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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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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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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DUMMY

3.


울란바토르 사건으로부터 1달의 시간이 흘렀다.


알 실라의 수도 서울로 돌아와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황궁 호압궁(虎壓宮)은 마치 제 집처럼 편안했다.


귀향길 중 일부는 대륙 전체에 넓게 퍼져있는 장성 성벽을 타고 돌아올 수 있었기에 나찰들의 영토를 적게 지날 수 있어 훨씬 빠르고 편한 여로였다.


비록 한동안 지냈던 쿠룬의 황궁은 호압궁보다 몇 배는 넓고 화려하긴 했으나.

곳곳에 피비린내와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해 도저히 잘 수가 없었기에 다시는 떠올리기 싫어지는 곳이었다.


긴 여행길에 지친 몸도 며칠 휴식하자 마치 새로 태어난 듯 가벼워졌다.


그러나 몸이 가벼워도 마음은 그와 반비례하듯 더 무거울 뿐이었으며.

그 이유는 지난 여행에서 역시 늘 보던 광경을 또다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평생 보아온 것과 그리 다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 규모는 지난 경험과 상상을 또다시 초월하는 것이었기에 아무리 많이 보아도 익숙해지긴커녕 불쾌함만 가중시킬 뿐인 끔찍한 광경이었다.


현실이란 그 어떤 문학과 시, 문인들의 끝없는 상상력조차 초월할 정도로 잔혹한 것이었으니.


그리고 언샤가 호압궁에 돌아와서 보게 된 광경 역시, 전장과는 다르긴 하나 그럼에도 치열하고 동시에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니까,천도(遷都)는반드시필요하다고말하고있지않습니까!이제황제폐하의영토는대륙의정중앙을가로지르며,대륙전체의3할을차지할정도로광대해졌습니다.그럼에도이서울은대륙의서쪽끝,배를띄울수도없는바다에가로막힌벽지에존재하고있으니.장차직접치세를펼치기에가장적합한장소는대륙정중앙에존재하며장성을통한이동이매우용이한쿠룬임이틀림없습니다.실리를위해서는반드시천도해야만합니다!" "무엄하다!여기가어느어전이라고그런망언을내뱉나!이서울은수백년전알실라의초대왕이신태조모한왕께서직접하늘의명을받고도읍으로삼은장소이거늘.어찌그까짓실리하나만을 보고그런더러운오랑캐놈들이천년넘게더렵혀온땅으로천도하겠다는되도않는헛소리를하는것이냐!" "하지만앞으로의전쟁과더많은영토확장을대비하기위해서는쿠룬만큼적합한장소가없는게사실입니다!" "우량카이놈들은제대로된종교체계도,문화도없는일자무식의무지한자들이로다.우리알실라는지난반세기동안그런힘만쎌뿐인골빈놈들한테끝도없이영토를빼앗긴결과,폐왕호해놈에이르러서는이서울외엔남은땅이단하나도없을지경이었는데.구국의성웅이신폐하께서돌연나타나시기전까지우리알실라백성들의마지막보루가되어오랑캐들과나찰들에게서우릴 지켜준이곳서울의정통성을부정하겠다니.그대에겐조상도핏줄도명분도없는가?" "그럼이곳서울을여전히수도로유지한채종묘대례를위한성도(聖都)로삼고,이곳호압궁은대례를할때에머무르는이궁으로삼으며,쿠룬의황궁만을황제께서거주하시는법궁으로바꾸는건어떻겠습니까?" "이고오얀놈!이호압궁에서대체얼마나많은역사에길이남을사건들이있었는데이곳을이궁으로격하하는게좋겠다는망언까지하는것이냐!또한,대체쿠룬과이곳의거리가얼마나되는지를알기나하고그런소리를하는거냐?폐하께서대례를위해몇천리나되는길을왕복하시게만들셈인것이냐!"


왜냐하면, 도저히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길고 긴 언쟁이 한참 동안이나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황제의 옥좌가 있으며 온갖 국가 대사가 정해지는 장소이자 호압궁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정전(正殿) 내부였다.


정전은 실내였음에도 아름다운 단청을 칠해 단아하고 아름답고, 칸막이와 벽이 전혀 없이 창과 문만이 가득해 드넓으면서도 호방했다.


옥좌를 중심으론 여러 고관대작이 황제의 앞, 즉 어전에 참례(參禮)하고 조회(朝會)를 하여 국정을 논하고 있었으며.


옥좌의 위에는 이를 덮고 장식하는 천개(天蓋)가 있어.

황제를 뜻하는 호랑이와 신하를 뜻하는 구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을 표현한 벽화가 신비로운 모습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충신들이자 고관대작이자.

정승, 재상, 당상관, 왕사, 공주, 황태자 등의 작위로 불리는 드높은 벼슬을 달고 있는 종족불문한 여러 나이대의 이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두 사람이 그 드높은 품계만큼이나 드높은 목청으로 서로의 잘잘못과 시시비비를 따지며 마치 아이들처럼 유치하게도 어전회의를 하고 있었다.


두 관리가 서로에게 이 고오얀놈 감히 어느 어전 앞에서 그딴 소릴 지껄이느냐는 말을 벌써 수십 번은 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감히 어전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어전에선 원래 그런 소릴 하는 게 당연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서 아무도 없었다.


계급과 위세와 권세는 이곳 정전에서 아무 의미도 없으니.

이곳에 설 능력이 있는 자는 누구라도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소신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체면치레도 할 필요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으며, 아첨도 필요 없었다.


그저 웃거나, 아첨하거나, 거짓을 고하는 등 황제가 싫어하는 몇 가지 행동만을 조심한다면.

오로지 더 옳은 말을 하는 자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그리고 이는 반대로 얘기해서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모두 다 옳다면.

그 논쟁은 그 과정이 제아무리 유치한 애들 싸움이 되어도 한 쪽이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진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황금빛 비단에 검은 실로 다섯 범의 모습을 새긴 황호포(皇虎袍)를 입고, 매미 날개를 닮은 왕관인 익선관을 쓴 채.

옥좌에 기댄 한 팔로 턱을 괴고, 더없이 무료한 표정으로 눈앞의 두 벼슬아치들이 천도를 논하며 입씨름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개미를 내려보는 듯, 완벽하게 무관심하며 일체의 표정조차 담기지 않았다.


두 관리가 60분 동안이나 어전에서 일말의 양보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는 놀라운 광경을 한참 동안이나 내려다보던 황제는.

도저히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는지 스스로 입을 열었다.


"뭐, 잠시 조용해보시게. 경들은 벌써 반시진(60분)째 천도 이야기를 하고 있네만. 짐은 이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문관인 경들과 달리 배움과 학식이 짧은 어로불변인 무식한 자라, 경들 중 누가 더 옳은 의견을 말하고 있는지, 그냥 이렇게 앉아 듣는 것만으론 잘 모르겠단 말일세."


황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어전에 서있던 관리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럴 때에는, 가장 현명한 이의 의견을 들어보는 게 좋다는데에 경들도 이견이 없으리라 믿겠네. 그러니, 좌승상. 이 자리에서 짐이 가장 총애하는 왼팔과도 같은 자이자, 그 학식과 깨달음이 인간의 그것을 뛰어넘었다고 명성이 드높은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하고 들어볼까 하네."


"예, 폐하. 참으로 황공하옵니다."


좌의정 고이가 옥좌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경은 어찌 생각하는가? 천도를 하는 것이 이치에 알맞은가? 그게 아니라면 이곳 서울에 남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인가? 짐은 전쟁을 하기에만 적합하다면 딱히 어디 살던 상관없네. 그대들의 지론을 따르도록 하지."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신은 천도는 위험한 행위이며, 이곳 서울에 남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좌승상의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호오, 실리를 보자면 쿠룬으로 천도하는 것에 막대한 이득이 있는 것도 또 틀림없을진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황제가 그렇게 이르자.

좌의정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세 번 두드리는 네 번의 절, 즉 고두배(叩頭拜)를 올렸다.


비록 그 누구도 말은 없었으나, 정전 전체가 고요 속에서 크게 술렁였다는 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좌의정의 그러한 기행에 크게 당황하여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자의 위세가 드높다고 해도, 그 위세는 정승의 도움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인데.


모든 당상관 중에서도 그 지위와 예우가 가장 드높으며 황제가 직접 임명하였기에 사실상 그 두 팔 중 하나와 같은 재상이.

황제의 어전에서 절을 올릴 필요가 대체 어디 있겠는가.


"무언가? 짐에게 충정을 보이는 건, 그런 예법에도 맞지 않는 인사를 갑자기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지론을 펼치는 것으로 증명하시게."


"황제 폐하. 지금부터, 신이 올리는 말씀을 잘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폐하께서는, 지난 23 년간 우리 알 실라에게 수많은 굴욕을 안겨주었던 무뢰배들인 우량카이의 영토를 빼앗고, 그들에게 보복하며, 반천제를 실시하는 것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천자의 그 기세는 파죽지세와 같고, 권토중래를 그대로 실현함과 같으니. 황제께서 무신이라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천하의 모든 이가 다 알게 되었으며, 이로써 천자의 위업이 하늘에 있는 아슬란신과 같아졌습니다."


"짐이 입에 발린 아첨을 싫어한다는 걸 승상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어째서 경이 그러한 말을 아뢰는가?"


개미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불변했던 황제의 표정이,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아니오. 이는 아부가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열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고작 이십여 년 만에 대륙에서 알 실라와 그 천자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게 되었으며, 황제께서 펼치시는 이상,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의 대업이 이뤄진 오늘, 위대한 주상께 단 하나의 간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청컨대, 이제 더는 전쟁을 하지 말아주시옵소서."


"······."


전쟁을 그만둬달라는 일방적인 부탁.

이는 충분히 황제를 진노케 할만한 발언이었으나, 그럼에도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례임을 알고도, 계속 말씀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천자의 공력은 분명 이 대륙의 그 누구도 맞설 수 없는 경지이며, 이는 저 역시도 지난 전쟁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바입니다. 저와 같은 이 지구상의 모든 범인(凡人)들이 모두 천자에 맞서더라도, 그 옥체의 털 오라기 하나 다치게 하지 못할 것이 확실합니다."


"······. 그걸 알면서도, 짐에게 전쟁을 하지 말라 하는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천자의 위상과 그 기치, 그리고 이상은 너무나도 드높으나 현실의 세상은 그와 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민들은 하늘의 뜻을 모르며, 세상엔 자신의 알량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들만이 가득합니다."


황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기에, 승상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황제께서 가신 그 모든 대지에선 인간이 같은 인간을 노비로, 노예로, 농노로, 천민으로 대하며 서로 구분하고 있었으며, 폐하께서 직접 반천제를 실시하고 나서야 그런 미개한 풍습이 사라질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반천제의 기치가 아무리 위대하고, 하늘이 정한 이치에 잘 맞는다 해도, 이를 실시하는 데에 대체 얼마나 많은 폐해와 부작용이 있었습니까. 작은 지방 하나를 정벌해도 그곳의 안정화에는 아무리 짧아도 몇 개월, 길면 몇 년까지. 그 긴 기간 동안 반란과 난이 끊이지를 않았으며, 반골 기질이 가득한 저 마호메트 족의 두 나라는 정복 이십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전혀 안정되지 못한 채 기나긴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면, 경은 한동안은 전쟁을 하여 영토를 넓히는 것보단, 내실을 다지고 국정을 튼튼히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신은 앞으로 이어질 영원한 항구적인 기간 동안 황제께서 그저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더는 어떠한 전쟁도 벌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은 지금, 아무리 하늘의 명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성신이 아닌 일개 화신이며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한 황제께선, 이 대륙 모두를 다스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


그야말로 불손하며 불경하다고 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으나.

황제는 여전히 분노도 기쁨도 아닌 오묘한 표정만을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 불경하다!"


"폐하께 대체 무슨 망발인 것이냐!"


"폐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어서 저 불경한 자를 이곳에서 끌어내라 명해주십시오!"


좌의정의 과감한 발언에 관리들이 웅성이며 불평불만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니, 계속해라."


황제가 그렇게 이르자 관리들의 소란은 금세 가라앉았고, 고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 이십여 년 전.

폐하께서 처음 황위에 오르시고.

자신을 새로운 황제라 칭하시고.

국호를 알 실라 제국이라 개칭하시고.

이 나라가 황국이 되었을 때.


그때의 신은 무엇 하나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잔반에 불과했습니다.


신의 형은 본래 이름 높은 명반이자 무관이었으나.

계속해서 우량카이에게 패배해 영토를 잃은 죄로 그나마 가진 명예마저 모두 빼앗겨.

그저 목숨과 재산, 알량한 자존심만을 남긴 채 옛 영광에 빠져 허우적댈 뿐인 인간이었고.


신은 과거에 여러 차례 합격했음에도 이 나라를 버리고.

우량카이 제국에서 매국노 노릇을 하다 이에 회의감을 느끼고 귀국하여.

그나마 남은 재산마저 탕진하며 사는 빈대와 같은 자였지요.


그리고, 신이 그렇게 죽을 날까지 허송세월하며 살기로 결심했던 그때.

이곳 서울에서 반천제가 실시되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지옥의 풍경이었습니다.


권세가, 명가, 이름 있는 가문의 모든 양반들이 죽어나갔지요.


신의 형 또한, 평소 홀대하던 노비에게 원한을 사 칼을 맞아 죽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신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건 신이 가난했기 때문이었지요.


신이 살아남은 것.

그건 단순히 그 옛날의 신에겐 노비를 부릴 만큼의 위세와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불과합니다.


그때 신은, 부자인 형은 죽었으나 가난한 동생인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운명을 느꼈고.


더는 아무 경쟁자도 남지 않은 이 조정에 들어와 부와 권세를 다시 쌓아올렸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라고 변명하며 자신을 속여 왔지만.

사실은 자신이 적국인 우량카이에 충성했었다는 부끄러운 과거와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했던 치욕을 지우기 위해 그야말로 무엇이든 했지요.


그리고 오늘날, 신은 딱히 무엇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저 황제를 잘 만난 천운 단 하나 덕에, 알 실라의 오랜 원수인 저 오랑캐 수그리바의 목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은 이미 소원을 이뤘으며.

더는 무엇도 원하지 않고.

더는 무엇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직을 할까 하며, 문득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니 그곳엔 그야말로 부끄러움과 치욕스러움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인간으로 태어나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인 정승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신에겐 무엇 하나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신은 반천제에 그 누구보다 크게 찬동해.

수많은 이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명목으로 그저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왔으며.


십 년 전 이날엔, 그저 하늘이 내린 재능을 타고난 것 이외엔 어떠한 죄도 없던 황태자의 궁에 들어가.

그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끝내는 불을 지르고.

그 시체마저 조각내어 나찰들의 먹이로 던져주었습니다.


신은 불에 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의연한 태자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 무릎 꿇은 채로 죽어있는 태자의 시체를 보고 나서야.

태어나 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질 거 같은, 양심의 가책이란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위에 처음으로 의문이란 걸 가져보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뿐. 그 어떤 것도 표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제 권세는 그런 식으로 이뤄낸 것입니다.


패호황 폐하, 폐하께선 지난 23년간 대륙의 3할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이는 곧 대륙에는 아직 그보다 두 배 이상으로 넓은 영토가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 광대함만큼이나 수많은 역사와 종교, 신앙과 종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찾아올 미래, 폐하께서 이루시게 될 통일된 대륙에서 그들을 한데 묶어주는 건.

오로지 하나의 가치, 폐하의 순수하며 강력한 무력뿐이겠지요.


하지만 강한 힘, 강한 지배, 공포, 그 모든 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고방식도, 가치관도 모두 다른 12인간종을 제후나 소패왕, 지방 영주, 호족, 사또 등의 존재 없이 모두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폐하께서 원하시는 단 하나의 이치, '평등'이란 단어 자체가 또 다른 갈등과 분열을 계속해서 불러올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지배하실 대륙에는 총 12종의 인간 종족들이 살고 있으며.

개중에는 폐하와 대등한 힘을 가진 10명의 화신들 또한 존재하고 있겠지요.


만약 지금 이 시대에 아슬란의 화신 이외의 다른 화신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화신은 불멸하며 장수하는 존재입니다.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난 미래일지라도 황제께서 계속해서 타국을 침략 해나간다면.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타 종족의 화신이 나타나 황제의 대적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설령 그 모든 화신을 쓰러뜨리더라도.

아슬란족에서 황상보다도 더욱 아슬란신에 가까운 자가 나타나, 폐하에게서 화신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또 그러한 일이 결코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황제께서는 이미 사멸신장(赦滅神仗), 즉 신을 멸한다고 알려진 고대의 무구들이 이 대륙 곳곳에 가득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계시겠지요.


황상께선 정복 도중 그러한 것들을 찾자마자, 절대 이를 가까이하지 않으시고는 제게 모조리 파괴하고 없애라 시키셨으니.


저 나선성신 마저도 죽일 수 있다고 명성 자자한 그 무구들의 강력함이.

단순한 과장이 아님을 황제께서는 지난 23년간 행해온 전쟁 속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아주 잘 알고 계실 터입니다.


이런데도 전쟁을 계속해나간다면.

만약 알 실라가 이 이상 계속 승리하게 된다면.

끝없는 승전 끝에 결국 이 제국은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것이 우연이듯.

당신의 목숨이 아직 붙어있는 것도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체면치레라고는 전혀 없는 좌의정의 직설적인 말에 그 자리에 선 모든 이들이 황제가 진노할 것이라 생각했다.


황제는 자신의 신하에게 누구보다 관대한 자였으나.

어전에서 웃는 자, 아부를 하는 자, 거짓을 고하는 자.

그리고 반천제에 반대하는 자,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자에게만큼은 누구보다도 무자비하며 잔혹해질 수 있는 존재였으니.


하지만 황제의 반응은 범인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것이었다.


"아, 참으로 옳은 말이로다."


황제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온화했다.


"충도, 대의로다. 그대의 충정이 짐의 마음에 통했노라. 자신의 목숨, 자신이 쌓아온 모든 권세와 직책, 부와 명예를 걸고 진정으로 짐의 미래를 걱정하여 올린 그 충언 덕에, 그대가 과연 이 제국에서도 가장 뛰어난 좌승상의 재목이 맞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대와 같은 신하를 둔 짐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복에 겨운 임금일 것이니라."


"오오, 그렇다면, 이제 더는 전쟁을 하지 않고, 반천제 실시를 멈춰주시는 것이옵니까?"


"그러니 그렇게나 위대한 승상인 경에게 이런 말을 하긴 참으로 미안하지만, 그것만큼은 윤허할 수 없소."


황제의 말투와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더는 권위라곤 없으며, 격식이라곤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제 황제가 보살펴야만 할 나약하고 낮은 자가 아닌, 황제와 나란히 설 대등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온화한 표정 그대로 옥좌에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내려와, 여전히 정전 마루에 무릎을 꿇고 있는 좌의정의 앞에 섰다.


"······."


고이는 더는 말이 없었다.


"짐이 그대와 같은 대승상을 곁에 두기엔 너무나도 그릇이 좁은 자라, 참으로 미안하오. 그대가 아무리 반박할 수 없는 정론으로 이 부덕한 천자를 꾸짖더라도, 짐은 더는 멈출 수 없소. 경이 짐에게 올린 충언은 언젠가 누군가 짐에게 올려주었으면 했을 정도로 무엇보다도 짐이 원하던 내용이었소. 경이 올린 그 간언에 거짓은 단 하나도 없으며, 짐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짐은 멈출 수 없는 것이오."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른손을 뻗어, 엎드린 고이의 목을 쥐어 하늘로 들어 올렸다.

작은 노구가 하늘로 떠올랐다.


"왜냐하면! 이 천자의 성전을 가로막는 것은, 만에 하나 그것이 참된 충신이라 할지라도 모두 짐의 적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천자의 적은 모두 죽어야만 하오! 이 천자의 미래에 기다리는 것이 오로지 확정된 파멸뿐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걸어가는 길이 지옥 밑바닥의 업화 속이라 할지라도. 짐은 단 한 사람의 노예라도 더 많이 해방하고, 하나라도 더 많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을 찾아 죽이겠소!"


공중에 떠오르며 목이 졸리는 고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듯 체념한 방금 전까지의 태도와는 정 반대로 꺽꺽 소리를 내며 조금이라도 숨을 내뱉으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결국에는 황제의 손에 목을 졸리면서도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는 데에 성공했다.


"언샤 전하! 바꾸십시오. 이 나라를! 반드······."


좌의정 고의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정전에 울려 퍼졌다.

고이는 즉사하여, 그 시신은 더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술렁였다.


그건 고이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고이가 최후의 순간에 이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고 있었던 단 한 사람을 호명했기 때문이었다.


"뭐······? 나?"


그저 병풍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던.

황태자 언샤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어 그만 진심을 입 밖으로 꺼내버리고야 말았다.


황제가 고이의 시체를 바닥에 내팽개치곤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태자여, 짐의 사랑스런 아들이여."


"예, 부르셨습니까, 아바마마."


"승상이 방금, 그대를 불렀다만. 그대는 이에 대해 무언가 아는 바가 있는가? 승상과 무언가 작당을 한 바가 있는가?"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언샤의 머리에 손을 얹어, 마치 사랑을 담은 듯 부드러운 손길로 황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니오······. 전혀······. 하늘에 맹세하건데, 결단코 그러한 바는 없습니다."


언샤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마치 개미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떨리는 목소리엔 공포가 가득했다.


"그래. 그렇지. 짐의 사랑스런 아이가, 그런 구밀복검의 악행을 꾸밀 리가 없지."


"······."


소름이 끼쳤다.

마치 그 손에 닿은 부위가 그대로 사라져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두피 째로 잘려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시선 안에 좌의정의 시체가 들어오고, 거품도 물지 못한 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그 끔찍한 모습이 마치 다음 순간의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태자여. 오늘, 짐의 왼팔 그 자체였던 승상이 승하했다. 참으로 비통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구나. 이는 이 황제의 옥체 일부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황태자여, 다름 아닌 천손인 그대가 국장의 예를 갖춰, 승상이 떠나는 길을 배웅해 줄 수 있겠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내심 자기가 죽였으면서 저게 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긴 있었을까.


황제의 말은 그 정도로 어이없는 발언이었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피붙이인 자신의 맏아들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인 데다가, 변변찮은 묘하나 만들어주지 않았으면서. 똑같이 자기가 죽인 승상에겐 그런 예우라니. 그저 제멋대로 권능을 휘두를 뿐인 미치광이 살육자에 불과한 주제에 대체 무엇이 황제란 말이냐'라고.


그 자리에 있던 자 중 면종복배의 심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자가 있기나 할 것인가.


누구라도 그런 말을 내뱉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리가 있었겠는가.


"예, 명을······ 받들겠나이다."


하지만 황태자 언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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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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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문유관 7 - 개꿈의 반대말은 고양이 꿈 +6 21.05.27 48 1 29쪽
30 사문유관 6 - 세상 모든 힘 21.05.27 27 1 34쪽
29 사문유관 5 - 늘어선 세계 21.05.26 26 0 27쪽
28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21.05.26 28 2 25쪽
27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21.05.25 67 1 27쪽
26 사문유관 2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21.05.25 36 1 17쪽
25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2 21.05.24 42 2 24쪽
24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1 1 25쪽
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5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2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1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5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1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16 호질 16 - 거사 21.05.19 38 1 19쪽
15 호질 15 - 집 나간 탕아 21.05.18 44 1 38쪽
14 호질 14 - 하나밖에 없는 목숨 21.05.18 41 2 15쪽
13 호질 13 - 용의 꼬리 21.05.17 47 3 23쪽
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8 2 29쪽
11 호질 11 - 사사로운 인간사 21.05.16 47 2 17쪽
10 호질 10 - 나찰사냥꾼 21.05.16 47 3 27쪽
9 호질 9 - 해후 21.05.15 54 2 20쪽
8 호질 8 - 박제가 되어버린 여신을 아시오? +2 21.05.15 52 1 18쪽
7 호질 7 - 세상 끝의 불꽃 21.05.14 63 3 29쪽
6 호질 6 - 종이호랑이 21.05.13 143 4 37쪽
»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21.05.12 211 6 25쪽
4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21.05.12 134 6 23쪽
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2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5 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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