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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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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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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DUMMY

12.


모든 싸움이 끝났음에도 기나긴 밤은, 아직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를 않았다.


기절했던 파르다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의관을 불러 응급 처치를 했다.


독 때문에 황제의 공격이 약해져있던 건지, 아니면 자신의 딸에 대한 온정이었는지 부상은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다.


언샤와 파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언샤는 당연히 이 모든 계획을 주도하고 계획을 이끌며 심지어 왕을 독살하는 데에까지 성공한 누이야말로 황제에 올라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황녀의 추종자들 역시 그렇게 말했으나.


그러나 파르다는 언샤의 팔을 붙잡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신하들을 향해 그 팔을 올려 하늘을 향해, 백성을 향해, 여신을 향해 외쳤다.


알 실라의 새로운 황제, 설련황(雪蓮皇) 언샤가 황제의 유일한 적통인 황태자로서, 황제의 인정을 받아 그 황위를 계승했노라고.


알 실라 제국은 여러 종족이 편입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본래는 아슬란족의 나라. 그리고 아슬란족은 용기의 신 아슬란의 자식들. 그렇기에, 그 황위에 오르는 건 가장 강하고 용기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그리고, 이에 불만이 있는 자, 자신이 더욱 황제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자, 판테라가 옳다고 생각한 자는 모두 지금 이 자리에서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의견을 말하라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도 없이, 새로운 황제에게 네 번의 절을 올리고, 자신들의 새로운 군주로서 맞이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수많은 관리들이 고작 두 사람의 싸움 때문에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호압궁을 보며 망연자실해 있었다.


황녀는 알 실라의 황궁은 비록 무너졌으나, 건물 따윈 다시 지으면 그만이라며 그들을 독려했다.


황녀는 이제부터 지어질 새로운 건물들은 앞으로 설련황이 이룩할 태평성대의 첫 초석이 될 것이라 말하며, 궁궐 사람들을 최대한 모아 황궁을 바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정확히 무엇을 할지,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할지 세세히 명령하고 분배하여 분란이 없도록 처리했다.


완벽한 행정 능력이었다. 참으로, 언샤는 따라갈 수가 없는 재능이었다.


그리하야 어수선함이 조금 정리되고 나자, 파르다 황녀가 언샤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마지막에 언샤 너를 죽이지 않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 걸까?"


"그야 독 때문 아니겠어? 몸이 마비되어서 더는 못 움직인 게 아닐까?"


"글쎄, 나를 한쪽 팔로 날리고, 겨우 몇 초밖에 안 지났는데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리가······. 거기에 한 시진동안 싸우고 나서야 겨우 독 효과가 돌았는데 과연 겨우 몇 분 얘기한다고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독효가 심각해졌을까?"


"그럼 뭐, 나한테 일부러 패배했다는 말이라도 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잖니."


"왜? 어째서? 그럴 이유가 대체 어딨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걸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인간의 길을 한참이나 벗어난 괴물이야. 자신의 친아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인간이라고. 그런 것에 인간다운 마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언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죽인 존재가 남기고 간 허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그건 당장에라도 다시 일어나 또다시 분노를 내뱉을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역시 죽은 자가 다시 움직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언샤는 그 시체가 마지막에 남긴 말, 자신의 시체에는 침을 뱉더라도 호원의 원통함만은 기억해 달라는 말이 생각났다.


"······아니다. 인간이 아니란 소리는 취소할게. 나도 이제 저 인간이랑 하등 다를 게 없는 살인자가 됐으니. 그것도 황위가 탐나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세상에 둘도 없을 패륜아가 돼버렸으니. 내가 저 사람을 비난할 자격은 없어진 거겠지."


"동생아, 그렇지도 않단다. 왕실에서 그 자식이 왕을 죽이고 반정에 성공해 왕이 되는 건 흔한 일이니까. 우리가 패륜아인지 아닌지는 역사가 평가해 줄 거고, 우리 세대의 일이 아니니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니, 나는 패륜아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난 며칠 사이에 남 평가 같은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됐거든."


"그래, 그렇게 생각하렴. 그럼 우리는 이제 세상에 둘도 없을 불효자가 돼버렸구나."


그렇게 모든 사건이 끝난 감상을 나누고 나서는, 문득 언샤는 한 가지 의문이 들어 누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나, 아버지의 시체는 어쩔 거야?"


"아, 원래 계획대로라면 진짜로 우리가 화신을 죽이는데 성공하면, 시체는 그냥 불태워서 그 유골을 바람에 날려버리려 했는데. 나도 어쩜, 좀 동정심이라는 게 드나 봐.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하지? 그래서 그냥 화장한 뒤에, 어머니의 그 낡은 적삼과 함께 나만 아는 장소에 묻어버리려고. 패호황은 추종자가 많았으니. 무덤 위치가 어딘지 알면 추종자들이 몰려와서 온갖 난리를 다 칠 테니."


"위치를 비밀로 한다고? 나한테도 안 알려주려고?"


"너처럼 입이 가벼운 애한테 알려줬다간 새어나갈 게 뻔하지 않니."


"그래, 그렇지. 맘대로 하셔."


파르다는 언샤의 싱거운 대답을 듣고 한 번 허탈하게 웃고나서는, 그를 향해 심하게 다쳤으니 이 소란스러운 곳에 계속 있지 말고 어디 가서 좀 쉬라고 말했다.


언샤는 그 말을 듣고 태자궁에 돌아가려 쉬려다가, 태자궁이 완전히 박살 나 그곳엔 와륵밖에 남지 않았단 걸 깨닫고는 태자궁에서 쉬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언샤는 누이를 향해, 저 태자궁은 원래부터 허물고 저기다가 히르형의 묘소를 만들려 했으니, 부서진 태자궁 자재 중 괜찮아 보이는 것들은 다른 건물을 재건하는데나 쓰고 다시 지을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샤는 그다음에 아까 전부터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은발의 여신, 루카의 손을 잡고는 혼자서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냐며 한 번 핀잔을 주고 나서는.


그 작은 소녀를 데리고, 궁궐 밖으로 나섰다.


이런 어수선한 때에 궁궐의 정문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에 두 사람은 아주 쉽게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언샤는 천천히 걸어 소녀와 함께 호압궁을 둘러싸고 있던 앞산 언덕 위로 갔다.


벌레가 울고, 하늘에는 별이 흘러넘쳐 세상을 뒤덮을 듯했으며, 선선한 바람이 부는 풀밭은 20년 전 그날과 아주 똑같았다.


언샤는 그곳에, 피투성이의 몸을 뉘었다.


루카는 비록 그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으나, 저고리는 갈가리 찢겨있었고 기껏 만든 댕기머리 역시 머리가 잘려날아갔을 때 생머리로 풀려버린 지 오래였다.

또한 온몸이 먼지와 흙투성이였기에 상처만 없을 뿐 똑같이 비참해 보이는 몰골이 된 건 언샤와 마찬가지였다.


"화신의 육체는 굉장하구먼. 그렇게 크게 다쳤었는데 벌써 다 나았어."


언샤는 그냥 순수하게,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감상을 말했을 뿐이지만, 여신은 아무래도 의문스러운 모양이었다.


"언샤여, 왜 갑자기 나를 끌고 이 언덕으로 오자고 하였느냐?"


"······그냥 좀 쉬려고. 내 방은 완전히 부서졌고, 사실 거기 싫어해서 그딴 곳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여기만큼 편한 곳이 없겠다 싶었거든."


"그렇구나, 궁이 부서져서 참으로 유감이로구나."


"아냐, 유감은 무슨. 저딴 궁 따위, 다시 지으면 그만이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이름도 바꿔버리자. 호랑이가 사는 성인데, 호랑이 누른다는 뜻인 호압궁이 뭐냐고 대체."


"아니, 그냥 그대로 두거라. 이 여신이 살던 시대부터 계속 이 땅에 있던 호압사 이름에서 따온 것이지 않느냐. 그곳은 나의 낭군 아슬란이 우주로 떠났다고 전해지는 장소, 그 이름과 의미를 계속 이어온 수천 년의 전통을 고작 그대의 변덕 하나로 없애버려선 안된다."


"변덕이라······. 지금 내가 여기 살아서 너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단순히 황제의 변덕 때문인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리 있겠느냐! 그대는 이 여신이 직접 선택한, 진정한 아슬란의 화신이다. 그대는 저런 거짓 천자, 거짓 화신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야. 그대는 판테라보다 더 강한 존재였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하하, 이 여신님은 나 같은 겁쟁이가 대체 뭐가 마음에 들었길래, 나 같은 놈을 그리도 굳게 믿어주시는 거래?"


"아, 당연히 합당한 이유가 있다. 아깐 설명할 게 많아 말하는 걸 잊었지만. 그대는 이 여신의 낭군인 아슬란과 정말, 정말 많이 닮았다. 처음 천리안으로 그대의 모습을 봤을 때, 참으로 놀랐었지."


"그게 이유야?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서? 방금 전에 우리 누나가 아버지한테 자기는 어머니의 대체품에 불과한 존재라 사랑 같은 걸 받지 못했다는 말을 하던 걸 들은 직후라 그런지 좀 기분 나쁜데."


"그 정신병자와 같은 거짓 천자와 나를 같이 묶어서 취급하지 말거라. 내가 그대를 아슬란의 대체품 같은 걸로 생각할 리가 없지 않으냐. 애초에 그대는 모든 면에서 우리 낭군님의 반에 반도 못한데 어떻게 대체를 할 수 있겠어."


"아, 그러시겠죠. 난 화신이 되어도 그 권능 하나 제대로 못쓰는 반푼이니까."


"뭐, 그리고. 누군가와 닮았다는 이유로 호감을 가지는 게 꼭 잘못인 게냐? 누가 그럼 안된다고 정해 두기라도 했느냐? 나는 기억 대부분이 날아가서 낭군님과의 소중한 기억 이외엔, 나를 나라 믿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갈기 갈기 찢어진 기억,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아슬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아주 굳건한 것이었다. 사랑의 여신이 사랑을 행동 원리로 하여 움직이는 것에, 대체 무슨 모순이 있단 말이냐?"


"그래, 그래. 좋겠네. 아슬란신은 지금쯤 아마 다른 나선성신들과 같이, 우주 어딘가에서 위대한 열두 가치를 퍼뜨리고 있겠지. 네가 아슬란신과 다시 만나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젠가 다시 저 우주로 떠나 아슬란을 다시 찾을 것이니라. 이 지구에 사는 나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날이 오는 그날에."


언샤는 여신의 그 말을 듣고, 저 흘러내릴 듯한 별을 올려다보았다.


20년 전 그날, 형이 분명 말했었지.


다른 나선성신은 모두 자신들이 온 우주로 다시 떠났으며, 여신 루카만이 인간들을 걱정해 이 지구에 남았노라고. 그리고 우주는 너무나도 넓어, 그곳에서 한 신을 찾는 것은 무한한 시간이 있더라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그리고, 형과 나눈 약속도 기억해 냈다.


언젠가 두 사람이 모두 다 어른이 되면, 자신을 만들어준 신들과 우리 인간들을 위해 지구에 남았다는 여신 루카를 찾아서, 이러한 아름다운 세상과 자신들을 만들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자고.


그렇게 감사 인사를 하자고.


"그, 루카. 그게. ······고맙다."


"응? 왜 갑자기 맥락도 없이 감사를 올리는 것이냐?"


"아니, 그게. 고마운 일 많잖아. 오늘만 해도 네 축복이 없었다면 감히 황제에게 덤비지 못했을 거고, 네가 몽환포영의 능력에 대해 알려줘서 그걸로 황제의 본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거고. 고마운 일쯤이야, 아주 많지. 넘치도록 많지. 그냥, 전부. 고마워······."


"흠. 아까 전까지 그렇게 내가 여신이란 걸 부정하더니, 이제는 내 충실한 신도가 되어 감사 인사를 올리다니. 참으로 줏대가 없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렇기에 더욱 마음에 드는구나. 역시 이런 맛에 사람들을 돕는 사랑의 여신이란 걸 하는 법이겠지."


"아니, 네 신도가 된 적은 없는데······."


"됐고, 그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황제이자, 진짜 천자이자, 이 루카신을 모시는 제사장인 것이다. 이제부터 종묘제례는 있을 수 있는 한 가장 화려하게 실시하도록 하고. 연등회와 팔관회도 최대한 성대하게 치르도록 하고. 황궁 한가운데에 황금으로 된 거대한 루카 여신상을 하나 만들도록 하고. 그 외에도 앞으로 그 권력을 써서 이 여신의 위업과 아름다움을 널리 퍼뜨리는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말도록."


"싫어요······. 백성들 혈세로 그런 짓을 했다간 내 밥에도 매일 같이 독이 들어가게 될 거야······."


"그럼, 이왕 황제가 되었는데, 이 여신을 섬기는 것 말고 대체 무엇을 할 것이냐."


"몰라. 무얼 하면 좋을까. 화신은 늙지 않으니까, 옛날부터 당연히 판테라가 영원히 황제이며. 나는 그냥 늙어죽는 게 일일 줄 알았는데. 미래 같은 거, 꿈같은 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갑자기 나도 꿈이란 걸 꿀 수 있게 되었네."


"그래, 언샤여. 꿈을 꾸거라. 나는 그대들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으니, 꿈꾸지 않는 인간만큼 시시한 건 없다."


언샤는 그렇게 누워서, 많은 생각을 했다.


죽은 형, 이 세상을 바꾸자고 말해준 누이, 서울 거리에서 만난 자신의 할아버지, 가혹한 정치 아래 사느니 죽는 게 낫다던 병든 노파, 언샤의 모든 걸 긍정해 준 갑사, 아마 자신의 외사촌일 터인 비구니.


언샤가 변화할 수 있도록,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바꾸려 했으나 결국엔 바꾸지 못한 사람을, 한 명 생각해냈다.


이제는 재가 되어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될, 그럼에도 수많은 존재를 죽여온 죄인인 판테라 황제를 생각해냈다.


그는, 태평성대를 이루고 싶어 했다. 그 과정이 아무리 뒤틀리고, 잘못됐어도. 그가 최초로 가졌던 그 생각 자체가 틀리진 않았다고. 그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이며, 아무리 부정해도 자신의 절반은 그 인간으로 되어있다고.


그리고 자신은 어떤 정당성과 정의를 주장하더라도 결국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황좌에 앉은 살인자이자 패륜아. 자신이 폭력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그 원죄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사람을 죽여도 괜찮은 이유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을 바꿀 수 없어. 그건 화신이나, 왕, 황제라도 마찬가지야.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나, 다른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주는 것뿐.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변화할 때까지, 최대한의 인내를 갖고 믿고 기다려주는 것 정도. 판테라는 확실히 악인이었지만, 마지막 순간. 무언가 변했지. 스스로 무언가를 깨닫고 변화한 거야. 다른 존재가 된 거야. 그의 죄는 결코 용서 못 할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유언을 들었으며, 그것을 들을 이유가 있던 건 우리 남매들 뿐이었지."


"언샤여, 그런 자식을 동정하는 것이냐."


"동정 안 한다고. 그가 행한 반천제는 무엇보다 끔찍하고 이 세상에서 다시는 있어선 안될 일이었으며,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옛말을 그대로 실현한 것만 같았지. 하지만 그래도 내 아버지야.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가는 쓰레기라도 내 아버지라고. 나는 그 근본을 부정할 수 없고. 나는 그 자식으로서 그자의 죄와 아무 관계없는 깨끗한 인간인 척, 나는 죄인이 아닌 척하는 건 절대 불가능해. 그러니 나는 나의 속죄이자 대속으로서. 나의 태평성대를 이룬다. 그게 내 소원이야. 아까 말했잖아? 판테라를 죽이면 소원을 하나 이뤄주겠다고."


언샤는 자신의 나쁜 머리를 최대한 쥐어짜내서, 나름대로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아까 전 여신이 판테라를 죽이는 자의 소원을 이뤄줄 것이라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기에, 자신의 새로운 꿈을 소원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해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옆에 누워있던 루카의 표정은 아주 경악에 가득 찬 것이었다.


"뭐!? 태평성대라고? 너도 판테라놈처럼 사람들을 잡아다 죽일 것이냐!"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아니라고! 아버지의 방식 대로가 아니라. 내 방식대로! 나는 어떤 부조리도 고통도 없이, 그저 평화와 사랑, 그리고 서로 간의 상호 이해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을 환경과 긴 시간을 주는 것으로. 태평성대를 이룰 거야. 그게 내 소원이야."


"아, 그렇구나. 나는 또 네가 그 판테라 놈과 본질은 똑같은 놈인 줄 알고 놀랐지 않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에 그런 미치광이가 두 명이나 있다면, 세상은 그날로 멸망해버릴 거라고."


루카는 언샤의 이번 대답은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엔 그 만면에 미소를 짓고 흡족하단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그 표정에 희로애락의 모든 것이 잘 드러나는 여신이었다.


"그래. 태평성대. 서로 간의 이해를 통한 태평성대라. 하하, 우습구나. 태평성대라는 건 아무리 화신이라 해도 한낱 인간에 불과한 네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하려는 거야. 오늘 인간에게 불가능한 걸 이미 하나 해냈어. 그렇다면,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가 이 목숨을 건다면, 또다시 똑같은 일이 가능하겠지."


"아니, 그대가 아무리 강한 화신의 힘을 가졌어도, 그대가 결국엔 인간인 이상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소원만큼은 불가능하도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신이라면. 그것도 우주에 있는 모든 신 중 가장 전능에 가까운 이 여신 루카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아주 훌륭한 소원이구나. 이 여신이 그 소원을 반드시 이뤄주마."


"뭐, 정말?"


"그럼. 주신 루카는 전지하며 전능한 존재. 그런 것쯤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이렇게 작고, 약해져있어서 말이다. 그러한 어려운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건, 내 몸을 다 되찾아 원래의 전지전능한 여신으로 되돌아갔을 때나 가능할 것 같다."


사실, 언샤는 미심쩍은 소원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루카가 그렇게 말하기 전부터 이렇게 될 것 같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럴 것 같더라! 완전 사기 계약서에 지장 찍은 기분인데. 그럼, 천수천안이랬던가? 그 천 개의 손이랑 천 개의 눈이란 걸 다 모으면 되는 거야? 모아야 되는 몸이 총 이천 개나 되는 건가?"


언샤는 그저 순수하게 물었을 뿐이었지만 루카는 혐오감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인간이 어찌 이리 멍청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언샤를 바라보았다.

언샤는 내심 조금 많이 상처받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 세상에 손과 눈이 천 개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으냐! 천수천안이란 건 단순히 전지하며 전능한 내 능력에 대한 비유일 뿐이로다. 내 몸은 이 머리까지 포함해서 총 12개로 나뉘어 흩어졌도다. 천리안을 사용할 수 있을 때, 그 위치가 대충 어딘지 파악은 해뒀었지. 내 머리는 이미 여기 있으니, 앞으로 11개의 신체를 더 모으면 되느니라."


"뭐야, 생각보다 쉽게 모으겠는데?"


"아니, 내 잘린 육체는 이 대륙 전체에 흩어져있다. 하나는 아예 이 지구의 최북단, 북극점에 있지. 행성의 최북단에서 적도 이남까지 이어질 정도로 거대한 이 대륙의 광활함, 그리고 대륙 곳곳에 가득한 저 나찰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괴물들을 생각하면. 절대 순탄한 여행이 되진 않을 게야."


"뭐, 될 대로 되라지. 난 이제 천하에 어떤 적수도 없을 화신이라 이거야. 권능이야 뭐, 연습하면 쓸 수 있게 되겠지. 거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망할 황궁을 떠나서 단 두 명이서 여행 다니는 게 꿈이었거든. 아주 좋네. 맘에 들어. 내 소원을 이뤄준다면야, 그런 몸 몇 개쯤 찾아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렇게, 두 사람은 별하늘 아래에서 소원을 나눴다.

각자의 가슴에 하나의 별을 품었다.


신은 아직 죽지 않았노라고,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그러한 맹세를 나누며, 그날 밤의 모든 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여명이 떠올랐다.


영원히 끝나지만 않을 것 같던 길고 긴 밤이 끝이 났다.



······또 옛날이야기.

이건 언샤가 시골 마을에서 나찰에게 죽임 당하는 사람들을 본 순간 떠오른 옛날이야기다.


형은 자신이 죽기 얼마 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동생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었다.


아슬란교엔, 미래의 신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해.


아슬란은 우주로 떠나기 전의 어느 날 자신의 가장 뛰어난 16명의 제자들을 모아 미래를 구할 영웅이자 신이 될 자가 없느냐고 물었어.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모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선 억겁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수많은 시간 동안 윤회하여, 모든 생마다 최대한 모든 이들을 구도하고, 이끌어야만 한다고 했지.


영웅이나, 새로운 신이란 얘기는 누구라도 혹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해탈하지 못하고 끝도 없이 중생을 구원해야만 하는 그 운명을 떠맡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섣불리 나서지 못했어.


그럼에도 제자 중 한 명, 아슬란신 다음 가는 용기를 가진 제자가 자신이 그 영웅이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러자 아슬란신은, 그의 용기를 높이 사 그가 반드시 미래를 구할 영웅이자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축복해 주었어.


그 후 그 제자는 그렇게 셀 수도 없이 아득한 윤회를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하고 있다고 해.


그렇게 56억 7천만 년이란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에 이르러서야 그 자의 혼은 우주의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하게 될 자격을 얻을 정도로 무르익어, 미래의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세상에 아직 도래하지 아니한 신, '미래불(未來佛)'이 될 수 있다고 전해져.


그 제자의 이름은 이미 잊혔지만, 미래불이라는 그 개념만큼은 세상에 널리 퍼졌지.


세상 모든 권력자들이 자신이 바로 그 미래불이 될 자라고 주장하게 됐을 만큼.


하지만 당연히 진짜 미래불은 아직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어.


진짜 미래불은 설법 한 마디에 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하고, 이 세상 모든 이와 서로 통할 수 있으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존재라고 전해지고 있으니 말이야.


나는 말야······ 그 미래불처럼 되고 싶어.


무력이 아닌 대화로, 진심을 나누며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인간.


미래불이라면 호랑이가 꾸짖으며 찍어누르지 않아도, 오로지 대화만으로 세상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서로가 존귀하다는 걸 깨닫도록 만들 수 있겠지.


그러니 내가 만약 황위에 오르면, 나는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싶어.


미래불과 같은 방법으로, 몇 번을 죽더라도 다시 태어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그런 방법으로 이뤄내고 싶어.


그러다 죽어도 괜찮아.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니까.


내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는 그 미래불과도 같이 끝도 없이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와 세상을 구하려 할 테니까.


형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기라도 한 듯, 그렇게 말했었다.


분명 그것이, 그가 죽음의 앞에 선 순간에도 의연하며, 죽는 그 순간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이유겠지. 다른 모든 이가, 또한 자신의 동생이, 자신의 유지(遺旨)를 이을 게 분명했으니.


······형, 저 하늘에서 보고 있어?


나 드디어 20년 전 그날 밤 한 약속대로, 루카신을 만나서, 고맙다고 인사할 수 있었어. 그리고 형과 함께는 아니지만, 정말로 어른이 되어, 두 사람이서 황실을 떠나 여행을 떠나게 됐어.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내가 여신을 만나고, 화신이 된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은 도저히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 확신이 드는 건, 내가 여신의 육체를 모두 모으고, 나의 소원을 이뤄 이 세상에 태평성대라는 걸 실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고, 형은 죽었으나 나는 살아남은 그 이유를 알게 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어.



서막 - 호랑이가 꾸짖다, 끝.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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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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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문유관 7 - 개꿈의 반대말은 고양이 꿈 +6 21.05.27 48 1 29쪽
30 사문유관 6 - 세상 모든 힘 21.05.27 27 1 34쪽
29 사문유관 5 - 늘어선 세계 21.05.26 26 0 27쪽
28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21.05.26 29 2 25쪽
27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21.05.25 67 1 27쪽
26 사문유관 2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21.05.25 36 1 17쪽
25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2 21.05.24 43 2 24쪽
»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2 1 25쪽
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6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2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1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5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1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16 호질 16 - 거사 21.05.19 38 1 19쪽
15 호질 15 - 집 나간 탕아 21.05.18 45 1 38쪽
14 호질 14 - 하나밖에 없는 목숨 21.05.18 41 2 15쪽
13 호질 13 - 용의 꼬리 21.05.17 47 3 23쪽
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8 2 29쪽
11 호질 11 - 사사로운 인간사 21.05.16 47 2 17쪽
10 호질 10 - 나찰사냥꾼 21.05.16 47 3 27쪽
9 호질 9 - 해후 21.05.15 54 2 20쪽
8 호질 8 - 박제가 되어버린 여신을 아시오? +2 21.05.15 52 1 18쪽
7 호질 7 - 세상 끝의 불꽃 21.05.14 64 3 29쪽
6 호질 6 - 종이호랑이 21.05.13 144 4 37쪽
5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21.05.12 211 6 25쪽
4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21.05.12 134 6 23쪽
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3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5 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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