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요툰하임 - 2
그녀와 기쁨의 조우를 한 카할의 왼쪽 뺨 위로 나뭇가지에 베인 경미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외의 다른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방금 전 의문의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는 무척 놀라워하며 그 예언이 맞을 거라고 맞장구쳤다. 그녀는 이안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그는 마을로 가는 방향을 잘 알고 있으니 자신만 따라오라고 큰소리쳤다. 그들은 깊디깊은 원시림을 헤치며 나아갔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빽빽한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겨우 길을 비추어주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노을빛으로 바뀌면서 눈 바닥은 차차 붉게 물들어갔다. 조금 있으면 어두워질 터였다. 밤이 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야만 한다. 그래서인지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걸음은 갈수록 빨라졌다.
거인이 생활하던 숲이어서 그런지 수목들의 키가 상당했고, 어떤 건 나무통이 수진 같은 아이 세 명이 손잡고 둘러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눈을 비집고 삐죽 솟아난 거친 풀 사이로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뿌드득 뿌드득~”
눈을 밟는 그들의 신발 소리만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마치 넓은 이 세상에 그들과 하늘, 나무, 풀, 눈, 돌 밖에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고요함이 이랬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뭔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카할은 도중에 언제부터인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무척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그녀 쪽을 바라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근데 수진,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너무 조용하잖아.”
“숲이 조용하지, 그럼 딥언더니아 원형광장처럼 시끄럽겠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숲인데도 새 한 마리 울지 않잖아? 다람쥐도 없고. 하물며 사슴이나, 오면서 짐승 한 마리도 마주치지 못했잖아? 넓디넓은 이곳에 우리 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기분 나쁘고 이상하지 않아?”
“듣고 보니 그러네. 근데 왜 이리 돌이 많은 거야? 크기도 다 제각각이고. 밟을까 봐 피해 다니느라 아주 힘들어 죽겠어. 아얏!”
그녀는 바로 앞에 놓인 회색 돌을 미처 피하지 못하여 그만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눈 위로 쓰러져 무릎을 다치진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것까지 자신을 괴롭히다니 한꺼번에 짜증이 확 밀려드는 그녀였다. 분풀이를 하려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어째 해괴한 게 좀 이상했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세히 관찰하던 중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눈 위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어머머!”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좀 더 큰 돌로 다가가 그 앞에 주저 않았다. 그리고 전보다 더 충격적인, 이젠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한 얼굴로 카할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완전 사색이 되어 외쳤다.
“아까 걸려 넘어진 돌에는 다람쥐가 조각되어 있어. 지금 이것은 토끼 모양이고. 앗, 저 건 새잖아? 그리고 그 앞에 누워있는 건 여우 모양이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카할은 그의 왼쪽에 놓인, 자신의 몸 크기와 거의 대등한 돌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곰 새끼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수진, 우리 주위의 돌들이 다 동물 모양을 하고 있어!”
“도대체 왜?”
“모르겠어. 하지만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아. 어서 빨리 이 숲을 떠나자. 어서 빨리!”
그들은 앞으로 뛰면서 가능한 한 돌에 닿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조심히 나아가고 있는데 어떤 나무 밑으로 조그만 자갈들이 한 움큼 쌓여있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녀는 자갈 하나를 슬쩍 집어 눈 가까이 대어 보았다. 꿀벌이었다. 그 자리 바로 위 나뭇가지에 허물어진 벌집이 매달려 있었다. 순간 그녀의 머리로 섬광이 번뜩하고 내리쳤다.
“카할, 이것들은.. 이것들은 조각이 아니야. 진짜 동물들이었다고. 여기 벌들도 저 벌집에서 떨어져서 이렇게 돌이 되어버린 거야. 앗,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죽기 아님 살기로 둘은 정신없이 달렸다. 웬만하면 돌을 건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발에 밟히거나 차이면 마치 전기가 흐르듯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어 넘어질 뻔 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달렸다. 혹시나 그들도 이와 같은 운명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해가 지고 숲으로 몰려드는 어두움의 숨결처럼 극한 공포가 어느새 그들의 몸과 정신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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