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다
통역 마법인지 아니면 의념을 통한 대화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와 나의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물론 그 대화중에 잘못 알아들은 것도 있었고 단순히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물로 내게 의미가 전달된 것도 있었다.
가령 인간이라고 하는 단어가 이 행성에서 인간이라고 발음되지는 않을 텐데 내게는 항상 인간이라는 의미로 전달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엘프라는 단어 역시 내가 어제 행성인을 본 후 든 ‘혹 엘프인가?’하는 생각으로 인해 이 행성인의 종족이 계속 엘프로 내게 의미 전달되는 모양이다.
고블린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아마 그래서 이 행성의 대륙 이름이나 행성의 달 이름이 모두 내가 들어봤음직한 그런 이름이다.
차후라도 그의 말을 배워 그와 대화를 나눈다면 서로가 알아들은 단어들을 수없이 고쳐야 할 것이다.
그에게 무와 아수와 대륙에 대해 물었지만 신에 의해 세 대륙간 이동이 금지되었기에 그 역시 그 대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단다.
그리고 아주 고대에 대륙을 그린 지도가 있기는 한데 지금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단다.
참으로 태평스런 종족이다.
그래도 가끔 조난을 당한 인간들이 아틀라스 대륙으로 흘러들어오곤 하는데 제 고향으로 가지는 못하고 이곳에서 살다가 죽는 게 전부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통해 무와 아수와 대륙의 사정에 대해 알게 되는 게 이곳 엘프들이 아는 전부라고 한다.
더구나 가장 최근에 아틀라스 대륙에 온 인간이라고 해도 벌써 십 년도 더 전이라고 하니 엘프가 두 대륙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럼 여기 아틀라스 대륙에 대해 얘기 좀 해주시죠.
가령 이 대륙의 크기라든가? 아니면 기후라든가?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종족들이 있는지 같은 거 말입니다.”
‘크기? 모르는데. 굳이 그걸 알 필요가 있나.
내가 살고 있는 곳도 모두 모르는데.
그래도 어마어마하게 크다고는 하더군.
아주 옛날에 어떤 엘프가 이 대륙의 크기를 알고자 1년 동안 돌아다녔지만 다 돌아다니지 못했다고 하니까?’
“그걸 어찌 아십니까?
그러니까 어떤 엘프가 그런 기행을 했다는 걸 어찌 아시냐고요?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시는 겁니까?”
‘귀찮게 만날 필요 있나.
그냥 네 개의 보름달이 뜨는 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하면 그 동안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데.’
“예? 그게 무슨?
아니 그 전에 네 개의 보름달은 언제 뜨는 겁니까?”
‘네 개의 보름달? 흐음. 그렇게 말하니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대화를 해 보니 마주한 이 엘프만이 아니라 엘프라는 족속 자체가 세상에 대한 관심이 극히 낮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할 정도다.
그저 하루 종일 마법에 대한 탐구나 하는 족속이다.
더구나 대화라는 걸 거의 하지 않는 모양이다.
당연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최선을 다 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려고 할 뿐이다.
그러니 그와의 대화에서 정보를 얻으려면 그가 답을 할 수 있도록 질문을 고쳐 해야 한다.
“그럼 가장 최근에 네 개의 보름달이 뜬 건 언제입니까?”
‘가장 최근? 가만있어 보자. 그게 5년 전이군. 아니, 6년 전인가.
아무튼 그때 원로에게서 그 게이트라는 게 열릴 거라는 신탁이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거든.
아! 그렇군. 네 개의 보름달이 뜨는 건 10년에 한번씩 있는 일이야.
물론 우리 엘프는 그런 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마나가 성해지는 걸 보고 알지만.
네 개의 보름달이 뜨면 대륙에 마나가 아주 성해지거든.
그 때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가지려고 난리지.
물론 우리 엘프야 그런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내게 전해지는 그의 뜻은 대부분 두서가 없다.
더구나 전해지는 내용은 어떨 때는 장난스럽고 어떤 때는 별 거 아니라는 툰데 그 표정은 낮에 보았던 그 무심한 표정이다.
아니 얼굴에 표정이 거의 없다는 게 맞다.
웃지도 않고 찡그리지도 않는다.
그래선지 수백년을 살았다는 이의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다.
그러니 그가 전하는 내용이 정말인지 농담인지도 분간이 안 된다.
그래도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전제에서 상당한 정보가 흘러나온다.
방금도 10년에 한번씩 네 개의 보름달이 뜬다는 것과 그 때 사람들이 아이를 가지려고 한다는 건 귀중한 정보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대화가 아니라 의미로 뜻을 전달하는 건 익숙하지도 않고 그 뜻이 구체적이지도 않다.
마치 게이트가 문이라는 의미로 전달되었듯이.
‘휴, 엘프의 말이라도 배워야 하나.’
‘그것도 나쁘지 않군.
그렇지만 우리말을 배우기는 쉽지 않을 거야. 워낙에 어렵고 복잡해서 말이지.
아, 그러고 보면 어딘가 나 어릴 적 글자를 배울 때 썼던 책이 있기는 있을 텐데 지금은 없군.’
대화가 아니라 단순히 생각한 거는 읽지 말라고 하려다 그만 두었다.
“책도 있습니까?”
‘응? 당연한 거 아닌가?
물론 우리는 각자가 가진 생각을 통해 배우므로 책이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어릴 적에는 생각을 통해 지식을 배우지는 못하거든.
그러니 책을 통해 배워야지.’
“흠, 엘프가 가진 책을 얻었으면 좋겠군요. 글도 배울 수 있으면 좋겠고요.”
‘그거야 자네 하기 나름이지.’
“그게 무슨 말이죠? 혹 제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럼. 그게 뭐 어렵다고.
더구나 자네는 제대로 된 마나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 듣기로 여기 아틀라스에 온 인간들 모두 제대로 된 마나를 가진 인간은 없다고 들었거든.’
“그건 또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네.
무나 아수와 대륙에서 조난당해 여기로 온 이들 중에 간혹 마나를 가진 이들이 있거든.
그런데 그들이 가진 마나는 모두 제대로 된 마나가 아니었다고 들었어.
저기 자고 있는 자네 동료들이 가진 마나와 비슷하다고 했지.
흠, 자네 동료가 깨어나려고 하는군. 이만 가봐야겠네.
그 칼은 자네가 가지도록 하게.’
“잠시만요. 다시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되죠?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것 참. 나를 만나서 뭐하려고?
혹 마법을 배우고 싶은 건가?’
“마법이요? 가르쳐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흠. 그런데 자네 생각은 그저 얼마간 배우고 떠나겠다는 뜻 아닌가?
그런 식으로는 배울 수도 없지만 가르치지도 않네.
배우고 싶으면 평생을 마법을 배우겠다는 맹세를 하고 내게 와야 할 거야.
그럴 수 있나?’
“예? 그건.”
‘어려운가 보군. 그러니 자네는 마법을 배울 수 없는 거네.’
“좋습니다. 마법을 배우는 건 포기하죠.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고블린의 바람총에 맞았을 때 해독하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그가 가르쳐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 부탁이다.
‘고블린 바람총? 그것도 모르나? 정말 형편없군.
음, 그게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는군.’
“혹 모르는 거 아닙니까?”
일부러 수작을 걸었다.
‘모른다고? 내가?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네.
고블린 바람총을 상대해 본 게 수백년 전이거든. 에잉, 기억이 안 나는군.
잠시 기다리고 있게. 내 가서 그 제법을 가지고 올 테니.’
그런 후 내 답은 들을 생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흔히 하는 말로 연기처럼이라는 비유를 하는데 아무리 연기라도 사라지는 중 그 연기가 조금이라도 보일 텐데 정말 원래 나 혼자인 냥 그 자가 사라지고 없다.
“끙, 어 삼촌. 왜 삼촌이 여기 있어요?”
“응?”
그리고 조금 전까지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밖의 소리가 들리기까지 한다.
좀 전의 일이 꿈이 아니라면 그가 마법도 없애버리고 간 것이다.
“삼촌이 왜 불침번을 서고 있냐고요?”
“어, 삼촌이 생각할 게 있어 삼촌이 서겠다고 했다.”
“지금도 생각할 게 있어요?”
“그래 생각할 게 있으니 더 자라. 피곤할 텐데.”
“헤헤. 그렇다면야. 고맙습니다.”
불침번 때문에 깬 모양이다.
‘설마 여태 졸다가 꾼 꿈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가다리니 어느새 그가 나타나 다시 내 머리를 두 손으로 쥐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또 어느새 외부의 소리가 차단이 됐다.
‘여기 고블린 바람총을 해독하는 방법이네.’
내미는 건 흔히 양피지라는 거다.
일단 받아서 그 내용을 들춰보았다.
그렇지만 내가 그 내용을 어찌 안단 말인가.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그려진 그림인데 어떤 식물을 그린 걸로 보인다.
“제가 엘프의 글도 모르는데 이 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거 엘프의 글이 아니라 무와 아수와에서 쓰는 대륙의 글이네만.’
“예? 거기 글은 제가 어떻게 알고요?”
‘응? 아, 그렇지. 자네는 거기 대륙 사람이 아니지.’
“그냥 그 내용만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아니 그 내용을 안다고 해도 당장 제가 거기 있는 물건을 만들 재간은 없습니다.
혹 바람총의 마취를 푸는 약을 구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엘프의 하는 양이 뭔가 빈틈도 많아 보여 기왕 하는 김에 한발을 더 나갔다.
‘그건 아주 귀찮은 일이라 그러기는 싫네.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내가 대륙에서 쓰는 글을 알려줄 테니 자네가 그 책을 읽고 제법을 배우도록 하는 거 말이네.
솔직히 그 책을 뒤져 고블린 마취 해독법을 알려주는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거든.’
“아니, 대륙의 글을 알려주는 건 귀찮지 않고요?”
‘그건 내가 알고 있으니 별로 귀찮지 않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당장 여기서 비록 글이라지만 하나의 언어를 알려주겠다는 건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더 귀찮고 오래 걸리는 일로 보이는데 말이다.
더구나 혹 글을 안다고 글의 의미를 아는 것도 아니다.
한글을 읽을 줄 안다고 그 의미까지 아는 게 아니듯.
‘다만 배우면 머리가 상당히 아플 걸세. 그래도 배우겠나?’
“골치가 아파봐야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당연 배우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글자라도 알아두자는 마음에 배우겠다고 나섰다.
본래 글이란 결국 글자부터 시작하는 법이니까.
‘그래? 자네 참 용기가 있군.
그렇게 배우는 건 우리 엘프들도 싫어하는 방법인데 말야.
언젠가 대륙인을 상대로 뭐가를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결국 가르치지 못한 걸로 알거든.
아마 자네가 제대로 된 마나를 가져서 그런 모양이야.
그럼 바로 가르쳐주도록 하겠네.’
그러면서 다시 내 머리를 두 손으로 쥐고 입으로 뭐라고 중얼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면서 머릿속으로 처음 보는 글과 그 글을 읽는 법에 대한 지식이 밀려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깨질 거 같은 머리에 땀을 줄줄 흘리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지만 언어에 대한 지식은 쉼없이 밀려들기만 한다.
‘이런 고작 대륙 언어인데 자네 역시 쉽지 않은 모양이군.
우리 엘프어를 가르쳐줬다간 큰일 날 뻔했군.’
“헉헉. 이게 가르치는 방법입니까?”
‘그렇지. 그게 우리 엘프가 가르치는 방법이네.
물론 우리 엘프도 그런 식으로 배우려고 하지는 않지만. 머리가 너무 아프거든.’
“머리가 아프다는 게 정말로 머리가 아프다는 거였군요.”
‘이제 배웠으니 그 책을 보고 스스로 알아서 제법을 찾도록 하게나.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네.’
“잠깐만요. 다시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엘프의 나무를 찾아 나무에게 말을 하도록 하게. 그러면 내가 들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역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여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손에 쥐어져 있는 책과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이상한 언어를 생각하니 꿈이 아닌 건 분명하다.
‘으, 아무래도 안 되겠군.’
갑자기 밀려든 지식 때문인지 정말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민정아, 일어나봐.”
“왜? 삼촌이 불침번 선데메. 아니 삼촌 어디 아파?”
“어, 삼촌 좀 쉬어야겠다. 미안하지만 네가 불침번 서라.”
“아, 알았어. 어서 누워. 큰일이네.”
“그냥 좀 쉬면 나을 거야. 그러니 호들갑 떨 필요 없어.”
“알았어. 이봐요, L그룹씨. 일어나요.”
읽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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