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재판(7)
57. 재판(7)
오후 2시 30분 재판이 속개되었다.
테오 재판장은 피고 측 네 번째 증인이 나올 것을 명했지만, 증인인 마법사 교수는 10분이나 늦게 나오고 말았다.
엘빈이 변명하길 구대륙에서 오신 분이라 길을 헤맸다고 둘러댔는데, 마법사의 태도로 볼 때 변명에 불과하였다. 식사나 관광 혹은 그보다 사소한 이유로 늦은 게 확실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는 미안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외려 자기가 뭘 잘못했냐는 태도였다.
기대 이상의 모습에 벤자민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존에게 속삭였다.
“말 정정할게요. 식재료가 오줌을 싸고 있네요.”
존도 흥미진진하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대륙에서 온 마법사는 일관성 있게 거만한 태도를 취해 재판장의 심기를 거슬렸는데, 과장을 약간 보태면 테오 재판장이 당장 의사봉으로 마법사를 두들겨 패 죽이지 않을까 우려되는 지경이었다.
테오의 표정이 꿈틀댈 때마다 엘빈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는데, 벤자민마저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안쓰러웠다.
결국, 보다 못한 엘빈이 양해를 구해 증인에게 뭐라고 강하게 속삭이자 이내 마법사는 예의라는 것을 지키기 시작했다. 최소한 겉으로나마.
“죄송.... 합니다. 재판에 나온 건 처음이라.......”
그리고서는 자기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이름은 ‘체론 엘븐’이며, 현재 ‘마기아’라는 마법 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하였다. 여섯 개의 수업을 맡고 있으며, 수십 편의 논문도 썼다고 자화자찬했는데, 그 자랑은 한계를 몰랐으며, 말투는 과시적이고 불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말을 골라 써 지루하다 못해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 자랑을 끝마치는데 거의 40분을 소비했는데, 중간에 하워드가 참지 못하고 작게 속삭여 물었다.
“원래 마법 교수들은 전부 다 저러냐?”
“약간 더 심하긴 한데, 대부분 저래.”
“오, 망할. 끔찍해라.” 벤자민의 대답에 하워드는 경기를 일으키듯 고개를 저었다.
괴로운 것은 테오도 마찬가지였는지,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강하게 누르며 말했다.
“자기소개가 끝났으면 증인은 하프 캔디에 대한 소견을 이야기해 주시오.”
그렇게 떠들고도 부족했는지, ‘체론 교수’는 자기 자랑을 10분이나 더 이야기하고 간신히 하프 캔디에 대한 자기 소견을 말했다.
참고자료로 교수가 작성한 보고서를 재판장과 배석판사에게 배부하였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왜냐면 체론 교수의 설명은 너무 배려가 없어서였는데, 전문 용어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 마법에 대한 전문적 교육을 받지 않은 이상 알아듣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죽하면 벤자민 조차 눈살이 찌푸려질 지경이었는데, 결국 참다못한 테오가 증인의 말을 멈추는 지경에 이르렀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수는 없소?”
‘어, 이거 안 좋은데.’ 벤자민이 무슨 냄새를 맡으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었는데, 증인은 결국 법정에서의 금기를 깨고 말았다. 바로, 재판장을 열 받게 하는 거.
“전 지금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최대한 수준을 낮춰서 설명하는 것이오. 이 정도로 쉬운 설명도 못 알아듣는 겁니까?”
억양 탓에 그의 발언은 더욱 심기를 거슬렀다. 테오는 두 눈을 꾹 감고 한숨을 내뱉는 지경에 이르렀다.
엘빈은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미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 결국 테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10분간 휴정을 선언하였다. 그리고서는 어딘가로 향했는데, 아마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러 갈 터였다.
‘이왕이면 술이 좋겠군. 짜증 나는 증인과 술 이 두 조합이면 엄청난 구경거릴 만들 수 있을 텐데.’
당황한 엘빈이 재판장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지만, 테오는 어떠한 말도 거부하며 그냥 떠나갔다. 그러자 엘빈은 피로가 엄습하듯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때때로 재판은 어떠한 재해나 전쟁만큼이나 잔인해질 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벤자민은 자신이 그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음 순간을 준비하였다.
어느새 10분이 훌쩍 지나갔고, 5분이 더 지나서야 테오가 돌아왔다. 재판 중 처음으로 시간을 어긴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차가운 분노만이 남아있었으며. 법정의 분위기도 변했다.
단 하나, 체론 교수만 빼고 그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까 전보다 더욱 어렵게 이야기하였는데, 벤자민은 과연 사람들이 저 말을 3분의 1이나 알아들었을지 의심스러웠다.
지옥 같은 설명이 거의 1시간 가까이 이어졌으며, 모두 밧줄과 총알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할 지경에 이르러야 설명이 끝났다.
“....여기까지가 제 소견입니다.”
몇몇 군데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으며, 심지어 신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아직 휴정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재판장은 당장이라도 휴정을 선언하고 싶은 눈치였다.
이해했다. 누군들 괜찮겠는가? 허나, 벤자민은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해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원고 측 변호인 반대 심문 하시겠소? 만약 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이쯤에서 휴정하도록 하겠소.”
재판장의 얼굴에는 짜증과 피로가 얼기설기했는데, 벤자민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뜻을 내세웠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던전의 시민 여러분. 모두 피곤하신 것을 이해하지만, 허락해주신다면 전 증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테오 재판장이 배석 판사들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락했다.
“좋소. 반대 심문을 허락하겠소. 만약, 제시간에 못 끝내면 내일이어서 하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벤자민이 인사를 하고 증인에게 다가갔다. 곧바로 질문하는 대신 체론 교수를 한번 살펴보았다.
오만이 깃든 날카로운 눈매, 뾰족하게 모양을 낸 콧수염, 과할 정도로 알록달록 화려한 옷 등등 과거 벤자민을 가르쳤던 교수들을 떠오르게 했다.
‘정확하게는 내가 알아서 배운 거지만...... 아쉽네. 그분들이었으면 똑똑히 망신을 주는 거였는데.’
벤자민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뗐다.
“증언 감사합니다. 체론 교수님. 저도 한때 마법을 배운 적 있습니다.”
그러자 마법사가 킥킥 비웃으며 말했다.
“들어서 알고 있소. 포그곤트 가문의 닭이라지? 어쩌다 그런 가문에 그대 같은 불량품이 태어났는지 모르겠구만.”
아주아주 모욕적인 발언에 테오 재판장의 얼굴엔 노기가 스쳐 갔으며, 객석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허나, 이와 반대로 벤자민은 평온하게 그지없었다.
과거였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발언이었지만,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는 너무나도 반갑게 이를 데가 없었다. 진심으로 말이다.
“예, 하지만 지금은 던전의 시민으로 성실하게 살고 있죠.”
“긍지도 없는 장애인 놈.” 혐오스럽다는 듯 체론 교수가 중얼거렸다.
결국 참다못한 테오가 경고했다.
“증인, 한 번만 더 그따위 태도를 보였다간 증인의 증언을 모두 무효화시키고, 당장 여기서 쫓아내겠소.”
벤자민은 괜찮다고 재판장에게 말하고 반대 심문을 이어갔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전 마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해주신 말을 얼추 이해했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체론이 내키지는 않지만, 한번 해보라는 듯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가르침을 청하면 해줘야지.”
그 말이 떨어지자 벤자민은 체론이 증언을 처음부터 읊기 시작했다.
단, 마법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게 최대한 풀어 설명했는데, 변론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비유를 섞기도 했다. 끓어 넘치는 냄비, 너무 오래 우려내면 쓴맛이 배어 나오는 육수거리 등등. 그때마다 체론 교수는 무식한 표현이라며 딴지를 걸었지만, 기본적으로 내용을 비난하지 않았다.
이는 다행이었다. 벤자민은 체론의 증언을 알아듣기 쉽게 바꾸는 동시에 단어와 뉘앙스를 살짝 식 바꿔 내용에도 변화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문득 랍의 말이 떠올랐다.
‘.......소문에 의하면 이 도시엔 눈만 감아도 코를 베어 가는 대도들이 득실거린다고 하잖나?’
아무래도 그 대도가 자신인 듯하였다. 벤자민은 비웃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설명을 마쳤다.
어느새 체론의 해석은 벤자민의 입맛에 맞게 바뀌었으며, 벤자민은 하워드를 시켜 미리 준비한 마법 교재 세 권을 재판장과 배석판사에게 나눠줬다.
준비를 끝마친 벤자민은 마침내 물어뜯기 시작했다.
“54페이지를 봐주십시오..........”
벤자민은 마법 교재와 보고서의 내용, 그리고 아까 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꾼 설명을 절묘하게 대입시켜 맞지 않는 부분을 콕 집어냈는데, 그러자 하얀 옷에 검은 물감이 튄 듯 거슬리는 부분이 보였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체론 교수는 항변하려고 했지만, 벤자민은 일단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테오 판사에게 청했고, 테오 판사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 살짝 기뻐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리라.
벤자민은 마법 캔디의 제조 과정인 ‘원료 구성’부터, ‘축출’, ‘주문’, ‘결합’ 등등 각 항목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짚어냈는데, 이 방법의 가장 잔인한 점은 기초적인 교재를 근거로 하여 마법사조차 함부로 부정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체론 교수는 흥분을 주체 못 해 중간중간 끼어들려고 했지만, 재판장은 이를 막아섰고 결국 산 제물처럼 토막 나는 수밖에 없었다.
‘평생소원 중 하나는 이룬 셈이구만......... 이리도 쉬울 줄이야.’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실현되니 현실감이 없었다. 벤자민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는데, 뛰는 심장과 넘치는 기운이 이는 꿈이 아닌 현실이라도 이야기해 줬다.
휴정 시간을 넘겼지만, 테오 재판장은 멈추지 않았는데. 방청객도 딱히 싫은 기색이 없었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기에 기꺼이 감수할 모양이었다.
한계를 느꼈는지 엘빈이 이의를 신청하였다.
“재판장님. 원고 측 변호인은 지금 증인의 말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테오가 물었다.
“내가 들을 땐 아닌데, 어디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오?”
그러자 엘빈의 말문이 턱 막혔다. 분명 그도 바보가 아니라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았지만, 그걸 설명할 능력이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벤자민만 칼을 쥐고 있는 셈이었는데, 심지어 심판마저 엘빈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아니, 적대적이기까지 하였다.
‘처형식이나 다름없군.’
벤자민은 그리 생각했고,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테오는 엘빈의 이의 신청을 기각하고 반대 심문을 계속할 것을 명했는데, 벤자민은 기꺼이 그 기회를 활용해 도축하듯 체론의 증언을 해체하였다.
잔칫날 사람들처럼 모두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체론 교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렀을 때쯤, 벤자민은 이만 심문을 마치겠다고 하였다.
단, 오해는 말라. 이는 관대함에서 나온 게 아닌 두 번째 미끼일 뿐이니.
벤자민이 자리로 돌아가자 엘빈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재심문을 요청합니다.”
그는 최대한 상처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흥분한 상태였다. 허나, 재판장인 테오는 관심 없다는 투로 이리 말했다.
“엘빈 변호인. 마음은 알겠으나, 휴정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났소. 내 퇴근 시간도 한참 지났고,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이어 하도록 합시다. 내일 시작하자마자 재심문 기회를 주겠소.”
엘빈은 거절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이미 재판장의 눈 밖에 나간 터라 그 이상 억지를 부리지 못했다.
재판장이 휴정을 선언하고, 벤자민은 내일 있을 재판을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때,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보는 체론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이제 자신의 목소리가 저들에게도 닿는 모양이었다.
- 작가의말
아스퍼거 님, eschelon 님, wiseinve 님, 마이너카피 님 후원금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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