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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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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연재수 :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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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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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7쪽

호질 6 - 종이호랑이

DUMMY

4.


반주일(6일) 후.


한 주의 절반인 6일간이나 좌의정의 국장을 상주로서 총책임 진다는.

자신과는 평생 인연도 없어 보이는 대사를 관리 감독하게 되는 일을 했었던 언샤는 말 그대로 녹초가 되어 태자궁의 한 가운데인 태자방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해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해본 적도 없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며.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하지도 않는 일을 대체 세상 누가 제대로 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언샤는 황태자가 되어서 고작 그런 것도 못한다는 이유로 관리들에게 눈칫밥을 먹으며 길고 긴 엿새를 보냈다.


언샤는 당장이라도 방 한가운데에 이부자리를 깔고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그럼에도 언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가부좌를 틀고 태자방 정중앙 자리에 앉아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정도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적어도 이 넓지도 않은 태자방에 창을 들고 나란히 서 있는 6명의 경갑사(京甲士)들의 존재를 잠시라도 잊을 수가 있으니.


그에 더해 그들은 언샤가 명상을 하고 있는 걸 그냥 앉아서 조는 것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명상을 하는 것만으로 언샤는 그들의 의심 또한 사지 않는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대체 역사상 어느 황실, 어느 황태자의 방에 그러한 자들이 있었겠는가.


저들은 하루 12 시진, 한 달 24일, 일 년 288일 내내 황태자가 가는 곳 모든 곳을 따라다니며 언샤를 감시한다.


대역 죄인을 지키는 옥졸들도 그렇게까지 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명목상으론 황제에겐 적이 많으니 그 자식인 황태자를 지키는 자는 그만큼이나 철두철미해야 한다는 이유였으나.

종이호랑이만도 못한 바보 황태자를 납치하거나 암살하려 드는 멍청이가 세상천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할 리가 없었으니.


그들 경갑사의 존재 가치는 오로지 황태자 언샤가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황태자라는 직책을 달고 있음에도 고작 뒷간에 가는 일조차 이들에게 보고해야 하는 삶을 10년이나 이어나가는 심정은 참으로 비참했다.


언샤의 인생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몇 달이나 몇 년에 한번 여러 갑사나 무관들 사이에 섞여 전장에 따라가 황제의 미친 학살극을 지켜보고.

그다음 돌아와서 감옥만도 못한 태자방에 앉아 그저 허송세월하는 것뿐.


언샤가 황태자로 책봉된 지 5년 정도의 기간이 지났을 때인 5년여 전부터.

그가 아버지인 판테라 황제를 닮아 무럭무럭 자라 그 기골이 아주 장대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단 하루도 지긋지긋한 감시에서 벗어나 본 기억이 없었다.


그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자유라곤 명상을 하거나, 서책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자유밖에 없었지만.

서책이라고 해봤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종교나 학문에 관련된 서적은 모두 금지였으니.

그가 읽을 수 있는 책은 대부분이 허무맹랑한 전설에 관한 책이나, 혹은 민가에서나 인기 있을 법한 유흥 소설이나 애들이나 읽을 법한 동화나 우화가 전부였다.


그런 쓰레기들을 매일 같이 읽다간 뇌가 녹아버릴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언샤는 자신이 처한 이 처지를 잊기 위해, 이 역겨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무아(無我)를 실현하기 위해 명상을 하며 자신의 내면과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깊이 명상을 하며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생각이라는 모순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쯤.


태자방의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그곳으로 들어왔다.


아슬란족 여인.

검은 흑발에, 전체적으로 체모가 아주 적은 체질.

검은 표범의 귀와 꼬리를 달고 있었지만 온몸에 털이라곤 귀와 머리카락과 꼬리 정도에 밖에 없었다.


긴 머리칼 일부를 뒤로 묶어 은으로 된 비녀를 단정히 틀었으며, 백옥 같은 그 얼굴은 짐승보다는 신의 것에 가까웠다.


지체 높은 신분인지 입고 있는 검은 비단 치마저고리, 장삼이라 불리는 옷은 아주 기품이 넘쳤으며, 장삼의 옷고름에는 황금으로 된 꽃 장식을 꽂고 있었다.


양갓집 규수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기품 넘치는 여인이 한 손을 들어 손짓하자.

태자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6명의 경갑사들이 바로 문밖으로 걸어나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여인은 품 속에서 부채와, 화려한 은빛 장신구를 하나 꺼내들었고.

익숙한 솜씨로 부채를 펼쳐들었다.


학과 태양의 모습이 새겨진 부채의 단면은 흔한 닥종이가 아닌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부채가 아닌 철선(鐵扇)이었다.


그리고 여인이 은빛의 장신구를 둘로 분리하자, 그 안에서 날카로운 비수의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잘 재련된 은장도(銀粧刀)였다.


황태자는 마치 그 여인이 자신의 앞에 섰다는 것도 모르는 듯이, 여전히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묵묵 부동하며 명상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러자 여인은, 그 자리에서 마치 춤추듯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자루의 은장도와 한 자루의 철선을 들고 움직이는 무예는 마치 아름다운 부채춤과도 같았다.


여인은 그렇게 아름다운 춤을 펼치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황태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철선이 휘둘러졌다.


무엇이든 꿰뚫을 수 있도록 날카롭게 손질된 철선의 단면이 황태자의 목을 쳤다.


본래라면 황태자의 목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어야 했을 터이나.


황태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부동한 채 검지와 중지 단 두 손가락만으로 얇은 철선을 잡아 이를 막아내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황태자는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알 수도 없을 아주 짧은 시간 만에, 태자궁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그리고 철선에 이어, 은장도의 칼날이 황태자를 향했다.


칼날을 휘두르는 그 동작은 아주 절도 있고 군더더기가 없어, 이를 휘두르는 여인이 아주 많은 수련을 쌓아온 실력자라는 걸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황태자는, 아슬란족 답게 그 손톱을 꺼내 칼날을 막았다.


마치 두 개의 칼날이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강철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여인은 몸을 크게 뒤로 물려 황태자에게 잡힌 철선과 가로막힌 은장도를 빼낸 후, 그 자리에서 천장을 향해 뛰어올랐다.


여인은 별로 넓지도 않은 방이 자신의 무예를 펼쳐보이기에 전혀 불편하지도 않은지.

벽을 밟고, 그 후 천장, 그 후 다시 벽을 밟고 세 번 도약해 하늘로부터 황태자를 습격했다.


이번에 황태자는, 고작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 그 강습을 피했다.


마치 곤두선 감각만으로 주변 모든 공간을 다 파악해 어느 곳으로부터 공격이 오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 계속해서 합을 겨뤘다.


같은 아슬란족.

성별에 따른 신체능력 격차는 그리 크지 않다.


무기를 가진 여성과 손톱과 송곳니만을 가진 남성의 대결이라면 보통 무기를 가진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그리 정상적이지 않았다.


오랜 수련과 단련으로 완성된 여인의 기술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단 야수의 것에 가까운 황태자의 반사 신경과 시력, 청력에 모두 읽히고 있었으며.


무기로 인한 압도적인 공세의 유리함도 마치 강철과도 같은 손톱과 어마어마한 근력 앞에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인간이 거대한 곰에게 덤비는 것과 같아, 두 사람은 같은 종족의 같은 인간이었음에도 마치 태생부터가 다른 듯 그 격차가 도저히 좁혀지질 않았다.


여인은 선공과 습격, 그리고 무기에서 오는 유리함을 이미 잃었음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그 화려한 무예를 펼치며 계속하여 황태자를 압박해왔다.


아무리 신체능력에 압도적인 격차가 있더라도 무기를 가진 자가 계속해서 공세로 밀어붙이자 황태자는 이를 막고 흘려내는 것 이외엔 어떤 수도 쓸 수 없었다.


그렇게 수십 합이 오갔다.


은장도와 철선과 도약력을 사용해 모든 신체의 힘을 활용하는 그 변칙적이고 변화무쌍한 무술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궤도로 황태자의 급소를 노려왔으나.

황태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으며 이 모든 공격을 손톱과 손목만을 사용해 모두 쳐냈다.


이윽고, 계속해서 손톱과 맞부딪힌 은장도에선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수십 합을 계속해서 공세를 주고받은 끝에 결국은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야 말았다.


잘 재련된 강철이 한낱 생물의 손톱에 부서지는 광경은 쉽사리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태자는 강철 칼날이 손톱에 부러지며 날아가 천장에 박히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잠시 눈이 팔린 여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그 상체에 올라타 마치 맹수처럼 목에 그 손톱을 들이밀었다.


조금만 그 팔에 힘을 주어도 여인의 목은 달아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혈관에서 피가 터져 나와 못 볼 꼴을 보이며 죽을 게 분명했다.


"좋아, 항복. 아주 완벽해. 내가 졌어."


쓰러진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


"······."


여인의 말에 손톱으로 목을 노리고 있던 언샤는 그 손톱을 마치 고양이처럼 손가락 내부로 집어넣었고.

퉁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야, 아야. 허리야. 너는 어떻게 이런 요조숙녀를 바닥에 넘어뜨려서 위협할 생각을 다 하니, 진짜 야만적이구나."


"······."


아주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여인의 말투에도 언샤는 여전히 묵묵부답했다.


"뭐야? 삐졌어? 삐진 건 바로 이 누님이란다, 어떻게 된 녀석이 몇 달을 원정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그대로 장례식 상주 선다고 또 반주일 동안이나 안 보일 수가 있니. 아주 태도가 글러먹었어. 궁에 돌아왔으면 이 누님부터 바로 뵙고, 그간 제가 없는 동안에도 강녕하셨습니까하고 문안 인사부터 올려야 할 거 아니야!"


"······그게 이번에 가만히 있는 사람 방에 쳐들어와서 칼부림을 한 변명이야?"


언샤가 뿌루퉁하여 대답했다.


"그렇단다. 궁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럴만한 명분 없이 이런 짓을 벌이면 안 된단 말이지. 그리고 고작 황태자 따위가 공주 전하께 문안을 올리지 않은 건 옛날 같았으면 그야말로 바로 목이 달아날 정도로 중죄였으니. 이 정도면 명분으론 아주 충분하며 넘칠 수준이라 할 수 있지."


"그럴 리가 없잖아. 애초에 황태자가 공주보다 높다고. 황태자는 엄연히 황제 바로 다음 자리인데 태연하게 자기 아래 서열로 놓지 말란 말이야."


"그치만 이 누님은 너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더 먹었단다. 내가 공주 작위를 받은 것도 네가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이고. 이렇듯 짬도 한참 앞서고 나이도 더 많은 어른인 내가 어떻게 너 같은 꼬꼬마에게 황태자 전하~ 하고 존대해 줄 수 있겠니."


실없는 헛소리나 하면서 배시시 웃는 여성은 언샤와 전혀 닮지 않은 외모이지만 엄연히 그의 친누이인 파르다 황녀였다.


황녀는 바로 반주일 전까지 이 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권위와 권력을 갖고 있던 제국의 실세 중 한 명이었으며.

서열 두 번째였던 고이가 저승으로 떠난 지금은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황족 다운 진짜 천손이었다.


"꼬꼬마라고······. 겨우 내 허리춤을 조금 넘는 정도 수준인 키면서, 키가 10척, 즉 3m를 넘는 나를 꼬꼬마 취급하다니······."


"사람의 크기는 겉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내면에 있는 법이란다. 우리 귀여운 언샤 황태자께서 황상을 닮아서 무식할 정도로 덩치가 커도, 그 떡대 안에 든 게 고작 이런 일로 삐지는 소인배의 옹졸한 마음이어서야 평생 소인이 아닌 대인으로 대우받기는 글러 보이는걸?"


"고작 이런 일? 사람 목에 칼을 들이밀어 놓고 고작 이런 일이라고? 누나의 끝도 없는 장광설을 더는 들어줄 생각 없으니, 오늘은 무슨 용무로 쳐들어 온 건지나 말해."


언샤가 한 그 말에, 언샤의 팔을 쿡쿡 찌르며 실없이 웃던 파르다 황녀는 갑자기 그 웃음기를 싹 걷어버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 일단 오늘의 대련과 네 무예 실력, 아주 완벽했어. 고작 5년 전만 해도 내 목검도 못 피해서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서야 끝날 정도였는데, 5년이 지난 지금은 이제 내가 진검을 들고도 네게 단 한 번의 공격조차 성공시키지 못할 정도라니. 그 사이에 덩치만 산처럼 커진 게 아니라, 그 실력도 일취월장해 이제는 이 제국의 어떤 강자를 데려오더라도 네 털끝 하나 다치지 못하게 할 정도가 되었구나."


"겨우 이 정도로 나한테 이길 자가 없다니.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아니, 너는 이제 이 누님 따윈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 수준이 됐으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이래 봬도 이 공주 전하님의 무예는 지난 15 년간 계방(桂坊, 태자교육담당기구)에서 제국의 수많은 이름난 무술가와 승병들을 스승으로 초빙해 쌓아 올린 것이거든. 이 황녀님은 이래 봬도 엄청난 신동이라, 문예에선 수십의 스승이 눈물을 흘리며 절필하도록 만들었고, 무예에선 수십이나 되는 스승의 엉덩이를 두들겨주고 짐 싸서 돌려보낸 경험이 있을 정도란다."


"자기 입으로 자기를 그렇게 띄워줄 수 있다니,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너무 부러운걸."


언샤는 짜증 섞은 말로 자기 자신을 밑도 끝도 없이 추켜세우는 파르다 황녀의 과감한 발언을 지탄했으나.

황녀가 직접 한 그 발언 중 어떠한 것도 거짓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활 공간이 분리되어 있고 사는 삶 자체가 다르다 해도 궁궐은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이며.

그곳에 수천에 가까운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는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그리고 작은 사회에 완전한 비밀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특히 다른 관리들 앞이면 몰라도 황태자 앞에선 전혀 입조심이란 걸 하지 않는 궁녀들이나 경갑사 호위들이 황녀에 대해 떠드는 소문을 언샤가 듣지 못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동생의 무예가 이 천재적인 황녀를 뛰어넘어, 마침내 저 하늘에 미칠 정도가 되었으니. 지난 십 년 가까이 천천히 준비해온 거사를 드디어 실행할 때가 된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판단했단다."


"또 그 얘기야?"


대체 몇 년 전일까, 대충 8년 전쯤이었을까.


히르카니아 폐황태자가 그렇게 죽고 나서, 2년 정도가 지났을 때쯤.


다음 황태자로 책봉된 언샤는 2년간이나 그저 태자방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미칠 것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시절.


인고를 씹고 있을 뿐인 그 어느 날 태자방의 천장 지붕을 뚫고.

먼지투성이인 누이 파르다가 천장에서부터 떨어지다가 고양이처럼 사뿐히 방안에 안착했다.


당시에는 태자방 안까지 호위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파르다는 문을 지키고 있는 호위를 뚫기 위해 건물 밖에서부터 지붕 아래 나무판자를 뜯어낸 뒤 기와 밑 공간을 타고 방안으로 침투한 것이었다.


마치 자객과도 같은 방식이었다.


2년 만에 만난 누이는 깜짝 놀란 언샤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 하나를 세워 쉬하고 내뱉더니.

먼지투성이인 치마저고리를 털고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나직하고 작지만 그럼에도 작고 명료하게, 겁먹어 떨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내 동생 언샤야. 잘 듣거라! 황상, 그러니까 우리의 아버지인 아바마마는, 아주 나쁜 사람이란다. 황상은 우리 가족인 히르카니아를 죽였으며, 또 수없이 많은 죄 없는 백성들을 학살하며 혹세무민하고 있지. 우리는 천손으로서, 그러한 만행을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될 의무가 있단다. 그러니 우리 같이 반정을 일으켜 거사를 실현하고, 우리가 직접 황제가 되어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자꾸나."


어린 날의 누이는 아직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아이 같은 목소리 때문에 위엄이라곤 전혀 없었음에도 거기에 담긴 큰 뜻만큼은 헤아릴 수 있는 강직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파르다 황녀는 자신을 총애하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황제를 이용해서.

궁궐 내에서 자신의 자리와 위신, 권세를 늘려나가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신하들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3년이 지나자 황녀의 권세는 비록 황제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럼에도 한 명의 소패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드높게 되었다.


황제는 전쟁과 반천제 실현에만 관심이 있으며 그 외 모든 사항에 일절 아무런 흥미가 없어 궐내의 관리들이 무엇을 하든 어떠한 눈길조차 주지 않은 것도.

일개 황녀가 황태자나 수많은 당상관들을 따위로 만들 만큼 많은 권력을 갖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


그러고는, 황녀는 황제가 자신을 총애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딸이기 때문에 자신이 남성 신인 아슬란신의 화신이 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화신이 될 자격이 조금이라도 있는 언샤가 히르카니아 황태자처럼 그 재능을 내보이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화신의 아들다운 모습을 보일 경우.


똑같이 죽임 당하는 미래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쩔 수 없이 궁궐과 황도에 바보 황태자에 대한 소문을 지어내 퍼뜨렸다.


황실에 대한 엄한 소문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 소문을 주워 더 자극적이고 황당한 것으로 부풀렸고.


어느새 소문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 덩치를 키워 황도 서울에서 바보 황태자 언샤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모를 정도가 되었다.


황녀의 천재성과 이름과 위세가 드높아질수록, 황태자의 무능함과 바보 같은 점은 더욱 조명 받게 되었다.


그렇게 두 천손은 완벽히 대비되는 빛과 그림자가 되어 천재 황녀와 바보 황태자라는 알기 쉽고 명쾌한 은유가 되었다.


그리하여 황녀는 5년여 전부터.

그 위세가 고작 손을 까딱이는 정도만으로 이 방에 있는 모든 경갑사를 물러나도록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경갑사들은 천재 황녀가 바보 황태자에게 무얼 하든, 어떤 걸 가르치든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게 되어 이곳에서의 밀담과 밀회가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없게 되었다.


황족 남매가 친하게 지내겠다는데 굳이 말릴 명분이 없기도 했고.


그렇게 황녀는 5년이라는 기간을 들여 자신이 총애하는 여러 무관들과 살수, 또 황녀 자신을 대련 상대로 활용해 언샤 앞에 내세웠으며.


화신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았기에 태생부터 인간답지 않은 무골을 타고난 언샤를 언젠가 황제의 목을 찌를 비수로서 단련시켜왔다.


그렇게 5년.

언샤는 수많은 무관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이젠 궁궐에 있는 사람 중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 중 가장 강하다는 황녀마저 마치 아이처럼 갖고 놀 정도가 되었다.


황녀는 지금이야말로 8년간 쌓아온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드디어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될 때라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그를 시험하고자 오늘 밤 황태자의 앞에 선 것이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지금,

이제 황태자의 무예는 하늘에 이르렀으며.

황태자의 그 뜻과 기상은······


"거사? 8년 전에 말했던 그거? 아직도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어? 당연히 진작에 포기하고 거사 얘긴 그냥 나랑 놀려는 핑계로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주 작고 옹졸했다.


언샤는 거사 얘기 따윈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 눈표범을 닮은 둥근 귀에서 귀지를 파내 입김을 불어 날려보냈다.


"누나, 이제 그런 어린 날의 치기 같은 건 잊어버려. 곧 서른이잖아. 혼담도 계속 나오고 있고, 자기 인생 생각하기도 바쁜 시기에 무슨 백성들 걱정이야. 그러니 반정 같은 걸 할 생각은 그만두고 누님은 좋은 남자 만나서 내 조카라도 낳고 그냥 행복하게 잘 살 생각이나 하는 게······."


"동생아. 제발.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너를 바보라 비난해도, 너는 바보가 아니잖니."


"아니, 나는 바보인데. 옛말에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해서, 세 사람이 굳게 믿고 말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더러 바보라고 하고, 나도 내가 세상에 둘도 없을 바보 천치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바보인 게 맞아. 그리고 누나는 그 바보의 바보 누나고. 세상 둘도 없을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이 지구에서 가장 강한 화신인 황상을 죽이고 황위에 오르자는 개같이 멍청한 소리는 안 할 텐데 말이지."


언샤는 그렇게 말하고는 누나 덕분에 오랜만에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 바닥에 누울 수 있어 편하다며.

그 자리에 옆으로 드러눕고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언샤······. 당장 일어나 앉지 못하겠니."


"누나. 제발, 그놈의 반정 얘기는 누나를 좋아해 주는 다른 신하들이랑 해줘. 궁녀부터 관리들, 갑사들까지. 다들 황녀님~ 공주 전하~ 하면서 흠모하는 말만 쏟아부으며 좋아라 하는 걸 보니 아주 간까지 빼줄 기세 더만. 굳이 나 같은 놈한테까지 반정 얘길 안 해도, 혼자서 아주 잘 할 수 있잖아. 반정이 당연히 실패하고 다 죽고 나면 내가 매년마다 성묘 가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혹여나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서 반정이 성공하면 나는 귀양이라도 가서 아무도 없는 섬에서 편하게 지낼 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빠진다고 바뀔 게 전혀 없어 보이니 난 그냥 빼줘."


파르다 황녀는 그 무엇도 배우고 접할 기회가 없는 언샤에게 있어 수많은 무술과 학문을 가르쳐준 유일한 스승이자 부모이며 또한 가장 소중한 가족인 존재였으나.

그게 언샤가 황녀를 존경하며 따를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저 베풀어주기만 한다고 해서 복종심이 생긴다고 하면, 세상 수많은 불효자들이 대체 왜 생겨났겠는가.


배은망덕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거늘.


하지만 황녀는 바닥에 누운 동생의 그런 무례한 태도에도 화내지 않고, 자신의 손 크기의 두 배쯤은 되는 거대한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말했다.


"언샤 너, 지난번에 좌의정 고이가 죽을 때, 그 자리에 있었잖아. 그 사람이 죽을 때 한 말 기억 안 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끝에 결국 후회밖에 남지 않았고, 삶의 마지막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한 우국(憂國)의 정신을 보고도. 그리고 좌상을 충신으로 인정하면서도, 결국에는 죽여버리는 황상의 모습을 보고도. 너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거야? 네겐 사람다운 마음이 없어?"


황녀는 언제나 활짝 웃기만 하는 평소 태도와는 어울리지도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지, 나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 그래서 뭐? 난 우의정이 매일 아첨만 일삼는 간신배라는 이유로 죽을 때도 거기에 서있었고. 또 영의정이 어전에서 웃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을 때도 거기에 서있었고. 거기에 황제가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여 그곳의 사람들을 반천제라는 명목으로 학살할 때도 거기에 서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폐황태자가, 히르형이 아무 이유도 없이 불타 죽었을 때도, 거기에······ 서있었지. 그저 병풍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언샤는 마치 넋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며 두 동공을 떨뿐이었다.


"언샤야. 네가 많은 걸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을 느꼈던 건 나도 잘 알지만, 이번에는 그때와 다르단다. 시국이 바뀌었어. 우량카이 제국을 정복하는 걸로, 그리고 고이가 죽는 걸로. 많은 게 격변했단다."


황녀는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을 억누른 인내가 가득한 목소리로 씹어내듯이 말했다.


그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누워서 천장의 얼룩 숫자나 세고 있던 언샤에겐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에.

언샤는 누이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생각나는 대로 계속 내뱉었다.


지난 십 년간, 계속해서 참기만 했던.

그 누구도 듣지 못한 속내를 모두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뭐? 내게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좌의정 고이는 히르카니아 형을 죽인 놈이야. 그리고 그런 쌍놈이 10년이나 지난 이제야 와서 미안하다며 자기 멋대로 사과하고, 자기 멋대로 후회하더니 픽 죽어버렸지. 그러고는, 나한테 미리 귀띔 한 번 안 해줘 놓고, 갑자기 세상을 바꾸라느니하는 헛소리를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했어."


언샤는 호랑이를 닮은 송곳니를 갈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바보인 척, 그 자리에 없는 척,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데. 그 한 마디 때문에 황상은 몇 년 만에 다시 내게 눈길을 줬다고. 나는 그런 식으로 황제의 관심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야말로 최악이었지. 고이 그 인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 내 인생을 철저히 망치고 엿 먹이고 자기 멋대로 떠나버린 놈이야. 그런데 그런 놈이 죽었으니 슬퍼하라고? 그런 놈이 우국지사라고? 서당 개도 어전 앞에 삼 년을 서면 그런 개소리는 안 지껄이게 될 거야."


"······."


황녀는 거기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샤는 그 침묵에 더욱 분노가 끓어올라.

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좌상은 히르 형을 죽인 놈이라고! 그리고 반천제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데 동조한 놈이지. 그런 놈이 죽었는데 대체 어디에 슬퍼할 건덕지가 있어? 드디어 인과응보를 맞은 것뿐이야. 머리가 터져죽는 걸 보니 아주 속이 시원하더라. 근데 그런 놈이 이제 와서 착한 척하며 갑자기 나라를 바꿔달라니 뭐니 말해봐야 아무 감흥도 없거든요? 창귀는 대체 무얼 하나 싶지. 그런 쓰레기들을 진작에 싹 다 잡아가질 않고."


하지만 언샤의 분노가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자이자 원흉인 황제를 향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 짓을 해봐야 무의미한 것이다.


황제를 향해 화를 낸다면.

화를 내서 분노가 풀리기도 전에 먼저 언샤의 머리가 터져죽겠지.


그렇기에 황태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고작 황제의 앞잡이이자 대리자이며 대호의 꼬리인 한낱 여우에 불과했던 고이를 이 악물고 죽어라 욕하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우리 동생은 누나에게 참으로 할 말이 많았는데. 그동안 대체 어떻게 내색도 안 하고 그렇게 참고 있었던 거야?"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꺼낸 황녀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동생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잖니.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서로의 잘잘못을 비난하기 바쁜 이 순간에도. 대륙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소에서 반천제가 실시되고 있고,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어. 너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잖니?"


황녀의 그 말에, 언샤는 마치 가슴을 칼로 찌르는 듯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것은 죄책감인가, 아니면 책임감인가, 그게 아니라면 양심의 가책인가.


그 묘한 기분은 무엇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나.


언샤는 자신의 마음속 끓어오르는 그 감정에 자신을 맡겼다간.

자신에게 찾아올 말로가 대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낡은 분노에 다시 자신의 마음을 맡겼다.


"그래서, 뭐? 지난 23년간 이미 수십만이 죽었어. 지금 와서 무언가를 바꾼다고, 이미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야. 그리고 지금 와서 그만큼 더 죽는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지도 않겠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살 사람들은 계속 살아간다는 걸 이 대륙의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까. 인간 따위 아무리 죽어나가도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아버렸으니까."


"아냐, 동생아. 사람은 모두 고귀한 존재란다. 아무리 이미 많은 사람이 죽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생명을 살리는 데에는 가치가 있어."


"그래, 사람은 모두 고귀하지. 그리고 누군가는 사람이 고귀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할 수 있기도 하고."


결국 명분은 명분일 뿐.

같은 명분이 있어도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지 정하는 것은 명분이 아닌 그 사람의 선택이었다.


누이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고.

황상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일뿐.


"애초에, 왜 하필 나인 거야? 누나를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나 널렸고, 나 같은 놈을 굳이 이렇게 단련시키고 포섭하고 회유하지 않아도 황제에게 거스르려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이 세상에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 고작 명분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자,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자. 그런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은 세상에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아니, 동생아.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황제의 목을 칠 비수는 세상에 단 하나, 언샤 너뿐이야. 너도 잘 알잖니?"


"아니! 그런 거 몰라. 남이 하지 못하는 건 나도 못해.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따위,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세상에 특별한 인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아니, 너는 특별한 인간이야. 세상 모든 사람은 특별하지만, 너는 그중에서도 더욱 특별하단다. 아슬란신과 똑같은 남성이며, 인간을 초월한 신체 능력에, 타고난 무골, 그리고 그 덩치. 화신인 판테라 황제와 가장 닮았으며, 그 피를 가장 짙게 물려받은 존재. 황제의 유일한 역린이자, 지금 시대의 아슬란족 중에서 판테라와 함께 단둘밖에 없는, 화신이 될 그릇을 갖고 태어난 자. 너도 알다시피, 화신은 한 시대에 단 한 명만이 존재할 수 있어. 만약 다른 화신이 나타난다면 원래의 화신은······."


아무리 자신의 의견을 내뱉어도.

결국에는 완강하게도 원점으로 돌아와버리는 그 논리에 아주 질려버린 언샤는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주먹으로 마루를 내리쳤다.


마루는 그대로 산산조각 나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제발! 그 되도 않는 소리 좀 그만해. 그걸 누나가, 나에게 대체 몇 번이나 강요하며 가르쳐왔는지 알아? 나는, 내가 화신이 될 수 있다는. 그 말이야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분노가 마치 사자후처럼 튀어나왔다.


아마 태자궁 근처에 있던 자 중에, 그 외침을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경갑사들이 대체 무슨 일인지 살펴보려 다가왔기에 방문 근처를 서성이며 문 앞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언샤는 목소리를 낮추지 못하고,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동생아, 너는 왜 누이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화만 내는 거니. 네가 강하며, 용기 있는 존재이며, 무엇이든 견뎌내며 이겨낼 수 있고. 그 기개가 마치 호랑이와 같다는걸.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



용기? 스스로 잘 안다고? 웃기지 마!


아슬란 신은 용기의 신이며.

가장 용기 있는 자만이 그 화신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은 아슬란족이라면 세 살짜리 꼬맹이도 다 아는 사실이야!


그리고 그놈의 용기, 용기 타령 때문에 내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기나 해?


나는 형이나 누나처럼 어린 시절부터 수십의 스승에게 훈육 받으며 태자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쓰레기 같은 삼류소설들 밖에 없으며.

내가 아는 거라곤 기껏해야 누나에게 배운 것들이 전부라고!


거기에 매일 같이 6명의 경갑사들에게 감시당하고.

언제나 내 목을 날려버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황상의 눈빛을 피해 다니며.

가는 장소마다 백성들에게 비웃음을 사느라 바쁘지.


그리고 내가 사는 곳, 내가 항상 앉아 있는 이 장소, 이 태자궁은.

히르 형이 불타 죽었던 바로 그 자리야!


나는 형의 죽음 위에서 살고 있다고!


거기에 나는 학살, 학살, 끝도 없는 대학살을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지켜봐왔어.


그리고 이런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거라곤.

황상을 따라가서 그 인간이 수많은 사람들을 마치 찰흙처럼 주물러 뭉개버리고 점토처럼 뜯어 수천 조각으로 산산이 찢어 시체도 남기지 않는 걸 무력하게 구경하는 것뿐이야!


황제를 쓰러뜨리겠다고?

반정을 해서 거사를 이룬다고?


황제를 찌를 비수? 무예가 대단해?

웃기지 마!


황상의, 화신의 힘은 무예가 어떻고 무력이 어떻고를 따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화신은 인간이 아니라 신 그 자체라고!


······황제는 자그마치 십 년간이나 내게 직접 공포를 새겼어.


수십만의 인간을 도륙 내고, 어떤 강자조차 손도 대지 않고 조각 내 버리는 걸 내게 질리도록 보여주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얼마나 강대한 존재인지, 그 누구도 그에게 이길 수 없다는걸.


오로지 그것 하나만큼을 내게 끝도 없이 가르쳐주며 나의 뼈에, 육체에, 내 영혼에 그에 대한 공포를 새겼어!


용기의 신 아슬란의 화신?

화신이 될 자격이 있다고?


제발 개소리 좀 하지 마.

그런 게 가능할리 없잖아.


나는 두려워. 나는 겁쟁이야.


평생을 두려워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해내질 못했어.

용기라는 단어만큼 나랑 거리가 먼 게 없다고!


바로 얼마 전, 울란바토르 평야에서 황제가 십만 대군을 죽였을 때.


그리고 수그리바를 자기 발밑에 엎드리게 하고 그의 모든 걸 유린했을 때.


내가 그걸 지켜보기만 하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눈앞에서 십만 명이 죽었는데.

그게 뭔 대수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


내가 저기 있지 않아서.

내가 저 꼴을 당한 게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러니 그렇게나 죽고 싶으면 제발 혼자 죽어.

날 끌어들이지 말고 혼자 죽으라고.

나는, 살고 싶어.


히르 형처럼 비참하게 불타 죽어서.

무덤도 남기지 못하고 나찰들 먹이가 되는 건 사양이야.


그저 황상 앞에 엎드려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나는 천하에 둘도 없을 쓰레기입니다 하고 외치면.

다시는 당신에게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면.


겨우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꼴에 황태자라고 불리며 종이호랑이 노릇이라도 할 수 있다고······.


황제가 몇백만의 목숨을 더 죽이건, 인류 전체를 멸종시키건 내 알 바가 아니야.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까.

아무것도 남질 않아.


나는 용기를 모르는 무지렁이며.

그저 수많은 학살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방관자에 불과하니.


만천하가 분노케할 광경을 보고도 내 가슴은, 내 양심은 조금도 미동이란 걸 하지 않아.


나는 텅 비었어.

나는 텅 빈 깡통이고, 요란한 빈 수레야.

그러니까 더는 시끄럽게 울리도록 걷어차지 말아 줘.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둬.



그렇게 넋두리하는 황태자의 온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아주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대체 세상 어떤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그가 용기 있는 존재이며, 용기의 화신인 판테라에 대적할 수 있다 하겠는가.


"그 육체에 담긴 무예는 신역에 들었으나, 그 내면은 무엇도 없이 그저 공(空)하구나."


파르다 황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그래, 온갖 정이 다 떨어지지? 그게 바로 나란 인간이야. 나는 누나와 달리 대의도, 꿈도 양심도 없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껍데기 인간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꺼져."


언샤 황태자는 마지막까지 그저 추하게 자신의 아집을 내뱉을 뿐이었다.


머리가 지끈 아팠다.

마치 그 머리를 호랑이가 앞발로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감정의 파도에 먹혀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일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가겠지.


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내뱉은 헛소리를 모두 묻어버리고, 관리들을 완벽하게 함구시키고.


황제의 귀에 거사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들어가지 않도록 완벽히 조치한 후.


또다시, 이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언제나처럼 다시 이곳을 찾을 게 분명했다.


언샤는 이제, 이런 삶에 질려버리고야 말았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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