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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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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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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DUMMY

2.

저녁.


언샤와 루카와 그들의 말은 주변에 풀 한 포기 나지 않도록 잘 정돈된 모래 바닥만이 가득한 인공적인 공터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당연히 그 끝없는 송림에 뜬금없이 작은 사막 같은 게 있어 모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장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공간은 모두 선황이 전쟁을 할 때에 병사와 갑사들을 숙영 시키기 위해 병사들을 시켜 그곳의 모든 나무를 베고 땅을 헤집고 다시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리는 소규모 토목공사를 하여 만들어진 공터였다.


끝도 없이 펼쳐진 송림 곳곳에 이러한 장소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천막을 치고 거기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언샤는 철골과 천을 이용해 간단한 임시 천막을 세운 뒤 주변의 소나무 가지 중 일부를 손톱으로 베어 장작을 만든 뒤 그것을 우물 정자(井)로 차곡차곡 쌓아올려 모닥불을 만들었다.


본래라면 비바람이나 들짐승에 의해 꺾여 떨어진 나뭇가지를 쓰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터이나.


이곳은 원래부터가 알 실라의 군대가 사용하던 숙영지였으며, 전쟁이 끝난지 한참 지난 지금도 용병이나 상인들도 이곳에 모여 야영하곤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떨어진 나뭇가지는 진작에 다 주워서 사용된 지 오래라 멀리 나가지 않고는 땔감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찰의 영토에서 어두운 숲속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건 목숨을 버리려는 행위나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가지를 직접 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샤는 그렇게 육체적으로는 쉬우나 정신적으로는 힘든 과정을 거쳐 불쌍한 소나무들의 가지들을 베어내 피어오른 아름다운 불꽃을 불쏘시개로 계속 쑤시며, 복잡한 기분에 잠겼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기에 그 불꽃은 아주 투명하며 그 색채도 연했으나, 그럼에도 신비롭게 일렁이며 타올랐다.


당연히, 언샤는 이곳에서 야영할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다면 아무 위협도 없었지만, 고작 두 사람이 이곳에서 야영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행위였으니.


그렇기에 첫날엔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바로 다음 마을에 도착해 그곳 관아에서 쉬려고 했으나, 그 계획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언샤가 사전에 미리 고려하지 않은 하나의 요소 때문이었다.


문제는 말(馬)이었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은, 몇 번이고 강조했듯이 분명 대륙에서 둘도 없을 훌륭한 명마였다.


한혈마, 아할 테케. 피와 같은 땀을 흘린다고 전해지는 대륙 제일 가는 명품종.


그러한 훌륭한 품종의 핏줄을 타고난 망아지를 황실의 마정(馬政)에서 근무하며 대대로 수많은 명마들을 배출해낸 목자(牧子)들이 엄청나게 세심한 주의와 정성을 들여 키워낸 이 한혈마였기에.


그 외모부터 범상치 않아 비단보다도 더욱 곱고 부드러운 황금빛 단색 털을 온몸에 두른 채 저녁노을을 받아 그 땀이 마치 황금 위를 덮어 물들인 붉은 피처럼 보이는 착시를 일으키는 그 특성 덕에.


한혈마는 다른 얼룩투성이인 평범한 말과는 전혀 다른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며, 그 아름다움은 동화 속 왕자들이 타고 다닐 법한 백마를 그대로 현실로 옮긴 듯했다.


그리고, 그 말이 지금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120km 중 80km, 목적지까지의 거리 중 2/3 가량을 달려왔을 때쯤, 점차 느려지기 시작한 말은 갑자기 끝도 없이 기침을 내뱉더니 결국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언샤는 700 킬로그램에 달하는 말을 등에 업고 몇 시간 동안이나 힘들게 걸어서야 이 공터까지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기절한 한혈마는 도저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분명 언샤는 황궁의 목자에게서 이 말은 혈통이 훌륭한 한혈마 중에서도 가장 큰 재능을 타고났기에 하루에 150km는 거뜬히 달릴 수 있는 개체라고 들었으며, 분명 출발 전 어떠한 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몸 상태도 만전인 것을 최대한 확인했을 텐데 대체 왜 갑자기 여행 첫날부터 체력이 다해 기절해버린 것일까.


도저히 그것만큼은 이해가 가지 않는 변수였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황실 목자가 한혈마는 150km를 달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며, 며칠간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수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것도 가능한 말이라고 했단 말이야. 아직 겨우 10살 밖에 안됐으니 젊다기보단 어린 수준인 나이니 노환 때문에 약해진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완벽한 계획이었을 텐데."


"언샤여,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나는 이 말이 왜 기절했는지 아주 잘 알 것 같구나."


"아, 그렇구만! 나도 알 것 같아! 이건 분명히 누군가가 이 설련황 폐하님을 암살하기 위해 사전에 미리 짜둔 교묘한 함정인 거야!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누군가가 목자들에게 사주하여, 일부러 겉만 그럴듯할 뿐 속은 텅 빈 강정 같은 말을 준비해서 내가 이 무인지대에 고립되어 나찰들과 싸우다 죽도록 유도한 거지! 아······ 이 얼마나 악귀같이 무시무시한 발상인가. 인간의 악의가 참으로 무섭도다······!"


언샤가 자신이 방금 생각해낸 되도 않는 피해 망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으며 아주 주접을 떨었기에, 루카는 그대로 도약하여 언샤의 어깨를 잡고 매달려 한 손바닥으로 언샤의 머리를 뒤에서부터 분노를 담아 후려쳤다.


루카의 힘은 아주 약했기에 솔직히 말해서 가렵지도 않은 수준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이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흑흑, 잘못했으니 때리지 말아 주세요."


"내가 보기에, 이 말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건 바로 언샤 그대가 바실루스족처럼, 마치 돼지처럼 무겁고 뚱뚱하기 때문인 게 당연하지 않으냐! 이 돼지 자식아!"


그건 언샤가 태어나서 들어본 모욕 중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너무나 억울했다. 언샤는 엄연히 눈표범인데 어떻게 돼지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돼지란 거야! 내 몸무게는 고작 55관 9근, 즉 210kg 밖에 안된다고? 숫자만 보면 무거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 키가 정확히 10척 3촌, 즉 313cm 정도인 거랑 내 몸의 근육량을 생각해 보면 사실 엄청나게 마른 거란 말이야! 뼈랑 근육밖에 없다고! 내가 얼마나 오랜 수련을 거쳐서 만든 날씬한 몸매인데!"


"그만 좀 꿀꿀거려라, 이 근육 돼지 녀석아! 210kg 이면 보통 인간 평균의 3배는 거뜬히 넘지 않느냐! 내가 지금 27kg이니까 이 말은 오늘 하루 종일 등에 사람 네 명을 태우고 달린 것과 마찬가지인 게다!"


"아, 아무튼 아니라고. 아무튼 내 잘못 아니라고! 그리고 나도 1톤 가까이쯤은 거뜬히 되어 보이는 이 말을 등에 업고 한참은 걸었으니 쌤쌤이잖아! 기절한 동물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 물에 젖은 솜 이불을 등에 매고 다니는 기분이었다고!"


"그대는 말도 못 하는 축생을 괴롭혀놓고 한다는 게 고작 자기가 더 힘들었다는 변명뿐인 게냐!"


언샤는 여전히 억울했으나 변명을 할 때마다 그 머리에 계속 손바닥이 날아왔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몇 년간 원껏 먹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뚱뚱하다니 돼지라느니 하는 말을 듣게 되다니 이토록 억울할 수는 없었지만.


손바닥으로 얻어맞는 건 더욱 억울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옛 속담 그대로 루카님 손바닥 안에 갇힌 원숭이 왕이 된 기분이었다.


언샤는 어쩔 수 없이 이대로 혼절해 죽어가는 중일 지도 모르는 말을 살려보기 위해 갖은 수를 쓰기 시작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쓰러진 게 자신의 몸무게 때문이라니 미안해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엄청난 명마라고 하니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기는 아깝다는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자, 언샤여. 쓰러진 말한테 직접 말해보거라. '미안해. 내 잘못이야.'라고."


"미, 미, 미······. 미친 목자 놈 같으니라고! 대체 왜 내가 타면 말에게 무리가 갈 것이라고 미리 경고해 주지 않은 거야!"


그리고 또 한 대 더 맞았다.


"네놈은 아무래도 매가 약인 듯하구나."


언샤는 여신에게 그런 슬픈 평가를 들으며 아까 장작을 팰 때 남겨둔 송진을 기나긴 송림을 계속 돌파하느라 여러 군데가 쓸리며 찰과상을 입어 곳곳에 피딱지가 붙은 말의 피부에 발라주었다.


송진은 상처의 균을 죽이고 소독하여 상처를 곪지 않게 해주는 데에 탁월한 효능이 있었기에 이는 매우 합당한 조치였다.


언샤는 그다음 짐 속에 넣어둔 병에서 포도 식초를 꺼내 아까 전 우연히 본 옹달샘에서 퍼 온 물을 끓인 다음 섞어 희석했다.


화신인 언샤나 완벽한 불사의 여신인 루카라면 아무 물이나 마셔도 어떤 위험도 없었겠지만, 이 물을 마시는 게 쓰러진 말이 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물을 끓인 시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위험이 사라지겠지만, 혹시 모르니 거기에 식초를 더해 그 성분으로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르는 균을 죽이는 것이다.


포도 식초에는 물을 끓여 먹지 못할 위급한 상황에서 급히 행군을 계속해야만 할 때 끓이지 못한 오염된 물을 어느 정도 정화해 주는 효과가 있었으며 희석하여 마시면 원기를 회복하는 데에 좋았기에 군인들은 포도 식초를 수통에 많이들 넣어 다니곤 했다.


언샤는 거기에 혹시나 몰라 챙겨온 비상약 주머니에서 우황청심원을 꺼냈다.


청심원이란 알 실라에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 있는 상비약으로, 중풍이나 신경증이나 고혈압 증세나 심장병으로 졸도한 사람을 깨우는 데에 비상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로 혹시나 과로로 쓰러진 말에게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것을 아주 잘게 찢어 희석된 포도 식초에 넣고 말의 입에 조심스레 흘려 넣었다.


그 뒤 해가 지는 그 순간까지 말의 몸에서 나는 땀을 닦고 모닥불에 뜨겁지 않을 정도로만 최대한 가까이 옮겨주고 담요를 덮어주며 정성스레 간병했으나, 말이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주 엉망이었던 호흡이 진정되고 더는 거품을 뱉어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죽어가던 말에게서 다시 화색이 돌기 시작했기에 늦어도 다음날 아침쯤엔 깨어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말을 열심히 돌보고 쓰러진 말의 병세에서 차도가 보였을 때는 이미 얼마 남지 않았던 실자락 같던 마지막 노을마저 지평선과 산 너머로 넘어가 더는 세상에 어떤 황혼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 해가 져버렸구만. 이제 우린 다 죽게 생겼어."


"애초에 이렇게 된 건 그대 잘못이로고. 하지만 이제 와서 더 비난해봐야 의미도 없겠구나. 언샤 그대는 미덥지는 못해도 일단 화신이지 않느냐. 어떻게든 될 것이니라."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혹시나 운이 좋아서 아예 안 나타날지 또 어떻게 알아?"


언샤는 그렇게 말하고는 말이 들고 다니던 짐 속에서 활과 화살집을 꺼내들었다.


말로는 안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 준비도 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알 실라에서는 활과 화살 그리고 화살집을 모두 합쳐 '동개일습'이라고 불렸으며, 물소의 뿔과 각종 나무를 아교로 붙여서 만든 합성 각궁이 주류였다.


여러 가지 재질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그 탄력성을 최대한 높여 위력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재료를 붙이기 위한 접착제인 아교가 습기에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보관을 조금만 잘못해도 사용 불가능이 될 정도로 관리가 까다로웠고, 그렇기 때문에 보관 및 사용을 위해선 여러 특수한 방법을 써야 했다.


언샤는 활시위를 풀고 보름달 형태로 활몸 전체를 말아놓은 부린활 상태로 둔 활을 꺼내들어 시위를 걸고, 화톳불을 이용해 열을 가해 자신이 쏘기에 가장 알맞은 형태로 변형시켰다.


열을 조금만 잘못 가해도 활이 뒤집어지거나 튀어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있었기에 언샤는 극도로 섬세한 작업을 거쳐서야 활시위를 걸은 반달 형태인 얹은활 상태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탄력성과 휜 정도가 자신이 평소 사용하던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그 탄력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열을 받은 활 몸체를 식히기 위해 천막 옆에 활을 걸어두고 그 옆에 화살집을 놓았다.


언샤가 밤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둘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었지만, 이것이라도 해두지 않으면 더 힘든 싸움을 직면하게 될 것이란 건 뻔한 일이었다.


그 이후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언샤와 루카는 미리 챙겨온 건량을 조금 나눠먹고는 그대로 천막 밑에 침낭을 펴고 누워버렸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여행길에서 식사를 잘 챙겨 먹고 체력을 보충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겠지만 언샤와 루카는 황제와 여신이라는 그 신분 상 요리 같은 걸 잘 할 줄 알 리가 없었으며.


또한 화신과 여신의 특성상 음식을 잘 섭취하지 않아도 배가 고플 뿐 전혀 약해지지 않는 육체를 갖고 있었기에 육체의 체력을 보존하는 것보단 정신적 피로가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두 사람의 육체가 아무리 인간의 것을 한참 벗어난 것이라 해도 그 정신은 인간과 그리 다를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최대한 정신에 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게 몸의 건강을 신경 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마음이 힘들고 괴로우면 중요한 때에 실수를 하게 된다.


그걸 항상 염두에 두면서도 거기에 너무 신경을 써 기력을 소모할 일이 없도록, 항상 마음을 편히 가지며 쓸데없이 걱정을 하거나 불안하지 않도록 잡생각을 비우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임해야만 했다.


여행이란 끝도 없는 인내와 고난과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공포에 맞서 싸우는 끝도 없이 긴 과정이다.


그렇기에 정신과 마음의 건강을 편히 해주지 않으면 중요한 때에 판단을 그르쳐 목숨을 잃을 만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걸 최대한 잊고, 괜히 필요도 없는 행동에 신경을 집중하여 정신적 피로를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움직임을 줄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잠을 잘 필요성이 매우 적은 육체임에도 침낭을 펴고 천막 바닥에 누웠다.


천막은 한 쪽에 구멍이 뚫린 구조였기에 침낭에 도롱이벌레처럼 들어간 채로 머리를 그쪽으로 내민 두 사람은 누운 채로 적당히 고개를 돌려 쓰러져있는 말의 용태와 모닥불이 타오르는 모습, 그리고 끝도 없이 모든 방향의 지평선을 가득 채울 듯이 소나무로 넘쳐나는 송림과, 저 하늘에 넘쳐나는 수많은 별들과 하나의 달을 보게 되었다.


끝도 없이 드넓은 세상에 마치 두 사람만이 남은 듯한 고요함이었다.


세상은 이미 멸망했으며, 이 세상에 두 사람과 저 말 한 마리 이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 착각하게 될 정도로 침묵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대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미지의 존재를 괜히 두려워하며 끝도 없는 심적인 긴장으로 정신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실없는 농담 따먹기나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사실 그걸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대충 눈치로, 이심전심하여 그리하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은 기분이었기에.


"저 별을 보니까 생각났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난 지 벌써 3년이나 됐던가? 처음 만났을 땐 네가 여신이란 것도 전혀 믿지 못했는데. 그랬던 내가 이제는 여신님 육체를 찾아서 이런 곳까지 오게 되다니 참으로 감회가 새로운걸. 근데 대체 왜 3년 동안 육체 찾으러 가잔 얘기를 잘 안 꺼낸 거야?"


"뭐, 제국이 혼란하여 그런 얘길 꺼낼 상황이 아니기도 했으며. 또 거기에 더해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온 내게 있어 3년이란 눈 깜빡할 정도밖에 안되는 시간이라 그런 것도 있느니라. 이 여신님은 관대하기에 고작 3년이나 30년쯤은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도다."


"사실 그냥 너도 잊고 있었던 거 아냐? 그 날 이후로 육체를 찾으러 가잔 얘기는 딱 한 번 밖에 안했으면서."


"그, 그렇지 않다······. 나는 여신답게 그 인내심이 인간을 초월했기에, 그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엔 굳이 꺼낼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뿐이니라."


"중궁전에서 마치 황후처럼 대우받으며 마키와 내명부의 여러 궁녀들이 여신님, 여신님 하며 시중을 들며 부탁하는 건 다 들어주니 너무 살기 편해서 그랬던 건 아니고?"


언샤의 그러한 지적에 여신은 짚이는 바가 조금 있기는 했는지 적잖스레 당황한 듯 두 눈을 크게 뜬 뒤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화, 확실히 내 옷조차 내가 직접 입을 필요가 없고 팔만 벌리면 궁녀들이 알아서 옷을 입혀주고 머리도 매일같이 댕기머리로 땋아주던 그러한 경험을 해본 건 이 여신이라 해도 처음이었던지라······. 그 극진하고 융숭한 대접에 지극히 만족했던 건 사실이나. 나, 나는 절대 그곳에 머무르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은 추호도 없었느니라! 그런 곳에 계속 살다간 세상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가 되어 버릴 게야! 사람은 누구나 성실해야만 한다. 그건 아무리 여신이라 해도 마찬가지인 법이다!"


사람이 누군가의 지적을 아주 격렬히 부정할 경우, 그건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이며 그 본심은 입 밖으로 나오는 말과 정반대라는 말도 있긴 했고.


여신의 반응도 그러한 말과 별로 다를 바는 없어 보일 정도로 아주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이었으나.


언샤는 여신을 불쾌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그 점까지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래. 그렇게 극진한 대우를 받으신 만큼 여신 값을 하며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시긴 했지. 꼭 수렴청정을 하는 황귀비처럼 옥좌 옆에 서서 매일 같이 황제가 하는 말에 참견하며 황제를 괴롭히느라 아주 바빴으니까."


"누가 괴롭혔단 말이냐! 그대가 무능하며 멍청해 매일 같이 헛소리를 멈추지 못하니 내가 어쩔 수 없이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줄 수밖에 없지 않았던 것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백번 옳으십니다요. 어련하시겠습니까. 하늘과 같은 여신님. 덕분에 저는 신하들에게 제정일치의 무당 황제란 소릴 들었고, 백성들에게 근본도 없는 무당 계집을 루카신이라 부르며 모든 국정을 떠넘기는 미치광이라는 평가를 들었지요. 참으로 성은이 망극하기 그지없습니다."


"······."


"거기에 제 누이는 제가 죽은 뒤에 기록될 실록에는 분명, 설련황은 적장자가 아닌 세 번째 자식이었기에 그 정통성이 부족하여 그 권위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천신의 이름을 사칭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정체 모를 외간 소녀를 데려와 루카 여신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말이 곧 여신의 말이라 주장하는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취했다는 개짖는 소리가 적힐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아이고, 신은 여신님 덕분에 아주 행복합니다요."


언샤는 내시처럼 기어들어가는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윽, 그건 조금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런 세간의 평가 따위에 연연하니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가 화신 답지 못하며 한낱 인간에 가까운 존재를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화신의 강함은 정신적 강함에서 비롯되니, 화신답게 강해지고 싶다면 하찮은 인간사에 연연하지 말고 좀 대범해지거라."


"예이, 알겠사옵니다. 그 하찮은 인간 세상 정치에 제일 관심이 많아서 이래라저래라 온갖 참견을 다 하시던 분의 지론이니 참으로 그 덕이 드높습니다요."


"흥, 그대의 정치 역량과 눈썰미가 아주 형편없어 훈수를 두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 나와 파르다가 최대한 도와줬음에 감사한 줄 알아라."


"그래. 참으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기억 대부분이 없어도 여전히 똑똑하고 의연하신 여신님. 그리고 신체를 일부러 안 찾은 건 아닙니다요. 애초에 여신 네가 천리안으로 보았다는 신체 위치는 대부분 제국 영토 밖이었고요. 대륙 전체에서 알 실라 제국에 대한 적대감이 아직도 아주 강하기 때문에 여신님 신체를 찾으려고 외국에 군대라도 파병 보냈다간 또 전쟁을 일으킬 거냐고 타국에게 대체 무슨 욕을 들어먹을지 알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요."


"그럼 알 실라 영토 내에 있는 신체 2개는 왜 못찾은 게냐?"


"그것도 다 이유가 있지요. 먼저 제국 영토 안에 있다는 하나는 서울 근처, 나찰들이 가장 들끓는 위험천만한 지대에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거기에 병사들을 시켜 온갖 위험천만한 장소를 수색했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못 찾고 허탕쳤었고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


"그것 때문에 작은 마을 하나를 싹 뒤집어 엎은 건 기억 안나십니까요? 역시 병사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기에, 여신님께서 직접 가셔서 찾기로 했지 않습니까."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언샤는 그 후 한참 동안 내시 말투를 흉내 내며 여신을 놀리는 겸 자신이 황실에서 겪었던 고충을 하소연하였다.


솔직히 할 말은 많았지만 어쨌든 언샤는 여신의 권위를 싫어하는 것이었지 여신의 인간성을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안 그래도 제국의 실세인 누이가 내세운 허수아비에 가까운 황제라 원래부터 별것 아닌 자신의 권력을 여신마저 끝도 없이 침범했다는 사실에 서운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여신이 자신보다 유능하며 훨씬 더 옳은 선택을 해온 진짜 덕 많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놀리는 정도였을 뿐 진지하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여신이 황제의 권위를 완벽하게 무시한다는 사실에 짜증 난 것일 뿐 여신의 주장 자체는 모두 옳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신은 그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렸음에도 여전히 여신이란 이름값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덕과 품성과 지식과 결단력을 지닌 존재였으며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를 소유한 자였다.


괜히 12명이나 있는 나선성신 중에서도 제일 가는 주신인 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사실과 별개로 언샤는 그냥 루카를 놀려 먹고 싶었기에 계속 놀렸다. 여신은 아무리 놀려도 절대 진지하게 화내지는 않으면서도 감히 여신인 자신을 놀려먹으려 한다는 그 사실 하나 만에 끝도 없이 짜증을 내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놀려먹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샤가 한참 동안 루카를 위대한 여신님이라 비꼬면서 놀려대자, 여신은 결국 고개를 획 돌리더니 귀를 틀어막고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회양목 손거울을 꺼내 그것을 보는 척했다.


"아, 혹시 삐졌냐? 미안해. 그냥 장난이었으니 진지하게 화내지는 말라구."


"흥, 이 여신 님이 고작 그런 말재간에 놀아날 정도로 속이 좁은 사람으로 보이느냐. 그냥 그대의 같잖은 내시 연기를 더는 못 들어주겠기에 차라리 거울이나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 여신님 존안이 참으로 아름다우신 건 잘 알고 있지만, 이 어두운 밤에까지 그렇게 꺼내들어서 보셔야 할 정도인가요. 그렇게 자기애가 넘쳐나셔서 무얼 하시려고. 어차피 임자는 이미 있으시며 지금은 보지도 못하시는 저 우주 너머에 계시니 외모를 제아무리 잘 꾸며도 누구 보여주실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란 말이다!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는데, 말 위에서 그대 허리를 붙잡고 계속 가까이 있었더니 이 치마저고리와 내 머리칼에 그대의 털이 잔뜩 끼어서 엄청나게 간지럽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단 말이다. 이 털에, 이 딱딱한 바닥에, 거기에 몸은 따뜻한데 얼굴은 춥게 만드는 이 침낭, 참으로 불편해서 도저히 누워 있을 수가 없구나."


"아, 털은 어쩔 수 없지. 익숙해질 수밖에 없어. 아슬란족의 침구와 옷에선 원래 전부 털이 뿜뿜 뿜어져 나오는 게 정상이라구."


"으, 고양이털 알레르기('αλλεργία)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아슬란족만큼 가까이하기 싫은 인간종은 없겠구나······. 됐다. 그냥 포기하고 잠이나 자겠노라. 털을 빼려고 뚫어져라 찾아봤자 네 털과 내 머리칼이 모두 은빛이라 이 밤엔 도저히 구분히 가지를 않는구나."


"그래, 잘 자라구 여신님. 무슨 일 생기면 바로 깨울 테니 최대한 편하게 있어."


"최대한 편하게······. 대체 이런 오지에서 어떻게 편하게 있으란 건지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보마."


언샤와 루카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루카는 아슬란족과 달리 어두운 곳에서 사물을 잘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언샤의 털을 뽑으려 시도하다가 눈에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고, 거기에 짜증이 나 눈을 감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샤는 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냥 누워서 옆에서 자는 여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주 앳되다.


언샤는 지난 3년간 어전에서 소녀가 백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모든 안건과 상소문을 단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며 그 누구도 편애하지 않고 모든 인간을 널리 사랑하며 도우려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소녀가 진짜 여신이란 사실을 더는 부정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아주 앳되고 작았다.


수천 년을 살았다기에는, 세상 모든 역경과 고난에 달관한 여신이라며 우러러 보기에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그저 한없이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연민과 동정과 사랑만이 가득할 뿐인 아주 작은 소녀였다.


이러한 소녀가 그들 모두를 창조했으며, 자신이 창조한 생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동분서주하며 그들에게 행복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니.


대체 무엇이 이 작은 소녀가 그렇게 많은 책임을 지도록 만든 것일까, 대체 무엇이 소녀가 우리 모두를 사랑하게 만든 것일까.


그러한 내면과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건 한낱 인간인 언샤가 할 수 있는 게 아닌, 소녀와 똑같은 신이라 불린 다른 성신들 뿐이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이 신이 아닌 화신에 불과하며 이 소녀와 같을 수는 없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더라도.


이 조그만 소녀와 그 작은 외면에 반비례하는 깊고 깊은 그 내면을 온전히 이해하는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이 소녀를, 이 여신을 돕는 것만은 할 수 있다.


이 소녀와 함께 태평성대를 이루어, 세상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할 꿈을 품을 수는 있다.


그게 이 여신의 배필인 아슬란신이 자신에게 화신의 힘을 내린 이유라 믿으며, 언샤는 손을 뻗어 여신의 잠자리가 편한 것이 되도록 그 머리를 조금 쓰다듬어보려······.


그 순간 루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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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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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문유관 7 - 개꿈의 반대말은 고양이 꿈 +6 21.05.27 47 1 29쪽
30 사문유관 6 - 세상 모든 힘 21.05.27 27 1 34쪽
29 사문유관 5 - 늘어선 세계 21.05.26 26 0 27쪽
28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21.05.26 28 2 25쪽
»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21.05.25 67 1 27쪽
26 사문유관 2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21.05.25 36 1 17쪽
25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2 21.05.24 42 2 24쪽
24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1 1 25쪽
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5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2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1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5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1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16 호질 16 - 거사 21.05.19 38 1 19쪽
15 호질 15 - 집 나간 탕아 21.05.18 44 1 38쪽
14 호질 14 - 하나밖에 없는 목숨 21.05.18 41 2 15쪽
13 호질 13 - 용의 꼬리 21.05.17 47 3 23쪽
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8 2 29쪽
11 호질 11 - 사사로운 인간사 21.05.16 47 2 17쪽
10 호질 10 - 나찰사냥꾼 21.05.16 47 3 27쪽
9 호질 9 - 해후 21.05.15 53 2 20쪽
8 호질 8 - 박제가 되어버린 여신을 아시오? +2 21.05.15 52 1 18쪽
7 호질 7 - 세상 끝의 불꽃 21.05.14 63 3 29쪽
6 호질 6 - 종이호랑이 21.05.13 143 4 37쪽
5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21.05.12 210 6 25쪽
4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21.05.12 134 6 23쪽
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2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5 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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