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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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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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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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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호질 9 - 해후

DUMMY

언샤는 아주 잠시 후, 엄청난 두통과 짜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자신이 궁궐 내의 어느 방바닥에 누워있었으며.

주변은 꽤 조용했고, 이내 그곳이 자신이 늘 있던 동궁 태자방이란 걸 깨달았다.


주변에 자신이 기절시킨 갑사들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누이가 사람을 시켜 그들을 데려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언샤는 자신의 누이 파르다 황녀가 자신의 누운 몸에 기대고.

바로 옆 마룻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절했던 충격 탓인지 아직 눈앞이 흐려 황녀가 구체적으로 무얼 하고 있는지는 쉽게 분간 가지 않았다.


"뭐야, 내가 몇 분이나 기절했던 거야?"


"네가 아까 지하실에서 기절한지 대충 30분 지났고, 네가 기절시킨 경갑사 6명은 전부 강제로 입원시켰으니 누가 올 걱정은 안 해도 된단다."


파르다 황녀가 대답했다.


"갑자기 기절해서 한심해 보이는 건 나도 아는데. 아마 더러운 공기를 계속 마시는 바람에 혼절했던 것 같아. 쓰러진 사이에 내가 이상한 꿈을 꿨는데 그 내용이······."


"혹시 잘린 머리가 말을 하더니 갑자기 그 머리에서 몸이 자라나는 꿈이었니?"


"응, 맞는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거······."


언샤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누워있는 자신의 몸에 기대 있던 파르다 황녀가 계속해서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던 게 어떤 사람의 머리카락임을 알게 되었다.


파르다 황녀는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기나긴 한 소녀의 은발을 나선형으로 정리해 꼬아서 땋고 있었다.


언샤는 그 인상적인 은발이 누구 것인지를 바로 알아보고.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뛰어올라 겁에 질린 채 천장의 서까래에 손톱을 걸고 거꾸로 매달렸다.


하악 소리를 내며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꼬리를 거꾸로 치켜세우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사람이라기보단 놀란 고양이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 저. 저, 은발머리! 아까 그 잘린 머리잖아!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언샤는 서까래에 거꾸로 매달린 채 팔다리를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말했다.


파르다 황녀는 언샤의 그러한 반응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소녀의 머리를 땋는데 열중하고 있다가.

나선형으로 굵게 꼬며 땋아낸 머리끝에 댕기천을 달아 댕기머리를 완성해냈다.


"좋아, 댕기머리 완성됐습니다. 거기에 제가 어릴 때 입던 저고리가 아주 잘 맞아서 다행이네요."


황녀가 어울리지도 않게 존댓말로 말했다.


거꾸로 돌아 앉아있던 은발 소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바퀴 빙글 돌며 자신의 댕기머리와 비단 치마저고리를 두 사람에게 자랑해 보였다.


댕기머리로 땋은 은발과 자색 눈동자에 붉고 푸른 두 빛깔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은 마치 원래 자신이 입던 옷인마냥 아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은발 소녀는 그대로 천장에 매달린 언샤를 올려다보더니, 혀를 한 번 쯧차고 말했다.


"나 참, 사내가 저리 대범함이 없어서야. 언샤여, 그렇게 겁이 많아서는 장가나 똑바로 갈 수 있겠느냐?"


아주 자신만만하고 고압적인, 마치 여제와도 같은 단어만을 골라서 사용하는 소녀는 그 나이는 기껏해야 열 살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일 정도로 어려 보였으며.

그 목소리 또한 변성기도 채 오지 않아 너무 앳되어 위엄이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태도가 너무나도 당당하며 자신만만했기에.

소녀는 마치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을 받고 있긴 하나 그럼에도 고귀한 혈통을 부정할 수는 없을 어린 황제와도 같이 기백이 넘쳤다.


"너, 넌 뭐야! 대대 대 대체 언제 봤다고 내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는 건데? 나, 나는 이래 봬도 이 나라 황태자님이시거든? 그그그 그렇게 막 불러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이거야!"


언샤는 그렇게 크게 호통을 치려 했지만.

서까래에 매달려 벌벌 떨며 그런 소리를 해봤자 거기서 어떠한 위협을 느낄만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뭬야? 지금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이냐? 지난 십 년간 아까운 시간을 내어 밤마다 그대를 만나러 갔거늘."


"너 같은 루카족 꼬맹이랑 야밤에 밀회 같은 걸 가진 기억은 전혀 없거든!"


"참으로 실망이구나! 그대가 이런 겁쟁이에 사람 인연도 제대로 기억하는 놈인 줄 알았더라면 나를 깨우러 오라 명하지도 않았을 것을!"


소녀는 마치 언샤를 몇 년간은 만나온 사람처럼 그를 대했지만.

하늘에 맹세코 언샤는 저런 루카족 꼬마, 아니 루카족 어린아이기 이전에, 쇠사슬 안에 봉안되어 있던 잘린 머리와 만난 기억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만 했다.


"잠깐······. 깨우러 오라고 했다고? 밤마다 나를 만났다고? 거기에 그 긴 은발은······. 너 혹시 그 사람 정신 나가게 만드는 미친 꿈에 매일같이 나오던 그 은발 여자냐?"


"흥, 이제야 기억해내봤자 이미 늦었노라. 나는 그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해 이미 단단히 화가 난지 오래이니."


언샤는 그 말을 듣고는, 그 끔찍한 꿈의 내용.

그리고 매번 그러한 미래를 피하고 싶다면 자신을 깨우라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기억나, 순식간에 공포를 뛰어넘을 정도의 짜증과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서까래에서 발톱을 풀고 마룻바닥으로 내려왔다.


막상 아래에 내려와서 보니 키가 3척 반, 즉 1m를 약간 넘는 정도 밖에 안 되어 자신의 허리춤 높이에도 오지 못하는 작디작은 어린아이에게 자신이 겁먹었다는 사실에 또 화가 났다.


"뭐냐, 꿈속에 나오던 여자는 훨씬 컸었는데. 왜 직접 만나보니 이런 꼬꼬마인 거냐고."


"대체 누가 꼬꼬마란 거냐! 내가 원래부터 이런 어린 몸이었을 리 없지 않으냐! 내 머리에 남아있던 힘 가지고는 이런 작은 몸 밖에 못 만드니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다! 뭐 불만 있느냐!"


"불만 많지! 야 꼬맹아, 넌 대체 뭐냐! 뭔데 남의 꿈에 나와서 자신을 찾으라니 뭐니 하는 명령질을 하냐고? 그리고 도대체 뭔데 그 지하실 승탑 안에 있던 쇠사슬 안에 머리만 남은 채로 살아서 봉안되어 있었느냔 말이야!"


"뭐냐, 언샤 네놈 설마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로 나를 깨운 것이냐?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작은 소녀는 자신보다 키가 두 배는 더 크고 덩치는 최소 열 배는 넘는 호랑이 머리를 단 남자가 자신의 바로 앞에서 소리를 치는데도.

전혀 겁먹거나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더 화났다는 듯이 또박또박 반박했다.


언샤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누구신데요? 대체 누구신데? 대체 뭐길래 머리만 남았는데도 살아있었던 거냐고?"


"듣고 아까처럼 까무러치지나 말거라! 나는 여신 루카다. 모든 나선성신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며, 강대한 힘을 가진 전지하고 전능한 여신이며, 너희들이 해와 달과 별과 하늘의 신이라며 숭배하는 일월성신(日月星神) 이자, 그와 동시에 사랑의 여신인 바로 그 루카님이시지."


소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열두 나선성신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주신인 사랑의 여신 루카라고 소개했다.


"여신인 나는 3천년 간 저 쇠사슬에 잠든 채 봉인되어 있었고, 수백 년 전 잠에서 깨어나 내가 창조한 세상이 망해가고 있는 걸 보고, 이 세상을 예전과 같이 평화롭도록 되돌리기 위해 나를 깨울 자를 찾고 있었노라!"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태도라 혹시나 하고 혹하게 될 정도로 자신이 내뱉은 그 말을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하겠노라. 아슬란의 권능을 악용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반천제라는 명목으로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해온 저 판테라를, 이 여신 루카의 이름으로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이 소녀는 대체 무얼까?

사기꾼 무당도 감히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진 않는 법인데.


"······."


언샤는 갑자기, 급격한 피로와 후회가 몰려왔다.

대체 자신은 왜 이런 천하에 둘도 없을 멍청이에게 겁먹어 혼절까지 했었던 것일까.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상한 소녀보다도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뭐냐, 그 반응은 대체 무엇이냐! 왜 한숨을 쉬는 게야!?"


"불쌍한 아이였구나······. 미안하다, 꼬마야. 내가 너무 어른답지 못했지?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집은 어딘지 기억나? 이 곶감이라도 먹을래?"


언샤는 새벽에 수라간에서 음식을 챙길 때 안주머니에 같이 넣어놓고 쭉 잊고 있던 곶감 몇 개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걸 꺼내 곶감들을 싸고 있던 닥종이를 펼쳐낸 뒤 소녀에게 내밀었다.


"오, 이 여신님께 올리는 공물인 게냐! 삼 천 년이나 굶었더니 아주 시장하던 차였는데 정말 고맙구나!"


소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곶감들을 받아 싱글벙글하며 먹기 시작했다.

여신이고 뭐고, 그냥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언샤는 소녀가 곶감에 정신 팔린 사이에.

옆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던 파르다 황녀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누나, 저 꼬맹이는 대체 뭐야? 뭔데 자기가 여신이라는 미친 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한데?"


"아니, 그게. 동생아. 저분은 아마도······. 진짜 여신님이 맞을 거란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저 꼬맹이가 대체 어딜 봐서 여신인데?"


"겉모습만 봐도, 여신임이 틀림없잖니. 일단, 역사서에는 분명히 루카 여신의 외모에 대해, 20대 초중반 정도에 은발과 자안을 가진 아름다운 루카족 여성이라고 묘사하고 있고. 이건 수많은 책에서 모두 교차 검증 가능하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단다. 그러니 지금 어려진 모습이면 몰라도, 머리만 있었을 땐 그 묘사 그대로인 모습이었던 셈이지. 거기에 더해, 루카신에 대한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그 전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잖니?"


'그 전설'이라고 하면, 아마 루카 여신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하며 유명한 한 일화를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언샤는 어린 시절 자신의 형에게 그 전설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전설? 설마 다른 나선성신들은 인간들에게 여러 지식과 기술을 물려준 후 전부 다시 우주로 떠났지만, 주신인 루카 여신만큼은 인간들을 걱정해 우주로 떠나지 않고 이 지구에 계속 남아 우리 인간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그 웃긴 전설 말하는 거야?"


"그래, 바로 그 전설이란다."


"그건 그냥 아무 근거도 없이 허무맹랑할 뿐인 전설이잖아. 지난 3천 년간 아무도 루카 여신을 만나본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그게 사실일 수 있겠어?"


"동생아, 어쩌면, 우리가 그 3천 년의 시간을 넘어 처음으로 여신 루카와 만나게 된 사람들일지도 모른단다. 방금 전 그 승탑은 분명히 루카 승탑이었고, 대개 승탑이란 건 사리를 보관하는 장소인데, 사리란 건 뼛조각이잖니? 그러니 거기에 루카 여신의 사리, 그러니까 육체의 일부인 머리가 봉안되어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던 걸지도 몰라."


"잠깐, 신들은 대부분 우주로 떠났는데 어떻게 신들의 뼛조각이 지구에 남아있는 건데?"


"글쎄? 전설에 따르면 나선성신들은 완전한 불로불사이기에 팔과 다리가 잘려도 금세 다시 재생되었다고 하니, 신들의 진신사리라고 알려진 건 사실 모두 그렇게 잘린 팔과 다리뼈를 모은 것뿐 아닐까? 다른 신도 그럴진대 신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주신인 루카라면 머리만 남은 상태로 살아있는 것도 불가능한 게 아닐지도 몰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나보고 믿으라고?"


"그래. 한 번만 속는 셈 치고 믿어보렴. 넌 매일 같이 화신의 말도 안 되는 권능을 보아왔잖니? 그럼 화신이 아닌 진짜 신은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존재인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줄도 알아야지."


"아니 됐거든.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거든. 종교 같은 허무맹랑한 얘기는 옛적에 졸업했어. 성신이 우리 인간들을 버리고 떠난 게 벌써 3천 년 전 일이야. 그런 옛날 일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언샤는 그새 그 많던 곶감을 다 먹고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자칭 루카 여신에게 다가갔다.


"야, 꼬맹이."


"꼬맹이가 아니라, 여신 루카다. 루카님이라고 부르거라."


"됐거든. 네가 진짜 루카 여신이면 나는 아슬란 신이겠다."


언샤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튕겨 소녀의 머리에 딱밤을 한 대 먹이고는, 그대로 태자궁에 있던 자기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뭐냐, 언샤여. 왜 갑자기 짐을 싸는 것이냐?"


소녀는 난데없이 얻어맞은 이마를 감싸고 자신이 대체 왜 맞았는지 몰라 화를 내려다가.

언샤가 갑자기 짐을 싸는 걸 보고 당황하여 물었다.


"더는 이 유치한 짓에 못 따라 주겠어서. 그냥 황궁에서 나가려고."


"뭐냐 언샤여. 내 도움이 필요해서 나를 깨운 게 아니었느냐? 황상을 끌어내리고 황좌에 오르기 위해 이 여신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던 게냐?"


"뭐야, 거사 얘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건 내가, 저 쇠사슬에 봉안된 동안 나의 천리안(天眼通)을 통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지."


"뭐? 천리안? 천안통? 신들이 쓴다는 그 권능? 이 꼬맹이 여신 놀이에 아주 심취했구만."


언샤는 아까 전 마음먹었던 대로, 그냥 거사를 때려치우고 도망치기로 했다.


방금 전 저 무구를 찾을 때만 해도 혹여나 저것이 화신에게 닿을 수 있는 강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했었으나.


정작 저런 정신 나간 꼬맹이를 봉인하는 데에나 쓰이고 있었던 거 보면 저 무구도 별 볼일 없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동생아, 신을 죽인다는 무구를 찾았고, 루카 여신님도 만나게 되었는데 대체 왜 계속 도망치겠다는 거니?"


누이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진 언샤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언샤가 계속 거사에 참여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뭐야, 누나 미쳤어? 고작 몇 마디 해봤다고, 외모가 좀 닮았다고 저 꼬맹이가 여신이라고 확신하는 건 대체 뭔데?"


"하지만 저 여신님이 머리만 남은 상태에서 부활하시는 기적을 직접 보았잖니?"


"그딴 건 기적도 뭣도 아냐. 그냥 저 지하실의 안 좋은 공기 때문에 집단 환각이라도 봤나 보지."


언샤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신이 본 게 환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긴 했지만.

갑자기 나타나 갑자기 여신이라 말하는 저 꼬맹이 때문에 저 무구 성능이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아 거사에 참여하기 싫어졌다고 솔직히 말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냥 대충 적당히 아무 이유를 만들어내서 붙였다.


그것은 그냥 객기였으며, 어제 누이 앞에서 소리 지르며 고집을 부리던 언샤와 그리 다를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 애초에 언샤는 이런 놈이었다.


만약 저 무구가 신에 닿을 만한 것이었어도.

그곳에서 자신이 여신이라 주장하는 이상한 꼬맹이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어도


언샤는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서 도망쳤을 것이다.

애초부터 황제에게 저항하며 거사를 일으켜 반정을 성공시킬 생각 따위.

처음부터 전혀 없었으므로.


자신이 왜 아까운 목숨을 걸고 그런 짓을 해야 하는 지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으므로.


"언샤여, 이 무기가 있다면 저 황제를 죽이는 것쯤 아주 손쉬운 일이다! 이 여신이 도와줄 테니 수많은 이들을 학살하고 있는 저 파렴치한 황제를 끌어내리자꾸나!"


자칭 여신인 소녀는 여전히 공중에서 회전하고 있는 붉은 쇠사슬을 집어 들어 그것을 언샤에게 내밀었으나.

언샤는 애초부터 진심으로 황제에게 저항할 생각 따윈 없었으므로 이를 무시했다.


"아 됐어, 난 안 할 거야. 그 무기가 아무리 강해도 어차피 그걸 쓸 사람이 죽어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거든."


"동생아. 그러니 네 도움이 필요한 거란다. 이 알 실라에서 황제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무인인 네 힘이 필요해."


"됐어. 누나도 충분히 강하잖아. 게다가 저 자칭 여신님도 이제 도와주시겠다고 하시니. 둘이서 알아서 잘들 해보라고. 난 내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칠 테니."


"그래. 거사를 일으킬 이유가 없는 네게, 같이 거사를 하자고 한 내 잘못이 크구나. 그냥 가렴. 가서 세상을 한 번 보고 오렴. 그럼 왜 이 세상을 바꿀 필요가 있는지 금방 깨닫게 될 테니."


누이는 전혀 화가 난 기색도 없이, 아주 의연히도 말했다.


"아니, 내가 거사 같은 걸 일으킬 이유 같은 건 절대 안 생겨. 난 바깥세상에서 아무 구속도 없이 편하게 살 거거든."


언샤는 그렇게 말하고는, 짐을 들고 그대로 태자궁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무래도 좀 더 얘기를 해봐야겠구나."


자칭 여신인 소녀가 그렇게 말했다.


"네, 그리고 여신님, 당신께서 정말 여신이 맞으시다면. 천리안을 통해 이 세상을 내려다보셨다는 게 사실이라면. 제 동생이 도망 쳐봐야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아시겠지요."


파르다 황녀는 자신의 안목을, 직감을 믿기로 했다.


이 은발 소녀가 하는 말이 바보 황태자에겐 허무맹랑하게 들렸을지 몰라도.


수많은 전설과 종교 서적을 읽어온 파르다 황녀가 보기엔.

그리고 황녀로서 수많은 사람을 다뤄온 경험에 따르면.

이 여신의 말투, 태도, 그리고 발언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아무리 의심하더라도.

아무리 황당한 만남이라도.

눈앞에 있는 건 여신이 확실했다.


3천 년간이나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루카 여신.

인류를 위해 이 지구에 남았다고 알려진 사랑의 여신.


이 여신은 저 사멸신장 몽환포영에 의해 봉인되었다가.

수백 년 전 알 실라의 초대왕 모한이 땅에서 저 몽환포영을 파내어 신주궤로 옮겼을 때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리.


"그래. 언샤는 결국은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게다. 바깥세상이 지금 어떤 곳인지 알게 된다면. 도망 쳐봐야 희망 따윈 없다는 걸 알게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네."


"그런데 누이여, 황녀 파르다여. 그대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가? 내가 여신이라 주장하는 걸 믿어주는 건가?"


"네, 저 무구의 능력이 뭔지 생각해 보면. 거기에 봉인될 자, 그리고 머리만 남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여신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니까요."


"그래, 바보 동생과 달리 황녀 그대는 말이 잘 통해서 좋구나. 그럼 잠시 나갔다 올테니,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자꾸나."


"네, 다녀오시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신님. 저 멍청이가 지금 세상이 어떤 곳이 되었는지를 보게 되는 걸 조금 도와주시지요."


그리고 작은 은발 소녀는, 현재 입직한 모든 경갑사들이 자신의 사람이었기에 쉽게 궁궐 대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파르다 황녀가 직접 밖으로 내보내 주게 되었다.


자칭 여신인 소녀는 몽환포영을 집어 들고 도망친 황태자를 찾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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