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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연재수 :
58 회
조회수 :
3,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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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글자수 :
62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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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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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3쪽

호질 13 - 용의 꼬리

DUMMY

7.


언샤는 그렇게 비구니와 헤어지고는, 해가 지면서 땅거미가 깔린 어두운 마을에서 소녀와 함께 잠을 청할 곳을 찾게 되었다.


소녀는 지치지도 않는지 끈질기게도 언샤를 계속 쫓아다녔고.


그들은 쉴만한 주막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는 도중, 갑자기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언샤는 혹시나 귀신이 우는가 싶어 소름이 돋아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내 흐느끼고 있는 건 귀신이 아닌 그냥 평범한 인간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걷고 있던 건 마을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공동묘지였으니.


이제는 땅거미조차 남지 않고 어둠만이 짙게 깔린 마을 한 구석에서 어느 노파가 서럽게도 울고 있었다.


언샤는 왠지 그 처량한 모습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 그 노파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서럽게 우느냐고 물었다.


"네, 젊은 나으리. 저는 몇 년 전쯤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서 이곳 작은 마을로 이사 왔는데, 이 시골 마을은 그 목책이 낮고 치안이 형편없으며. 또한 '호랑이'의 영토와 아주 가까워······."


노파는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연신 기침을 계속 내뱉었다.


노파는 마치 몸 안의 모든 걸 내뱉기라도 할 듯한 아주 고통스러운 기세로 몸을 뒤틀며 계속 기침을 내뱉다가.

손바닥에 붉은 토혈을 잔뜩 적시고 나서야 기침을 멈췄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아, 죄송합니다. 보다시피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몹쓸 폐병에 걸려서 그만. 죄송하지만 다음에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보다시피 아주 튼튼해서 겨우 그 정도 병은 안 옮고. 내일이면 이 마을을 떠날 예정이거든요."


"아이고, 그 자신감이 부럽구먼요. 저도 나리처럼 젊었을 땐 세상 무서울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언샤는 병에 걸린 노파를 계속 말하게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기에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갔다.


"어르신, 이 돈이라도 받으시지요. 이 돈으로 의원을 찾아 좋은 약이라도 사드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언샤는 병자에게 이야기를 듣는 대가라며 돈을 내밀었지만.

노파는 돈 같은 건 아무 필요도 없다고 하며 대신 이런 부탁을 해서 죄송하지만 혹시 음식을 좀 나눠주는 온정을 발휘해 줄 수 있냐고 질문하였다.


"그게, 먹을 거라면. 이런 거라도 괜찮겠습니까?"


그건 언샤가 수라간의 숙수에게서 만들라 시키고 가져왔지만.

판테육을 먹느라 속이 아주 느끼해져 손 대지 않은 주먹밥(裹飯) 네 개였다.


소금 간이 되어 있기에 하루 종일 갖고 다녔음에도 딱히 쉬거나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오. 흰쌀밥이라니. 나리. 정말, 이 미천한 노친네에게 이런 귀한 걸 주셔도 되겠습니까?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까?"


"아니 그냥 주먹밥인데요."


언샤가 주먹밥을 주자마자 노파는 그 자리에서 주먹밥 하나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더니.

나머지 셋은 마치 신줏단지를 모시듯 소중히 품 속에 집어넣었다.


"어, 그게. 다 안 드시는 겁니까?"


"나머지는 집에서 기다리는 손주들한테 줘야지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리."


노파는 주먹밥을 먹고 기운이 좀 났는지 자주 기침을 내뱉어 쉴 대로 쉰 목소리는 그대로지만 그럼에도 아까보다 훨씬 원기가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샤는 이 노파가 왜 고작 주먹밥 따위에 이토록 크게 감사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다가.

이내 시장에서 배급을 받고 있던 수많은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으므로 대충 이유를 알 것만 같아졌다.


"어르신, 혹시 굶고 계신 겁니까?"


"네, 뭐. 그렇지요. 이 작은 마을에는 가뜩이나 밭과 곡식이 적은데. 그나마 있는 곡식들마저 군인들이 전쟁을 해야 한다며 다 사가 버리거든요."


"서울에 가면 배급이란 게 있어 거기에 줄만 서면 굶을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런 작은 마을에서 굶으며 사시는지요."


"하하, 나리.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그 서울에서 도망쳐 나온 게 몇 년 전 일인데. 그깟 배급 때문에 이제 와서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 같습니까."


노파는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이 왜 이곳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노파는 몇 년 전쯤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서 이곳 작은 마을로 이사 왔는데.

이 시골 마을은 그 목책이 낮고 치안이 형편없으며.

또한 '호랑이'의 영토와 아주 가까워 '호랑이'의 위세를 흉내 내며 호가호위하는 수많은 나찰들이 목책을 넘어와 사람들을 죽이는 곳인 것인 게 노파가 서럽게 우는 이유라 했다.


그래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지난 몇 년 사이에 처음엔 남편이 나찰에게 죽고.

몇 달 전엔 첫째 아들이 나찰에게 죽고.

며칠 전에는 첫째 손자가 나찰에게 죽었다고 했다.


자신의 소중한 가족들이 그렇게 죽어나가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노파는 말했다.


언샤는 이를 딱하게 여겨 자신이 돈을 내줄 테니.

살아남은 가족들끼리라도 성벽이 높고 사람이 많아 나찰의 위협으로부터 그나마 안전한 서울로 돌아가 살라고 했다.


그러나 노파는 그건 싫다고 했다.


언샤가 그 이유를 묻자.

노파는 자신의 가족들은 서울의 왕이 행하는 가혹한 정치가 싫어 이 시골로 내려온 것인데.

아무리 나찰의 왕 '호랑이'가 두렵다 해도 어찌 그게 인간 왕의 폭정보다 무서울 수 있냐고 했다.


"옛말에,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두렵다.'라는 말이지요. 나리, 작금의 현실이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비록 이곳에서 나찰들에게 죽는 일이 있더라도. 저 더러운 왕의 밑에 들어가 살고 싶진 않아요."


언샤는 그 얘기를 듣고는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이번에도, 목숨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나는 이들 모두가 그랬다.

모두들 목숨 따위, 자존심과 명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고작 목숨 따윌 자존심보다 소중히 여기는 언샤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어느 한 쪽은, 완전히 틀린 게 틀림없었다.


언샤는 노파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며.

노파가 한사코 거절하는 데도 줄 수 있는 게 돈밖에 없었으므로 약 값으로 쓰라며 돈을 억지로 쥐여주고 도망쳤다.


물론 노파에게 돈 같은 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노파 역시 많은 돈을 황실에서 받았음에도 여전히 굶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을 테니.


"언샤여. 이젠 스스로에 대한 변명조차 하지 않는구나. 슬슬 돌아갈 마음이 들었느냐."


"아니, 내가 저 노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그냥 어이가 없어서야. 저런 평범한 노인까지 전부 다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겠거든."


"그래. 그대는 꼴에 황태자니. 저 황궁에서 다른 건 몰라도 목숨만큼은 잘 건사하고 살아왔으니. 자신이 유일하게 가진 게 목숨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이 대륙에 목숨 같은 건 아무 가치도 없노라."


"왜? 왜 그럴 수가 있는데? 사람이 목숨 말고 가진 게 뭐가 있다고?"


"그야, 고통스럽기 때문 아니겠느냐. 이 세계가 살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기 때문 아니겠느냐. 사바세계의 모든 것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데, 누가 이런 곳에서 고통스러울 뿐인 삶을 이어나가고 싶겠느냐."


"······시끄러. 그래도 나는. 이 망할 나라를 벗어나서 어딘가에는 있을 내 자유와 행복을 찾아내고 말 거야."


"그래. 마음대로 하거라. 단언하건대 이 대륙 어디에도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친 황태자인 그대가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장소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여신은 너의 허망한 꿈을 응원해 주도록 하겠노라."


언샤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주막 혹은 숙소, 객잔 등 무엇이든 좋으니 밤을 보낼 만한 장소가 없는지 계속 찾아다니며 마을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잠시 후 마을 한가운데서 눈에 익은 3명의 갑사들을 보게 되었다.


카스피, 아무르, 아모엔시스.


언샤와 지난 원정에서 3달간 같이 지냈던 갑사들이었다.

모두 무장하고 창을 들고 있는 걸로 보아, 그들은 이곳 작은 마을을 경비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언샤는 그들이 자신을 혹시나 알아볼까 싶어 그들을 피했지만.

거대한 덩치의 언샤가 이토록 작은 마을에서 그들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 거동수상자. 왜 우리들을 보고 갑자기 피하는 거지?"


순찰 중이던 세 명의 경갑사 중 한 사람인 아무르가 말했다.


"아, 아무르, 지난 며칠간 잘 지냈나?"


언샤는 들켰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응? 넌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군. 거수자놈. 갑자기 아는 척한다고 해서 의심을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황제의 칼날인 우리 경갑사들은 그리 쉽게 속일 수 있는 자들이 아닌······."


하지만 아무르의 반응은 정말로 예상외였다.

3달간이나 같이 지냈는데, 얼굴도 못 알아 본다고?


"아니, 아무르 자네. 나를······ 못 알아보는 건가?"


"······? 어느 집 귀한 자식인 줄 모르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아볼 것이란 착각에 빠졌다면 이런 데서 서성이지 말고 의원에나 가보는 게 좋을 걸세. 마음이 아픈 데에도 듣는 약이 있다더군."


"아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참으로 기가 막히네. 지난 3개월 동안 매일 같은 천막 아래에서 잤으면서도, 나를 못 알아본다고?"


"······? 너도 경갑사인가? 그럼 그런 실없는 소리나 하지 말고 계급과 관등성명을 밝히는 게 어떤가."


언샤는 아무리 언질을 줘도 도저히 자신의 얼굴을 기억 못 해내는 그에게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되었지만.

괜스레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도망쳐서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아, 황태자 전하 아니심까. 어서 옵셔. 이런 곳에는 대체 무슨 일로 오셨슴까? 산보라도 나오신 검까?"


그때 그들 중 한 사람인 카스피가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언샤는 아무르가 '황태자 전하'라는 그 단어를 듣고, 아무르의 얼굴 혈색이 아슬란족의 두터운 털 밑으로도 붉으락푸르락 바뀌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그리고 아무르는 언샤가 예상한 것 중 가장 최악인 반응을 보였다.

길 한가운데에 납작 엎드려 절을 하며 자신이 잘못했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쉿, 쉿,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말고. 조용히 해."


도망자 신세인 언샤는 주목받아서 전혀 좋을 게 없었기에 혹여나 다른 갑사들이 이 광경을 보게 될까 두려웠다.


"아무르, 그렇게 호들갑 안 떨어도 돼! 태자 전하는 엄청나게 좋으신 분이라 겨우 그런 걸로 화내거나 하시진 않는다고!"


"말은 참 고마운데, 제발 카스피 너도 좀 조용해줄래?"


"넵, 알게씀다! 태자 전하!"


그렇게 대답하는 카스피의 목소리는 아주 또랑또랑해 그 마을에 있는 모든 이가 들을 수 있을 수준이었다.


결국 언샤는, 운 좋게도 친한 갑사인 카스피를 만나 경갑사들이 지내고 있는 작은 병영에서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도망자인 언샤가 나라의 시설을 이용하는 건 참으로 웃긴 일이었으나.

평범한 경갑사인 그들이 벌써부터 그가 황태자 자리를 포기하고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기에.

또한 당당하게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수상하게 행동할 경우 괜히 의심만 살 뿐 남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언샤는 결국 카스피와 아무르가 머무르던 2인실에서 아무르를 쫓아내고 대신 그곳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전하! 반갑습니다! 다시는 못 뵐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서 뵐 날이 올 줄이야!"


방의 침대에 앉아 언제 자신이 도망쳤단 사실을 들킬지 몰라 안절부절하던 언샤가 있는 방으로, 카스피가 그렇게 소리치며 들어왔다.


"제발 그놈의 전하 타령 좀 그만하면 안 되겠니. 그리고 뭐 얼굴 본 지 며칠 지났다고 그리 호들갑이야."


"그치만 수백 명이 있는 군 천막에서 전하를 뵙는 것과, 이렇게 둘이서만 얘기하는 건 완전 느낌이 다르지 않슴까. 그것도 황궁도 아닌 이런 작은 마을 한가운데서 만나 뵙다니, 그야말로 운명이라는 게 느껴지시지 않슴까?"


카스피는 마치 연극을 하듯 과장된 톤으로 실실 웃으며 자신이 기쁘다는 걸 내보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좋은 녀석이었다.


모든 행동과 표정에서 오롯이 자신이 아닌 상대를 우선시할 수 있는 천성을 타고난 몇 없는 인간.


일부러 바보를 흉내 내 타인을 즐겁게 만드는 것 하나에 인생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사람.


"아니, 애초에 그냥 우연히 만난 건데 운명이고 뭐고 자시고 할 게 있겠냐고."


"그래서 그 작은 루카족 아이는 대체 무얼 하시는 분입니까? 어느 관리분 자제이신가?"


"아, 나는 여신 루카······."


언샤는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여신 루카라고 주장하는 그 소녀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냥 어느 관리 자제인데 어쩌다 보니 같이 다니게 됐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미쳤다.


군영을 습격해 거기서 말을 털어가는 건 어마어마하게 어리석은 행위지만.

카스피에게 부탁한다면 쉽게 말과 식량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미친 것이다.


"아, 근데 그것과는 별개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오, 저밖에 할 수 없는 임무라니!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지요! 그래서, 무엇임까 전하. 저는 전하께서 시키신다면 저 천산의 설련도, 불로초도, 용연향도, 저 하늘의 별조차도 따내려고 노력은 해 보이겠슴다. 그런 걸 찾으러 갔다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겠지만서도!"


"그런 거창한 건 필요 없고. 말이랑, 식량이 필요한데. 구체적으로 나 같은 거인이 타도 버틸 만큼 튼튼한 군마 한 마리랑 쌀 두 포대랑 냄비 하나 정도."


"말과, 식량이라니. 설마······."


그 말을 들은 카스피는, 방금 전까지 만면에 가득하던 웃음을 싹 지워버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벽한 무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단 몇 초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네, 물론. 그 정도는 아주 쉽게 내어드릴 수 있지요. 그런데 태자 전하, 외람된 말이오나. 이 시간에 황궁이 아닌 밖에 있으며, 그리고 구하시는 것이 말과 식량이라니. 혹시, 이 나라 밖으로 도망치시려는 것입니까?"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추측이었다.


물론 카스피가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는 근거야 아주 여러 가지가 있었다.


언샤가 지난 3개월간 갑사들과 여행하며 보인 여행과 표정, 그리고 그 표정에 감춰져있던 여러 내면의 목소리.


며칠 전 좌의정이 죽고 그 상주로 황태자가 나왔던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곳에 황태자가 호위 하나 없이 이상한 여자아이와 있다는 사실.


그 모든 걸 종합하면 결론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말과 식량을 갖고 도망칠 예정이다.


"그래, 아주 정확해. 나는 도망칠 생각이야. 이제 이 광대만도 못한 황태자 노릇을 하는데 아주 질려버렸거든. 서울도, 황궁도, 사람들도, 아주 지긋지긋해. 실망스럽지? 한심하지?"


"······."


"거기에 황태자를 그만두고 도망칠 생각이면서 결국 말도 식량도 도저히 못 구하니, 자신의 있지도 않는 권위를 이용해서 죄 없는 말단 관리에게 말 내놔라, 식량 내놔라, 하고 아주 상전 노릇을 하고 말이야. 그런데 진짜 미안하지만. 나는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라, 카스피 네 선의에 기대서 황태자 때려치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을 좀 하는 것이 거든. 그러니까 내 마지막 부탁 좀 들어주라."


언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쓰레기 같은 발상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아니라면 안전하게 말과 식량을 구할 방법이 전혀 없었으니.


만일 체면이, 자존심이 밥을 먹여준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지만.


이미 더 잃을 명예도 뭣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버러지가 될 예정인 언샤 입장에서 황태자란 이름은 그저 아주 쉽게 엿 바꿔 먹을 수 있는 좋은 깡통 정도에 불과했다.


승병과 같이 여행을 다니면 되는데도 굳이 말과 식량을 구하는 이유는 뻔했다.


솔직히 말해, 언샤는 저들 승병들과는 더는 같이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타인을 위해 여행하는 이들과 같이 몇 개월이나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언샤에게 끝없는 죄책감만을 줄 뿐인 괴로운 경험이 될 테니.


언샤는 말과 식량을 빌려 혼자 여행하는 것으로 저 승병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언샤의 어처구니 없는 발언에 이어지는 카스피의 반응은, 참으로 보통 사람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태자 전하. 도망치실 생각을 하시다니! 황제 폐하께 살해당한 모든 사람들이 겨우 그 생각 하나를 못해서 아까운 목숨을 날려버렸었는데!"


"뭐?"


"역시 태자 전하는 대단하신 분이에요! 세상 모든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름, 자신의 아집 단 하나를 내려놓지 못해 대체 얼마나 무의미하게 개죽음을 해왔는지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요! 관직, 권세, 돈, 명예. 그 모든 게 목숨 값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천만금을 주더라도 죽은 사람의 목숨만큼은 절대 살 수 없는데! 그깟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 그 단순한 진리를 잊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많은지!"


카스피의 사고방식은 언샤가 지금까지 바깥세상에서 만나본 수많은 사람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깟 목숨은 자존심과 명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 자만큼은 언샤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 목숨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샤는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면서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가진 카스피와 한참 동안이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이내 카스피는 참으로 신기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카스피는 그 내면에 참으로 많은 걸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가 반천제를 통해 제국의 모든 차별과 노예제를 폐지하고 그들 모두에게 진정한 인권과 자유를 줬는데.

그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도 했으며.


모든 걸 갖고 태어났으나 그럼에도 스스로 이룬 게 아무것도 없어 그 무엇도 아닌 자리인 황태자를.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나태함만이 남은 그 자리에 앉기를 원한다고 했으며.


그렇기에 그 황태자 자리조차 버리고 내려올 수 있는 인간.

태어나자마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완성된 황태자란 나태한 자리에 태어났음에도 그 자리를 버릴 수 있는 인간은 진정 위대한 인간이라는 말도 했으며.


지배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는 위업을 이룬 건 오로지 아슬란 신이나, 메가스 대왕 정도밖에 없었다는 얘기.


그리고 그러한 대업을 이루며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하는 자.

목숨이 자존심보다 더 소중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아는 자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얘기도 하였다.


그는 괴짜였으나, 그럼에도 타인에게 끝없는 존중을 바치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샤 같은 멍청한 겁쟁이도 아무렇지도 않게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카스피. 내가, 뭘 어쩌면 좋을까. 나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세상은 내게 그 목숨을 걸고 황제에게 맞서라 하고. 나는 그저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치려고 밖에 나왔던 것뿐인데. 그곳에서 만 백성들의 삶이 끝도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그곳에 어떤 행복도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어버렸어. 내 고난은 타인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고통이란 걸 알게 되어버렸어.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계속 도망치려 하고 있고. 그런데도 너는 그러한 죄악을, 나의 공포를, 내 도피를 어떤 비난과 질책도 없이 그저 긍정해 주기만 하는구나."


"전하, 전하께서 그러한 질문을 제게 몇 번이고 하시는 일이 있게 되더라도 저는 그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삶을 불태우십시오. 도망치십시오. 굶주리십시오. 맞서십시오, 살아남으십시오. 너무나 충족되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황태자의 이름 따윈 내다 버리고, 저 황야로. 아무것도 없는 나찰들의 땅으로 떠나십시오. 그게 당신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들어줄 테니."


"고마워, 고맙다. 그렇게 말해주어서. 궁에서 살며 수많은 사람들과 스치듯 지나왔으나. 나를 긍정해 주는 존재, 나의 내면을 봐주는 존재, 내가 옳다고 말해주는 존재는······. 죽은 형을 제외하곤, 네가 처음이었어."


언샤는 그렇게 말한 후, 카스피에게 다음날 말과 식량을 받아낼 약속을 받아냈다.


"그게, 너같이 좋은 녀석에게. 그런 나쁜 짓을 시켜서 정말 미안하다."


"괜찮슴다. 이깟 횡령 정도야 안 들키면 만사형통이고. 만약 들켜도 기껏해야 엉덩이로 곤장 5대쯤 맞고 끝나겠죠. 몇 달은 후유증으로 고생하겠지만 그 정도론 안 죽슴다. 태자 전하의 목숨이 제 엉덩이보단 몇 십 배나 더 중한걸요."


"그놈의 전하, 전하, 이젠 그딴 거 때려치울 거니 그냥 언샤라고 불러."


"아뇨, 감히 그럴 순 없지요. 한번 태자는 영원한 태자, 전하는 제가 죽는 날까지 모셔 보이겠슴다."


"죽는단 소리 말라고. 나보다 오래 살란 말이야. 나는 당장, 내일부터 수많은 나찰이 들끓는 사지로 나갈 예정인데, 그런 사람 앞에서 먼저 죽는단 얘길 하면 쓰나."


그렇게 다음 날, 언샤는 이제 말을 구했으니 더는 그들과 같이 갈 이유가 없다며 승려들과 헤어졌다.


수자타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거라며.

이렇게 쉽게 헤어져서 아쉽다는 얘기를 남겼다.


그리고 언샤는 이미 작별 인사를 했는데 괜히 말을 타고 가다가 그들을 따라잡게 되어 불편한 존재들인 승려들과 또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다음 마을로 향할 길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들과 충분히 거리가 멀어진 만 하루가 지나서 다시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 바보 멍청이 황태자는, 고작 도망치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최악의 결말을 맞게 된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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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21.05.26 29 2 25쪽
27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21.05.25 67 1 27쪽
26 사문유관 2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21.05.25 36 1 17쪽
25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2 21.05.24 43 2 24쪽
24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2 1 25쪽
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6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3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2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6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2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16 호질 16 - 거사 21.05.19 39 1 19쪽
15 호질 15 - 집 나간 탕아 21.05.18 45 1 38쪽
14 호질 14 - 하나밖에 없는 목숨 21.05.18 42 2 15쪽
» 호질 13 - 용의 꼬리 21.05.17 48 3 23쪽
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9 2 29쪽
11 호질 11 - 사사로운 인간사 21.05.16 47 2 17쪽
10 호질 10 - 나찰사냥꾼 21.05.16 48 3 27쪽
9 호질 9 - 해후 21.05.15 54 2 20쪽
8 호질 8 - 박제가 되어버린 여신을 아시오? +2 21.05.15 52 1 18쪽
7 호질 7 - 세상 끝의 불꽃 21.05.14 64 3 29쪽
6 호질 6 - 종이호랑이 21.05.13 144 4 37쪽
5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21.05.12 211 6 25쪽
4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21.05.12 136 6 23쪽
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4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6 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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