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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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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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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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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사문유관 6 - 세상 모든 힘

DUMMY

4.

"아! 한혈아! 한혈이가 죽겠어! 언샤여, 저 놈이 한혈이한테 몹쓸 짓을 하고 있다! 빨리 어떻게 좀 해보거라!"


언샤의 등 뒤에 있던 존재 중 비명을 지르고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여신뿐이었기에.


언샤는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정신으로도 방금 전에 비명을 지른 게 누구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한혈이? 그게 대체 누구야?"


"우리가 타고 온 말 이름이지 않냐! 한혈마니까 한혈이!"


"그새 이름도 붙여줬었어?"


언샤는 또 루카가 여신답지 않게 퍽이나 웃기는 소리를 한다며, 너무 심하게 긴장을 한 나머지 미쳐갈 지경이었던 마음을 좀 풀며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한혈마니까 한혈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역시 여신님다웠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참으로 탁월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등을 돌린 언샤는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있는 건, 머리가 두 개인 나찰이었다.


온몸에 마치 인간이나 짐승처럼 부드러운 털이 덮였으나, 그 털의 색깔이 정확하게 흑과 백 두 가지로 나뉘는 기이한 색채의 나찰.


하나의 머리는 흰 늑대, 하나의 머리는 검은 호랑이.


마치 인간처럼 두 다리가 달려 이족보행을 하며, 인간의 팔이 달린 위치에 정확하게 팔이 달렸으며, 어깻죽지 위로 또 두 개의 팔이 달려 그 팔은 총 네 개였다.


다른 나찰과 같은 기형의 존재가 아닌,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된 것처럼 균형 잡혀 있어 자연의 신비가 그대로 담겨 있는 조화로운 육체였다.


또한 두 개의 머리가 모두 정확히 사고를 하고 기능하는 것인지 그 두 머리의 입이 모두 움직이고. 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며, 희로애락을 내비치고, 무언가 언어 같은 것을 두 머리가 동시에 내뱉었다.


"FamVanMedGonVehGonUrGraphGal MedFam !FamGisgVanGed !GraphFamDonMedNa"


나찰어.


인간은 절대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완벽한 문법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확실히 방향성과 의미를 담고 있다. 괴물의 괴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외계 언어나 암호와 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포효가 아니며, 고도의 사고과정을 거쳐 나온 고등 생물의 언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찰이, 그러한 존재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숙여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뜯어먹으며 그 몸의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나찰이 먹고 있는 것은 언샤와 루카가 타고 온 말, 한혈마였다.


나찰은 마치 그 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기라도 하듯이 그 네 개의 손으로 말의 육체를 뜯어내 그 맛을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말의 피로 목을 적시고.


그 내장으로 배를 채우며 게걸스럽지도 않게 아주 절제된 동작만으로 그 극상의 고기를 음미했다.


언샤는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넋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루카는 그새 그 이족보행 나찰의 옆으로 달려가 나찰에게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휘두르며. 이놈아, 도대체 우리 한혈이에게 무슨 짓이냐. 당장 그 손 떼지 못할까 하며 소리치고 있었으나.


나찰은 그 꼬마가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걸 아는지 완벽하게 그 존재를 무시했다.


"아니, 저게 대체 얼마짜리 말인데······. 그걸 그냥 잡아먹어버려?"


언샤는 저 한혈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귀한 우황청심원까지 먹여가며 정성스레 간호했던 기억이 떠올라 참으로 억울했다.


저 귀한 말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다면 그 맛있다는 말고기 육회나 한 번 먹어보는 것이었는데. 왜 말 주인인 자신이 아닌 저 나찰 놈이 그 고기 맛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지?


언샤는 방금 전까지 기절할 것만 같았던 정신을 겨우 붙잡고 그 억울함과 분노를 담아서 말했다.


"야, 당장 거기서 손 떼."


"?GedDruxGonDonGraphGalDonMed VanMedGony GraphDonUn GonyNaGon' ?GisgUnNaGon' MedFam"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대충 '네가 뭔데 명령질이냐?' 이런 의미임이 틀림없었다.


언어는 모르더라도 욕설과 폭언만큼 알아듣기 쉬운 표현은 없었으니.


"내가 누구냐고 물은 거냐? 누구긴 누구야. 그 말 주인이며, 이 나라 황제님이시다! 이 망할 나찰 자식아!"


"!FamVanMedUrVanVehGonGalGonDon MedFam !Ahahahahahaa ?VanMedGony ?DonMedDonGraphMalsTalGraph"


나찰은 두 입과 손톱에 검붉은 피를 칠한 채로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도저히 평범한 생물의 것이 아닌, 쇳소리가 섞여 귀를 찢는 듯한 소음이었다.


거기에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던 두 머리가 동시에 아주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비웃음과 멸시를 담아 알량하다며 그 감정을 표현하는 건 아주 소름 끼칠 정도였다.


언샤는 그들의 언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찰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나찰이 사람의 말을 듣고 웃을 수 있다는 건, 나찰이 인간 만의 전유물로 알려진 해학이란 개념을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언샤 역시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언어를 이해하고 해학을 이해하며 감정으로 드러낼 수 있다.


즉, 이 나찰의 지능은 인간과 비슷하거나 혹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이 나찰이 언샤가 방금 죽인 백 마리 나찰과는 전혀 비교도 못할 정도로 고등한 개체라는 의미였다.


언샤는 그러한 고위 나찰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할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입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그러한 나찰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히 자신의 말을 죽이고 먹어버린 이상 그냥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VanMedGony NaGisgGonGon' GisgNaGedGonOr UrUrGonGon' Gon ,DruxMed GraphTalMedVeh"


나찰도 언샤와 똑같이 생각하는지, 웃음기를 전혀 감출 생각을 하지도 않은 채 하나의 머리로는 분노하며 하나의 머리로는 비웃으며 손가락을 까딱하며 도발해 보였다.


명백하게, 자신과 싸우자는 신호였다.


서울의 나찰사냥꾼들 사이에서 저런 신체적 특징이 있다고 알려진 고위 나찰은 딱 두 마리였다.


고위 나찰이란 최소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이나 나찰사냥꾼들에게 사냥 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이 사냥꾼을 사냥한다고 알려진 존재이다.


평범한 나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기에 숲에는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던 착호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조심성 없이 일반 나찰을 사냥하다가 이러한 고위 나찰들에게 역으로 사냥 당해 죽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창귀가 되어 그 원혼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는가.


나찰들은 서울 주변에서 수천 년간 수많은 호랑이 백성들을 재미 삼아 죽이는 호환(虎患)을 일으키던 존재들이다.


강력한 나찰은 그 자체로 전설이나 구전이 되어 민간에 떠도는 요괴나 이매망량과 동일시되며 민담 속 요물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그중 서울 주변 숲에 살며 머리가 두 개, 그 팔이 네 개라고 알려진 고위 나찰 두 마리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각각 다른 이름이 붙어있었다. 한 마리는 '아수라', 한 마리는 '어둑시니'.


언샤는 그 두 마리의 특징에 대해서 할아버지에게 설명을 많이도 듣고, 그중 하나라도 마주하면 상대하지 말고 전력으로 도망치라는 조언까지 들었으나.


그럼에도 지금은 물러설 수 없었다.


애초에 이 공터에서 도망쳐 밤의 숲으로 들어가 수많은 나찰과 마주하는 건 자살행위였고, 이 괴물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는 이상 도망쳤는데 따라잡힐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숲속에서 이 고위 나찰과 다른 모든 나찰을 한 번에 상대하게 될 수도 있었다.


거기에 서울 주변 숲에는 눈앞의 이놈 이외에도 다른 고위 나찰도 많이 존재했다.


거대한 소를 닮았으며 철광석을 먹고살기에 그 몸 역시 강철과 같이 단단해 일반적인 무기로는 죽일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불꽃으로는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나찰, 불가살(不可殺).


평범한 늙은 여우처럼 생겼지만 잠을 잘 때는 두 눈을 뜨고 자며 아무 생각 없이 가까이 다가가면 그 꼬리가 수천 갈래로 갈라져 인간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고 알려진 나찰, 노호정(老狐精).


손가락이 여섯 개인 아슬란족 스님으로 변장하여 산고개를 넘는 사람에게 바둑 내기를 신청하고, 바둑에 이기면 살려서 보내주지만 질 경우 바로 죽인다고 알려진 나찰, 육족호(六足虎).


금빛 털을 가진 거대한 돼지처럼 생겼으며 인간을 홀려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인간을 잘 먹지 않는 나찰답지 않게 아주 적극적으로 식인을 행하는 나찰, 금모저(金毛猪).


전설 속 신수인 용과 닮은 머리를 갖고 있고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목격되며 그 덩치가 말도 안 되게 거대해 마치 산이나 섬처럼 보인다고 알려진 나찰, 귀수산(龜首山).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고위 나찰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존재이기에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로서 꺼려지는 나찰황 '호랑이'까지.


나찰사냥꾼들이 힘을 합쳐 이미 사냥했기에 기록만이 남아있는 고위 나찰은 배제하고, 너무나 강력해 미처 사냥하지 못한 개체 중 일부만 나열해도 저 정도이다.


거기에 더해 사냥꾼에게 아직 목격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너무나 강력해 그것을 목격한 모든 사람이 이미 다 죽어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고위 나찰이 대체 얼마나 더 많이 존재할지 알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언샤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도망치다가 다른 고위 나찰과 만나게 되면? 이대일의 싸움이 되게 된다면?


그때는 승산이 존재하긴 하는가?


그러니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싸워서 이 고위 나찰을 죽이는 것 이외엔 어떤 선택지도 없었다.


제발, 눈앞에 있는 나찰의 정체가 '어둑시니'가 아닌, '아수라' 쪽이기를.


언샤는 선수필승을 실현하기 위해 눈앞의 존재, 그 이름이 아수라일지 어둑시니일지 알 수 없는 고위 나찰을 향해 그 주먹을 휘둘렀다.


자신이 생각해도 아주 완벽한 힘 배분과 속도로 휘둘러진 주먹이었다. 맞기만 한다면 나찰의 육체를 한 번에 분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나찰은 네 개의 손 중 단 하나 만을 이용해, 마치 축국공(蹴鞠球)을 잡듯 아주 가볍게 그 주먹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악력으로 언샤의 주먹을 아주 강하게 뭉개려 시도했다. 어마어마한 악력이었다. 주먹이 그대로 부서지는 듯한 강력한 힘이었다.


언샤는 화신인 자신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그 말도 안 되는 악력을 가진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들게 반대쪽 주먹을 몸통을 향해 휘둘렀다.


한 손을 붙잡은 채로 반대쪽 주먹을 피할 수는 없었던 나찰은 그대로 손을 풀고 뒤로 몇 번이나 회전하며 도망치는 묘기를 펼치고는 네 팔로 거꾸로 물구나무 섰다가, 다시 뛰어올라 두 발로 섰다.


"Ravana GraphNaGisg TalUn Gon DruxGraphNaGisg ,DonMedDonGraphMalsTalGraph GraphNaGisg GraphDonUn VanMedGony OrGon !VehkUnGraphGon' MedFam !VehkUnGraphGon' MedFam"


나찰은 그 네 팔을 아주 희극스럽게 휘저으며 손뼉을 치고는 아주 제 세상인 듯 기뻐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 또한 조롱을 담은 의미임이 틀림없었다.


대충 '그렇게 약한 네가 진짜 황제면, 그럼 나는 나찰황이다'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젠장, 이 나찰, 단순히 힘만 보면 화신보다도 더 강하잖아?"


언샤는 단 두 합을 겨뤘음에도 일반적인 나찰 따위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고위 나찰의 무력에 전율했다.


그 개체 수가 상대적으로 적으며 이러한 고위 나찰들 역시 사람이 많으면 잘 나타나지 않기에 평범한 여행길에서는 만날 일 자체가 없는 존재라 다행이었지, 모든 나찰이 이 고위 나찰만큼 높은 지성을 갖고 있으며 강력한 존재였다면 인간 따윈 진작에 멸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언샤는 여행 첫날부터 그러한 존재와 만난 것이다.


그렇기에 어째서 성벽 밖의 대지가 무인지대이며 나찰의 영토라고 밖에 불릴 수 없는지를 직접 겪어 통감하게 되었다.


나찰 중 화신만큼 강한 개체가 존재한다면 그냥 인간 따윈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의 노리개에 불과할 것이 아닌가.


언샤는 눈앞의 고위 나찰이 자신을 계속 조롱하는 데에 이어, 그 목근육과 팔근육을 풀기라도 하듯 체조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동작을 하며 팔다리의 근육을 회전시키는 반복적인 동작을 하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저래서야 나찰이 아닌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도 손색없지 않나.


나찰은 그렇게 몸을 푼 후, 이번에는 손 전체를 까딱이며 그 몸 전체로 언샤를 도발했다.


마치 자신이 훨씬 강하니 이 싸움은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다는 듯한 오만함이 담긴 동작이었다.


언샤는 그 도발에 응해 옆으로 구르며 주변 나찰 시체에 꽂혀있던 화살 하나를 뽑아들어 빠르게 조준해 나찰을 향해 쏘았으나, 나찰은 옆으로 딱 한 걸음 움직여 아주 쉽게 그걸 피해버렸다.


아무리 화살이 빠르다곤 하나 그 궤적과 조준 방향이 정확히 보이는 이상, 뛰어난 지성을 가진 그 존재가 화살을 피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빗나간 화살은 아주 허무하게도 송림 반대편으로 날아가 나무 몇 개를 관통해 쓰러뜨린 후 바닥에 꽂혔다.


언샤는 활은 저 나찰에게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활을 옆으로 팽개친 후 그대로 나찰을 향해 돌진했다.


몇 번이고, 나찰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발차기를 하고, 손톱을 휘두르고, 몸 전체를 날려 넘어뜨리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찰은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그 힘을 흘릴 수 있을 정도의 간격 만을 둔 채 그 모든 공격을 회피했다.


네 개의 눈을 가진 모습에 걸맞게 엄청난 공간지각력을 갖고 있기라도 한 듯했다.


그리고 언샤가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주춤하자, 나찰은 바로 그 네 개의 팔을 주먹 쥐어 휘둘러 언샤에게 마치 수백 문의 대포가 일제히 발사되듯이 강력한 일격을 속사포로 쏟아부었다.


힘과 가속도가 모두 완벽하게 실린, 하나하나가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고 묵직한 일격들이었다.


하반신은 오로지 보법을 사용해 일정한 박자를 맞추며 적의 공격을 모두 회피하며 적의 발 놀림을 완벽히 봉쇄하는 데에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상반신의 네 개의 팔을 이용해 이족 보행 동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격을 단번에 퍼붓는다.


그것은 단순무식한 괴물의 싸움이 아닌 하나의 무술이었으며, 그 손바닥과 주먹을 계속해서 퍼붓는 장법과 품새는 하나의 권법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고대의 인간들과 시노페족은 이러한 무술을 가리켜 세상 모든 힘이라는 뜻의 '팡크라티온(Παγκράτιο)'이라 불렀으나, 언샤가 그러한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애초에 나찰이 무술을 구사한다는 허무맹랑한 얘기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기도 하고.


언샤는 두 팔로 최대한 방어에 집중했으나, 고작 두 개의 팔로는 네 개의 팔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상대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찰은 두 개의 팔만을 사용해 언샤의 방어를 최대한 견제하고는, 나머지 두 팔로 방어가 소홀한 부분을 아주 가차 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언샤는 턱, 배, 흉부, 심장 아래의 갈비뼈를 수비도 없이 그대로 얻어맞았다.


언샤는 마치 맞은 자리가 그대로 뜯겨나가는 듯한 엄청난 통증을 느꼈지만 다행히도 큰 내상을 입어 내장이 상하고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찌르고 격렬한 뇌진탕을 느껴 잠깐 기절할 뻔했던 것 이외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


"언샤여, 내가 축복을 내리겠노라! 대폭태쇄를 써서 그 괴물을 분쇄해버리거라!"


언샤가 마치 모래주머니처럼 두들겨 맞기만 하는 것을 더는 지켜보고 있지 못한 루카는 언샤에게 강복을 내려 그가 권능을 쓸 수 있게 하려 했다.


나찰을 향해 권능을 사용해 그 육체를 약화시키지 않았던 건, 여신이 인간의 신체 구조는 아주 잘 알고 있으나 나찰의 뇌와 신체 구조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어떤 호르몬이 어떻게 작용할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두 개인 존재의 호르몬 작용과 신경계 같은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잠깐, 필요 없어."


하지만 언샤는 여신이 축복을 걸어주는 걸 만류했다.


"왜 그러느냐, 자존심 내세울 때가 아니지 않으냐!"


"그게 아니라고! 출발하기 전에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렇게 아무 때나 축복을 받았다가는 결국 그 부작용으로 해뜨기 전에 온몸이 망가져버리고 말 거야. 이 위험한 땅에서 무방비가 되면 너는 몰라도 나는 확실히 죽는다고. 그리고 이 녀석은 나찰황도 아닌 그냥 고위 나찰일뿐이란 말야. 내 아버지는 맨손으로 고위 나찰을 총 수십 마리나 사냥했었다고."


"언샤여, 판테라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거라! 그건 그냥 판테라 놈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것뿐이다!"


"동일시 안 해. 나는 그 판테라를 이긴 최강의 화신이니까. 그런데 그런 내가 고위 나찰 놈 하나쯤은 축복 없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면, 대체 어떻게 대륙 전체를 여행할 수 있겠어? 오늘이 겨우 여행 첫날일 뿐인데, 벌써부터 저런 괴물을 만났다고! 대륙 곳곳마다 저런 놈들이 득실득실해서 그런 놈을 만날 때마다 축복을 써대며 계속 몸을 망가뜨리는 게 반복된다면. 과연 내가 네 육체를 다 모으는 날까지 살아있기나 하겠어? 그냥 짐 싸서 황궁에 돌아가는 게 낫지!"


"!GisgNaGedGonOr GraphNaGisg DruxMed FamVanVehMedOr !NaVehVanTal MedMedGisg VehkUrUnGisg VanMedGony"


나찰은 언샤가 자신의 공격에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한 눈을 팔고 옆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아주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 두 머리 모두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분노하며 더 격렬히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언샤는 도저히 네 개의 팔을 모두 막을 수가 없었기에 얼굴에도 공격을 허용해 이가 나가고, 눈이 반쯤 뭉개져 시야가 흐려졌다.


그다음 순간, 언샤는 얼굴을 얻어맞은 충격을 그대로 살려 뒤로 도약해 겨우 자신에게 끝도 없이 달라붙는 나찰을 떨쳐낼 수가 있었다.


"저 녀석은 권능을 쓰지 않으면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하지만, 근데도 나를 죽일 거면 진작에 죽일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고 나를 아주 갖고 놀고 있어. 싸움 자체를 즐기고 있다고! 그러니 분명 싸우다 보면 자만해서 빈틈이 생길 거야!"


언샤는 나찰에게 수십 번이나 얻어맞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언샤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나찰이 일부러 헛된 판단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마치 고위 나찰이 자신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인 듯이 일부러 과장해서 말했으나,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언샤보다 강한 근력이나 팔이 4개라는 이점만을 보면 나찰이 자신보다 더 강한 것은 맞았지만 그럼에도 그 강함의 격차가 아주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찰의 키 역시 언샤와 비슷한 3m 정도였고, 근력 차이는 1할 정도에 불과했다. 나찰은 언샤를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즉사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상처를 치유하는 화신의 특성상 아무리 얻어맞더라도 심장과 뇌가 멀쩡한 이상 어떤 공격도 치명상이 되지는 못했으니.


그럼에도 언샤가 계속해서 열세였던 건 단순히 집중력 문제였다.


언샤는 바로 조금 전에 백 마리의 나찰을 사냥한 직후였다. 그리고 1초도 휴식하지 못한 채 바로 저 나찰과 연전에 들어갔다. 그렇기에 정신력과 판단력이 떨어졌으므로 두 번째 싸움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면 저 나찰은 이것이 오늘의 첫 싸움이며, 귀한 말을 잡아먹고 그 배를 아주 충분히 불려 기력도 충만한 만전의 상태였다.


결국 언샤가 얻어맞은 건 그러한 연유에서 생겨난 기력과 정신력 차이가 이유였다.


언샤는 두 뺨을 손으로 두들기고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최대한 정신력을 고양시키고 싸움에 온전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은 분명히 땅에 두 발을 붙이며 걷는 이족보행 인간이긴 하나 실제로는 인간보다는 눈표범에 훨씬 가까운 짐승 그 자체인 존재라는 사실을 계속 머리에 새겼다.


땅에 발을 붙이고 싸우면서 지상전과 백병전에 특화된 저 나찰의 공세에 휩쓸려주는 건 자신에게 어울리는 전법이 전혀 아니었다.


언샤는 또다시 도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적을 향해 도약한 것이 아닌, 자신이 얻어맞으면서 계속 뒤로 밀려나 어느새 공터 구석까지 몰렸다는 사실을 이용해 뛰어올랐다. 뒤쪽의 송림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그곳의 소나무를 박차고, 나무가 휠 정도로 무게를 실은 뒤 그대로 나무가 펴지며 원래대로 돌아오는 탄력을 이용하여 지상으로 돌진했다. 소나무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부러졌지만 그것이 펴지는 힘만은 그대로 남아 언샤의 도약에 가속력을 더했다.


언샤는 양 손톱을 앞으로 내밀어 겹치고 마치 투석처럼 나찰의 가슴을 향해 돌진했다.


나찰은 그 네 개의 팔 모두를 사선으로 겹치며 방어 태세를 취해 몸통과 목을 보호했고, 그 결과 그 팔 모두가 눈표범의 강력한 손톱에 뜯겨나갔으나 그럼에도 몸통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언샤는 충격으로 바닥에 쓰러진 나찰의 머리를 그대로 짓밟으려 했으나, 나찰은 어깨를 바닥에 튕긴 반동으로 몸을 회전해 그대로 짓밟기를 피하고 일어섰다.


언샤는 비록 나찰의 머리를 날려버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팔을 잃었으니 그대로 자신이 승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역시 세상에 기대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나찰은 그 표정이 당혹으로 일그러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당연하다는 듯 잘려나간 네 개의 절단면에서 순식간에 다시 새로운 팔이 자라나도록 해 만전의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나찰은 그대로 반은 희고 반은 검은 그 네 개의 팔을 다시 언샤에게 휘둘렀다.


이번에는 손바닥이나 주먹이 아닌 손톱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언샤에게도 뒤지지 않을 손톱을 갖고 있으면서도 굳이 주먹과 손바닥만 쓰던 것으로 보아 그 나찰이 진심을 다 하지 않고 언샤를 재미로 두들겨 패고 있었던 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나찰은 그 손톱을 꺼내드는 걸로, 자신 역시 이제 진심을 다해 싸움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 보였다.


그리고 나찰은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연속으로 네 개의 팔에 달린 손톱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팔 숫자가 두 배나 되기에 그것만으로도 언샤의 손톱보다 더욱 위협적이었다.


언샤는 자신의 동체시력을 살려 최대한 그 손톱이 휘둘러지는 것을 피하다가, 두 쌍의 손톱을 모두 피하려 시도하는 것보다는 휘두르지 못하도록 막는 게 최선이라 판단해 송림 안으로 물러나 도망쳤다.


나찰은 언샤를 따라 송림 안으로 들어오며 계속 손톱을 휘둘렀고 결국 언샤가 방패막이로 쓴 수많은 소나무들과 잣나무들이 부러지며 엄청난 굉음을 내고 흙먼지를 날리게 했다.


언샤는 그렇게 계속 몇 분간이나 뒷걸음으로 도망치며 나찰이 송림을 벌채하도록 유도한 후, 다시 도약해 일부가 쓰러졌을 뿐 여전히 주변에 가득한 소나무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언샤는 마치 깃털처럼 사뿐히 소나무의 나뭇가지들에 어떤 충격과 무게도 싣지 않으며 마치 하늘을 날듯이 사방에 널리고 널린 발판을 밟고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리고 끝도 없이 뛰고 또 뛰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빠른 속도로 끝도 없이 나무들 사이를 건너다녔다.


그리고 나찰이 그 네 개의 눈에서 나온 동체시력으로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언샤가 시야에서 완벽히 우위에 섰을 때, 뒤에서 날아 그대로 나찰을 걷어차 짓밟았다.


등 뒤에서 공격당한 나찰은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언샤의 발 밑에 깔렸다.


송림 안에 얼마나 많은 나찰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이곳에 들어오는 건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나, 다행히 이곳에서 풍기는 엄청난 나찰의 피 냄새 때문에 더는 다른 나찰들은 겁을 먹어 근처에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송림 내부의 틈새로 굉장히 강한 바람이 계속 불어오고 있었음에도 언샤의 코는 자신이 밟고 있는 고위 나찰과 자신의 저고리와 온몸에 묻은 나찰의 피 이외에는 어떤 나찰의 냄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언샤는 승리를 확신하고, 자신의 발에 밟혀 꼼작도 못하던 나찰의 두 머리를 뭉개버리기 위해 두 주먹을 내질렀다.


"GedDruxGonNaGisg UrUnGisgDonMedTalTalGon TalUn Gon !VehkDonMedGon' GisgMedDrux FamGraphMedGal GisgUnNaGisg"


그다음 순간, 언샤는 자신이 밟고 있던 나찰이 마치 연기처럼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찰의 그 거대한 몸이 마치 연기와 같이, 혹은 검은 구름, 칠흑 그 자체와도 같이 깊은 어둠에 녹아들어 사라지는 모습은 이 세상의 광경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었다.


나찰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헛손질을 하게 된 언샤는 그대로 바닥을 내리쳤고, 바닥에는 깊은 구덩이가 패이고 흙이 튀어 올랐다.


오랜 세월 흙 속에 묻혀 있던 뿌리가 겉으로 드러나고 곳곳에 떨어져 있던 솔방울들과 썩은 소나무 잎들이 충격을 받아 무의미하게도 날아올랐다.


언샤가 그 짧은 시간 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여 어안이 벙벙한 사이에, 연기처럼 어둠으로 흩어졌던 나찰은 언샤의 등 뒤에서 나타나 그 손톱으로 언샤의 배에 바람구멍을 뚫었다.


언샤는 격통 때문에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당장에라도 기절하고 싶었으나 기절하면 그대로 죽게 될 것이 뻔했기에 어금니를 악물고 그 미칠 듯한 고통을 겨우 버텨냈다.


배에 구멍이 뚫리고 입으로 피를 토하고 나서야, 언샤는 대체 무슨 조화가 벌어진 것인지 겨우 머리로 이해했다.


아니 사실 스스로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 현상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미리 예습해두지 않았다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에 나서기 전, 언샤의 할아버지는 서울 주변에서 서식하는 가장 위험한 나찰 개체 여럿에 대해 설명하며 그중 하나인 '어둑시니'의 능력에 대해서도 가르쳐 줬었다.


어둑시니란 알 실라의 오랜 구전 설화 속에 등장하는 요괴의 이름으로, '어둡다'는 단어와 이름이 아주 비슷한 그 어감 그대로 어둠 그 자체를 형상화한 요괴였다.


어둑시니는 어둠 그 자체이기에 어떤 물리적인 공격도 통하지 않고, 그저 최대한 가까이하지 않고 도망치거나 무시하는 것만이 유일한 상책으로 통하는 요괴였다.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밤에도 낮처럼 보는 아슬란족이 대체 왜 어둠을 무서워하여 그러한 요괴를 상상해냈냐고 하면, 그건 바로 밤이야말로 나찰들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그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나찰의 특성, 그리고 매일 밤 자고 일어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나찰에게 납치당해 죽임당했다는 걸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그 공포야말로 모든 요괴의 근원이었다.


이는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야 할 아슬란 족이 밤의 어둠 그 자체를 너무나도 두려워하게 되어 그들이 어둠이나 밤 그 자체를 어둑시니라는 요괴로 부르며 경외시하기에 충분하고 합당한 사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백 년 전 이 땅에 어둠 그 자체가 되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고위 나찰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 나찰에게 경의를 담아 '어둑시니'라는 별명을 붙여주게 되었다.


그리고 참으로 불행히도, 언샤가 지금 만나고 상대하고 있던 나찰이 바로 그 어둑시니였다.


하필이면 그냥 힘만 센 게 전부인 아수라 쪽이 아니라, 어둑시니 쪽을 만나게 되었다니.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운이 없을 수 있는가.


언샤는 배가 꿰뚫린 엄청난 통증을 최대한 참으며, 그 팔꿈치를 뒤로 휘둘러 등 뒤의 어둑시니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어둑시니는 그 공격 역시 꿰뚫어보고, 또다시 어둠 그 자체로 흩어지며 공격을 회피했다.


그리고 언샤는 뚫린 배를 붙잡고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육감 그 모두를 최대한 살려 어둠 속에 숨어든 어둑시니를 찾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주변 어디에서도 어둑시니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언샤가 어둑시니를 찾을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둑시니는 그 존재 자체가 어둠인데, 대체 어떻게 이 어둠은 다른 어둠과 다르다며 선을 긋고 구분할 수 있겠는가.


어둠과 동화된 어둑시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어떠한 기척조차 흘리지 않았으며,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고, 어떤 살기도 내뿜지 않았다.


그 존재가 스스로 어둠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한 절대 그 위치를 알아낼 방법이 없으며 설령 위치를 알게 되더라도 공격할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언샤는 배를 뚫려서 그 내장 대부분을 잃었더라도 뇌와 심장만이 멀쩡하다면 회복할 수 있는 존재인 화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객기를 부려 권능 없이 고위 나찰을 쓰러뜨려보겠다고 외치며 화신의 권능을 꺼내지 않은 것 또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약 언샤가 어둑시니에게 대폭태쇄를 사용해 나찰을 바로 분쇄해버리려 시도했다면. 그 뒤에 기다리는 건 끔찍한 미래뿐일 것이었다.


심장이나 뇌를 잃지 않으면 죽지 않는 건 저 나찰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대폭태쇄를 어둑시니에게 사용하고도 그것을 단 일격에 죽이지 못했다면, 어둑시니는 그대로 어둠에 녹아들어 도망친 뒤 몸을 회복하고 언샤를 암살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을 것이다.


나찰들이 화신이란 존재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전혀 예상조차 가지 않았지만, 만약 어둑시니가 화신을 죽이려면 심장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대폭태쇄를 쓴 순간 언샤가 화신이란 걸 알아채고 그대로 어둠 속에서 심장을 관통해 언샤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어둑시니가 완벽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언샤의 심장을 파괴하지 않고 배를 꿰뚫은 건 일부러 봐준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우연이었다.


나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생물은 배를 관통하여 내장을 잃으면 그대로 사망하지 않는가. 아주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기에 언샤가 화신이란 걸 몰랐던 어둑시니는 언샤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배를 공격한 것이고, 아주 우연히 심장이 파괴되지 않았으며 마침 절묘하게도 화신이었던 언샤는 그냥 운이 좋았기에 목숨을 건졌다.


언샤는 자신이 화신이란 사실에 자만하지 않았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우연에 감사하며, 최대한 전신의 모든 신경을 집중해 어둑시니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렸다.


완전히 어둠에 녹아든 어둑시니는 어둠 그 자체였다. 반대로 얘기하면 어둠 그 자체가 사람을 찔러 죽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공격을 할 때만큼은 어둑시니 역시 다른 생물처럼 반드시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샤가 내장을 대부분 잃었음에도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괴물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위협을 느낀 어둑시니는 한참 동안이나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언샤가 공격할 만한 허점이 생길 만큼 전력으로 공격하는 일은 없었으며, 단순한 견제 수준에 불과한 할퀴기나 다리걸기 등을 계속 시도할 뿐이었다.


언샤는 그중 어느 것이 위험한 공격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모든 공세를 최선을 다해 피하거나 막았고. 그렇게 끝없는 대치가 십분가량 이어졌다.


언샤는 어둑시니가 끝없이 견제용으로 휘두른 손톱에 온몸이 찢겨 또다시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 사이에 구멍이 뚫렸던 배는 아물었고 내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움직임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까지 체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계속 확실한 때를 기다렸다.


다음 순간에 어둑시니는 대체 어디서 나타날까?


머리 위? 등 뒤? 바로 앞? 대각선 사선 위?


의심암귀가 언샤의 모든 신경을 갉아먹었고, 어둑시니가 노리는 게 바로 그렇게 언샤의 정신력이 소모되어 실수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언샤는 배수진을 펼친 것이라 생각하며 사필즉생의 심정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서 피와 뒤섞인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식은땀 중 하나가 계속 흘러내려 바닥에 하나 떨어지는 그 순간, 어둑시니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위치는 정면이었다.


가장 가능성이 낮은 방향이라고 생각했기에 바로 앞임에도 그곳엔 주의를 덜 기울이고 있었던 언샤는 한 박자 늦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저항도 못한 채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친 주먹에 턱을 맞았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뇌와 신경과 경추가 뒤흔들려 심각한 뇌진탕이 일어났기에 언샤의 의식은 그대로 세상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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