드디어 조금이나마 그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에,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


"······. 죽여라. 독 따위에 죽고 싶지 않다."


황제가 말했다.


언샤는 그 말을 듣고는, 더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손톱을 꺼내, 죽어가는 자신의 아버지의 심장을 찔렀다.


"아······, 고요 속에. 수많은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증오하는 한 서린 원성이. 나의 혼을 얽매는 창귀(倀鬼)들의 노랫소리가."


심장을 찔린 황제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의 업보가······, 내게로 돌아오는구나."


그것이 그의 죽음이었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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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1 1 25쪽
»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6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2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1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5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1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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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8 2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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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3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5 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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