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너가 여기서 왜 나와!
(24) 너가 여기서 왜 나와!
준혁이다. 갑자기 내가 나타나니깐 많이 놀랐나 보지? 애써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게 보인다. 근데 내가 영업직 짬밥이 몇 년인데 그거 하나를 눈치 못 챌까? 영업의 기본 중에 기본은 사전 치밀한 분석이지만, 의외로 협상장에서 눈치껏 지를 때 결과가 좋았던 적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감을 꽤 신뢰하는 편이다.
“왜 왔냐니? 수업 있어서 왔지.”
하지만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했다. 반응이 찰져서 은근 놀리기 좋은 타입이라니깐.
“아니. 내 말이 그게 아니라.”
“놀라게 해주려고 숨긴 거야?”
지원이 형이다. 음 준혁이를 더 놀리고 싶었는데 여기까지만 할까?
“저도. 어제야 안 사실이에요. 뭐 말할 시간도 없었네.”
“그래?”
내 대답을 듣고 지원이 형은 바로 몸을 풀러 가버렸다. 준혁이도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슬슬 수업시간이 다가와서 그런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이제 슬슬 몸을 풀어야겠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내 편견인지는 몰라도 B반은 몸 푸는 거 하나만 봐도 뭔가 좀 달랐다. C반 사람들은 대부분 연생 경력이 짧아서 그런가 뭔가 어설픈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근데 여기 사람들은 스트레칭 하는 거 하나만 봐도 프로 느낌이 난다.
그래서 나도 평소보다 열심히 스트레칭을 했다. 확실히 운동할 때도 그렇고 춤 출 때도 그렇고 스트레칭에 힘을 얼마나 줬냐에 따라 끝나고 오는 데미지 차이가 제법 많이 난다. 예전에는 한번도 그런 걸 못 느꼈었는데 이런 걸 경험할 때마다 예전에 얼마나 운동을 안하고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한참 몸을 풀고 있는데 굳게 닫혀 있던 연습실 철문이 열리면서 누가 안으로 들어왔다.
“엥?”
이번에는 내가 지금 당신이 여기서 왜 나와! 를 할 차례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영준쌤이었다. 기본 안무 배운 이후로 얼굴 자체를 처음 본다. 그때 참 친절하게 알려줘서 이미지가 참 좋았는데 진짜 수업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본격적인 수업 전에 영준쌤은 몸을 풀면서 자연스럽게 연습생들이랑 농담을 주고 받는다. 서로어느 정도 티키타카가 되는 걸 보면 확실히 C반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쉽게 말해 고인물 파티 느낌 이랄까. C반에 내가 오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수업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어수선한 느낌이 강했다. 근데 여기는 왁자지껄하지만 나름 그 소란함 속에 어떤 질서가 있다.
“오늘 새로 들어온 연습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 이야기인가 보군.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라 바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우리 구면이네.”
영준쌤이 아는 척을 하니 연습생 사이에서 약간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영준쌤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래. 몸은 다 풀었지? 바로 수업 들어갑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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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거기서 팔 5도쯤 더 올려야지?”
“동작에만 신경 쓰지 말고 표정도!”
헐. 영준쌤이 이런 수업 스타일이었나? 분명 예전에 1:1 수업 비슷한 걸 했을 때는 엄청 친절했던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완전 딴 사람이다.
“아. 넌 오늘 첫 수업이지. 앞으로 표정에 신경 좀 쓰자?”
물론 나한테도 약한 태클이 들어오긴 했다. 팔다리는 알아서 움직이는데 표정은 카피가 안되더라. C반 수업 때는 이런 지적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확실히 수업수준이 다르긴 하다.
근데 이 와중에 지적을 한번도 안 받은 사람이 있다.
“다들 지훈이만큼 하면 내가 놀아도 되겠네.”
음. 저렇게 대놓고 비교를 하네. 근데 내가 봐도 진짜 깔게 없다. 저런 사람이 왜 아직까지 B반에 있는 거야. 어제 봤던 음방에 나온 아이돌들보다 더 잘하는 거 같다. 주변 분위기를 보니 약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그런 느낌이다. 대놓고 에이스라는건가?
B반 첫 수업을 듣고 나니 대충 감이 잡힌다. 여기 수업 듣는 사람들은 애초에 기본기 습득은 다 끝난 사람들이라 주로 무대표정 같은 디테일에 많은 신경을 쓴다. 나도 영업직 짬이 있어서 접대용 표정 같은 건 자신이 있지만 무대 표정이라는 건 아직 잘 모르겠다. 뭐 하다 보면 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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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보컬 수업이다. 댄스 수업과는 달리 보컬 쪽은 따로 클래스가 있지는 않다. 내 생각에 춤은 한 사람이 한번에 여러 명을 가르치는 게 가능하고, 노래 쪽은 아무래도 그게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댄스는 연습하는 장면만 봐도 누가 틀렸는지 잘 추고 있는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지만, 댄스 수업 때처럼 사람 모아놓고 노래를 시키면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질 거다. 아무튼 그래서 이쪽은 수업의 연속성이 있었다.
“그래. 저번 수업에서 내가 말했던 거 많이 연습해 왔지?”
“네.”
보컬실에서 음악 틀어놓고 녹음하면서 셀프 체크를 해봤지만 아무래도 기본기가 없어서 그런가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지난 수업 시간에 지적 받았던 거 위주로 나름 열심히 연습을 했었지. 근데 아무리 혼자 열심히 해봐도 수업 중간에 피드백 받는 것만큼 효율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래서 전문가를 비싼 돈 주고 쓰는 거다.
“그래. 저음 부분은 많이 좋아졌네. 근데 아직 중간에 플랫되는 부분이 있고 클라이막스 부분에선 조금 더 힘을 주는 연습을 해야겠어.”
처음에는 (초보면 누구나 겪는 거겠지만) 기본 용어도 잘 몰라서 사소한 거 하나하나까지 다 물어봐야 했다. 다행히 보컬 선생님이 친절해서 신경질 안내고 열심히 알려주었고, 덕분에 나도 이제 엔간한 용어들은 잘 알아들을 수 있다. 일대일 수업이라 마음이 더 편한 것도 있다.
아무튼 B반 첫날부터 스케줄이 아주 많아졌다. 슬슬 월평도 준비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아직 기말고사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서 공부는 대충대충 해도 된다는 건 좀 위로가 된다. 단지 C반 나부랭이일 때랑 지금은 평가 기준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해서 이게 걱정이 된다.
레슨을 모두 마치고 개인 연습을 좀 하다 회사 문을 나서는데 벌써 밖이 어두컴컴하다. 불현듯 얼마나 이 생활을 더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 든다. 춤 쪽 재능은 확실히 있지만 다른 쪽은 여전히 불안불안하다는 걸 오늘 다시 느꼈다.
원래 사람이 갑자기 뭐가 많이 변하면 잡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잘 적응하면서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기분 참 오랜만에 느끼네.”
이직하고 나서 어느 정도 적응기가 끝난 다음부터는 사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해외출장도 처음 몇 번은 참 즐거웠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출장기간에 못 한 일들이 결국 이자까지 붙어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물론 큰 계약 따내고 나서 들어오는 보너스는 달콤했지만.
“에이. 뭔 궁상이야. 집에나 가자.”
내일 또 하루를 살아가려면 집에 가서 쉬어야 한다. 오늘 하루 열심히 굴렀으니 잠은 잘 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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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까는 당황해서 미처 이야기를 못했는데 왜 이야기를 안 했냐?”
“뭐? B반 올라간 거?”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너한테 할말이 또 뭐가 있냐?”
하루종일 굴러서 매우 피곤한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기도 전에 준혁이에게 붙잡혀서 이런 소리나 듣고 있다.
“아니 뭐 급한 것도 아닌데 천천히 말하려고 했지. 바로 수업에서 만날 줄은 나도 몰랐어.”
“이게 말이야 방구야.”
딱히 속이거나 숨기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이런 반응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이게 은근 연습생들 사이에서 민감한 문제인가 보다. 회사로 치면 낙하산이 하나 떨어졌을 때 그런 기분인가? 음. 저렇게 비유하니 약간 이해가 가는 거 같기도 하다. 첫 회사에서 동기 하나가 대형 낙하산이었는데 그때를 떠올리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이렇게 갑자기?”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바로 사과를 했더니 준혁이가 살짝 당황한 눈치다. 감정이 얼굴에 바로 드러나는 타입이라 어디 가서 사기는 못 치고 다닐 자식이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대충 수습은 끝난 거 같아서 이 참에 궁금했던 거나 물어보기로 했다.
“아. 근데 혹시 이번 월평에 대해서 뭐 소문 같은 거 못 들었어?”
“갑자기 월평은 왜?”
“아니 C반이랑 B반은 아무래도 평가기준 같은 게 좀 다른가 싶어서?”
그때 옆에서 우리 둘의 대화를 보고만 있던 지원이 형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나랑 준혁이는 처음부터 B반이라서 그런 쪽은 잘 몰라.”
아니. 이럴 수가! 나랑 같이 사는 사람들이 다 엘리트 출신이었어? 지원이 형은 뭐 그렇다고 해도 준혁이 저 자식까지?
“아 준석이는 C반 거쳐서 올라오긴 했다.”
그래도 동지가 하나는 있었네. 근데 준석이는 관심사도 아닌 이런 쪽은 물어봐야 답도 안 해줄 거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형. 이번 월평은 뭔가 좀 다를 거라는 소문 들었어요?”
“너도 들었냐?”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처음 듣는 소리라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어디까지나 소문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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