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동주의 사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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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의 손에든 이끼와 비늘이 말라 가루가 되어 갈수록 흡수된 영기들이 한줄기 창백한 기운이 되어 조화구중로 표면에 그려진 도형과 선에 스며들었다.
점점 더 도형과 선이 선명해졌고 장막처럼 가려진 표면이 걷힌다.
조화구중로의 윤곽도 점점 명료해진다.
물론 거대한 조화구중로의 극히 일부에만 영향을 주고 있을 뿐이다. 도형과 선은 아직 흐릿하고 아직 대부분은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어쨌든 강인의 호흡이 깊어질수록 뽑혀 나온 영기가 조화구중로의 표면에 계속해서 스며들었다. 그가 익혔던 싸구려 명륜공은 무가지보인 조화신공으로 그렇게 조금씩 변화되었다.
다시 사흘이 지나자 호수 위에 떠 있던 단로의 허상이 점차 사라졌다. 이어 강인도 깨어났다. 눈을 뜨자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요가 보였다.
“아무래도 우린 인연이 있구나.”
“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확실히 인연이 있기는 있죠.”
잡아먹힐 뻔했고 또 이렇게 거래를 트기 위해 위험도 무릅썼다. 그러니 인연이 없다고 말하긴 힘들다.
그리고 더 깊은 인연도 있다.
강인이 익히게 된 명륜공이 하늘을 가로지른 단로가 비로산에 부딪쳐 남긴 전승을 해석한 운기법이고 사요는 단로가 이곳에 남긴 힘으로 영지를 얻어 요괴가 되었다.
그러니 둘은 근원을 따져보면 사요와 강인은 같은 공법을 수행하는 동류라고 볼 수 있었다.
사요는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지만 강인이 만들어내는 단로의 허상이 자신에게 너무 중요한 기연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다가와서 강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친숙함을 표시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서로 수행을 돕기로 하자. 넌 저 바위 안에서 수행하고 난 이 밖에서 수행을 하는 거다. 어떠냐?”
“······.”
벌거벗은 여인이 가슴으로 압박하자 강인은 잠시 당황했다. 사요는 이를 강인이 주저하는 것으로 오해해 눈을 부라렸다.
“설마 싫으냐?”
“전혀 싫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제안이라 잠시 생각에 잠겼을 뿐입니다. 서로 같이 수행을 돕고 그러면 저로서는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동주님”
“동주라고 하니 너무 딱딱하구나. 백린白鱗이라고 불러라. 내 이름이다. 그리고 같은 전승을 얻게 되었고 그걸 토대로 수행을 하게 됐으니 서로 동문으로 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구나!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문 말입니까?”
“그렇다. 동의한다면 앞으로 날 사저師姐라고 불러라”
제자도 아니고 같은 항렬의 사저라니······.
파격적인 대우다.
이는 백린으로선 수행의 진보를 위해 이 녀석을 놓칠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강인으로선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잘 된 일이었다.
축기기의 요괴수선자라는 강한 뒷배를 얻게 되었고 동굴에 드나들며 귀한 약초인 이끼들을 잡초 뽑듯 챙길 수 있게 되었다.
강인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넙죽 그 제안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백린사저 전 강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강인사제! 좋구나. 하하 영민한 사제를 얻게 되니 몹시 기쁘구나.”
백린은 크게 웃었다.
강인도 따라 웃었다.
이번 생은 고난은 있지만 그래도 제법 운이 풀리는 모양이다.
강인이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공손명은 돌아가신 조상님을 반기듯 그를 맞이했다.
사정을 듣고 나니 그럴만했다.
자신이 동굴에 들어간 지 어느덧 스무날이 지나버린 것이다. 열흘 치 식량만 싸들고 갔으니 공손명은 이미 강인이 사요에게 잡아먹혔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뭐에 씌었다.’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계획에 넘어가다니······.’
공손명은 절망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다시 얻기 힘든 혈기단까지 투자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투자한 게 많다보니 정황상 실패라고 생각해도 마음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동굴 밖을 계속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 타는 상황에서 강인이 다시 나타났으니 공손명 입장에선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공손명이 강인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물건은 구했나?”
“여기 있습니다.”
강인은 보따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두 움큼 정도의 흑태, 온전한 사요의 비늘 한 개, 심지어 새끼 손톱정도 분량의 백태까지 들어있었다.
공손명은 예상보다 큰 성과에 크게 만족스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훌륭하네. 형태동주를 만났는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동주께서 공손공자님의 선물에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그럼?”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방문해 물건을 서로 교환하는 걸 허락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저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자네가 나의 복덩이로군!”
“과찬이십니다.”
공손명이 강인의 등을 두드리며 칭찬을 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키가 갑자기 커진 것 같은데?”
“아마도 연정기에 오르기도 했고 선물하신 영약이 효과를 발휘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못 먹고 살던 아이가 잘 먹게 되면 살이 오르기 마련이다. 더구나 강인은 공손가의 영약까지 복용했으니 갑자기 키가 커진다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다.
공송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하긴 이제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다. 우선 강인을 별채로 보내 쉬게 하고 즉시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강인이 열흘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자 배다른 형제들은 어느새 자신의 곤란함을 눈치 챘는지 내심 고소해 했다.
특히 적자이자 장남인 공손기는 그 동안 자신이 아버지의 총애를 입는 게 불편했었는지 가끔 마주칠 때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이제 그대로 되돌려줄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영도종의 고운진인은 약속대로 구름을 타고 한 달 만에 공손가를 방문했다. 솔직히 공손가에서 다시 물건을 구할 수 있을 거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혹시나 하는 약간의 가능성에 그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런데 공손가가 준비한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밝은 얼굴로 달려오는 공손가주를 보았다.
고운진인은 그들이 성공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손가주가 두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진인, 실망시켜드리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
“오! 볼 수 있겠소?”
공손가주가 손짓하자 공손명이 들고 있던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검은 이끼와 반투명한 비늘, 그리고 손톱만한 크기지만 하얀 이끼까지 들어있었다.
“대단하군. 백태까지 구할 줄이야”
“제 아들이 제법 영특해서 형태동주와 협력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매달 이 정도 양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손가에 뛰어난 인재가 나타났구려!”
“과찬이십니다.”
고운진인이 공손명을 칭찬하자 공손가주는 입으로는 겸손의 말을 하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다른 자식들은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고운진인은 상자를 챙기면서 공손가주에게 혈기단 다섯 개가 들어있는 옥병을 건네주었다.
“부족하다고 여기지 말아주시오.”
“별말씀을 과분합니다.”
“매달 이만큼 약재를 구할 수 있다 했소?”
“충분히 가능합니다.”
“흑태도 귀하지만 백태는 영도종이라도 쉽게 구하기 힘든 약재요. 이렇게 합시다. 여기 양평현에서 동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원강성元康城이 있소.”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원강성은 형태산 인근 수십 개 현의 중심지라 모든 물류와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공손가도 이곳에 조그만 가게를 열고 형태산에서 채집한 약재와 가문에서 제조하는 영약을 팔고 있었다.
“그곳에 영도종 지부가 있소. 그 지부를 내 제자 중 하나가 관리하는데 그곳으로 약재를 가져오면 지금과 같은 양의 영약으로 교환하도록 하겠소. 어떠시오?”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협의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자 고운진인은 만족하며 연회를 즐겼다. 그리고 떠나기 전 공손가주에게 한 가지 선물을 더 주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않았지만 일이 년 뒤, 영도종은 30년 만에 외문제자를 대대적으로 뽑을 예정이오. 만약 공손가에서 생각이 있다면 15세 이하의 자질이 뛰어난 이를 날짜에 맞춰 선발해 보내시오. 내 권한으로 3명까지는 외문제자로 지목할 수 있소.”
공손가주는 고운진인의 제안에 넙죽 엎드리며 감사를 표했다. 이는 혈기단과 비교도 안 되는 보상이었다. 외문제자로 들어가 영도종 고인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내문제자로 선발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내문제자가 된다는 건 영도종의 비전을 이을 직전제자가 된다는 의미다.
만약 공손가에서 영도종의 직전제가가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가문은 이 좁은 양평현이 아니라 원강성까지 명성을 날리는 명실상부한 명문세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다.
“반드시 자질이 뛰어난 인재를 찾겠습니다.”
공손가주가 넙죽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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