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공멸(共滅) : 다섯
왕은 자신의 거처 앞에 거의 다다라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향한 곳은 세자전(世子殿). 세자는 정갈하게 의복을 갖춰 입은 채 자신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 지존을 맞이했다. 그 옆에는 세자보다 약간 나이 많은 세자빈이 함께 예를 갖추고 있었다.
왕이 상석에 앉아 세자를 바라봤다. 이제 겨우 나이 여섯 살이 된 세자. 여느 집에서 태어났다면 어리광을 부리며 클 나이였으나 ‘세자’라는 자리가 그 어린아이를 장난 한번 치지 못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였느냐.”
“책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물음에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는 세자의 모습은 귀엽다기보다는 측은해보였다. 왕 또한 그런 모습에 가슴이 쓰렸다. 그러나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세자는 더욱 강해져야 했다.
“무엇을 읽었느냐.”
“예초(禮初)를 읽었습니다.”
예초는 아주 옛날부터 이어져오던 예법들을 소개한 책이었다. 그 예법들의 의미 등을 풀이한 제법 어려운 책으로 왕이 될 자에게는 필수인 책 중 하나였다.
“언제부터 예초를 배우기 시작했느냐?”
“이제 삼일 됐습니다.”
세자의 말에 왕이 잠시 탁상에 올라와 있는 책들을 바라봤다. 하나 같이 어려운 경전들. 여섯 살의 세자가 이해나 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왕이 잠시 세자의 얼굴과 세자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도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네…?”
오랜만에 듣는 왕의 따뜻한 목소리였다. 세자는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이 이번엔 세자빈을 바라봤다.
“너도 어디 불편한 곳 없느냐?”
“예. 전하께서 이리 신경 써 주시니 어찌 불편한 것이 있겠습니까.”
“네 숙부를 서방으로 보낸 것은 미안하구나.”
태서를 서방에 보낸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왕의 말에 세자빈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라의 큰 일이온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이 있겠사옵니까.”
세자빈의 말에 왕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어린아이들을 저 지옥 같은 조당으로 들이기는 아직 이르다. 왕은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는 왕 쪽으로 세자와 세자빈이 서서 다시 예를 갖추었다. 왕이 문 앞에 서서 문득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세자는 예초말고 ‘강국대략(强國對略)’을 읽도록 하여라.”
“알겠사옵니다.”
세자는 곧바로 왕의 말에 대답했다. 왕은 세자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걸음을 옮겻다.
약 이천년 전에 쓰인 책, 강국대략. 약소국으로서 강대국을 대적할 방법, 책략 등을 적은 책이었다. 그것을 갑자기 왜 읽으라는 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세자는 왕에게 깊은 뜻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가비래의 집 대문 앞에는 조등(弔燈)이 밝혀져 있었다. 조문객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가비래의 명성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수였다. 가비래를 평소 존경했던 무인들 몇이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들고 있었다. 나머지 무인들은 이제 명실 공히 조정 최고라는 말이 걸맞게 된 아도후의 눈치를 보느라 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조의를 표한다며 사람이나 재물이라도 보내는 자들이 좀 있다는 게 위안거리였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나,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 안 한다. 이 말이 가비래의 초상집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 너무 하군. 대장군께서 얼마나 우리 무인들을 위해 힘쓰셨는데, 어찌 이리 초상집을 텅텅 비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조황이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마루에는 가비래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 앞에서 향불이 타고 있었다. 가유현과 가사현이 그 앞에서 상복을 입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집 안에서 죽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장남 가유현을 짓누르고 있었다. 사현도 주먹을 쥔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성수비대 남군에 서둘러 연락을 하였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분명 아도후가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작정을 했던 겁니다. 형님. 이대로 가만히 있으실 겁니까!”
사현의 말에 유현은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사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도후가 서무하의 정체를 속인 증좌가 저희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라도 터뜨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왜 그것을 쥐시고도 바로 움직이시지 않았겠냐. 그것으론 약하다고 판단하신 게야.”
“그렇다면 대장군부에서 하던 조사라도 계속 하도록 해달라고 주청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리다. 아버지면 몰라도 우리가 그렇게 아도후를 건드렸다가는 아마 멸문을 면치 못할 게야.”
가유현의 말에 가사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아버지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멸문을 당해도 상관없소!”
“어허 앉아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현이 침착하게 말했다. 사현이 주위를 살핀 뒤 살짝 허리를 숙여 유현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방법이라면 혹….”
“어허. 방으로 들어와라.”
사현의 말에 유현이 얼른 일어나 바로 등 뒤에 있는 가비래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현은 문 밖을 한 번 살핀 뒤에야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네가 대장군 대리를 맡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남은 건 태 총괄이 언제 대리자를 죽이느냐. 이건데.”
“형님. 헌데, 설령 대리자가 죽는다 해도 아도후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일어난다 해도 제장들이 과연 절 따를까요?”
사현의 말에 유현의 얼굴이 근심이 더욱 짙어졌다. 사현이 계속 말을 이었다.
“서방 정벌을 청하는 것도, 제장들과 함께 회군하여 궁궐로 진격하는 것도. 모두 아버님의 명성과 신망이 있기에 가능하다 여긴 것 아니었습니까. 과연 제가….”
“염려 마라. 그 일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 터이니. 아버지의 명성보다 더 큰 것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현이 살짝 앞으로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그러나 유현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칼. 주천도를 붙잡았다.
“자, 받아라.”
유현이 주천도를 사현에게 건넸다. 가비래가 남긴 유일하다 할 수 있는 유품. 그리고 세상에 단 둘 뿐인 청금으로 만든 무기. 사현이 약간 멍한 표정으로 그 칼을 잡았다. 유현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너는 오로지 대장군의 일만 신경 써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주천도를 왜 제게….”
“네가 가지고 있어라. 지금 대장군은 네가 아니냐. 나는 상례를 다해야 하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
유현의 말에 사현이 받아든 주천도를 바라봤다.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울컥했으나 사현은 최대한 눈물을 참았다. 불구대천(不俱戴天).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법이니. 사현은 복수를 다짐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도후의 방은 밤이 깊었으나 아직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안에 있는 것은 다니라. 다니라가 아도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말씀하신 서신을 전서청에 보냈습니다.”
“잘 했네.”
아도후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니라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 내용입니까. 서무하에게 보내는 것입니까?”
“허허. 그냥 단유점이를 좀 도와줄까 하고. 보내봤네.”
“예?”
“그냥. 그리만 알고 있게.”
“예…. 아 갔더니 전하께옵서 보내시는 서신도 있더군요.”
다니라의 말에 아도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전하께서?”
“예.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만….”
“음. 뭐 별 것 아니겠지.”
아도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잠시 감도는 정적을 다니라가 조심스레 깼다.
“헌데, 서무하는 어찌 하실 요량이십니까?”
“서무하…. 뭐 아까운 인재기는 하나 어쩌겠나. 워낙 중한 일이니.”
“버리시는 겝니까?”
“별 수 있나.”
아도후가 수염을 한 번 쓸어내리며 말했다. 다니라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단유점을 지난번에 믿지 못한다 하셨지 않습니까? 헌데 예전에 서무하를 썼을 때는 어찌 믿고 살려서 돌려보내신 것입니까?”
다니라의 물음에 아도후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무하는 끽해야 떠도는 칼잡이에 불과하지만 단유점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자네. 자네도 명심하게. 벼슬 맛 본 놈은 쉬이 믿으면 안 되는 것이야. 중한 일에 쓸 경우가 있다면 뒤처리를 잘 해야 하는 법이네.”
아도후의 말에 다니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라는 앞으로 가 씨 형제를 어찌 할 것인지, 계획이 무엇인지 등을 더 물은 뒤에야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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