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노란커피 님의 서재입니다.

도시 던전: 도시의 까마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19.04.01 12:34
최근연재일 :
2019.06.29 23:35
연재수 :
67 회
조회수 :
207,583
추천수 :
9,938
글자수 :
375,354

작성
19.05.11 04:19
조회
2,615
추천
164
글자
24쪽

40. 마녀, 저항자, 괴물

DUMMY

40. 마녀, 저항자, 괴물




로건은 앤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무슨 내기?”


앤이 허리를 쭉 펴며 으쓱였다. 얇은 셔츠를 통해 사과 같은 가슴이 볼록 튀어나왔다.


“벤자민이 오늘 밤을 넘길지 말지 말이야. 만약에 불행한 사고로 오늘을 넘기지 못하면 네가 이기는 거고, 반대의 경우면 내가 이기는 거지. 네가 이기면 까짓거 어울려줄게.”


자신감에 찬 목소리에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는데, 로건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원한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네가 이긴다면 뭘 요구할 생각이지? 내 팬티?”


앤인 ‘켁’ 소릴 냈다.


“됐어. 팬티는 억지로 뺏는 게 좋거든. 음....... 네가 재판에서 너희 제품에 문제가 있다고 고백하는 건 어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로건은 거대한 망치로 맞은 것처럼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가 뭐라고 말하는 거란 말인가?


“왜 자신 없어? 그 정도는 돼야 내기라 할 수 있지. 원하면 데이트뿐 아니라, 한번 해주기도 할게.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앤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묘하게 사람을 움츠리게 하는 힘이 있었는데, 로건은 그녀가 내민 조건에서 매력보다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조건을 내미는 거지?”


앤이 웃었다.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 방금 대답을 회피한 것 같은데............. 혹시 겁나?”


제대로 찌르는 말이라, 로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앤은 어느새 웃고 있지 않았다.


“.........만약에 벤자민이였으면, 받아들였을 거야. 관심 있는 부분에서는 겁이 없어지거든.”


비교당했다는 생각에 로건은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는데, 앤은 그런 로건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앤드리 언니는 마법을 연구하거나, 새로운 주문을 만드는데 재능이 있어, 앤젤라 언니는 그걸 도구에 접목시키는 재주가 있고. 애비는 암흑의 공작부인답게 저주나 흑마법 같은데 소질이 있는데...... 그에 비해 난 딱히 별 볼 일 없지. 응용력이랑 순발력은 좋지만 가문 입장에서 보면 딱히 큰 도움은 안 된 달까?”


로건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앤이 마법 전투나 활용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그건 가업을 이어받을 가문의 구성원으로는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었다. 보통 마법 가문은 회사를 설립해 마법 도구를 만들어 부를 축적했으니, 그와 관련된 기술 외에는 모두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앤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로건은 위로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이미 그 자리엔 주인이 있었다.


“근데, 벤자민 녀석만 다가와 대단하다고 하더라....... 마법의 응용력이니, 이해도니, 순발력이니 어려운 말을 가득하며, 칭찬해 줬어.”


“나도 그 정도는 해줬을 거야.” 로건이 말했다. 만약 거기 자신이 있었다면 분명 자신도 그리 말했을 터였다. 허나, 앤은 믿지 않았다.


“마법을 못 쓰는 닭이라도?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갠 왜 나를 비롯한 모두를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을까? 상상력을 발휘해 봐. 자기 말고는 모두가 마법을 쓰는 환경에서 갠 왜 우릴 미워하지 않았을까? 나라면 미워했을 텐데. 왜 오히려 웃으며 다가왔지? 왜 대단하다고 해준 걸까?.......... 혹시, 그 약 때문일까? 아직도?”


끝부분은 나직이 중얼거려 로건은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미안, 뭐라고?”


그러자 앤이 고갤 저으며 말했다.


“아냐 혼잣말이야. 쓸데없는 데서 말이 셌네. 여하튼, 그 이후로 벤자민이랑 마법 결투를 개인적으로 많이 했지.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어울려 달라고.”


“마법도 못 쓰는 놈이랑 어떻게?”


“저장식 마법 지팡이가 있잖아?”


“그딴 건 진짜 마법사와 마녀 앞에 나무 막대기나 다름없어. 화력에서 상대도 안 되지.”


앤이 동의했다.


“그렇지.”


로건은 문득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자신의 허무맹랑한 생각이 맞다는 건 아니겠지?


“전적이 어떻게 되는데?”


“743전 522승 221무”


로건이 비웃었다.


“한 번도 못 이겼군. 아니지 221무나 한 게 대단한 건가? 아니지, 네가 봐준 건가?”


앤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표정은 진지하게 그지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승부를 봐주는 타입이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매너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묘하게 불평했는데, 로건은 이해가 안 됐다.


“무슨 말이야? 그럼 오히려 녀석이 널 봐줬다는 거야?”


앤이 고개를 끄덕이곤, 화가 난다는 듯 말했다.


“녀석은 허세 덩어리라, 절대로 날 공격 못 했거든. 하는 척만 했지. 진심으로 공격해본 적은 없어. 그러니까. 오로지 방어만 했다는 거지. 도저히 좋아하는 사람은 공격할 수 없다나 뭐라나.”


로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으며,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앤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벤이 마법은 못 써도, 마법을 다루는 실력은 좋다는 거야. 제한된 마법과 화력으로 나 같은 마녀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말이지. 더군다나 몸까지 좋아졌더라.”


앤이 그렇게 말하곤 낄낄 웃었다.



◆◆◆◆◆◆◆◆◆◆◆◆◆◆◆◆◆



세상이 핑핑 돌았고, 온통 붉은색 페인트로 덮여진 것 같았다. 코에는 쇠 비린내와 짠 내가 올라왔었는데, 귀에는 이명이 시끄럽게 울렸으며, 입안에는 가래가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벤자민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채찍질해 그러한 욕구를 떨쳐냈다. 이명 사이로 자신을 쫓으라는 습격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갔어! 쫓아! 벌써 여섯이나 당했어! 빌어먹을! 등등 귀를 아프게 했는데, 벤자민은 이 상황이 짜증이 나면서도 해럴드와 다른 노예 둘이 무사할지 걱정이 됐다.

해럴드가 죽으면 일에 차질이 생길 텐데. 그리고 메리와 마이클은 이 일과 관련이 없지 않은가? 만약 다치면 어떻게 보상해줘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아, 짜증 나.’ 벤자민이 그렇게 생각했다.


방심한 대가는 컸는데, 아직도 머리가 웅웅 울렸다. 설마 다른 습격자가 숨어있을 줄이야.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기절, 사망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피한 것도 아니라, 머리에 큰 상처가 생겼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상처 사이로 제법 피가 흘러나와 얼굴을 덮었는데, 지금 자기 꼴이 어떨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 세수하고 싶다.” 벤자민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상황에 비해 너무나도 태평한 대사이긴 했지만, 정말 세수가 하고 싶었다. 길바닥 생활을 오래 하고 나서인지 청결을 몹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벤자민이 걷다 말고 현기증을 느끼며 벽을 짚었다. 몽둥이를 휘두른 놈의 무릎과 불알을 박살 내주긴 했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현기증이 가라앉을 때 까지 잠시 멈춰 섰는데, 그때, 가로등 불빛이 새어나오는 골목 입구에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여기 있다. 그 빌어먹을 놈!”


‘여긴 골목인가? 죽으면 안 되겠군. 골목 구석에서 죽는 건 개죽음이잖아?’


놈들은 도통 자신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어 여러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놈들은 전부 마법 지팡이로 무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도끼나 칼, 총으로 무장했으면 더 위험했을 텐데.

상태가 상태이다 보니 습격자의 모습은 수면에 비친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습격자가 마법 지팡이를 요란하게 휘둘렀는데, 벤자민은 그에 맞춰 마법 지팡이를 살짝 튕기듯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충격파가 부딪히더니, 벤자민의 옆으로 슬쩍 비껴갔는데, 습격자가 다시 휘두르려 하자 벤자민이 먼저 짧게 휘둘러 인중을 박살 냈다. 다들 크게 휘둘러 화력만 높이면 되는 줄 안다고 착각했지만, 필요한 만큼 집중에 쓰는 것이 오히려 핵심이었다.

그냥 일반인은 물론, 마법사들 중에 상당수가 이 사실을 몰랐는데, 벤자민은 그게 화가 났었다.


‘빌어먹을. 왜 똑똑한 머리를 줘 놓고는, 결정적인 것을 안 주신 건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있다면 꽤나 가학적인 성향인 게 틀림없다고 벤자민은 생각했다.


굳어져 가는 피가 불편했고, 핑핑 도는 머리와 울리는 이명이 체력을 좀 먹었다. 마치,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는데, 점점 숨쉬기도 불편해졌다.


‘축축해. 언제 이렇게 땀을 흘린 거야.’ 벤자민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리 중얼거렸다.


납덩이를 단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는데, 이대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게으름에 대한 대가인지 습격자들이 나타났다. 여덟? 아홉? 여하튼 많았는데, 자신을 높이 평가해 준 것 같아. 너무나도 좆같았다. 이런 식으로 높이 평가해줄 필요는 없는데.

습격자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더 이상 자신을 우습게보지 않는 듯싶었다. 하긴 몇 명이나 당했는데. 그럴 만도 했지. 차라리 겁먹고 도망쳐주길 바랐으나, 그거는 또 아닌 듯싶었다.

습격자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들었다. 벤자민도 들었다. 서로 잠시 노려보다가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이 순간만큼은 정신이 돌아와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습격자들은 백정들처럼 마법 지팡이를 무슨 식칼마냥 무식하게 휘둘렀는데, 벤자민은 그에 맞춰 적당히 튕겨내며, 한명씩 차례대로 쓰러뜨렸다. 아껴 쓰고 있었지만, 슬슬 자기 지팡이의 힘이 다할 듯했는데, 그 순간 어떤 녀석이 지팡이를 팽이처럼 붕붕 돌리더니 커다란 불덩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저건 분명 군용일 텐데. 어떻게 구한 거람.

위기와 별개로 벤자민은 아름다운 화염구에 눈을 뺏겼다. 이상할지도 몰랐지만,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마법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말려들기 싫었는지 다른 습격자들이 거리를 벌리며 피했고, 상대방은 지팡이를 크게 휘둘러 화염구를 던졌다. 커다란 화염구가 점점 다가오자 벤자민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있는 힘껏 휘둘러 화염구를 찢어버렸는데, 화염구는 폭죽처럼 터져 여기저기 불꽃을 튕겨댔다.

벤자민은 그대로 정면으로 달려가 당황한 습격자의 목에 다 쓴 지팡이를 찔러 넣고 놈의 지팡이를 뺏어 들었다. 품 안에 다른 지팡이도 있어 챙겼는데, 벤자민은 양손에 지팡이를 하나씩 들어 충격파와 화염을 내뿜어 습격자들을 다시 제압해 갔다.

습격자들은 처음에 저항했으나, 하나둘씩 쓰러져가자 결국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벤자민은 놈들을 쫓는 대신 숨을 돌리기로 하였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무엇보다 잠을 좀 자고 싶었다.


‘가야 돼.... 어디로?.... 일단.....일단, 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해. 골목에서 죽을 수 없잖아.’


벤자민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어갔는데, 그 순간 ‘탕’소리와 함께 어깨에 강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어느새 바닥에 누워있었다.

어깨는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는데,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진짜 시발.” 벤자민이 어깨에 난 상처를 보며 말했다. 움직이고 싶었지만, 목 아래로 움직일 수 없었는데, 피로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벤자민은 주변을 둘러봤다. 골목 구석 어둠에서 무엇인가 비적비적 움직이더니, 후드가 달린 검은색 망토를 쓴 늙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림자 망토? 비싼 거네.’ 벤자민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그리 생각했다.


망토를 쓴 살인자는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는데, 벤자민은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총알도 혹시 마법 도구인 것일까?


‘아.... 이런.’ 벤자민은 속으로 한탄했다. 이리도 허무하게 갈 줄은 몰랐는데, 앤을 비롯한 사촌 누이들의 얼굴이 한 번씩 떠올랐는데, 웃기게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자신이 성공한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살인자가 자신을 내려다봤다. 올려다보니 더욱 무섭게 생겼는데, 그렇다고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살려주지 않을 테니. 욕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 입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살인자가 두꺼운 단검을 뽑았다. 짐승 가죽도 벗길 법한 칼로. 놈은 몸을 숙여 벤자민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는데, 그 순간 놈의 한쪽 얼굴이 뭉개지며 눈알이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꿈처럼 현실 감각이 없는 장면이었다. 갑자기 얼굴이 뭉개지고, 눈알이 터지다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명은 점점 심해졌는데, 살인자는 무너지듯 쓰러졌고, 땅 울림이 느껴졌다. 이제 슬슬 끝내고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몸에 향기가 좋은 게, 여자인 듯싶었다. 벤자민이 자기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린이다. 이 염병할 놈아.”


“아...... 향기 좋네.” 벤자민은 그렇게 말하고 의식을 잃었다.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다.



◆◆◆◆◆◆◆◆◆◆◆◆◆◆◆◆◆



“괴..... 괴물.”


존은 자신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내려다 봤다. 난감하게 이를 데가 없었다. 마법사들이 멍청하고, 무모한 구석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들 같으니라고.

도대체 열두 구가 넘는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물론, 정당방위가 성립하겠지만..... 정말 난감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존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자신의 마법 지팡이를 만졌다. 천년도 더 된 떡갈나무를 밑바탕으로 사람 피를 머금은 유니콘의 뿔과 새끼를 죽인 어미 코끼리의 상아, 기아로 죽은 아기의 이빨을 섞어 만든 최상품이었는데, 손에 놓은 지 십년이 넘었음에도 손에 착착 감겼다. 심지어 이 감각이 반갑기까지 했는데, 자신이 누군지 말해주는 것 같아 서글프게 그지없었다.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발버둥 쳤건만. 결국 자신의 피는 속일 수 없는 건가 싶었다.


“살려저........”


초대받지 않은 손님 중 하나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무기력의 저주’와 ‘무저항의 저주’를 걸었으니, 꼼짝도 못 하고 산채로 썩어갈 터였다.

정신은 살고자 할 테지만, 꼼짝도 못 하고 죽고 말텐데. 아주 아주 아주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울 터였다.

존이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가 할 말은 아니지만, 좀 착하게 살면 이런 최후는 피할 수 있을 텐데.

존은 주변을 둘러봤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침을 질질 흘리는 산송장과 한 달 굶은 듯한 삐쩍 곯은 시체, 끔찍하게 찢어진 시체 등 무슨 살인마의 소굴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오랜만이라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날뛴 것 같았다. 좀 더...... 평범하게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존이 살려달라고 비는 산송장에게 물었다.


“자네 혼자 남았나? 내 감각이 많이 둔해졌거든.”


그때, 다리가 문어 다리처럼 축 처진 건달 하나가 기어 왔다. 벌레 같은 게 참으로 비참하게 이를 데가 없었다.


“나, 나도 살려줘. 제발.......”


존은 깜빡했다는 제스처로 이마를 딱 쳤다.


“미안하네, 까먹었군.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이 떨어진다네.”


허나, 기어 온 사내는 그 말을 못 들었는지 그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포에 집어 삼켜진 것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정도 각오도 없이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 거란 말인가?

여느 불평 많은 늙은이처럼 되긴 싫었지만, 요새 젊은것들은 도통 노력이나 각오라는 걸 몰랐다.

존이 두 손님에게 물었다.


“어느 쪽이 더 상급자지? 그러니까.... 누가 내 질문에 만족스럽게 대답해 줄 수 있지?”


“나!”


벌레처럼 기어 온 손님이 먼저 외쳤다. 하기야, 다른 쪽은 ‘무기력의 저주’에 걸렸으니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은 불공평한 거였는데, 받아들여야지.

존이 손을 내밀자, 두 개의 저주를 받은 손님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터질 듯 팽배해졌는데, 이윽고 시뻘건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존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얼핏 사과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존은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보곤 어깨를 으쓱이고는 바닥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어차피 지저분해졌는데, 얼룩 하나 더 추가된다고 무슨 문제가 있으랴?

다리가 문어처럼 된 손님이 밀가루 반죽처럼 허옇게 질렸다. 존은 또 자신이 과했음을 깨닫고 창피해졌는데, 나름대로 변명했다.


“오해 마시게. 난 살인마가 아니니. 엄밀히 말하면 고통을 덜어준 걸세. 그대로 놔뒀으면 산채로 자기 몸이 구더기에게 먹히는 것을 봐야만 했을 테니까..... 일종의 자비인 셈이지.”


마지막 남은 손님은 그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못했다. 그저 무서워할 뿐이었다. 존은 그 사실이 약간 슬펐다. 멋대로 들어와 습격한 건 본인들인데, 이런 반응은 아니지 않은가?

존은 부엌에 가 포도주를 한잔 따라 가져왔다. 특별, 첨가물도 추가해서.

존이 다시 오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손님이 빌었다. 공포에 떤 게 마치 아이 같았다. 존은 과거 기억이 떠오르며 불쾌해졌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저, 전 아이가 있어-”


존이 입술 위에 손가락을 포갰다. 닥치라는 제스쳐였다.


“조용, 자기 몸을 뜯어먹고 싶지 않으며. 질문에만 대답하게. 특히, 아이를 파는 짓은 하지 말고.”


그러자 그는 착한 아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존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그저 든 채 바닥에 엎드린 사내의 주변을 두 바퀴 돌았다.


“살고 싶나?”


사내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살려 줄 수 있네. ‘침묵의 저주’를 건채 그대로 살려 줄 수 있지. 평생 앉은뱅이에, 벙어리 신세가 될 테지만..... 아니지. 앉지도 못하겠군. 하반신 뼈가 모두 사라졌으니까.”


그 말에 사내가 아기처럼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얼굴은 복숭아처럼 잘 익었는데, 심지어 오줌까지 질질 쌌다. 말 그대로 불쌍하고 비참하게 이를 데가 없었다.


“살려줄까? 말해보게.”


사내가 빌었다. 또 구걸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하지만 제 몸도 원래대로 해주세요.... 너무.. 오, 신이시여, 너무 무서워요. 제발.... 착하게 살게요.”


사내는 정신이 무너진 듯 흐느꼈고, 존은 웃음이 났었다. 지팡이만 잡으면 기분이 고양돼. 쉽게 흥분하고 기뻐했는데, 안 좋은 버릇이었다. 하지만 웃기지 않은가! 사람을 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작자가 세 살 아기처럼 비는 게!

존은 진정하려고 애썼다. 흥분해선 안 됐다. 이번 일의 주인공은 벤자민이였다. 후세를 위해 자신이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내 궁금증을 해소해 주면 살려주겠네. 물론 몸도 고쳐줄 거고.”


그러자 벌레처럼 엎어진 사내가 자신을 올려다봤다. 무슨 구원자를 영접한 것 같았는데, 심지어 애정도 섞여 있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사람은 자신에게 극단적인 공포와 고통을 주는 이에게 사랑을 느꼈다.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은 그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마시게. 목마르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게.” 존이 포도주가 든 잔을 내밀자 사내는 의심도 하지 않고 마셨다. 심지어 흘린 것을 개처럼 핥기까지 했는데,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나, 수치는 이미 사라진 듯했다. 육체가 변한 충격은 이렇게 쉽게 사람을 망가뜨렸다. 육체는 정신을 닮는 그릇이라더니.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적당히. 제발. 멈춰. 정신 차리라고 이 답도 없는 녀석아.’ 존은 통제력을 잃어가는 자신에게 말했다. 또 안 좋은 버릇이 나오다니. 한심했다. 나잇값을 해야지.


존이 간신히 이성을 되찾으며 말했다.


“........누가 습격하라고 지시했나?”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브라운 사에서 시켰습니다. 제 부하를 통해 알아봤습니다.”


사내는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아는 사실을 전부 토해냈다. 예상은 얼추 했지만 막상 사실로 밝혀지니 또 그 느낌이 달랐다. 멍청한 것도 정도란 게 있는 법 아닌가?


“나 말고 또 습격하라 시켰지?”


“해럴드라는 작자와 벤자민이란 놈입니다. 당신과 같은 시간에 공격하라고 시켰습니다.”


존은 화가 났지만 티 내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거 화낸들 변할까?


“그 외에는?”


“없습니다. 믿어주세요!” 사내가 빌었다.


그 말을 듣고 존은 안심했다. 라일라나 하워드 등 다른 녀석들은 무사하다는 것을 테니. 뭐, 해럴드 씨야 존의 책임이 아니니 죽으면 안타깝겠지만, 뭐. 그 정도였고, 벤자민이야 알아서 잘 헤쳐나갈 테니 역시 크게 걱정 없었다.

애당초 여기서 죽을 녀석이면 또 그 정도뿐인 녀석인 거고...... 하지만 그래도 불쾌하긴 매한가지였다.

사내는 그 외에 묻지 않은 이야기를 전부 이야기했다. 계획부터 참가한 인원, 받기로 한 대금 액수까지 모조리 불었는데, 존은 머리에 하나하나 다 새겨 넣었다.

사내는 말하다 보니 이상함을 느꼈다. 왜 이토록 자세히 떠벌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존이 그 물음에 답을 가르쳐줬다.


“포도주에 특제 첨가물을 탔다네. 내가 열 살 때 만든 거지. 수업 시간 중에 장난삼아. 일명, ‘진실쟁이’라는 거였는데. 먹으면 자기도 모르게 사실만 말하게 되는 거지. 벤자민의 면접 날 이후 자네가 두 번째군.”


사내는 다시 존을 두렵게 바라봤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는데, 본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 법이었다.


“사실, 그 약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어. 잘 쓰지는 않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렇게 썼네. 미안하네.”


존이 그렇게 말하고는 촛불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촛불은 춤을 추듯 일렁이더니 거대한 화염이 되었고, 이내 사람 형상의 무엇가가 되었다. 여자 같은 실루엣이었는데, 존이 익숙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불러내서 미안하오. 아가씨. 부탁 좀 하지. 다 태워주시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말이오. 주변에 피해는 주지 말고.”


그러자 불의 형태를 한 여자가 존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춤을 추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시체, 벽, 식탁, 냄비까지 모조리 말이다.

사내가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뭡니까! 살려준다고 했잖아! 뜨거워! 살려줘!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사내는 말을 안 듣는 하반신을 억지로 움직여 불로 벗어나려고 했지만, 벌레의 발악처럼 무의미했다. 그래, 그게 딱 어울렸다. 벌레.

존이 주변의 불에 아랑곳 않고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마치 불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나도 자네를 살려 주고 싶네. 진심으로 근데 자네는 내가 마법을 쓰는 걸 보지 않았나. 사실 이건 비밀이거든. 난 내가 마법사라는 걸 주변에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아.”


존의 태도와 정반대로 사내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지옥 불구덩이 죄인들의 비명이 저게 아닐까 싶었다. 이미 얼굴은 반쯤 익어, 수포가 올라오고 있었는데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약소.....! 약속! 약속했잖아! 제... 발! 살려! 주...세!”


존이 외투를 걸쳤다.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니 몸을 조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거듭 사과하겠네. 거짓말했어. 하지만 자네들도 멋대로 내 집에 구두를 신고 들어왔으니 비긴 셈 치지.”


사내는 미디움 스테이크처럼 익어가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네.” 존이 위로하듯 말했다.


사내는 불로 멀어버린 눈으로 존을 바라봤다.


“화재보험은 들었다는 거야.”


존은 그렇게 말하고는 집 밖으로 유유히 나갔고, 사내는 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마 안 있어 불에 먹히고 말았지만.


작가의말

늦게나마 한편 더 올립니다. (역시 끊기 잘했네요) 이번 편을 올리고 자야지 하다가 이제야 올리네요. 칭찬해 주시죠.


공모전이 끝났고, 몸상태가 약간 안 좋아, 다음 주 부터 연재 방식이 바뀔 거 같은데, 이번 편을 보고 부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드시 완결 낼 테니. 부디 끝까지 봐주십시오.


너무 잠이 와 뭐라고 쓰는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이상한 부분이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5

  • 답글
    작성자
    Lv.31 노란커피
    작성일
    20.05.21 18:00
    No. 31

    꽤나 강한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크림
    작성일
    21.02.20 10:27
    No. 32

    세상에 혹시 마법사 출신인가 생각하긴 했지만. 저런 실력자인줄은 몰랐네요. 벤자민은 마법사랑 평생 살 운명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1 노란커피
    작성일
    21.02.21 00:21
    No. 33

    실제로 벤자민은 마법과 얽힐 팔자라는 생각이 저도 들곤 합니다. 시즌3 그 이야기가 절정에 치닫을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로 존의 재능은 벤자민이 본 마법사 중 가장 뛰어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8 청광류
    작성일
    21.03.12 22:31
    No. 34

    존 포스 장난 아니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8 소설탐방
    작성일
    21.03.25 05:27
    No. 35

    아아 이제 알겠네요 존의 본명이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도시 던전: 도시의 까마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7 후기 +86 19.06.29 3,888 175 9쪽
66 65. 새로운 시작 (시즌1 완결) +140 19.06.27 3,205 207 16쪽
65 64. 황제의 까마귀와 변호사 존 +34 19.06.26 2,620 164 15쪽
64 63. 미래 계획 +38 19.06.24 2,454 150 9쪽
63 62. 작은 파티 +19 19.06.24 2,389 138 12쪽
62 61. 개 이론 +70 19.06.21 2,571 167 12쪽
61 60. 체포, 초대 +69 19.06.13 2,851 158 13쪽
60 59. 판결 +22 19.06.11 2,547 143 15쪽
59 연재 관련 공지 사항입니다. +18 19.06.10 2,657 55 1쪽
58 58. 협상 시도 +40 19.06.08 2,518 152 13쪽
57 57. 재판(7) +28 19.06.06 2,349 131 12쪽
56 56. 재판(6) +24 19.06.05 2,354 128 11쪽
55 55. 재판(5) +27 19.06.04 2,266 131 15쪽
54 54. 재판(4) +18 19.06.03 2,241 137 10쪽
53 53. 재판(3) +28 19.05.31 2,273 138 15쪽
52 52. 재판(2) +14 19.05.31 2,231 122 9쪽
51 51. 재판(1) +22 19.05.29 2,352 133 8쪽
50 50. 매운 샌드위치 +24 19.05.28 2,344 134 12쪽
49 월요일 휴재입니다. +16 19.05.26 2,369 40 1쪽
48 49. 사전 회의 +26 19.05.24 2,421 137 13쪽
47 48. 의도치 않은 전개 +19 19.05.23 2,452 131 8쪽
46 47. 거인의 개입 +26 19.05.21 2,396 138 12쪽
45 46. 폭풍전야 +18 19.05.20 2,362 117 7쪽
44 45. 대치 +24 19.05.18 2,444 140 16쪽
43 44. 후퇴 +26 19.05.16 2,471 131 11쪽
42 43. 공갈단 +34 19.05.15 2,453 130 14쪽
41 42. 새옹지마 +18 19.05.14 2,353 125 9쪽
40 41. 끔찍한 꿈 +7 19.05.13 2,416 135 11쪽
» 40. 마녀, 저항자, 괴물 +35 19.05.11 2,616 164 24쪽
38 39.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 +16 19.05.10 2,485 137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