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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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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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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DUMMY

"악, 미안! 혹시 나 때문에 깼어?"


언샤는 기겁하며 놀라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침낭에 몸이 들어간 채로 허공에 뛰어올랐다가 내려왔다.


그건 마치 지렁이가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천막 천장에 닿기 전에 몸에 힘을 주어 다시 내려왔기에 천막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둔탁한 소리가 나며 먼지가 날렸다.


언샤는 자신의 행동이 여신의 숙면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하여 노심초사했으나 여신은 애초에 잠들지도 않았었는지 그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언샤여, 도저히 못 자겠다."


"도대체 왜? 추워? 아니면 털 알레르기?"


"난 알레르기 같은 거 없도다. 그냥 추위 때문이다. 단순히 추운 것 정도라면 견딜 수 있으나. 이 침낭 때문에 몸은 따뜻한데 얼굴은 추운 그 불균형이 너무 거슬리는구나. 거기에 바닥은 너무나 딱딱하고, 무엇보다 바닥이 차갑다. 나는 지난 3년간 매일 같이 호압궁의 뜨거운 온돌에 몸을 지지며 자면서 그 뜨거움에 이미 중독된 지 오래라, 바닥이 뜨겁고 푹신하지 않으면 도저히 자지를 못하겠노라."


"온돌에 푹신한 이불이 없으면 못 자겠다니 무슨 할머니나 고양이냐고. 꼭 보면 할머니들이 별로 춥지도 않은 가을에 두꺼운 이불을 잔뜩 꺼내고는 온돌을 뜨겁게 데워서 자더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런 데서 자면 질식사할 것 같던데 할머니나 고양이들은 왜 그렇게 그런 더운 곳을 좋아하는 거야!"


"뭐 어쩌겠느냐! 나는 아무리 기억이 날아갔어도 일단 수천 년은 넘게 산 몸이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할머니 따위를 한참 초월해 증조 고조할머니, 너희 모든 선조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니 그런 것을 좀 좋아할 수도 있지 않으냐! 그리고 그대는 그 몸의 정수가 눈표범의 것이기에 추위에 아주 강하고 털이 두꺼워 더위에 약할 수도 있으나, 원래 고양이는 사막에 주로 살던 생물이니라. 일교차가 극심한 곳에 살던 동물이니 몸의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따뜻하게 데워진 바닥에서 체온을 올리는 습성이 있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지."


루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침낭을 박차고 나와 천막 안에 위풍당당히 섰다.


사실 온몸에 언샤의 털이 박혀 있었기에 별로 위풍당당해 보이진 않았지만 일단 그 기세만큼은 그랬다.


"뭐, 그래서 어쩌려고? 저 모닥불 위에 집이라도 한 채 지어줄까? 거기서 뜨겁게 잘래?"


"그런 불가능한 소리는 하지도 말거라. 그리고 굳이 그런 걸 안 만들어도, 바로 여기에 따뜻하고 푹신해 침대로 쓰기에 아주 부족함이 없는 게 있지 않느냐!"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그 손가락으로 언샤를 가리켰다.


"뭐, 나?"


그리고 루카는 그대로 걸어와, 언샤의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 이게 대체 뭐 하는 파렴치한 짓이야! 군자는 남녀칠세부동석인 법이라고! 황족인 나는 절대 아무 여성과도 함부로 만나지 않으며 그 정절을 지켜야 할 의무가······."


"뭐? 아무 여성? 지금 이 여신님을 어디에나 널린 아무개 잡배들과 같은 취급 한 것이냐?"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침낭 안에서 언샤의 저고리 앞섬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자, 잠깐. 대체 옷은 왜 푸는 거야!"


"그래야지 네 털이랑 피부가 그대로 드러날 것 아니냐!"


언샤는 침낭 안에서 최대한 저항해보았으나 애초에 이 여신과 언샤의 권력관계란 육체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었기에, 하늘과 같은 여신이 언샤에게 어떠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 자식인 천자로서 언샤는 그를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그게 하늘과 땅이 나눈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언샤는 여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만 최대한 저항했으나 결국에는 그 과격한 행동을 전혀 막지 못했다.


"거, 사내자식이 겨우 배를 보이는 정도로 이렇게 쑥스러워 해서 되겠느냐! 배! 배를 보자꾸나!"


여신은 그렇게 말하며 결국에는 저고리 앞섬이 펼쳐져 밖으로 드러난 언샤의 배 위에 눕고, 자신의 머리를 덮을 만큼이나 침낭을 크게 덮어쓰며 침낭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그대의 배는 참으로 따뜻하고 넓구나. 털은 아주 비단보다도 더 부드럽고. 아, 참으로 극락이로다. 그대의 덩치가 그냥 쓸데없이 크기만 한 줄 알았는데, 잘 생각해 보니 침대로 쓰기엔 이만한 크기가 있을 수가 없었어."


"아! 이 얼마나 원통한가! 여신이란 자가 권력을 앞세워 이런 부당한 성희롱을 하다니. 이런 폭정은 이 세상에 더는 있을 수 없도다."


"겨우 배 위에 누운 정도로 그렇게 호들갑이라니, 기생오라비도 언샤 그대보단 사내다울 것이다."


언샤는 두 팔로 얼굴을 감싸며 마치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군자가 되어 외간 여자에게 희롱당하고 침대로 여겨졌음에도 이에 저항하지 못하다니, 이러한 굴욕은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


"······흑흑, 이젠 장가 못 가······."


"뭐, 상관없지 않으냐. 하늘은 명하고, 천자는 따른다. 그게 우리 사이의 관계이며 당연한 순리이지 않느냐. 그러니 고작 배를 보인 것만으로 마치 정조를 빼앗기기라도 한 듯이 오열하지 말거라. 우리가 남도 아니고. 다름 아닌 우리 사이 아니더냐!"


"우리 사이가 뭔데요! 우리 사이가 뭐냐고요! 대체 우리 사이에 나도 모르는 무슨 관계가 있었던 거야!"


"나와 아슬란은 천년 언약으로 맺어진 몸. 그리고 그대는 나의 낭군님인 아슬란의 후손인 아슬란족이며, 동시에 그의 화신이지 않느냐. 외모도 아슬란 본인과 아주 닮았고. 그러니 윤회란 관점에서 보면 그대는 대충 아슬란의 환생 비슷한 존재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이 여신님의 정부(情夫) 같은 게 아니더냐."


"예? 윤회요? 환생? 게다가 거기서 갑자기 정부 타령이 나와요? 저는 여신 님의 정부 같은 게 된 기억은 없는데요. 게다가 알 실라에서는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양쪽 다 금지인데요······."


언샤는 이 여신이 황제인 자신을 대체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보고 있는지 도저히 감 조차 잡히지 않았다.


권력이란 자신의 위에 선 존재는 바로 윗사람이라도 두렵게 하지만 바로 아랫사람에 대한 존중은 완벽히 잊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놈, 이놈. 잘 보니 27살밖에 안된 새파란 어린 녀석이 그 정신은 다 죽어가는 노인네나 다를 게 없는 애늙은이였구나. 네 나이의 보통 젊은 지배자들은 자기 권력을 이용해 최대한 많은 이성을 소유물처럼 삼고 가장 불순한 사랑의 형태인 애욕과 정욕을 불태우는데 모든 정열과 시간을 쏟아붓곤 하거늘. 비록 모든 나선신교에서 금지시하는 중혼이긴 하나 이렇게 아름답고 유능하며 현명한 여신과 결혼하는 데에 대체 무슨 불만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관심 없거든요. 그냥 폐왕 호해처럼 추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 것뿐이거든요. 거기에 그 유능하고 현명한 여신이란 게 대체 어디 있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뭐? 이성을 소유물로? 그런 짓을 했다간 나도 박규 놈처럼 될걸."


"유능하고 현명한 여신이란 바로 나, 루카 여신을 가리키는 말이다만. 근데 박규? 그건 또 누구더냐?"


"거 왜 있잖아. 너도 옥좌 옆에 서서 맨날 정치에 참견했으니 어전에서 본 적 있을 거 아니야. 정 3품 통정대부 박규 영감. 사자의 정수를 물려받아서 머리에 갈기가 풍성하던 당상관 말이야."


"아, 갈기가 인상 깊어서 기억하고 있노라. 그래서? 그 박규가 어떻게 되었길래?"


언샤는 이 여신도 그 박규가 어전에서 보고를 올리던 걸 분명히 같이 보았을 텐데, 같이 보고 들은 것조차 기억 못 할 정도로 대부분의 인간에 무관심한 그 태도에 새삼 놀랐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이 여신에게 있어 모든 인간은 평등했으니.


반대로 말하면 이 여신에게 있어 특별한 인간 따윈 거의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작년에 그 박규 놈이 어전에서 지난 23년간 알 실라와 우량카이 영토에서 계속된 전쟁 때문에 주로 제국 동부에서 남성 인구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운을 트더니, 그다음에는 선황이 10만 대군을 학살하는 바람에 쿠룬에는 남자가 아주 씨가 말랐다면서. 적어도 향후 100년 동안은 인구 절벽 현상을 막기 위해 그런 지역에 한해 일부다처제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었거든."


"흠, 확실히.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안될 일이나 향후 세대의 국가 발전을 위해서 인구 유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니, 이치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긴 했구나.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너도 그때 같이 안 된다고 대답했잖아. 진짜 기억 안나?"


"내가 지난 3년간 옥좌 옆에 서서 대체 얼마나 많은 일처리를 했다고 생각하느냐? 내 뇌에 그런 사사로운 일 하나하나 기억해 둘 공간 같은 건 없노라."


"아, 그러셔. 토트족처럼 완전 새대가리가 따로 없으시네. 아무튼 너도 말했다시피, 다음 세대의 제국 동부의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서는 일부다처제는 필수불가결 수준이었기에 많은 관리들이 다 같이 몇 시진 동안이나 이에 대해 격렬히 토론했고. 결국 결과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어."


"흠?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온 것이냐? 관리인 그들에게 있어서 제국의 인구가 늘어나서 나쁠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3년 전에 이 여신이 직접 쓴 농서를 모든 관아에 새로 보급한 후로 생산량도 계속 증대되는 중이니 식량 문제도 없을 것이고."


"토론 도중 한 관리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거든. 일부다처제 실시에 찬성했다는 걸 마누라에게 들키면 오늘 밤 바로 아내에게 두들겨 맞고 집에서 쫓겨날 거라고."


"······아?"


여신이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대답도 아닌 대답을 했다.


"그러자 다른 관리들도 잇달아 본심을 말하기 시작했어. 아내의 말을 거스르느니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 죽겠다고 말하는 문관에. 처에게 사자의 정수를 타고나는 아슬란족은 아주 타고난 바람둥이니 말도 섞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무관에. 자기 고향에선 아내를 여럿 들였다가 발각된 놈은 멍석말이를 한 뒤 족보에서 지워버린다고 말하는 관리도 있었고."


"······!"


"거기다 공포에 질려버린 세상을 지배하는 건 대체로 남성이지만 세상은 바로 그 남성을 지배하는 존재로 절반 채워져 있다는 걸 절대 잊지 말라고 외치며 도망치는 자도 있었고. 자신은 오늘 아파서 어전에 나온 적이 없으니 제발 여기에 있었다고 소문 내지 말아달라고, 황궁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는 걸 어머니가 알았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 제발 살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관리도 있었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어."


"아······?"


여신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뇌가 고장 난 모양이었는지 입을 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루카는 그 사건을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안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떤 대답도 못 하는 얼간이가 된 건 머릿속 한구석에 고이 모셔두고 계속 잊고 있었던 충격적인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부작용이었으리.


"반응을 보니 이제 좀 기억나나 봐? 그럼 박규가 그다음 어떻게 되었는지도 기억나겠지?"


"그래. 이제 기억나는구나. 박규 놈은 그대로 도망치듯 정전 밖으로 나갔고······. 다음 날부터 궁녀와 여의들이 모두 박규를 볼 때마다 저놈은 사자처럼 생겼다고 지가 진짜 사자인 줄 안다면서 수군대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 수군거림을 못 견디던 박규는 집에 돌아갔다가, 어머니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호적에서 이름을 파냈으니 이제 넌 내 자식이 아니란 소리를 들었지 않느냐."


"맞아. 거기에 결국 박규는 사람을 피해 혼자 돌아다니다가 결국 서울 한복판의 거리에서 수많은 젊은이들. 저놈이 감히 아내를 여럿 들이자는 소리를 했다고 하며 당연스레 화내는 아녀자들과, 지금 가족도 먹여 살리기 힘든 마당에 중혼이라니 저 인간은 남자가 무슨 종마인 줄 안다고 화내는 청년들에게······."


그 뒤 이야기는 너무 참혹하므로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러한 연유로 저희 알 실라 제국에선 중혼이 금지이며 저는 여신님의 첩 따위가 될 생각도 없으니 빨리 제 배 위에서 내려가 주시길 바랍니다."


"······아. 앗. 아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것이니라. 난 그냥 침대가 필요해서 그대 배 위에 올라온 것뿐이니라! 아무튼 시끄럽도다! 황제 따위가 여신께 명령하지 말라!"


황제 따위라니. 황제 따위라니.

너무나 부당한 폭정이자 폭거였다.


최소 6천 살은 넘은 여신이 권력을 이용해 순진한 젊은이의 옷을 헤집고 배를 차지하는 행패를 부리다니.


언샤는 울고 싶었지만 울었다간 여신이 무슨 소리를 하며 자신을 놀릴지 몰랐기에 울지 못했다.




아주 잠시 후, 언샤는 자신의 배 위에 누워 조금씩 졸기 시작한 루카에게 최소한의 저항감을 담아 화내기 시작했다.


"이 땅딸보 여신. 꼬꼬마 여신. 처음 만났을 때부터 3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땅딸막한 우리 여신님. 그때부터 단 1cm도 자라지 않다니 믿기질 않아. 도토리 키를 재봐도 너보단 많이 자랄 텐데."


"신체가 없어 육체를 수복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느냐. 다른 육체를 찾아야 힘을 회복하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그런데 그대가 3년이란 기간 동안 하찮은 인간 세상의 정치를 하기에 바빠 내 신체를 찾는 건 아주 등원시 했으니. 내 키가 1cm도 자라지 못한 건 사실상 그대 잘못이라 할 수 있지."


"웃기고 있네. 사실 제일 정치를 열심히 한 게 자기면서. 그리고 천리안으로 봐둔 위치가 있다면서 호들갑 쳐서 수많은 병사들을 끌고 성문 밖으로 나와 지정해 준 위치를 샅샅이 뒤졌는데 거기서 육체의 육자도 찾지 못했었던 건 기억 안 나? 그 사건 때문에 내가 관리들과 누나한테 얼마나 많이 갈굼 받았는지 알기나 해? 솔직히 나는 이미 두 번이나 틀렸던 전적이 있는 여신님의 천리안만 믿고 지금 이렇게 목숨 걸고 밖에 나와 무모한 여행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것 참 미안하구나.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근처에서 나의 신체 중 하나가 느껴진다. 그런데 도저히 그 정확한 방향과 위치를 알 수가 없구나. 아무래도 이곳의 신체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찾을 수 없는 모종의 방식으로 숨겨져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이곳이 알 실라의 수도이니, 분명 또 돌아올 일이 있을 테니 서울 주변에 있는 이 신체는 나중에 찾도록 하자꾸나."


"그래, 그러던지요. 자꾸 그런 식으로 추측을 덧붙여 말하는 게 계속 신뢰도를 떨어뜨리니 문제지."


언샤는 그렇게 말하며 괜히 짜증 난 김에 이것저것 얘기하며 분풀이를 했다.


솔직히 화나서 툭 내뱉은 말이 내심 여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며 걱정했지만 여신은 고작 이 정도로는 화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흥, 시끄럽다. 됐고 나는 잘 테니 베개로 쓰게 그대의 꼬리나 내놓거라!"


루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침낭 구석에 묻혀 있던 언샤의 기나긴 꼬리를 꺼내들어 배 위로 잡아당겼다.


언샤는 눈표범, 즉 산악 지대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하기에 그 무게 중심인 꼬리의 길이가 몸통 전체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길고 엄청나게 두껍도록 진화한 고양이의 정수를 타고났기에 그 꼬리 역시 아주 길고 풍성하며 또한 굵었다.


그리고 여신은 배 위에 누워 그러한 거대한 꼬리를 마치 죽부인마냥 몸으로 끌어안더니, 그 끝부분은 목 밑에 넣어 베개처럼 썼다.


"아, 참으로 따뜻한 꼬리로구나. 정말이지······ 최고다."


꼬리의 아름다움을 칭찬받는 건 아슬란족에게는 아주 큰 영광이었기에 언샤는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여신이 그것을 계속 만지며 몸으로 끌어안는 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꼬리뼈는 척추뼈의 연장선과 같았기 때문에 온갖 신경이 밀집되어 있어 감각이 아주 예민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프다고, 좀 살살 만지란 말이야."


"아, 이렇게 꼬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구나. 아슬란의 꼬리도 아주 훌륭했었지. 그런데 그대의 꼬리는 그것보다 더 훌륭하도다. 눈표범은 호랑이보다 모든 면에서 못한 짐승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더 나은 점도 분명히 있구나. 인간을 만들 때에 최대한 많은 짐승의 정수를 섞은 게 정말 잘한 일이었어······."


여신은 언샤의 꼬리가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는지 그것을 계속 쓰다듬으며 마치 세상에 둘도 없을 예술품을 손에 넣기라도 한 듯 아주 황홀해했다.


언샤는 그 모든 손놀림이 전부 고통으로밖에 안 느껴진다고 말하려다가 웬만하면 잘 웃지도 않는 여신이 아주 좋아라하는 걸 보고 그냥 아파도 참기로 했다.


어차피 꼬리가 없는 여신에게 꼬리를 만지면 얼마나 아픈지 말해봐야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할 게 분명했고.


고작 조금의 고통 정도로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거보다 더 싸게 먹히는 게 없으니.


"아슬란신이라······. 그러고보니 우리 아슬란족 신님은 대단하다면서 엄청나게 칭송하고 추켜세우며 존경을 표하는 이야기는 끝도 없이 많이 들었지만, 정작 그 아내인 너한테서 평가를 들어본 적은 별로 없네. 아슬란신은 어떤 분이었어?"


언샤는 아슬란신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옛날부터 신을 직접 만나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질문이 갑자기 생각나 그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카는 꼬리를 계속 만지다가 언샤의 질문을 듣고는 그 큰 자색 눈망울로 언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낭군님 말인가? 사실 잘 모른다. 기억이 대부분 날아가서 얼굴만 기억나고 어떤 성격이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거의 기억이 안 나는 게야."


"뭐? 기억도 잘 안 나면서 낭군님 낭군님 하면서 좋아했던 거야?"


"아니, 당연한 거 아니더냐. 다름 아닌 이 여신님이 직접 선택한 배필이로다. 그렇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잘생기고 착하고 아무튼 세계에서 제일 가는 호걸이었던 게 분명하지 않느냐. 뭐 사실 외모만 보면 그대랑 많이 닮았으니 신보단 짐승 그 자체인 외모였기에 잘생겼다 뭐다 평가할 수 있는 외모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억은 없지만 막연히 남아있는 인상과 느낌 속에서, 내가 그를 아주 깊이 사랑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사랑의 여신에게 사랑보다 중요한 기준이 무엇이 있겠느냐."


"그 말 3년 전에도 했었던 거 같은데. 더 구체적인 기억은 없어? 만나게 된 계기나 좋아하게 된 계기 같은 거. 루카신과 아슬란신의 연애담을 담은 전설이 많긴 한데 전설은 전설일 뿐이잖아. 나는 본인의 경험담이 듣고 싶은 거라고."


"그러니까 바로 그게 기억 안 난다고 하지 않으냐. 자세한 얘기가 듣고 싶으면 어서 내 다른 신체를 찾아내거라! 뭐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딱 하나는 참 인상적이었기에 기억에 남는구나. 밤에 침대에 누워 그 크고 아름답고 굵은······."


"전 그런 얘길 들으려고 물어본 게 아닌데요?"


"······꼬리를 베개로 쓰면 참으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던 걸 기억하고 있다."


"꼬리 얘기였냐고!"


"그럼 사람 몸에 크고 아름답고 굵은 게 꼬리말고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이냐? 그런 고로 그대의 꼬리도 이 여신에게 헌상하라! 그대의 이 훌륭한 꼬리 베개만 있다면 그 어떤 오지에서도 아주 편히 잘 수 있겠구나!"


여신은 그렇게 말하더니 그대로 언샤의 꼬리를 베개 삼아 잠들어버렸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자지 못했다는 말은 정말이었는지 여신은 이번에는 아주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언샤는 아주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여신을 내려다보며 아주 복잡한 기분에 잠겼다.


일단 여신을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솔직히 아주 무거웠다.


여신은 아까 자신의 몸무게가 27kg이라고 했고 이는 사람의 몸무게로 치면 아주 가벼운 중량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배 위에 올려놓고 잠을 청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무게였다.


거기에 더해, 사람 배 위에 고양이가 골라가서 자는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고양이 배 위에 여신이 올라와서 잔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기에, 그 아주 기묘한 모습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잠이 전혀 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사실 언샤는 오늘 밤 원래부터 한숨도 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여러 요인이 많은 점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긴 했지만. 그럼에도 배와 꼬리 위에 무거운 걸 올려놓고 그 고통을 견뎌야 되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기에 참으로 괴로웠다.


언샤는, 어차피 잘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혼자 생각에 잠겼다.


전설에 따르면 아슬란신은 다른 성신들처럼 수천 년 전 호압사에서 저 우주로 다시 떠났다고 했다.


성신 중에 부부나 연인 관계였던 신이 더 있는지 없는지는 역사학자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였지만, 어쨌든 아슬란신과 루카신이 부부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방금 전에도 여신 본인에게 증언을 들었기도 하고.


그렇기에 언샤는 그 이야기에 여러 의문과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슬란신은 대체 왜 자신의 배필인 루카신을 내버려 두고 혼자 우주로 떠난 것인가······.


루카가 이 지구에 남은 것은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과 자비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렇다면 아슬란신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이유로 같이 남을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아슬란신은 대체 왜 자신의 아내가 3천 년 간이나 12조각으로 나뉘어 봉인되어 있었음에도 여신을 구해주지 않았던 걸까?


아슬란신이 이 지구에 단 한 번이라도 돌아왔다면, 아내가 위험에 처했음을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금술이 안 좋거나 불화가 있어 갈라졌다고 보기엔 이 여신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편을 너무 긍정적이며 좋게 평가했다.


두 신이 사실 서로 사랑하지 않았을 거란 가정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왜 아슬란신을 포함한 어떤 성신도 다시는 이 지구에 돌아오지 않은 것인가?


12 인간종은 모두 신의 피를 물려받은 자손들이었다.


아무리 저 우주가 드넓고 위대한 가치를 퍼뜨리기 위해선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해도 저 성신들처럼 덕이 높다는 존재들이 3천 년간이나 자기 자식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건 또 말이나 되는가?


자신의 창조물을 걱정해 다른 모든 신이 떠났음에도 홀로 이 지구에 남은 여신, 그리고 영원토록 돌아오지 않는 다른 신들. 이 드넓은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건, 대체 어떠한 기분일까.


모든 성신 중 홀로 남은 외로움, 자신과 같은 존재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슬픔, 그 기억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육체 또한 조각조각 나 하찮은 인간보다도 나약해진 건 또 어떠한 기분일까.


자신은 그러한 여신을 감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여신도 한낱 인간인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두 사람이 이 위험천만한 대륙 전체를 여행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일 테니, 자신은 이 여신의 유일한 조력자로서 여신에 대해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여신에게 있어서 자신은 어떠한 존재일까?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남편과 닮은 화신이라니.


언샤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으며, 그 사람과 아주 닮았을 뿐인 타인이 자신 앞에 나타나게 된다면.


왠지 아주 기분 나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신에게 있어 언샤는 그저 한없는 애증의 존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언샤를 계속 자신보다 낮은 한낱 황제에 불과하다고 하대하면서도, 그럼에도 계속 말을 걸며 친한 척하며 들러붙는 그 모순적인 행동과 심정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외로운 것이리.


그렇기에 언샤는 별을 올려다보며, 저 우주 어딘가에 있을 아슬란신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아슬란신과 닮았다는 자신의 존재가 아주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이 여신의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제발 아슬란신께서 돌아오셔서 이 망할 여신을 데리고 우주로 떠나주면 좋을 텐데.


언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언샤의 그러한 마음이 닿았는지, 잠든 여신이 잠꼬대를 하며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아슬란······."


여신은 낭군님에 대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래, 내가 바로 아슬란······족의 언샤라고."


언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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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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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문유관 7 - 개꿈의 반대말은 고양이 꿈 +6 21.05.27 48 1 29쪽
30 사문유관 6 - 세상 모든 힘 21.05.27 27 1 34쪽
29 사문유관 5 - 늘어선 세계 21.05.26 26 0 27쪽
» 사문유관 4 - 내가 바로 아슬란 21.05.26 29 2 25쪽
27 사문유관 3 - 한혈마 아할 테케 21.05.25 67 1 27쪽
26 사문유관 2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21.05.25 36 1 17쪽
25 사문유관 1 - 사람 사는 세상 +2 21.05.24 43 2 24쪽
24 호질 완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2) 21.05.23 31 1 25쪽
23 호질 23 - 창귀들의 노랫소리 21.05.23 35 1 20쪽
22 호질 22 - 비취와 청금 21.05.22 32 1 12쪽
21 호질 21 - 가장 아름다운 꽃은 21.05.22 31 1 11쪽
20 호질 20 - 호랑이가 꾸짖었다 (2) 21.05.21 35 2 16쪽
19 호질 19 - 호원(2) 21.05.21 31 1 31쪽
18 호질 18 - 호원(1) 21.05.20 31 1 29쪽
17 호질 17 - 기호지세 21.05.19 39 1 31쪽
16 호질 16 - 거사 21.05.19 38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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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호질 13 - 용의 꼬리 21.05.17 47 3 23쪽
12 호질 12 - 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1.05.17 38 2 29쪽
11 호질 11 - 사사로운 인간사 21.05.16 47 2 17쪽
10 호질 10 - 나찰사냥꾼 21.05.16 47 3 27쪽
9 호질 9 - 해후 21.05.15 54 2 20쪽
8 호질 8 - 박제가 되어버린 여신을 아시오? +2 21.05.15 52 1 18쪽
7 호질 7 - 세상 끝의 불꽃 21.05.14 63 3 29쪽
6 호질 6 - 종이호랑이 21.05.13 144 4 37쪽
5 호질 5 - 청컨대, 이제 더는 21.05.12 211 6 25쪽
4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21.05.12 134 6 23쪽
3 호질 3 - 호랑이가 꾸짖었다(1) +4 21.05.12 153 4 16쪽
2 호질 2 - 바보 황태자 +2 21.05.12 245 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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