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연재수 :
58 회
조회수 :
3,561
추천수 :
93
글자수 :
622,086

작성
21.05.18 17:00
조회
44
추천
1
글자
38쪽

호질 15 - 집 나간 탕아

DUMMY

9.


전하, 제발 도망치십시오. 돌아가지 마십시오. 제발 살아주십시오.


살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고.

살아야, 희망 또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떠나겠다고 말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간다고 말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를 생각해 준 그 마음 하나는 정말 고마웠어. 자네의 진심이, 나란 사람을 바꿨으니.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죽을 겁니다. 반드시 죽을 겁니다. 폐황태자님처럼 끔찍하게 죽게 될 겁니다.


그는 그렇게도 말했었다.


그럼에도 돌아가야 해.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는 그렇게도 대답했다.


언샤는 울고 불며 자신을 극구 말리며, 절대 돌아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 카스피를 떨쳐내고.


부상을 입은 그가 골목 한가운데 무릎 꿇고 대성통곡하는 걸 애써 외면하며 어제 마을을 구한 대가로 정당하게 받은 말을 타고 달렸다.


그리고 서울에 돌아와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등에 한 은발 소녀를 업은 채로 밤의 어둠을 틈타 기와지붕을 타고, 담벼락을 달려, 숲길을 넘어, 산을 넘어, 언덕 분지 내부에 있는 호압궁으로 돌아왔다.


타인의 강요로 인해서가 아닌, 스스로 원해 사지로 돌아온 기분은 참으로 새로웠다.


아침에 타고 넘어온 호압궁의 담벼락을 정반대 방향으로 넘어 조심스럽게 내려오자.

어두운 담벼락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밤눈이 아주 밝아 가장 어두운 밤에도 낮과 하나도 다를 게 없이 볼 수 있는 아슬란족의 시야로 그 인기척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집 나간 탕아가, 돌아왔구나."


그건 마치 무명천처럼 새하얗지만 그럼에도 별빛을 받아 푸르게 빛날 정도로 곱고 아름다운 흰 비단 저고리를 입고 담벼락에 기대서있는 여성이었다.

이 호압궁의 유일한 황녀인 파르다였다.


황녀는 털이 거의 없었기에 섬섬옥수와도 같이 새하얗게 보이는 가는 손에 곰방대를 꼬나들고.

이를 입에 연거푸 가져다 대며 하릴없이 입에서 연기를 뱉어내는 걸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기 냄새가 아주 지독했기에 연신 기침이 나왔다.


"켁, 냄새 한 번 독하네. 근데 이 늦은 밤에 여기서 뭐해?"


"그냥 바람도 좀 쐴 겸. 남초(南草)나 좀 피고 있었단다."


남초란 알 실라가 여러 국가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이 서울에도 유입되기 시작한 기호품으로.

남쪽에서 온 풀이라 하여 남초, 연기가 나는 풀이라 하여 연초, 혹은 본래 이름인 타바코(Tobacco)를 음차한 담바고나 담배 등으로 불리는 물건이었다.


농사를 지을 사람도 없는 서울에서 그런 기호 식물을 키울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이 서울에선 엄청난 사치품이겠지만.

엄연히 일국의 황녀인 파르다라면 그러한 것을 손에 넣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거 건강에 안 좋고 향이 아주 지독하다고 관리들 사이에서도 난리던데 그런 건 왜 피우는 거야?"


"글쎄다. 별로 오래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니 이런 거에 손대게 되는 거 아닐까."


"오래 살긴 뭘 못 살아. 백 년 만년 살 생각을 해야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니, 이러한 세상에서 오래 사는 건 그저 고통이요, 단순한 자기 학대에 불과한 것이리."


누이가 시구처럼 읊조린 건 낮에 노파가 언샤에게 말했던 그 옛말을 인용하는 것이었다.


"······누나도 그런 얘길 하는구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단 말도 있는데 말이지."


파르다는 언샤를 한 번 돌아보더니, 곰방대 안에 있던 남초를 담벼락에 대고 털어 불을 껐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이나 별이 가득한 하늘을 계속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그래서, 귀여운 우리 동생아. 여신님과 함께 떠난 여행은 즐거웠니?"


파르다 황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언샤가 제일 꺼내고 싶지 않았던 화제를 꺼내들었다.


"아, 그게······. 즐겁다고 해야할지. 많은 경험을 하게 됐지. 그게, 어. 바깥엔 내 행복과 자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고. 며칠 전에 소리치고 화내서 정말 미안해."


"됐다, 나는 괜찮단다. 동생의 사사로운 어리광도 받아주지 못하면 대체 내가 어떻게 네 누이 노릇을 하겠니."


누이는 털털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여전히 언샤를 바라보지 않고 그 호박색 눈동자로 하늘을 지긋이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듯 쓸쓸해 보였다.


"······나한테 아주 크게 실망했겠지. 누나는 나를 믿어 줬는데, 내가 화신이 될 자격이 있다고, 이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믿어줬는데. 나는 그냥 살고 싶단 소리나 하며 죽고 싶으면 혼자 죽으라는 폭언이나 하고. 죽기 싫고, 살고 싶은 건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라, 그런 당연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


"사과는 됐단다. 화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밖에서 무얼 보았니?"


"그냥 도망치려고 했었어. 말을 타고, 멀리."


"그래? 어째서 도망치고자 한 거니?"


"죽고 싶지 않았거든."


언샤가 그렇게 대답하자.

파르다는 갑자기 두 눈을 굳게 감고 그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가 났다기보단,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대체 무엇이 슬픈 것일까.

동생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자신의 모습에 슬펐던 것일까.


아니면 내심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동생이 돌아온 지금 이 순간부터 이제 그들 남매와 여신의 앞에 남은 길이 죽음밖에 없음을 통감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럼, 왜 도망치지 않았니?"


"내가 고작 도망치는 것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바보 멍청이라서. 그리고 이 세상에 고작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는 걸 알게 돼서."


"그래, 아주 훌륭한 이유구나. 그냥, 그대로 도망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도 이 누나는 화내지 않았을 거란다?"


"아니, 화내야지. 자신의 기대를 배신하는 사람에겐, 화내는 게 당연한 거야. 이 여신님은 그래도 화내지 않을 거라고 말하긴 하지만. ······누나. 왜 날 찾을 사람을 아무도 안 보낸 거야? "


"우리 바보 황태자가 겨우 가출 한 번 나갔다고 병사를 보내 동네방네 난리 쳐봐야 낯부끄러움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겠니. 추적자 대신 여신님을 보내기도 했었고."


"내가 도망쳐서 영영 안돌아오면 어쩌려고?"


"하지만 돌아왔잖니. 여신님과 함께."


"그래, 돌아왔지. 하지만 결과론일 뿐이야. 이 여신과 함께 간다고 돌아온다는 보장이 어딨어? 누나는 마치, 내가 정말로 도망치기라도 바랬던 것처럼······."


"그래, 그런 걸······.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란다. 반정을 일으켰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죽을 테고, 반정을 일으키지 않으면 다른 모두가 죽을 테니까.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죽더라도, 너 하나만은 살아줬으면 하는걸.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란다. 하지만······."


"하지만. 이미 돌아왔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 나는 자기 목숨 하나도 건사할 줄 모르는 멍청이기 때문에."


언샤가 그렇게 대답하자, 황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어두운 밤 속에서도 스스로 빛나고 있는 언샤의 푸른 두 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쭉 서로 바라보기만 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쭉쭉 자라, 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구나. 언제까지나 내 귀여운 병아리일 줄 알았는데. 어느새 스스로 훌쩍 날아가 버릴 새가 되었구나. 누나는 조금 허탈하단다."


"아니, 이제야 겨우 알을 까고 나온 것에 불과한 게다. 아직 한참 멀었지."


그때 잠자코 있던 여신 루카가 끼어들어 말했다.


"아니, 난 이제 성인이거든. 다 컸다고."


"그래. 그래. 이제 성인이고 다 큰 언샤야. 밖에서 대체 무얼 보았니?"


"별거 없어. 그냥 이런 세상에 태어나 고통받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됐을 뿐."


언샤는 그 털과 손톱이 가득한 손을 뻗어, 누이의 손을 잡았고, 누이는 털 없이 가련한 손으로 그 손을 맞잡아 주었다.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럼에도 두 사람은 피를 나눈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여신은 그 남매의 모습을 보고, 저 옛날 자신이 아슬란과 나눈 약속을 떠올렸다.


"그럼 누나. 이제 말해줘. 대체 어떻게 반정을 일으켜 거사를 성사시킬 건지. 화신이 되니 뭐니 하는 가능성도 없는 계획 말고. 8년간이나 계속 마땅한 때를 기다려온 누나가 아무 계획도 없이 나한테 반정을 일으키잔 소리는 안 했을 거 아니야."


"당연히 준비해뒀단다. 애초에 그 계획을 완성시켰으니 너를 찾아간 거고. 아무리 그래도 위험한 계획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네가 화신이 되면 그 작전을 실행할 필요도 없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니까, 화신이 돼란 얘기부터 한 것뿐이란다. 네가 갑자기 도망치는 바람에 준비해온 계획을 말할 시간이 없었던 것뿐이고.


"제대로 얘기도 들어보기 전에 도망치는 멍청이라 거참 미안하네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언샤와 파르다는, 지난 몇 년간의 모습과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달라진 점은 오로지 하나, 파르다는 더는 망설이지 않으며, 언샤는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뿐.


"모든 준비가 갖춰져있어. 바로 오늘 자정부터, 이 나라를 바꿀 거사를 시작할 거야."




잠시 후, 언샤는 태자궁으로 돌아가, 다시금 그 방 한가운데에 있게 되었다.


원숭이의 시간(猿時)의 정중앙.

혹은 자정이라 불리는 루카시(23:00~01:00)의 중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기에 언샤는 황태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관리들에게 알리고 다시 자신이 살고 있던 태자방으로 돌아왔다.


솔직히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장소였으나.

오늘은 누이가 미리 조치를 해둔 것인지 방 안에는 언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언샤는 마음 편히 자리에 앉아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누이에게 방금 전 대략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후였고.

그 계획 이외에는 어떤 대안도 존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언샤는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지 마음속으로 계획을 검토하며 이 방과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찌 됐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에 관계없이 언샤는 다시는 이 방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언샤는 방 한가운데.

자신의 형이 불타 죽었던 그 장소에 조용히 향을 피우고 두 번 절을 올린 후 죽은 형에게 인사를 올렸다.


폐황태자의 묘소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를 추모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형, 십 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드디어 형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혹시 내가 내일이 되어도 아직 살아있다면, 내일 해를 볼 수 있게 된다면. 이 나라를 바꿀 수 있는 자가 된다면. 그럼 이 망할 놈의 태자궁을 허물고, 엄청나게 유명하고 명필인 시인을 불러다가 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멋들어진 묘비를 세워줄 테니까.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저세상에서라도 지켜보고 응원해 준다면 고맙겠어."


그리고, 하루의 끝이자 시작.

황혼이자 여명인 자정이 되었다.


태자방 정 중앙에 조용히 앉아 명상을 하고 있던 언샤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호였다.


언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그곳에는 평소 입던 아름다우나 단출한 검은 장삼이 아니라 수많은 자수가 새겨져있기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 비단 활옷을 입은 파르다 황녀가 서 있었다.


활옷이란 황녀가 입는 대례복, 즉 혼례복인 동시에 여러 국가적 중대사에 입는 예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신 루카 역시 찢어지고 피 묻은 저고리 대신 깔끔한 새 비단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화려하게도 입었네. 어디 시집이라도 가시나 봐?"


"시집은 무슨. 알 실라의 여인에게 있어 혼례복은 곧 수의(殮衣)란다. 이제 곧 관에 들어갈 테니, 가는 길이라도 곱게 가기 위해 잘 차려입은 것뿐이지. 여인은 죽을 때도 마치 혼례를 올릴 때와 같이 가장 아름답게 죽어야 그 처녀 귀신의 때깔도 고운 법이거든."


"······처녀 귀신이라. 그러게 며칠 전에 내가 해준 조언대로 나이도 찼으니 시집이라도 갔으면 결혼도 못 하고 죽을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이 서울 전체를 뒤져도 써먹을 만한 남자가 하나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혼인을 할 수가 있겠니. 천지에 널리고 널린 흔해빠진 남자와 결혼해서 저 난설헌(蘭雪軒)처럼 고생만 하다 죽을 바엔 혼자 살고 말지. 됐고, 출발하자."


그 말을 듣고 언샤가 문밖을 나서자.

복도엔 누이의 최측근이자 호위인 소위장군 마키와 그 휘하 살수 16인이 중무장을 한 채로 서 있었다.


비롯 그 숫자는 적으나, 황녀가 직접 선정해 키운 이들이니 만큼 그 개개인의 무력은 이 황실에서 가장 강력한 축에 속하며 그 모두가 믿을 만한 이들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겨우 이 정도 숫자로 되겠어?"


언샤는 아까 전 계획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최대한 적은 이들을 사용해서 궁을 장악할 것이라는 계획을 듣긴 했으나 겨우 이 정도 인원으로 거사를 실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곳은 이미 장악 완료했으니 이 숫자 정도면 충분해. 사실 장악이라기보다 그냥 겁 좀 주고 얌전히 있으라고 설득한 것뿐이지만."


"황상과 싸울 자는? 겨우 이 정도 숫자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래. 겨우 17명으론 황상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겠지. 하지만 황상을 상대로 평범한 군사는 아무 의미도 없어. 고작 몇 주 전에 황상이 십만 대군을 혼자서 다 쓸어버린 걸 직접 보았잖니."


"그래도 군사는 필요하지 않아?"


"아니. 내 권력을 쓰면 군대를 동원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만, 아무리 많은 대군을 준비해도 황제 앞에선 그냥 개미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다를 게 없단다. 알 실라 제국의 모든 인간이 목숨 걸고 황상을 죽이려 들어도 화신을 상대론 전부 개죽음당할 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계획의 실행 만을 도와줄 뿐이고, 싸울 사람은 단 한 사람, 언샤 너뿐이야만 해."


"결국 나 혼자 싸운다고?"


"그래, 그러려고 너를 준비한 거잖니. 황제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하며 가장 날카로운 비수. 그리고 네가 쓸 최강의 무구까지."


"아니, 이 살수들도 조금 도와주면서 빈틈을 만들어 주는 것도······."


"빈틈은 네가 직접 만들렴. 황상은 자비로운 분이라 이들이 내 명령을 따랐다 해서 죽이지는 않을 테니, 설령 거사가 실패하더라도 개죽음 당하는 사람 숫자는 최소한으로 해야 돼."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뭐."


언샤는 그대로 황녀를 따라 복도를 가로질러, 아무도 없는 황궁 마당으로 나가 17인의 군인들과 함께 황궁의 작전실인 호군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잠시 후 호군청(護軍廳) 집무처에서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호군청, 혹은 호군방이라 불리는 이 장소는 궁궐 내의 군사협력기관이었다.


호군방은 그 용도에 걸맞게 그 벽면과 책상에는 궁궐과 서울의 지도나 갑사들의 입직 기록부, 그리고 대륙의 지도와 여러 전쟁 지휘에 쓰일 법한 문서와 각종 군사들에 대한 정보가 가득했다.


파르다 황녀는 작전을 실행하기에 앞서 루카 여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며.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마치 저 하늘에 바치듯 세 번의 절을 올렸다.


그리고 황녀가 황제 이외의 사람 앞에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경건하고 엄숙한 태도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작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칭 여신이라는 이 소녀에 대한 모든 정보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 실라 제국의 미천한 황녀가 가장 위대하신 여신이신 루카님을 뵙습니다."


"그래, 파르다여. 역시 그대는 저 무식한 언샤 놈과 달리 여신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훌륭하구나."


자칭 루카 여신인 소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거만한 태도로 대답했다.


"예, 여신이시여. 제 동생의 부덕함으로 인해 며칠 간이나 고된 여행길을 떠나게 하여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오나, 몇 가지 질문을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오, 그럼 물론이지. 나는 아주 관대하기 때문에, 저 무식한 언샤놈이 실수 좀 했다고 해서 화내거나 하진 않는다. 그대들은 나를 저 쇠사슬에서 꺼내준 공이 있는 자들이니, 묻고 싶은 건 무엇이든 묻도록 하여라. 이 여신이 정성을 담아 모두 대답해 주도록 하마."


"먼저, 당신께서는 12 나선성신 중 주신인 루카 님이 확실합니까?"


"그럼, 당연하지.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 너무 기이한 얘기니 잘 믿지 못하는 그 마음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정말로 사랑의 여신 루카 본인이 맞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하신 분께서, 지하의 승탑에 머리만 남아 봉안되어 계셨던 겁니까?"


"······음, 뭐든 대답해 준다고 말하자마자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참으로 미안한데. 다른 질문이라면 전부 대답할 수 있으나,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무리가 있도다. 내가 대답을 해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째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대답해 줄 수 없다."


"그 말씀은, 자신이 왜 머리만 남아 봉안되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리고 사실 나는 내가 어째서 그런 꼴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만 기억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기억 대부분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니라. 확실한 건 나는 3천 년에 가까운 아득한 시간 동안 저 쇠사슬에 갇혀 계속 잠들어 있었고, 지금으로부터 대충 체감으로 3백 년 전쯤, 우연히 잠에서 반쯤 깨어났다는 사실뿐이다."


여신의 대답으로 알게 된 사실은 며칠 전 황녀가 추측했던 사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3백 년 전, 그건 알 실라의 초대왕 태조 모한이 호압사의 승탑 터를 파내고 그곳에서 몽환포영을 발견한 시기와 대충 일치했다.


아마도 그 쇠사슬을 땅속에 계속 묻어두지 않고, 신주궤에 봉안하여 모시게 되면서 그 안에 있던 머리 또한 잠에서 깨게 된 모양이었다.


"잠에서 반 정도 깬 나는, 내가 머리만 남아 있는 채로 어딘가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지. 그건 매우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느니라. 기억은 조각난 파편 정도밖에 없고, 몸이 없으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고, 갖고 있던 힘과 능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고, 그렇기에 그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도 없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참으로 비참한 기분이었도다."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며칠 전에 만든 자신의 손발이 잘 움직이는지 다시 확인하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더욱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내가 바로 여신 루카라는 사실 하나뿐. 나는 내게 남은 몇 없는 능력 중 하나인 천리안을 사용해, 나는 어째서인지 머리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 머리가 든 쇠사슬은 신주궤에 넣어져 신으로 모셔지고 있었으며, 이 대륙 곳곳에 내 다른 육체가 흩어져 있고, 내가 본래의 힘과 기억을 되찾으려면 먼저 쇠사슬을 풀고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제 동생 언샤를 부르신 건가요?"


"맞노라. 수백 년간이나 쇠사슬에서 탈출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썼고, 그 결과 드디어 성공하여. 며칠 전에서야 겨우 그 끔찍한 감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대체 누가 나에게 그런 짓을 한 건지, 내가 왜 봉안된 것인지, 그중 어느 것도 알지 못한다."


자칭 여신 루카는 너무나도 당당히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며.

권능도 대부분 잃었고, 심지어 기억도 없다고 선언했다.


언샤는 그 발언에 어이가 없어져 기억이 없으면 그 자신이 여신이란 걸 자신조차 잘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냐고 말하려 하다가.

이를 알아챈 누이가 언샤에게 눈치를 주었기에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게,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짐작 가는 바는 전혀 없으십니까?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만한 기억 같은 건 없으시고요?"


"전혀 없도다! 기억은 일부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장담할 수 있노라. 나는 남에게 원한 살만한 짓은 한 적이 없······. 한 적이······. 한 적이······ 남의 원한을 아주 많이 사고 살기는 했지만. 아무튼 3천 년 전 이 지구에 나를 반쯤 죽이고 그 몸을 잘라 봉안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존재했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할 수가 없구나! 동기야 차고 넘치지만 수단과 방법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니,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봉안하는 건 불가능했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봉안되어 있지 않으셨습니까?"


"······음, 확실히 그렇군. 그 말이 맞다. 범인은 대체 어떻게 날 이기고 내 머리를 자른 것일까? 나도 지난 3백 년간 그러한 고민을 끝도 없이 해보았으나, 기억 대부분이 없어서야 겨우 골똘히 생각해 보는 정도로는 범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냥 다른 질문을 하려무나."


언샤는 두 사람이 대화하면 대화를 할수록 결론은 나오지 않은 채 더욱 깊은 미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여신님께서 저희 남매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건 대체 어떻게 된 연유인 것입니까?"


"아, 그건 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내 능력 중 하나인 천리안을 사용해서 알아낸 것이니라. 나는 천리안을 통해 대륙뿐만 아니라 이곳 호압궁도 계속 살펴보며, 그중 나를 깨울 수 있을 만한 자가 있는지 계속 찾고 있었도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언샤 저놈이었고."


"그렇다면, 동생의 꿈에 나타났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여신님의 능력인 것입니까?"


"아니, 그건 내 능력이 아니라 나를 수천 년간이나 가두고 있었던 그 가증스런 쇠사슬, 인둘겐티아 히프노스(Indulgéntĭa Ὕπνος)의 능력이니라."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놓인 채 붉은빛을 내뿜으며 공중에서 회전하고 있는 쇠사슬, 몽환포영을 가리켰다.


몽환포영은 언샤가 이 황궁에 다시 돌아온 계기가 된 도구이긴 했으나.

거기에 그런 이름이 붙어있단 얘기는 완전히 금시초문이었다.


"인둘겐티아······? 바로 저것, 사멸신장 몽환포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멸신장? 이 나라에선 인둘겐티아를 그렇게 부르던가? 인둘겐티아란 신을 죽일 수 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고 있는 무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만."


"네, 아무래도 그저 이름만 다를 뿐 저희가 이해하고 있던 개념이 틀린 건 아니었던 모양이로군요. 저희도 저 무구가 신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찾아낸 것입니다."


"뭐, 이름이야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잠든 후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이름 정도야 바뀌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 아무튼 저 쇠사슬은 자신이 속박한 대상을 잠재우고, 끝도 없는 꿈에 빠뜨리는 끔찍한 능력을 갖고 있는 도구이니라. 나는 저 쇠사슬의 능력을 사용해서 이 궁궐에서 유일하게 인둘겐티아를 다룰만한 재능이 있는 존재, 바로 저놈. 언샤에게 계속 꿈을 보여줬도다. 쇠사슬이 나를 가두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 쇠사슬이 바로 내 머리에 계속 닿아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사슬을 직접 풀 수는 없어도 그 능력의 일부를 빌려 쓰는 것 정도는 가능했지."


"아, 잠깐!"


계속 얘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 사이에 언샤가 끼어들었다.


"야, 자칭 루카신이라는 꼬맹이. 며칠 전에도 이 얘기 했던 거 같은데. 그럼 진짜로 네가 나한테 그 사람 미치게 하는 악몽을 보여준 거냐? 네가 그딴 악몽을 보여주는 바람에 내가 대체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는지 알아?"


언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크게 숙여 작은 소녀 머리 위에서 마치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소녀는 그러한 위협에도 아주 조금도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흥. 내가 한 건 그냥 언샤 그대의 악몽에 나와 말을 건 것뿐. 나 이외의 꿈 내용은 모두 그대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광경일 뿐이었노라. 그 불꽃, 그 수많은 시체, 그 모든 게 네 마음속 공포의 형상이지. 그 모든 것이 천하에 둘도 없을 겁쟁이인 그대의 뇌수가 만들어낸 환상일진대.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일로 이 여신을 탓하다니 그대는 참으로 아량이 작은 소인배로구나."


"뭐라고? 이 꼬맹이가 뭐라는 거야? 그 겁쟁이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줄까?"


"동생아. 제발. 좀. 닥치렴."


언샤는 당장에라도 자신에게 그 끔찍한 악몽을 보여준 존재에게 주먹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누이가 언샤의 숙인 머리를 꽉 누르며 제지하는 바람에 다시 뒤로 돌아가 조용히 말을 듣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여신이시여. 질문에 계속 대답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이치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지 못하는 건 절대 아니며, 그 모두가 사실이라 믿고 있습니다만. 지금부터 저희는 아주 중요한 거사를 치를 예정이기에, 단지 확인의 의미로서. 저희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단 하나의 확증을 보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확증이라 함은?"


"당신께서 정말 주신 루카이시며, 저희의 이름을 알아내고 모든 걸 꿰뚫어보는 그 천리안이 당신의 능력 중 일부에 불과하다면. 그건 당신이 주신 루카의 권능이라 알려진, 한없이 전능에 가까운 천 가지 능력, 즉 천수천안(千手千眼) 중 일부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희 미천한 남매에게 여신의 전능함의 편린이라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천수천안? 권능? 권능이라 함은 듀나미스(δύναμις)랑 비슷한 단어일 테고······. 천 가지 능력이라면······. 아, 이 여신의 아스트라(Astra)를 말하는 것인가? 아,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니 내가 천 번 말하는 것보다 단 한 번 직접 나의 능력, 그러니까 권능이라는 그것을 보여주는 게 확실하겠지. 처음부터 그리하면 좋았을 것을.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구나."


그 말만큼은 언샤도 정말로 동감이었다.

아무리 권능 대부분을 잃었더라도 전부를 잃은 건 아닐진대.


그중 일부라도 보여주며 설득했다면 아무리 언샤라도 믿으려고 시도해보지 않았을까?


또 불사신이라는 사실을 미리 말해줬더라면.

저 마을에서 그렇게 충격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언샤의 심정이 어떻든 간에 루카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방금 설명한 천리안······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아주 굴뚝같으나. 그 능력은 아스트라 소모가 아주 극심해서 말이다. 나는 방금 전 나의 이 작은 육체를 무에서부터 창조하는 것만으로도 가진 아스트라 대부분을 다 썼을 정도로 아주 약해진 상태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몇 가지 남지 않은 권능 중에서도 아스트라 소모가 거의 없는 아주 단순한 능력들, 구체적으로는 딱 두 가지 밖에 쓰지 못하는 상태이니라."


이 역시 언샤가 밖에서 여신에게 들었던 얘기 그대로였다.


"저희들에게 그러한 사정까지 모두 말씀해 주실 정도로, 저희를 신뢰하시는 모양이니 아주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 능력이라도 보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 그대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면.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중 하나는 이미 직접 보지 않았느냐. 나선성신은 모두 기본적으로 불로불사의 존재이다. 그대들은 내가 머리만 남은 채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있고, 또 내가 무에서부터 육체를 생성해내는 모습을 이미 보았겠지? 언샤는 밖에서 한 번 더 보았고."


"그래. 다시는 그런 광경 보고 싶지 않지만 말야."


언샤가 대답했다.


"어쨌든 그게 내게 남은 두 가지 권능 중 하나이니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지 않는다. 이 지구에 있는 어떠한 물건으로도 날 죽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내 머리를 자른 자도 나를 죽이지 못하고 겨우 잠재워 봉안하는 데에 그친 것이겠지."


"그렇군요. 이미 여신의 능력 중 한 가지를 보았음에도, 감히 이를 바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불경함을 보여 정말 죄송합니다."


황녀가 대답했다.


"뭐, 어쨌건 이 불로불사는 사실 나의 아스트라라기보단, 그냥 타고난 체질인지라. 이번처럼 다른 육체가 전부 조각난 채로 살아있는 바람에 재생할 육체 자체가 없어진 게 아니고서야 아스트라를 전혀 쓰지 않고도 스스로 이뤄지는, 사실상 자연현상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작아진 몸으로도 불로불사 능력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권능은, 사실상 아주 단순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라 아스트라가 거의 남지 않은 이 가짜 몸으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권능인가요?"


"너희 인간들이 여신의 축복, 혹은 강복(降福)이라 부르던 능력이지. 구체적으로, 나는 인간에게 축복을 내려 그 감정을 조종할 수 있다. 이렇게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너희들에게 축복을 걸어 대충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주마."


자칭 여신은 그렇게 말한 후, 손을 뻗어 두 사람을 가리켰다.


딱히 후광이 비친다거나, 머리에 광륜이 떠오른다거나.

손에서 빛이 난다거나, 그 손을 알 수 없는 아우라(Αὔρα)가 감싼다던가.

그런 식으로 여신의 축복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알기 쉬운 현상 같은 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 선 두 사람 모두 뭔가가 달라졌다는 건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매우 불쾌하고 불안한 기분.


식은땀이 나며,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어질 정도로 어지러우며 눈앞의 모든 것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만취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감정을 조종할 수 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딴 게 무슨 여신의 축복이야? 이름값 더럽게 못하네!"


언샤가 구토감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그야, 당연히 그렇게 불쾌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도, 세상 모든 감정을 느끼도록 만드는 게 가능하니 여신의 축복이지 않겠느냐? 원한다면 마치 아편(ὄπιον)이라도 입에 댄 것처럼 모든 감각이 마비된 황홀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어줄 수도 있단다?"


"됐고, 이거 당장 멈추기나 해!"


언샤가 그렇게 소리치자, 소녀는 아쉽다는 듯 그 여신의 축복인지 강복인지 하는 것을 멈추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쾌해진 기분은 한참 동안 낫지 않아 언샤와 파르다는 책상에 앉아 한참 동안이나 심호흡을 한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자, 이제 내가 틀림없는 루카 여신이 맞다는 걸 그 몸을 통해 잘 알게 되었느냐?"


"그럴 리가! 뭐 속임수 같은 거 아냐? 냄새가 안 나는 독향을 미리 피워뒀다던가? 그렇게 사기 치는 무당이 세상에 한 둘인 줄 알아?"


언샤가 대답했다.


"그럼 그 독향이란 것이 이곳 어디에 숨겨져 있기라도 한지 잘 찾아보거라. 영원한 시간을 들여도 찾을 수 없을 테니.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확고한 증거를 보여줘도 믿지 못하다니 어찌 이리 어리석을 수 있나. 참으로 개탄스러운 반응이로다."


언샤는 그 말에 아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파르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이 권능이라면 혹시······. 동생아. 우리, 어쩌면 오늘 밤 죽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파르다 황녀는 그 불쾌한 체험에서 대체 무엇을 느꼈는지.

여전히 심호흡을 하며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도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렇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이 여신에게 마지막 남은 기적인 이것이 대체 어떤 용도로 쓰일 수 있는지, 공주 그대는 바로 알 수 있었나 보군."


"예, 당신은 의심할 바 없는, 틀림없는 루카 여신이십니다. 미천한 제가 당신을 조금이나마 의심했던 것에, 큰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요."


누이는 고통 속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겨우 말을 쥐어짜내고 있었음에도.

그 표정은 마치 안심하기라도 한 듯 긴장이 풀리고 매우 평안해 보였다.


"뭐야? 이 분위기 대체 뭐냐고. 방금 그걸로 대체 어떻게 여신인 줄 알 수 있는 건데? 대체 그 능력 어디가 대단한 거야?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드는 건 굳이 권능인지 뭔지를 안 써도 그냥 욕지거리 한 번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그게 여신인 증거라고? 겨우 사람 감정을 갖고 노는 정도로 뭘 할 수가 있는데?"


"많은 걸 할 수 있지. 그대처럼 어리석은 자는 결코 모르는 수많은 것들을."


소녀가 대신 대답했다.


언샤는 할 말이 아주 많았으나.

누이에게 잘못한 게 너무 많아 더는 그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언샤는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분노를 굽히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순간부터 눈앞의 소녀는 아무튼 여신 루카인 걸로 되게 되었다.

언샤는 며칠에 걸쳐 부정해 온 사실을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소녀는 진짜 여신이었다.


그렇기에 파르다는 여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럼 여신님, 저희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대충 무슨 부탁인지 알 것 같노라. 내가 계속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 거사를 도와주겠다고. 아까도 말했듯, 나는 천리안으로 수백 년간 이 호압궁을 지켜봐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기억을 잃은 나 자신에 대한 일보다도 훨씬 눈에 선하게 잘 알고 있다."


여신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고는 과거를 되돌아보듯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서 폐왕 호해가 죽고, 판테라라는 자가 감히 하늘의 자식을 칭하며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감히 나의 낭군이자 배필인 아슬란의 힘을 빌려 신의 이름을 능멸하고, 화신의 권능을 악용해 수많은 나의 아이들을 학살해온 것을. 나는 마치 나 자신의 일처럼 모두 지켜봐왔노라."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은 주먹을 꽉 쥐어보이며 또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내 아이들의 수많은 비명소리가, 수많은 고통이, 나를 분노케 만들었고. 수천 년간 잠들어있던 내가, 당장이라도 깨어나지 않고는 더는 버틸 수가 없도록 만들었도다."


그렇게 말하는 여신의 모습은, 그 모습이 어린아이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엄이 넘쳤다.


전설에 따르면, 주신 루카는 아슬란족의 신인 아슬란의 아내이기도 했다.


소녀가 정말로 힘을 잃은 루카신 본인이 맞다면.

자신의 남편이 이 세상에 남긴 권능을 이용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용서할 수가 없으리라.


그 여신다운 합당한 분노가, 판테라의 행위를 학살이라는 명확한 단어로 칭하는 그 태도가 언샤가 더는 소녀를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저희 이해관계가 완벽히 일치한다는 말씀이신 거군요."


파르다가 말했다.


"그 말대로이니라. 누이 쪽은 정말 말이 잘 통해서 좋구먼. 그렇기에, 나는 너희가 내게 부탁하기 전에, 먼저 여신으로서, 너희에게 부탁하도록 하마. 먼저, 내겐 기억이 없다, 자신이 왜 봉안된 지도 알 수 없다. 솔직히, 내가 정말 여신 루카 본인이 맞는지 내심 의심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명확한 게 있다. 그건 이 내가, 나의 감정이. 하늘의 이름을 사칭하며 수많은 이들을 학살한 저 자, 판테라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나뿐만이 아닌 그대들 역시 같겠지."


"그래, 황상은, 판테라 황제는. 아슬란 신의 화신도, 미치광이 성군도 아닌. 그냥 학살자야. 그것도 세상 역사에 길이 남을, 다시는 존재해서는 안 될 최악의 학살자지."


언샤가 대답했다.


"그 말대로다. 언샤여. 그대답지 않게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구나. 그렇기에. 나는 지금부터 그대들에게 여신의 이름을 걸고 부탁하겠노라. 내 모든 것을 걸고 그대들을 도울 테니, 그대들은 그대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거라. 그대들의 대의를 이루고, 거사를 성사시키고, 이 세상에 아직 정의가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이거라!"


그리하여 여신과 표범 남매의 거사가 시작되었다.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를 죽이는 것.

그리고 실패할 경우,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1 사문유관 7 - 개꿈의 반대말은 고양이 꿈 +6 21.05.27 48 1 29쪽
30 사문유관 6 - 세상 모든 힘 21.05.27 27 1 34쪽
29 사문유관 5 - 늘어선 세계 21.05.26 26 0 27쪽
28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21.05.26 28 2 25쪽
27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21.05.25 67 1 27쪽
26 사문유관 2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21.05.25 36 1 17쪽
25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2 21.05.24 42 2 24쪽
24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1 1 25쪽
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5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2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1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5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1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16 호질 16 - 거사 21.05.19 38 1 19쪽
» 호질 15 - 집 나간 탕아 21.05.18 45 1 38쪽
14 호질 14 - 하나밖에 없는 목숨 21.05.18 41 2 15쪽
13 호질 13 - 용의 꼬리 21.05.17 47 3 23쪽
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8 2 29쪽
11 호질 11 - 사사로운 인간사 21.05.16 47 2 17쪽
10 호질 10 - 나찰사냥꾼 21.05.16 47 3 27쪽
9 호질 9 - 해후 21.05.15 54 2 20쪽
8 호질 8 - 박제가 되어버린 여신을 아시오? +2 21.05.15 52 1 18쪽
7 호질 7 - 세상 끝의 불꽃 21.05.14 63 3 29쪽
6 호질 6 - 종이호랑이 21.05.13 143 4 37쪽
5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21.05.12 211 6 25쪽
4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21.05.12 134 6 23쪽
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2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5 9 2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