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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고양이가 된 마녀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김딸
작품등록일 :
2021.12.15 20:48
최근연재일 :
2024.01.05 10:23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1,075
추천수 :
132
글자수 :
142,512

작성
22.01.1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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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08. 마녀, 연구를 시작하다

DUMMY

“저는,”


페일이 내린 결정은 매우 도덕적이었다.


“이제까지 절 길러주신 스승님께 예우를 다하고 싶습니다.”


관점에 따라 인간적이기도 했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페일은 그렇게 루나의 세 번째 제안(서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단으로 서탑을 택한 것이지 그곳에 도로 몸을 담을 생각은 없었다.


‘일이 다 끝난 후에는 조용히 사라지자.’


설사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이젤리카님과 폐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건 페일이 유일하게 잘했던 일이고,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음.”


그런데 왜 이젤리카님의 안색이 안 좋아지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끼어들면 안 되는 일이었나?’


그렇게 의심할 땐 언제고 이제 와 숟가락 얹냐는 걸까?


살짝 주눅이 든 페일이 이젤리카의 눈치를 봤다. 그 사이에 루나는 일의 우선순위를 세웠다.


“우선 너희 둘 그 몸부터 어떻게 좀 해봐.”


소파에 기댄 채 턱을 괴듯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그가 이젤리카와 페일을 향해 손짓했다.


뭘 하든 인간으로 돌아가는 게 먼저였다.




***


냐아-


이젤리카의 낭랑한 목소리를 따라 데시데리움이 담긴 상자들이 허공에 둥실 떴다.


뿌리가 온전한 데시데리움에서부터 진액으로 짜인 데시데리움까지.


상자의 크기에 따라 들어 있는 데시데리움은 각기 모양새가 달랐다.


이젤리카는 침실로 들어가 지하실로 이어지는 문을 두드렸다.


통- 통-


그러자 겉보기에는 통나무 벽이었던 부근이 서서히 열리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드러났다.


서늘한 공기에선 흙내음이 물씬 풍겼다.


이젤리카는 발걸음도 가볍게 상자들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갔다.


정령들의 눈을 빌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나가 새 찻물을 끓여왔다. 이번엔 레몬 향이 도드라지는 레몬버베나였다.


루나는 싱싱한 레몬을 반으로 갈라 찻주전자에 꾹 눌러 짰다.


그가 뒤집은 모래시계 속의 모래가 사륵대며 흘러내렸다.


시계 속 모래가 줄을 맞춰 빙글빙글 춘 춤은 민둥산이 되어 끝났다.


달그락-


루나는 새 대접과 잔에 차를 따라 하나는 제 앞에 또 하나는 페일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제 잔에 설탕을 잔뜩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서 슈가텅(각설탕을 집기 위한 도구)이 빠르게 움직였다.


퐁당- 퐁당- 퐁당퐁당퐁당-


그 앞에서 페일은 조심스럽게 발톱을 이용해 설탕을 하나만 콕 찍어다 가져왔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그의 앞발에 비해 슈가볼(설탕을 담은 도구)과 슈가텅이 너무 작아 사용할 수 없었다.


포옹-


앞선 설탕이 녹기도 전에 빠진 설탕들이 수북히 쌓인 루나의 잔과는 달리. 페일의 대접 속에 빠진 각진 설탕은 바닥에 툭 가라앉았다가 서서히 녹아 사라졌다.


“휘유-”


페일은 안도의 의미가 담긴 숨을 내쉬었다.


슈가볼을 엎어트리거나 깨트리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앞발에 미세한 핏줄이 섰다.


그의 앞에서 루나가 티스푼으로 찻잔 속을 휘저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하얀 얼음을 젓는 것처럼 보였다.


서걱- 서걱- 서걱-


녹다 만 설탕 채 찻물을 입에 넣은 루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페일은 그 모습을 못 본 체하며 차를 후후 불어 찻물의 온도를 낮추었다. 그리고 조금 식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 표면을 핥아 냈다. 레몬 향의 새콤하고 상큼한 향이 달짝지근하게 혀끝을 적셨다.


따뜻한 게 몸에 들어가서인지 술렁이던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페일은 루나를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조심성 있는 인간이군.’


루나는 그런 페일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믿기진 않겠지만 타 종족의 왕족이나 황족에게 예우를 다하는 이는 예상외로 드물었다.


‘하긴.’


제아무리 보니타의 제자라 하여도 인성이 못 미쳤더라면 지금까지 이곳에 있지 못했으리라.


서탑을 끔찍이 싫어하는 이젤리카가 가만 보고 있진 않았을 터이니.


정령들을 통해 읽어낸 기억 속에서도 눈앞의 늑대는 특별히 모난 구석이 없는 성품처럼 보였다.


이젤리카를 위해 요리를 하려는 늑대라니.


시간이 날 때마다 이족보행을 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나름 기특하게 다가왔다.


특히 요리를 하려는 이유가 죄송함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났다는 점에서.


도대체 왜 마법 그릇을 두고 저들끼리 요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래도 쟤 때문에 이젤리카가 삼시세끼를 먹었단 말이지.’


이전의 이젤리카를 생각하면 감지덕지한 일이다.


‘그래, 아무거나 주워 먹을 때에 비하면···.’


루나가 먼 산을 바라보았다.


‘가기 전에 마법 도구들이 요리도 할 수 있게 해놔야 하나.’


이젤리카는 잘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조리도구를 끔찍이 아꼈다. 이 때문에 항상 생각만 하고 실천은 못 했던 일을 -사실 시도했다가 이젤리카의 집에서 쫓겨났다.- 이번에야말로 해 볼까 고민이 된다. 그의 이러한 마음에 정령들이 불을 지폈다.


“저 늑대 발이 너무 커서 요리를 못한다.”


“요리를 못하는 건 작은 발을 가진 마녀도 마찬가지야.”


“인간들은 이상하다. 원래 음식을 그렇게 먹나?”


“맞다. 저 늑대도 마녀도 그냥 생것을 씹어먹는다.”


“마녀는 원래 그랬어!”


“맞아. 마녀는 그냥 그렇게 먹었어.”


‘저 늑대를 핑계 삼으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찻잔을 들어 올린 그는 정신 사나운 정령들의 대화를 무시하며 페일에게 말했다.


“편하게 앉아 있어도 된다.”


그리고 그렇게 너무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때마침 이젤리카가 방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젤리카의 뒤에는 작은 병 하나가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토도톡 가볍게 다가온 이젤리카가 흘끔 시계를 확인했다.


“늑, 아니 페일.”


“네, 이젤리카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이 좀 작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말고 너한테.


이젤리카는 제 눈높이에 맞춰 고개 숙인 페일의 눈을 마주했다.


페일은 제게 맞춘다면 집이 작긴 하지만 스승님의 친우의, 그것도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집을 작다고 솔직히 이야기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그동안 딱히 답을 바라진 않았던 이젤리카가 말문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괜찮다면 네 크기를 조금 줄이면 어떨까?”


응접실과 부엌, 바깥만 오가던 때는 상관이 없지만, 이 크기로는 이젤리카의 연구실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설사 발을 들인다 하더라도 실험 용품들은 모두 이젤리카의 체형에 맞춘 것이라 페일의 도움을 바랄 수도, 그가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젤리카는 절 따라온 병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몸 크기를 줄여주는 약인데, 일주일 뒤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거야.”


크기는 아기 늑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젤리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루나는 그의 귀여움에 쓰러졌다.


이젤리카가 덧붙였다.


“오기 전에 시험해봤는데 데시데리움하고 상충 되는 독성은 없었어.”


조롱박 형태의 약병이 이젤리카의 솜방망이 위로 다가왔다.


“물론 네가 싫다면 연구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법도 있어.”


손이 더 가긴 하지만,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는 할 수 없는 법.


이젤리카는 페일에게 선택지를 넘겼다.


페일은 두 눈을 깜빡였다. 사적인 측면도 그런 편이었지만, 공적인 측면에서는 더더욱, 지극히 수직적인 구조에서 살아왔던 페일에게 다소 낯설었다.


그가 말했다.


“이젤리카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왜?”


“···이젤리카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말한 건데 왜?”


이젤리카는 그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했고, 페일은 왜 그 당연한 것이 궁금한지 도리어 궁금해졌다.


‘날 시험해보시는 건가.’


그는 이젤리카의 질문이 서탑에서 종종 받아온 충성심 테스트와 같은 종류라 생각했다. 그래서 페일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이젤리카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제가 어리석어 이젤리카님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바라시는 걸 말씀해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내 말을 이렇게까지 따르려 하는데?’


그의 속내에 떠오른 물음표가 그대로 표면에 드러난다면, 그의 주위를 한가득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으로 의문을 끝낸 그가 약병을 내밀었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늑대의 의중을 이해하기에는 이젤리카의 사회성이 부족했다. 그것은 많은 사람과 어울려 왔으나 반쯤 타의와 환경으로 인함으로 반수동적인 삶을 살아온 페일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뭐 하는 거야.’


주거니 받거니.


보고만 있어도 밤고구마 세 개를 음료 없이 씹어먹은 기분이 든 루나의 입꼬리가 못나졌다.


그나마 보고 있을 만한 게 서로 빙빙 말을 꼬아가서 생긴 고구마가 아니라 진심과 진심이 맞부딪혀서 생긴 고구마였다.


하아-


루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만 있다간 하루 온 종일 저러고 있게 생겼다.


‘하루만 그러면 다행이게?’


달그락-


부러 다기 부딪히는 소리를 낸 루나가 설탕이 아직 덜 녹은 자리에 또 하나를 욱여넣으며 혀를 찼다.


“보니타의 제자. 그대는 리카에게만큼은 그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솔직하게 답하라.”


루나가 쉭쉭 설탕을 휘저은 티스푼으로 페일을 가리켰다.


“서탑에서는 하루 가지고 선배니 뭐니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설쳐댄 것들이 많았을 테니까 그랬다지만. 여기서 그런 건 필요 없어. 허례 의식? 이젤리카는 그런 걸 알지도 못하고 딱 질색하니.”


루나는 페일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을 잇고서 설탕만 남은 자리에 새 찻물을 부었다. 진득진득한 하얀 갯벌 위로 파도가 밀려들었다.


페일의 대접에도 찻물을 부어준 그가 지그시 페일을 응시했다.


페일은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이젤리카를 보며 조심스레 약병을 받았다.



잠시 후.


이젤리카보다는 여전히 크지만, 눈높이는 엇비슷해진 페일의 몸에서 헐렁해진 붕대가 스륵 흘러내렸다.


작가의말

댓글과 응원 감사합니다 :)


오늘도 좋은 일이 가득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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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0. 동쪽의 여명, 아우로라 23.02.11 13 0 9쪽
26 마녀, 고심하다 (3) 22.01.18 16 1 9쪽
25 마녀, 고심하다 (2) 22.01.17 16 0 9쪽
24 09. 마녀, 고심하다 (1) 22.01.15 13 0 10쪽
23 마녀, 연구를 시작하다 (4) 22.01.14 14 0 10쪽
22 마녀, 연구를 시작하다(3) 22.01.13 15 0 10쪽
21 마녀, 연구를 시작하다(2) 22.01.12 18 0 10쪽
» 08. 마녀, 연구를 시작하다 22.01.11 14 0 10쪽
19 여왕, 친우의 유지를 전하다 (3) +1 22.01.10 25 5 15쪽
18 여왕, 친우의 유지를 전하다 (2) 22.01.08 16 0 9쪽
17 07. 여왕, 친우의 유지를 전하다. (1) 22.01.07 19 0 9쪽
16 06. 마녀, 손님을 맞이하다 22.01.06 19 1 12쪽
15 늑대와 고양이 (8) 22.01.05 21 1 9쪽
14 늑대와 고양이 (7) 22.01.04 26 4 9쪽
13 늑대와 고양이 (6) 22.01.03 24 3 9쪽
12 늑대와 고양이 (5) +1 22.01.01 28 3 9쪽
11 늑대와 고양이 (4) 21.12.31 28 3 9쪽
10 늑대와 고양이 (3) +1 21.12.30 25 2 9쪽
9 늑대와 고양이 (2) +1 21.12.29 39 2 9쪽
8 05. 늑대와 고양이 (1) +1 21.12.28 45 4 11쪽
7 마검사, 눈을 뜨다(2) +2 21.12.25 51 3 12쪽
6 04. 마검사 눈을 뜨다(1) +1 21.12.24 56 3 13쪽
5 마녀, 마검사를 구하다(2) +2 21.12.23 61 5 11쪽
4 03. 마녀, 마검사를 구하다(1) +1 21.12.22 62 6 17쪽
3 02. 마검사, 처분되다. +1 21.12.21 107 17 9쪽
2 01. 마녀, 고양이가 되다. +4 21.12.20 124 22 20쪽
1 프롤로그 +11 21.12.20 138 45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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