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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연재수 :
58 회
조회수 :
3,564
추천수 :
93
글자수 :
622,086

작성
21.05.24 12:00
조회
42
추천
2
글자
24쪽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DUMMY

휴브리스(ὕβρις)


제1막 - 사문유관(四門遊觀)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새 황제가 천좌에 오르고, 그 패호황보다 강한 화신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에 수많은 이들이 공포에 떨었다.


새로운 황제인 설련황(雪連皇)은 아주 일자무식하며 강한 무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니.

수많은 노예를 해방한 업적이 있는 패호황보다도 더욱 악랄한 치세를 펼치리라는 추측이 제국 전체에 가득했다.


새 황제는 채 10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무당 계집을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 하며, 그 계집에게 섭정당하고 있는 멍청이라는 소문이 항간에 떠돌았으며.

황제는 그저 바보처럼 힘만 센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며 그 누이가 호가호위하여 제국의 모든 실권을 지배하고 있으니.

두 여인의 치맛자락에 휘둘리게 된 이 제국은 이미 경국의 징조가 만천하에 가득하다는 말 또한 세간에 떠돌았다.


그럼에도 다들 이에 대해 최대한 함구하며, 쉬쉬하고, 누구도 감히 경거망동하며 불만을 표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침묵의 미덕을 지키며 새 황제와 두 여인에 대해서는 감히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하루라도 많은 삶을 살기 위한 요령이라 여겼다.


그렇게 침묵 속에 3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알 실라 제국에는 딱히, 아무런 일도 없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알 실라 제국의 영토가 더 늘어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더는 관리들이 엄청난 돈을 주고 곡물을 사 가지도 않았으며, 노예를 부리던 이를 찾아내면 큰 포상을 내리는 일도 더는 없었다.


알 실라의 영토 곳곳,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가득하던 무장 군관들이 어느 순간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어제까지 무관이나 군관, 갑사라고 불리던 자들이 어느새 갑옷이 아닌 관리복을 입고, 창 대신 붓을 들고.

대로에 서서가 아닌, 관아에 앉아 일하게 되었다.


대륙 역사상 처음으로 조정에서 직접 관리를 보내게 되어 각 고을마다 최소 한 명씩은 사또라 불리는 관리들이 있게 되었다.


대체 어떤 폭정과 수탈이 더 이어질지 걱정했던 이들의 마음은 아주 조금 누그러졌고.


패호왕 치세에서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던 반란과 여러 난도 그 기세가 갈수록 잦아들어.

세 번의 해가 바뀔 때쯤엔 이미 독립을 요구하는 몇몇 나라 이외에선 그 소식을 듣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제국 전체는 그렇게, 딱히 적지도, 많지도 않은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다른 지방과 달리 황도 서울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루에 최소 한 번쯤은, 수백 명이 무리 지은 대상단이 그 대문을 열고 성벽 밖으로 나가거나, 혹은 성벽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고.

더는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이들도, 수많은 곡식을 사서 나르는 승려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 또한 몇 가지 일어났다.


한 노인은 갑자기 훈련도감의 착호갑사 교육대장으로 임명되여, 수많은 착호인들을 훈련하고 육성하게 되었다.


한 병자는 어느 의관이 갑자기 나타나 그 병세를 보아주었고, 몇 달 정도 약을 먹자 오랜 폐병이 씻은 듯 나았다.


한 갑사는 갑자기 한 고을의 사또로 임명되어 고향 서울을 떠났고, 그곳에서 우연히 자신의 사랑을 찾게 되었다고 했다.


한 사찰은 더는 외국에 나가 곡식을 사 올 필요가 없게 되어 풍족히 남아돌게 된 돈으로 황금 불상 같은 걸 만들었다 했다.


갑사로 일하다 두둑한 퇴직금을 받고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들은 몇십 년간 계속 메마른 채 방치된 농지를 다시 파고 씨앗을 뿌리며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조정에선 각 지방에 파견할 관리를 필요로 해 이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문관을 뽑게 되어.

파리만 날리던 각 고을의 서당들은 수십 년 만에 글 읽는 소리로 가득하게 되었으며.

예전과 달리 무관이 아닌 문관이 되기 위해 과거를 치러 수도 서울을 찾는 이들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예가 뛰어난 자, 학문의 식견이 드높은 자, 종교적 성취가 대단한 자라면 누구라도 그 재능을 인정받아 관리로서 나라에 공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다시 서로에게 선을 긋고,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며, 내가 잘났네 너보단 잘났네 하며.


자신은 양민이었으나 너는 천출이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상놈이라 부르며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미워하게 되었다.


자신이 양반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본적도 없는 족보를 꺼내드는 이들, 큰돈을 받고 근본도 없는 족보를 위조해 파는 이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과거에 노비였던 자가 이젠 다른 사람을 이름만 달라졌을 뿐인 노비로 부리게 되었고, 개중엔 몰래 첩을 들이는 자 역시 나타나게 되었다.


새 황제의 치세에서, 알 실라 제국은 그렇게 변했다.


태평성대라 부르기는 아주 힘든 세상이었으나, 그럼에도 조금은.

사람 사는 세상이 되었다.



0.


지난 3년은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간 시간은 아니었다.

자신의 미래 계획이나 꿈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게 최선이었던 언샤에게 있어 갑자기 떠맡게 된 황제란 직위는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호랑이처럼 찍어눌렀을 뿐 천하를 다스렸다기보단 그저 지배했던 것에 불과했던 패호황이었다면 정복지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그곳의 지배자들을 다 쓸어버린 후 헌병을 통해 공포로 통치하는 것이면 충분했겠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파탄 난 황실 재정을 되살리고 내실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결국 분권을 통한 안정된 복속과 징세 이외의 방법은 존재할 수 없었다.

알 실라의 영토는 이미 중앙 집권을 이룩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규모였다.


지방의 호족과 에미르와 영주들을 포섭해 그들을 제국의 지방관으로 받아들이고, 그 수많던 갑사와 무관 중 재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거나 전과시켜 임기 5년의 수령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황제의 이름으로 수령칠사(守令七事)를 명해, 즉 학교를 일으키고 농사를 흥하게 하고 호구를 늘리며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소송을 집행하도록 하며 군정을 집행하고 교활한 자들을 벌하게 하니.

비록 그러한 권력을 부정하게 남용해 폭정을 하는 이들이 나타나 이들을 처벌하는 데에 골머리를 쓰게 되긴 했음에도 그 어떤 지배자도 없이 방치되던 과거보다는 훨씬 안빈낙도에 가까운 시대가 되게 되었다.


다행히도 제국 사람들이 설련황은 역대 최강의 화신을 죽인 자이니 당연히 그보다 더 강할 거라고 지레짐작하여 멋대로 겁먹었기에 패호황이 행하던 공포 정치의 효과는 새 황제의 시대에도 여전히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황실이 그러한 오해를 굳이 먼저 나서 해소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이는 반란이나 여러 내란을 막기에는 아주 충분한 억제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황제의 자리에는 화신이 앉아야 한다는 파르다 황녀의 주장이 그리 틀리지는 않은 셈이었다.

사실 설련황은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이를 무력으로 숙청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쨌든 혼란은 최소한이 될수록, 평온은 최대한이 될수록 더 좋은 법이란 걸 부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황실은 사람들이 황제를 두려워하도록 새로운 용기의 화신이 대체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에 대한 소문을 일부러 퍼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언샤는 황제라는 자리가 참으로 싫었다.


대부분의 자잘한 안건은 수많은 조정의 관리들이나 황녀, 여러 고관대작, 공경대부들 선에서 처리되었고 황제가 하는 일이라곤 관리가 상소문을 독소(讀疏)하거나 독주(讀奏)하면 그 최종 결정권을 갖고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에 불과했기에 업무량 자체가 사람 잡을 만큼 많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제왕교육이나 태자 교육 같은 건 받아본 적도 없으며 황실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에 상식이 부족한 언샤에겐 무엇 하나 중요해 보이지 않은 게 없는 안건을 자신이 모두 책임지고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큰 정신적 부담이었고, 거기에 꽤나 옳은 판단을 하여 관리들이 만족하였을 때에도 자기 자신이 대체 뭐길래 그런 걸 다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지 끝도 없는 의문이 들었다.


고작 자신의 한 마디에 대체 얼마나 많은 이의 인생이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하나가 수많은 이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체 누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결국 그는 황태자였으며 지금은 황제이고 심지어 화신이기까지 하나 그럼에도 한 인간이며 수많은 직함과 명분을 빼놓고 보면 결국 한 명의 평범한 개인에 불과할진대.

화신의 강건한 육체 덕에 다른 제왕들과는 달리 암살에 대한 두려움이나 반정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긴 했으나, 그럼에도 황제란 자리는 그에게 전혀 걸맞지 않았으며 여우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듯이 불편한 자리였다.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언샤에게는 있지도 않는 위엄과 권위와 예법을 연기해야만 하는 황실 그 자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샤는 패호황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으나, 새 황제로서 정당성과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을 황태자로 책봉했으며 명분 상 직접 황위를 물려준 것으로 되어있는 선황을 폐위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선황을 태상황으로 추존하고 황실의 예법에 따라 3년간이나 황제의 상징인 황호포와 익선관 대신 아버지가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상복이자 정복(正服)인 참최복(斬衰服)과 참최관을 쓰고 옥좌에 앉게 되었다.


흰 삼베로 최대한 거칠게 만들어졌기에 전혀 황제답지 않은 그 복장은 언샤가 더욱더 자신이 황좌에 앉아 있을 인물이 아니도록 느끼게 만들었다.


결국, 언샤는 애초부터 남들 위에 설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황제의 삶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언샤는 막연히 황제란 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하늘과 같은 존재라 생각해왔으나 그건 단순히 패호황이 유아독존의 존재였던 것에 불과했다.

군자학에 입각해 군주의 성품과 어진 정치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나라인 알 실라의 황제란 수많은 신하들이 내놓은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내리면서 알 실라라는 이름의 거대하며 하나 된 자동 체계를 통괄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태조 모한왕이 군자학을 기치로 삼아 이 나라를 건국한 그날부터 알 실라는 신하와 백성들의 나라였지, 왕과 황제의 나라 같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폐왕과 패호황의 정치가 이상했던 것이지, 설련황 치하의 정치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언샤는 그 모든 행동에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도덕성과 잣대를 요구받으며 수많은 관리들의 감시와 질타를 받는 몸이 되었고, 평생 타인의 기대란 걸 받아본 적이 없는 언샤에게 그러한 기대와 관심은 너무나 불편한 것이었다.


거기에 그런 엄숙한 태도를 요구받기에 황제임에도 식사는 군자답게 최대한 검소한 것이 되어야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 황제는 곧 나라 제일의 현인불이라는 논리로 생명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는 이유, 아버지의 상 중에 사치스런 식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 총 세 가지의 3불가론으로 인해 수라상에는 고기는 아예 올라오지 않았다.


아무리 화신이라 적은 식사량으로도 생존에 아무 지장이 없는 몸이라 해도 덩치에 걸맞게 대식가인 언샤에게 있어 강제로 먹는 양을 줄이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처사였다.

어린 시절엔 황제가 되면 매일 같이 소고기를 먹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으나 이는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3년, 그렇게 3년. 언샤가 참최복을 입고 황제 같지도 않은 종이호랑이 노릇을 하는 사이에 어느 여신은 어느샌가 아무도 사용하지 않던 중궁전을 차지해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신은 마치 이 나라의 황후, 황귀비, 혹은 중전이라도 되는 듯이 온갖 국정사에 사사건건 참여하는데다가 황제를 마치 자신의 아랫사람처럼 취급하며 황제보단 여신의 말을 듣는 게 더 옳지 않겠냐며 매번 자신의 드높은 학식과 뛰어난 결단력을 자랑하는 데에 전혀 거침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원래부터 엄청난 권력을 갖고 수많은 추종자를 달고 살기에 그 세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어느 황녀 사이에 끼인 언샤는 황제의 권력이란 게 뭔지 느껴보지도 못하며 그냥 병풍처럼 살았다.


설상가상으로 관리들이 서울에 있는 한 절에서 숨어 살던 황태후의 핏줄을 발견했다며 그 공덕과 무예가 높은 것으로 유명한 어느 비구니 한 명을 데려와 국가에서 가장 높은 승려인 국사(國師)로 추대하며 임금의 스승으로 모시라 했을 땐 그냥 그 자리에서 정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황제의 반대로 그 비구니가 왕사가 되는 일은 없었으나 꽤 높은 법계의 승직을 얻어 황실에 자주 드나들게 된 비구니는 내원당 호압사 법당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황제를 볼 때마다 여신과 황녀 사이에 끼어 참으로 살기 힘들어 보이신다며 아주 노골적으로 놀리곤 했다.

비구니는 황태후 계열이긴 하나 엄연히 황족이었기에 고작 그런 걸로 처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언샤가 참최복을 벗고 황호포를 입게 될 시기 즈음.

더는 자신이 진짜 황제가 맞기는 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됐을 때 즈음.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나선 축일 행사를 보러 가고 싶다고 말했을 뿐인데 수많은 신하들이 폐왕 같은 방탕한 군주나 태상황과 같은 폭군이 되시려는 것이냐는 단체 상소를 올렸을 때 즈음.


비가 안 오는 것도 황제의 부덕함 탓이요, 가뭄이 들어도 황제의 부덕함 탓이요, 병충해가 생겨도 황제의 부덕함 탓이요, 홍수도 태풍도 아무튼 전부다 황제 탓이라며 끝도 없이 신하들이 황제를 비난하게 됐을 때 즈음.

일주일 동안 매일 같이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앉아 기우제를 올려도 비가 안왔을 때 쯤.

백성의 모든 고통이 전부 황제의 죄업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군자학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아주 질리게 됐을 때쯤.


언샤는 폭발했다.


그냥 황제 같은 거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그런 되도 않는 억지가 먹힐 리는 없었다.


3년이 지나 겨우 혼란스럽던 제국이 안정되었고 늙지도 않는 화신인 자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는데 또다시 새로운 황제가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언샤는 파르다 황녀에게 역시 태상황의 세 번째 자식인 자신보단 두 번째 자식인 누이가 훨씬 더 적통이니 황제 자리에 더 어울리지 않느냐는 말을 몇 번 꺼냈으나 황녀는 그때마다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이 완벽히 그 말만을 무시하고 다른 주제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언샤는 그냥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정말로 울었다간 신하들이 또 뒤에서 뭐라고 떠들지 두려워서 울지 못했다.


그리고 3년 전 그날 거사를 일으켜 황위에 오를 것이 아니라 그냥 도망쳐야 했었다는 생각을 수십 번쯤 하고, 몇 년 간 꾸지 않던 악몽을 다시 꾸게 되었을 때쯤.

지난 3년간 완벽히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기억났다.

일에 치여 사느라 황제와 여신 두 사람 모두가 잊고 있었던 3년 전 그 약속이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분명 여신의 육체를 찾으러 대륙 전체를 여행하기로 약속했었지.


거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언샤는 드디어 끝도 없는 미궁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은 심정이 되었다.



언샤는 누이를 향한 수많은 회유와 설득을 거친 끝에서야 겨우 황궁을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자신이 꺼낼 수 있는 모든 논리를 다 동원하였다.


이제 제국이 안정되었으니 한 동안은 별 탈이 없을 것이다,

육체를 되찾아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신 여신님이 이 제국을 수호하게 되면 더욱 기나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형과 나눈 약속이기도 했다,

여신의 명이기에 제아무리 황제라 해도 거절할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육체를 찾아 돌아오도록 하겠다,

세상을 둘러보고 식견을 넓혀야 더욱 훌륭한 치세를 펼칠 수 있는 법이다,

여신님께서 육체를 되찾아주면 태평성대를 이루는 걸 도와주시겠다고 약조하셨다,

화신의 힘으로 수많은 백성들을 돕고 그들이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어 지방의 혼란을 줄이고 황실의 권위를 세우겠다,

사실 나 한 명쯤 없어도 이 나라 잘만 돌아가지 않느냐,

기타 등등.


그리하여 또다시 1달 후.


이른 새벽, 웬일로 해가 뜨자마자 활짝 열린 서울의 남대문에는 수많은 백성들과 신하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언샤와 루카, 즉 바보 황태자라 불린 주제에 대체 어떻게 용기의 화신이자 새로운 황제가 된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설련황 언샤와 자신이 여신 루카라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무당 소녀 두 사람을 배웅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별로 탐탁지 않았으나 괜히 황제의 여행을 환송하라는 어명을 무시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밭에 나가야 할 시간임에도 남대문에 모여 환송식을 거행했다.


언샤와 루카는 남쪽 사막 지대에서 들여온, 수백리를 연달아 달려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품종인 황실의 명마 한혈마(汗血馬), 혹은 아할 테케(Akhal-Teke)에 올라타 최소한의 짐만을 챙긴 채 백성들의 환송을 받았다.


환송식의 연설 때에 언샤는 이것이 대륙에 흩어진 여신의 육체를 되찾기 위한 여행이며,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여신 루카가 다시 이 대륙에 강림해 우리들 모두에게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을 만큼 기나긴 평화와 수호를 내려줄 것이라며 허심탄회하며 어떠한 숨김도 없이 자신의 대의를 널리 선포했으나.


사실 황실의 일부 관리들 이외엔 그 누구도 그 말을 진지하게 믿고 있지 않았으며 그곳에 모인 모든 백성이 여신 루카의 머리가 황실에 강림했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황제가 천자로서 자신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내세우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바보 황태자였으며 이젠 바보 황제인 놈이 용케도 저렇게 얼굴에 철면피를 쓰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며, 감히 신의 이름을 사칭하다가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새 바보 황제는 백성들을 학살하거나 수탈하는 군주는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정신 상태가 아주 글러먹긴 했으나 적어도 성격은 착해 보이는 새 황제가 고작 두 사람이서 저 끝도 없이 위험한 나찰들의 땅을 통해 대륙을 여행하겠다고 했을 때는 수많은 백성들이 그 안위를 걱정하게 되기는 했다.


어쨌든 새 황제가 비록 멍청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백성들은 황제를 아뢰어 삼배를 올리고는 제발 그렇게 위험한 땅으로 나가지 말아달라며, 스스로 죽을 길을 선택하지 말아달라며 통곡했고 언샤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내심 마음이 동했다.

이렇게 훌륭한 백성들을 두고 떠나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며, 지금보다 더욱 평안한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물론 백성들이 언샤를 보고 떠나지 말라며 통곡한 것은 단순히 그들 모두 황제가 자신이 여신 루카라고 주장하는 저 미친 무당 계집에게 홀렸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 우물에 빠져 죽으려 하는 어린아이를 살리려 하는 심정으로 황제의 여행길을 만류했었던 것뿐이었으나.


어쨌든 백성들이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언샤는 그들의 눈물을 새로운 교두보로 삼아 최대한 빨리 여신의 육체를 찾아서 자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이 평안할 수 있게 되도록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황제 폐하, 반드시 떠나셔야겠습니까? 이렇게 수많은 백성들이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데, 그들을 저버리고 위험한 여로에 오르시겠다니, 현명한 판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샤가 황위에 오른 후 공식 석상에서만 언샤에게 높임말을 써주게 된 파르다 황녀가 말했다.


"이미 알 실라의 정세는 안정에 들어섰고, 이 나라의 재상과 수령이 모두 덕이 높고 훌륭한 자들이니, 태평성대를 이룩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지 오래이다. 그렇다면 하늘이 직접 선택한 자식인 천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은 유일하게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저 일월성신의 힘을 빌어 인간이 아닌 신의 권능으로 백성들이 더욱 평안히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뿐. 그러니 이 여로의 끝에는 영원한 행복과, 여신의 이름 아래 어떠한 고통도 없는 세상만이 존재할 것이니. 더는 이 여로를 뒤로 미룰 이유가 전혀 없다."


언샤는 황금빛 윤기나는 털을 자랑하는 명마, 한혈마에 탄 채로 백성들 모두를 바라보며, 며칠 전부터 한참 동안 연습해 외워둔 대로 아주 위엄 넘치게 말했다.

아름다운 말에 탄 채로 자신의 큰 포부를 외치는 그 모습은 천자라는 이름이 부족함이 없을 만큼이나 위풍당당했다.


"알았어, 그럼 잘 다녀오렴, 우리 바보 동생아."


그리고 황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 존댓말 안 해? 백성들이 다 보고 있다고?"


"됐고, 그냥 가렴. 이제 우리 귀여운 황제 폐하랑 여신님이 여행을 떠나면 그동안은 내가 황실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 될 예정이라 아주 기분이 좋거든. 옥좌에 한 번만 앉아봐도 괜찮지?"


"아니, 그렇게 권력이 좋으면 누나가 직접 황제를 하면 되는 거······."


언샤는 누이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았지만, 파르다 황녀가 말 뒤로 달려와 군마의 궁둥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쳤기 때문에, 놀란 군마가 그 자리에서 앞으로 튀어나가게 되었으므로.

그곳에 모인 백성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면 결국 말 머리를 돌려 성문 밖으로 달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잘 가, 몸조심하고, 아무 여자나 만나고 그러면 안 된다!"


등 뒤에서 크나큰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는 제발 아무 남자라도 만나라고!"


언샤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을지는 알 수 없었다.


미리 숲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정 악사들이 비파와 거문고, 대금, 아쟁, 피리를 들고 일제히 정악을 연주하며 황제와 여신의 여로를 축복해 주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서울과 작별이다! 잘 있어라 망할 황궁아! 나는 이제 자유다! 나는 이제 존나게 자유롭다고!"


"언샤여. 긴장 좀 하거라! 지금부터 목숨을 건 여행길을 떠나는데 그렇게 애처럼 기뻐할 수 있는 건 세상에 그대뿐일 게다!"


한 사람은 고삐 풀린 개처럼 신나게, 나머지 한 사람은 그럴수록 불안하게.

황제와 여신은 그렇게 상반된 반응을 보이며, 여행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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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99 망할세계
    작성일
    21.05.29 22:22
    No. 1

    겨우 황제가 축제를 보러가는것도 반대하는 꼰대신하들은 3년에는 뭘했는지 모르겠고 3년만에 황제의 행동을 억압하려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니알아서.
    작성일
    21.05.29 22:35
    No. 2

    정당하신 지적입니다. 작중 신하들이 꼰대 같은 면모를 보이는 장면은 조선왕조의 암군인 연산군이 왕권을 이용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 시대 이후, 후대의 조선 왕이 조금만 유희를 즐기려 해도 연산군이 타락한 이야기를 들먹이며 왕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 했다는 얘기에서 따온 설정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인 언샤가 황제라는 자리에 앉았음에도 신하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음에 답답함을 느껴 황제라는 자리에 앉았음에도 버티지 못하고 자유를 추구하며 여행을 떠나게 되는 이유와 왕이 신하에게 휘둘리게 될 수도 있는 유교 사상의 부당함에 대해 다루는 장면인데. 그 부당한 부분에 대해 정확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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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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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문유관 7 - 개꿈의 반대말은 고양이 꿈 +6 21.05.27 48 1 29쪽
30 사문유관 6 - 세상 모든 힘 21.05.27 27 1 34쪽
29 사문유관 5 - 늘어선 세계 21.05.26 26 0 27쪽
28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21.05.26 28 2 25쪽
27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21.05.25 67 1 27쪽
26 사문유관 2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21.05.25 36 1 17쪽
»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2 21.05.24 43 2 24쪽
24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1 1 25쪽
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5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2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1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5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1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16 호질 16 - 거사 21.05.19 38 1 19쪽
15 호질 15 - 집 나간 탕아 21.05.18 45 1 38쪽
14 호질 14 - 하나밖에 없는 목숨 21.05.18 41 2 15쪽
13 호질 13 - 용의 꼬리 21.05.17 47 3 23쪽
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8 2 29쪽
11 호질 11 - 사사로운 인간사 21.05.16 47 2 17쪽
10 호질 10 - 나찰사냥꾼 21.05.16 47 3 27쪽
9 호질 9 - 해후 21.05.15 54 2 20쪽
8 호질 8 - 박제가 되어버린 여신을 아시오? +2 21.05.15 52 1 18쪽
7 호질 7 - 세상 끝의 불꽃 21.05.14 63 3 29쪽
6 호질 6 - 종이호랑이 21.05.13 144 4 37쪽
5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21.05.12 211 6 25쪽
4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21.05.12 134 6 23쪽
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3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5 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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