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천명쑤심 님의 서재입니다.

멈춰버린 시계추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천명쑤심
작품등록일 :
2021.03.11 16:08
최근연재일 :
2021.10.08 21:48
연재수 :
72 회
조회수 :
2,645
추천수 :
18
글자수 :
493,087

작성
21.10.06 17:29
조회
33
추천
0
글자
21쪽

경계. 7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DUMMY

여자는 입술을 매만졌다. 심하게 터져 핏물이 흐르는 입술이 가져오는 고통은 제법 심했다. 그녀는 난간에 팔을 올렸다.




제국 발라의 중앙수도, 아스페르에 바람이 불어온다. 여자는 선선한 바람에 묻어나는 비 냄새를 맡았다. 오래지 않아 비가 내릴 것이다. 그녀는 짙게 드리운 어둠과 동화된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가 서 있는 건물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그녀의 회색빛을 띠는 금색 눈동자가 연회장의 불빛을 받아 은은한 빛무리를 만들어낸다.




여자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몸보다 한참 큰 셔츠는 힘없이 흘러내려 가슴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셔츠를 끌어올리는 모습은 어딘지 유약하게 비춰진다. 그녀는 연회장을 내려다보았다.




연회장을 보는 여자의 시선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무감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는 창백한 피부와 어울려 인형처럼 보였다. 그녀는 긴 머리가 바람에 제멋대로 흩날리게 놔두었다. 문득 여자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본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 위대한 벽으로 향하는 연회에 참가했다. 이들을 제외하고 중앙수도, 아스페르에 머물고 있던 아르레데나겐은 그녀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인기척을 내는 이는 새로운 아르레데나겐이거나 아르레데나겐이 아니란 뜻이다.




새로운 이가 수도에 온 것이라면 그녀가 알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토록 가까워질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는 세상에 단 열일곱 명뿐이다.




제국 발라의 9군단장 가면, 발라 에게테푸쉬 이스테리아는 여전히 연회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이걸로 벽의 아르레데나겐은 예순 명이 넘었네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발라는 터진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에서 시작된 고통이 몸 곳곳에 전해진다. 그녀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따끔거렸다. 아픔과는 별개로 입술을 움직이기 한결 편해졌다. 그녀는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은 눈을 비볐다.




인기척이 점차 가까워진다. 곧 발라의 귀에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상대방이 정말 가깝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다시금 그와의 차이를 느꼈다.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면 상대가 이토록 가깝다는 것조차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발라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구름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 근처에 머물던 빛무리가 섬광이 되어 흩어진다. 발라는 두 팔을 가슴께까지 들었다.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




“비가 오네요. 아마 겨울이 오기 전 아스페르에 내리는 마지막 비가 될 것 같아요.”




조곤조곤 말하는 발라의 목소리는 그녀의 외모를 빼고서도 굉장히 퇴폐적이다. 발라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손가락 끝에 걸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전 비오는 날을 정말 싫어했어요.”




우산이 펴지는 소리가 들린다. 곧 커다란 우산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발라는 흘러내린 옷가지를 다시 끌어 올렸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비오는 날도, 빗소리도, 비를 맞는 것도 좋아하지만요.”




발라는 조심스럽게 뒤로 돌았다. 그녀는 우산을 든 채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금에서 뽑아낸 것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있다. 발라와 비슷하지만 좀 더 어두운 피부는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은 사람 같다. 경비의 복장을 갖추고 있는 사내는 발라의 곁으로 한 발 다가와 한 팔을 난간에 걸쳤다.




그의 눈동자는 새하얗게 빛난다. 발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신비로움을 간직한 눈을 유심히 살폈다. 피곤한 듯 풀어져 있는 눈매는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남자와 같다. 발라는 사내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면도를 한 것 같지 않음에도 얼굴에 수염이 없다. 발라는 매끄러운 피부를 만지작거리다가 그의 흰 머리카락을 손끝에 올렸다. 머리카락은 흩날리는 모습과는 반대로 부드러움이 없었다. 강철로 만든 현과 같은 뻣뻣함과 병장기의 날카로움이 공존하고 있다.




“왜 돌아오신 거죠?”




사내의 새하얀 눈동자가 발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군단장 간의 내전,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돌아오신 건 아니잖아요. 왜 돌아오신 거예요?”




사내가 다시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저와 프리아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시지 않으시는군요.”




발라는 사내의 각진 턱을 만졌다.




“모르는 건 우리뿐. 이번에도 칼란두일은 알고 있겠죠. 안 그런가요, 이블레이가?”




이블레이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만족하면서도 답답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말만 하시겠죠. 우린 알 필요 없다고.”




이블레이가는 말없이 발라에게 우산을 쥐어주었다. 그는 왔을 때처럼 소리도, 인기척도 없이 뒤돌아 가기 시작했다. 발라는 우산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칼란두일처럼 당신의 제자잖아요, 스승님. 그런데 왜······.”




이블레이가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발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블레이가의 모습이 사라졌다. 발라는 애처로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나쁜 새끼······.”




터진 입술이 말라 아픔을 더한다.








*








이제 마흔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율레자르는 얼굴에 생긴 팔자주름을 매만졌다.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처럼 이것도 어느새 불쑥 찾아왔다. 한창 때만 해도 얼굴에 주름이 생길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율레자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는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젊을 때와 비교하면 그의 위상과 기백은 놀랍도록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있다. 다만 마흔의 나이부터 투기의 성장이 더뎠다. 그의 스승은 육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라 말했다.




한마디로 패기와 살기는 모를까 투기는 각성할 수 없다.




인간의 상위 종족이 아닌 이상 성장이 멈추고 노화가 시작되는 건 자연의 섭리다. 율레자르는 그 한계가 너무 일찍 찾아왔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는 오러와 투기를 동시에 활성화했다.




몸 절반을 붉은 오러가 뒤덮는다. 나머지 반신은 색이 없는 투기가 둘러싼다. 율레자르는 자신이 가진 초인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잠시 후 율레자르는 넘쳐흐르는 오러를 거두었다. 그는 투기만을 두른 채 첨탑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두 개의 초인의 힘이 섞이지 않는다. 율레자르는 기지개를 켰다.




“스승님처럼은 안 되는 건가······.”




그의 스승은 율레자르가 융합에 소질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 율레자르는 삼기와 오러를 융합시킬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가능한지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쉽게 얻은 힘은, 쉽게 잃어버리는 법.’




“고지식한 사람 같으니······.”




율레자르는 태양빛을 견디다 못해 옷에 달려 있던 후드를 썼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건만, 아직 남은 여름의 태양은 뜨겁다. 율레자르는 하품을 했다. 슬슬 약속 시간이 되어간다. 잠시 후 율레자르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다.




“기다리시던 사람이 아니라 실망하셨나요?”




밝은 분홍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율레자르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이 불안함은 저 여인과 만난 이후로 때때로 느껴지던 것이다.




그녀는 율레자르가 전처를 잃고 상심하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났다. 전처와 같은 강인한 여자에게만 마음을 허락할 줄 알았다. 눈앞의 여인은 그녀와 완전히 반대였다. 하지만 율레자르는 자신도 모르는 새 여인에게 빠져들었다. 왠지 곁에 두어야할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저 여인과 만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그 긴 시간동안 지켜봐왔지만 아름답고 성격 좋은 여자라는 결론이 지배적이었다. 때때로 느껴지는 이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제외하면 그녀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대제국 발라가 아직 왕국이었을 시절부터 왕들을 지켜온 ‘왕의 방패’의 일원들에게 저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리고 왕의 방패 지휘관인 벨페스트를 제외한 네 명 모두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벨페스트에게도 묻고 싶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율레자르가 황제로 등극하기 전에도 후에도 벨페스트란 존재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이렇듯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왕의 방패 일원들은 그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에 말에 의하면 벨페스트는 언제나 율레자르를 지켜보고 있다.




율레자르는 여인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조금 정도군요. 하지만 당신의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도 사라집니다. 칼리사,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웬만한 고민은 다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말이죠.”




칼리사는 율레자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율레자르의 손을 붙잡았다. 거친 전장을 수없이 넘어온 투사의 투박한 손이었다. 칼리사는 그 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율레자르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말했다.




“헌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평소에 자주 들르는 곳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칼리사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픈 님께서 데려와줬습니다.”




율레자르가 시선을 옮겼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덩치 큰 사내가 걸어오고 있다. 율레자르는 칼리사가 보지 않는 틈을 타 하픈에게 인상을 썼다. 하픈은 허허 웃었다.




“아, 미안. 미안. 근데 어떡하냐, 예비 황후님께서 황제님을 꼭 뵙고 싶다는데. 네가 예비 황후 말은 다 들어주라며?”




율레자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하픈은 그 얼굴에서 ‘이 양반아, 정도라는 게 있지!’라는 말을 읽을 수 있었다. 하픈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의 몸짓에 율레자르는 이마에 주름이 늘어나는 감각을 맛봐야했다. 율레자르는 하픈을 쏘아보았다.




‘중요한 얘기를 못하게 되잖습니까!’




‘빼고 하면 되지.’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율레자르 님?”




칼리사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율레자르는 표정을 풀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칼리사?”




“혹시 제가 방해되는 건가요? 하픈 님이 두 분이 만나시는 걸 잠깐의 일탈을 즐기시는 것뿐이라고 하시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뵈러 왔습니다만······.”




잔뜩 실망한 칼리사를 본 율레자르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모습에 하픈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율레자르가 하픈을 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한참을 웃던 하픈이 말했다.




“크하하하하! 황제, 넌 정말 카구야 때도 그랬지만 정말정말 여자한테 서툴구나? 엘은 어떻게 낳았냐? 하긴 너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카구야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했겠네.”




“하픈!”




“푸흐흐흑흑! 야, 네가 그러니까 맨날 네메시스가 비웃는 거 아니야? 어휴, 생긴 건 다 늙은 주제에 아직도 한참 어리네. 우리 율 어린이, 몇 살? 네 쨜? 마흔 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지 못한 하픈은 눈물까지 흘렸다. 율레자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할 수만 있다면 하픈의 멱살을 움켜잡고 쌍욕을 하고 싶다. 그는 칼리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아하하하······. 칼리사, 하픈과 우리끼리 긴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 후에 찾아뵐 테니 궁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율레자르는 하픈을 쳐다봤다. 하픈은 율레자르의 사나운 얼굴을 보며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율레자르는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가 말했다.




“하픈, 칼리사를 궁으로 데려다주시겠습니까?”




“뭐야, 무슨 소리를 하려고 예비 황후를 보내고 둘만 보려고 해?”




“잔말 말고 부탁 좀 합시다, 예?”




하픈은 율레자르의 짜증 가득한 얼굴을 보곤 헛기침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율레자르가 칼리사의 손을 놓자 하픈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하픈이 다시 나타났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는 하픈을 율레자르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율레자르가 말했다.




“하아······,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둘만 따로 보자고 한 건 당신 아닙니까?”




“괜찮아, 괜찮아. 황제 너 늘 그렇게 쓸데없는 일에 열을 내니 금방금방 늙어가잖아. 아직 네 아들 어리다? 지금 너 쓰러지면 네 아들 하나가 이 큰 땅덩이 관리할 수 있겠냐? 암만 중앙수도가 영웅의 비호아래 있다지만 네 자리를 노리는 필멸자는 많다? 오래돼서 까먹은 거 아니지? 영웅은 아르레데나겐들만 헛짓 못하게 막아준다는 거. 우리들이라고 해도 나랑 네메시스를 제외하면 아르레데나겐만 신경 쓰지 필멸자는 신경 안 쓴다? 거기다가 네메시스가 널 돕고 있다곤 해도 걘 변덕이 심한 애야. 언제 돌변할지 몰라.”




율레자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그가 힘 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잘 압니다. 왕의 방패 여러분과 영웅께선 제가 아니라 선조인 아스케인 황제의 제국을 지키는 것이란 걸요. 그건 그거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제1등공신이 당신이란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정말 매일매일 머리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만······.”




하픈은 팔짱을 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첩탐의 끄트머리로 향했다. 율레자르는 말없이 하픈의 뒤를 따랐다.




나란히 선 두 남자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들은 따로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담배에는 불이 붙었다. 하픈은 연기를 내뱉고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는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얼음 장벽이 보인다.




“말썽꾸러기들이 위대한 벽으로 향했어.”




“드디어 출발했습니까. 용케도 큰 싸움이 생기진 않았군요. 지도를 새로 그려야하나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잘 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레큐런스 님은 한바탕 할 줄 알았는데······.”




“생각이 있다면 그런 짓 못하지. 아무리 개차반인 레큐런스라도 1세대가 모여 있고 벨페스트의 위치도 모르고 영웅까지 온 마당에 걔가 뭔 짓을 하겠어?”




율레자르는 하픈을 쳐다봤다. 2미터가 넘는 그를 보기 위해선 고개를 젖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율레자르는 뒷목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율레자르가 말했다.




“헌데 하픈. 그렇게 레큐런스 님 험담을 해도 괜찮은 겁니까?”




하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가?”




“이르칼라 님을 대신해 왕의 방패에 소속되기 전에 8군단의 전위셨잖습니까?”




하픈이 코웃음 쳤다.




“말 그대로 전 8군단이지. 율레자르 넌 아직도 우리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 같구나?”




“뭐, 잘 모르긴 하죠. 제가 감히 어떻게 수 시대를 거쳐 살아온 여러분을 이해하겠습니까?”




“에효. 우리한테 소속감 그런 건 없어. 서로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붙어 있는 것뿐이지. 난 레큐런스에게 얻을 게 있었고, 레큐런스도 나한테 기대한 게 있어서 서로 어울린 거야. 난 얻을 거 얻고 레큐런스 밑에서 나온 거지. 레큐런스는 쓸모없어진 나를 대신해 새로운 전위를 구한 거고. 물론 걔가 나보다 한 세대 위여서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긴 하다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복종은 하지 않아. 마음에 안 들면 서로 싸우지. 세대 차이가 나든 안 나든 들이박고 보는 건 공통적이니까. 안 그래도 없는 아르레데나겐이 괜히 줄어드는 게 아니라고.”




율레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픈은 담뱃재를 털었다. 재는 바람에 흩날려 어딘가로 날아갔다.




“원래는 여기 들어온 건 이르칼라 밑에서 일하려고 한 거였지. 벨페스트 밑에서 일할 예정은 아니었어. 아무리 오래 살았고, 여자고 남자고 가리지 않고 취했다지만 내 천성이 사내놈인 걸 어떻게 하냐? 남자보단 여자한테 더 흥미가 가는 건 뭐 본능이지. 프리아랑 발라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쪽은 자리가 안 나서 말이야. 여긴 자리 널널해서 왔지. 근데 재수 없게도 이르칼라 얼굴 보지도 못했는데 벽으로 훌쩍 떠나버리고 남은 건 벨페스트 뿐. 하는 일은 황제, 네가 흘린 똥 치우는 거고.”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율레자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하픈을 올려다보았다. 하픈은 율레자르를 곁눈질하곤 피식 웃었다. 하픈이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는 살짝 구겨진 종이를 율레자르에게 건네주었다. 율레자르는 종이를 펼쳤다.




“······실반.”




율레자르는 종이를 오러로 감쌌다. 그는 오러를 불로 벼려 종이를 흔적도 남지 않게 태워버렸다. 그가 담뱃갑에서 새 담배를 꺼냈다.




“메이룬스의 생각을 좀처럼 읽을 수가 없군요. 이 흐름은 누가 봐도 전쟁을 하자는 거 같은데······.”




하픈은 자신의 남아 있던 담뱃불로 율레자르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하픈이 말했다.




“그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전쟁은 없어.”




율레자르가 기지개를 켰다.




“스승님이 돌아오셨기 때문이죠.”




“이블레이가가 있어서 저쪽은 우리를 공격 못하고, 우리도 프리아와 칼란두일이 벽으로 가서 공격을 못하지.”




“벨페스트 님이랑 발라 님은 실반이 제국 내까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전쟁에 손대지 않으실 테고요.”




“저쪽도 레노어를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것 같지만, 글쎄? 레노어는 간섭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실반에 남은 1세대는 셋인데······. 그 싸움 좋아하는 놈들이 아스케인의 정복전쟁 때도 안 나타난 거 보면 아무래도 벽 아니면 다른 대륙에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율레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픈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율레자르는 고개를 숙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시원한 음료를 들이킨 두 사람은 첨탑 아래의 대도시를 바라보았다. 율레자르가 유리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메이룬스와 저는 즉위 시기도, 하고자 했던 일들도 겹칩니다. 그래서 굉장히 행동을 읽기 쉬웠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하는 짓이 영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세계 각지에 실반의 기사들을 뿌려 전쟁을 일으키고, 끝내고 있어요. 일으키는 것까지는 어떻게 이해하겠지만, 끝내는 건 도저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하픈은 머리를 긁적였다.




“너희가 우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도 너희를 이해하기 어려워. 애초에 같은 종족도 아니고 생긴 것만 비슷한데다가 살아온 시대 자체가 다르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긴장을 놓치면 안 된다는 거야. 실반이 준비한 전쟁은 우연히 영웅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불발.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시도할 수 있게끔 작정하고 힘을 모으고 있지. 그리고 이번에 전쟁이 터진다면, 저쪽은 아스케인한테 뺏겼던 ‘강철의 태동’을 되찾기 전엔 멈추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천 년 전의 되풀이가 되겠군요······.”




“과연 그 정도로 끝날까? 장담하는데 불의 시대 이후로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질 거다. 알스트레일과 레노어 단 둘만으로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곤 믿기 힘들어. 나머지 세 명이 없는데도 그런 결정을 했다는 건 준비된 다른 게 있다는 거야. 그게 뭔지 알기 전까진 걸어오는 싸움은 피해.”




율레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픈은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담배를 첨탑 아래로 떨어뜨렸다. 문득 하픈은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율레자르가 그를 바라보았다.




“하픈?”




하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하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꺼림칙한 투로 말했다.




“넌 신경 안 써도 돼. 벨페스트겠지.”




그렇게 말하는 하픈의 얼굴은 율레자르가 알던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율레자르를 궁으로 돌려보내고 첨탑 위로 혼자 올라온 하픈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율레자르에게는 얼버무렸지만 그 시선의 정체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 잠깐 동안 추적을 시도했지만 흔적은 금세 끊기고 말았다.




‘정말 벨페스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벨페스트는 이렇게 소름끼치는 시선은 아니었단 말이지······.’




하픈이 고개를 내렸다. 그는 한참을 제자리에 서있었다. 하픈은 팔짱을 꼈다. 사라진 흔적을 찾는 건 그에게는 불가능하다. 하픈은 네메시스의 손을 빌려야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연재하는 게 끝나고 새 작품으로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멈춰버린 시계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기억해주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21.03.11 92 0 -
72 경계. 10 21.10.08 28 0 16쪽
71 경계. 9 21.10.08 29 0 15쪽
70 경계. 8 21.10.06 30 0 18쪽
» 경계. 7 21.10.06 34 0 21쪽
68 경계. 6 21.10.06 30 0 20쪽
67 경계. 5 21.10.02 29 0 20쪽
66 경계. 4 21.09.07 32 0 14쪽
65 경계. 3 21.09.06 31 0 17쪽
64 경계. 2 21.09.05 32 0 13쪽
63 경계. 1 21.09.03 31 0 20쪽
62 epilogue. 여명 21.08.19 35 0 20쪽
61 epilogue. 암살의 대가 21.08.16 31 0 12쪽
60 epilogue. 루브타스의 경계 21.08.14 31 0 17쪽
59 epilogue. 게오르그 21.08.13 43 0 23쪽
58 epilogue. 강철 21.08.11 30 0 13쪽
57 epilogue. 피와 철의 사냥꾼 21.08.10 28 0 17쪽
56 epilogue. 붉은 달 21.08.09 28 0 10쪽
55 잿더미. 33 21.08.09 29 0 18쪽
54 젯더미. 32 21.08.07 33 0 22쪽
53 잿더미. 31 21.08.05 28 0 17쪽
52 잿더미. 30 21.08.03 34 0 14쪽
51 잿더미. 29 21.08.01 32 0 19쪽
50 잿더미. 28 21.07.31 34 0 12쪽
49 잿더미. 27 21.07.24 31 0 24쪽
48 잿더미. 26 21.07.24 31 0 20쪽
47 잿더미. 25 21.07.12 30 0 14쪽
46 잿더미. 24 21.07.12 30 0 9쪽
45 잿더미. 23 21.07.05 31 0 10쪽
44 잿더미. 22 21.07.03 30 0 18쪽
43 잿더미. 21 21.06.27 31 0 15쪽
42 잿더미. 20 21.06.25 30 0 14쪽
41 잿더미. 19 21.06.24 29 0 12쪽
40 잿더미. 18 21.06.22 32 0 14쪽
39 잿더미. 17 21.06.18 30 0 17쪽
38 잿더미. 16 21.06.17 32 0 16쪽
37 잿더미. 15 21.05.30 40 0 14쪽
36 잿더미. 14 21.05.23 40 0 15쪽
35 잿더미. 13 21.05.21 38 0 14쪽
34 잿더미. 12 21.05.17 37 0 15쪽
33 잿더미. 11 21.05.11 34 0 17쪽
32 잿더미. 10 21.05.08 34 0 16쪽
31 잿더미. 9 21.05.06 40 0 14쪽
30 잿더미. 8 21.04.27 58 0 12쪽
29 잿더미. 7 21.04.23 34 0 19쪽
28 잿더미. 6 21.04.21 35 0 20쪽
27 잿더미. 5 21.04.18 35 0 16쪽
26 잿더미. 4 21.04.16 36 0 14쪽
25 잿더미. 3 21.04.12 46 0 15쪽
24 잿더미. 2 21.04.11 36 0 17쪽
23 잿더미. 1 21.04.10 39 0 13쪽
22 겨울. 22 21.04.04 37 0 11쪽
21 겨울. 21 21.04.01 39 0 12쪽
20 겨울. 20 21.03.30 37 0 12쪽
19 겨울. 19 21.03.27 42 0 13쪽
18 겨울. 18 +1 21.03.26 39 1 12쪽
17 겨울. 17 21.03.25 33 1 12쪽
16 겨울. 16 21.03.24 37 1 13쪽
15 겨울. 15 21.03.22 48 1 14쪽
14 겨울. 14 21.03.19 42 1 11쪽
13 겨울. 13 21.03.14 42 1 11쪽
12 겨울. 12 21.03.13 41 1 11쪽
11 겨울. 11 +1 21.03.13 35 1 11쪽
10 겨울. 10 21.03.13 40 1 18쪽
9 겨울. 9 21.03.13 35 1 13쪽
8 겨울. 8 21.03.12 36 1 12쪽
7 겨울. 7 21.03.12 36 1 14쪽
6 겨울. 6 21.03.12 41 1 18쪽
5 겨울. 5 21.03.12 42 1 12쪽
4 겨울. 4 +1 21.03.12 39 1 14쪽
3 겨울. 3 21.03.11 38 1 11쪽
2 겨울. 2 21.03.11 51 1 13쪽
1 겨울. 1 +1 21.03.11 140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