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천명쑤심 님의 서재입니다.

멈춰버린 시계추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천명쑤심
작품등록일 :
2021.03.11 16:08
최근연재일 :
2021.10.08 21:48
연재수 :
72 회
조회수 :
2,635
추천수 :
18
글자수 :
493,087

작성
21.07.24 16:28
조회
30
추천
0
글자
20쪽

잿더미. 26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DUMMY

“역시 그런 무거운 걸 들 수 있는 건 자네뿐일 거야.”




클라이프는 씩 웃더니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 그가 내려놓은 물건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클라이프는 반대쪽 어깨에 걸고 있던 밧줄을 내려놓았다. 밧줄의 끝에는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가 단단히 동여매어져 있었다. 클라이프는 투기를 가라앉히며 어깨를 풀었다. 그가 말했다.




“인간은 하면 되는 생물입니다.”




클라이프의 말에 주름이 얼굴 구석구석을 뒤덮은 중년의 사내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클라이프도 그를 따라 웃었다.




점심 먹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낸 클라이프는 중년의 사내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녔다. 클라이프는 중년의 사내를 벤더슨이라 불렀다. 벤더슨은 클라이프와 함께 남는 시간을 보내던 중 마침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식사를 하기로 했다. 두 남자는 평소에도 일을 마치면 곧잘 가곤 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클라이프는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벤더슨과 대화하다가 적기를 놓쳐 드문드문 탄 자국이 보였다. 문득 클라이프는 평소에 먹던 돼지고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돼지고기가 아닌 거 같은데요?”




“음?”




벤더슨은 클라이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더니 말을 이었다.




“아, 자네 모르는가?”




“뭘요?”




클라이프는 고기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벤더슨은 클라이프의 술잔을 채우며 답했다.




“요 근래 무슨 일인지 고기값이 많이 싸졌어. 저번에 들렀던 장사치들이 고기를 아주 싸게 넘기더라고. 이렇게 싸게 팔면 이윤 남는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충분히 남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왜 고기값이 싸졌는지 물었더니 자기네들도 아는 게 없다고 하더라고. 그냥 어느 순간부터 고기 물량이 많아졌다고 하던데······.”




“흐음. 그거 참 이상한 일이네요.”




“에이, 고기를 싸게 살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걸세.”




클라이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기가 싸졌다는 건 공급이 많아졌다는 뜻이지만, 여태껏 십여 년을 변화가 없던 것이 바뀌자 의구심이 들었다. 클라이프는 새삼스럽게 바깥소식을 알 수 없다 생각하자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술을 잘 마시지 못하던 벤더슨은 탁자에 머리를 박고 코를 골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이프는 이대로 벤더슨을 집까지 업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세요, 벤더슨 씨. 집에 가야죠.”




그가 벤더슨을 깨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가게를 부수며 나타난 불덩이는 커다란 바위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는 모습이었고, 그것은 벤더슨의 몸을 찌그러뜨렸다. 클라이프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벤더슨이 사라지고 커다란 돌덩이가 불타오르고 있는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어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하지만 살갗을 간질이는 열기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클라이프는 우물쭈물 불덩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발라카스의 불에 단련되어 있다고는 해도 투기로 몸을 보호하지 않으면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다. 클라이프는 투기를 두르지 않고 불타는 돌덩이를 손으로 만졌고 경미한 화상을 얻을 수 있었다. 짧게 신음을 내뱉은 클라이프는 투기를 둘렀다.




무너진 건물을 빠져나오자 도망치는 마을 사람의 모습과 무기를 착용한 채 달려가는 자들의 상반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망치는 자들은 평범한 마을 사람이었고, 무기를 든 자들은 과거 왕국 페이서스의 귀족 실버문 가의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멀뚱멀뚱 서 있는 클라이프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라이프? 이 멍청아! 뭐하고 있어? 집으로 가서 엘사와 갈라테아 님을 데리고 도망쳐!”




밝은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는 클라이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말했다. 사내는 또 다시 하늘을 가로지르는 돌덩어리를 보며 혀를 찼다. 그는 게럴드를 부르려다가 클라이프가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넌덜머리가 났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정신 안 차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기사단 단장이었다는 자식이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해서 멀뚱멀뚱 눈이나 굴리고 앉았냐!”




사내는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그는 클라이프의 몸뚱이를 칼로 그었다. 피가 튀었고 클라이프는 눈을 크게 뜬 채 사내를 쳐다봤다. 활성화된 투기 덕분에 아무는 상처에 손을 얹은 클라이프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미친······, 정신 차리게 해주는 건 뺨 때리는 걸로 충분한 거 아니냐, 딘?”




“넌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 어? 마을 입구와 북문 쪽으로 광역 초월기 두어 개만 던져놓고 산으로 올라가. 우리가 최대한 시간 끌 테니까 도망쳐. 페아르가 확실히 성장할 때까지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 알겠냐?”




“잠깐, 딘!”




“이놈들은 ‘검은 숲’이 아니야! 놈들의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용병들이지. 시간이 얼마 없다. 사도 한 놈이라도 뜨는 날에 여기서 끝장이야! 어서 움직여, 이 멍청한 놈아! 게럴드! 측면 사수해! 놈들이 우회한다! 에히놀! 저 창잡이를 쫓아!”




클라이프는 달려가는 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딘의 요구대로 마을 입구와 그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이어서 하늘에서 불의 비를 내리게 한 클라이프는 엘사와 갈라테아가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클라이프는 사라졌다.








*








“좋구만.”




“내가?”




“꽃밭이. ······허억!”




“그래. 그럼 영원히 꽃밭에 묻혀 있던가.”




갈라테아는 페아르의 명치를 내려찍었다. 페아르는 고통을 호소했지만 갈라테아는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페아르는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라는 듯 아픔을 호소했다. 하지만 갈라테아는 페아르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그를 당황하게 했다. 페아르는 갈라테아가 반응이 없자 헛기침을 했다. 그는 갈라테아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하지마.”




페아르는 순간 겁을 집어먹고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갈라테아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을 한 채 최대한 신경질적으로 들리게끔 소리쳤다.




“하지 말라니까!”




“진짜 안 한다?”




갈라테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페아르의 배 위에 머리를 눕혔다. 페아르는 피식 웃었다. 갈라테아는 웃지 말라는 뜻으로 페아르를 향해 풀 한포기를 집어던졌다.




하늘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페아르는 행여나 돗자리가 젖어 갈라테아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지 걱정했다. 그는 갈라테아에게 모포를 덮어주었다. 갈라테아는 페아르가 덮어주는 모포에 몸을 밀어 넣었다. 모포는 따뜻했다.




갈라테아는 페아르의 몸에 완전히 기대었다. 페아르는 휘파람을 불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씨를 페아르는 좋아하지 않는다. 휘파람을 불던 페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




갈라테아는 페아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페아르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는 모습에 갈라테아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갈라테아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가만히 하늘을 보던 페아르가 말했다.




“습기 때문에 찝찝하네.”




“시원하고 좋은데?”




“그거야 너나 그렇지. 이럴 줄 알았으면 스승님한테 발라카스 초월기 좀 배워둘 걸 그랬나봐.”




“그럼 더 늦게 내려왔겠지······.”




“응? 뭐라고?”




페아르는 갈라테아의 혼잣말을 듣지 못해 되물었다. 갈라테아는 고개를 저었다. 페아르는 별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해 재차 되묻지 않았다.




별다른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페아르는 이대로 잠을 잘까 생각했다. 춥지 않은 날이라 낮잠 자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습기가 많다는 걸 제외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문득 페아르는 갈라테아가 자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피식 웃고 눈을 감았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즈음 페아르는 눈을 떴다. 애초에 잠을 자지 않았다. 페아르는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탄내가 난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다. 페아르는 이렇게 습기가 가득한 날에 산불이 일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을 어딘가에서 장작을 태우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한 그는 부스스 일어나는 갈라테아를 다시 재웠다. 갈라테아는 반만 뜬 눈으로 페아르의 손길을 뿌리쳤다. 갈라테아는 페아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페아르는 별 생각 없이 그녀를 마주보며 말했다.




“왜?”




“나 좋아해?”




“······?”




페아르는 그녀가 잠이 덜 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갈라테아의 두 눈은 너무 명료했다. 갈라테아는 대답 없는 페아르를 쏘아보았다.




“나 좋아하냐구.”




페아르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갈라테아는 페아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페아르는 분위기가 퍽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말을 아끼기로 했다.




“좋아하지, 다만······.”




“다만?”




“좀 더 크면 고려해보마.”




장난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던 페아르는 갑자기 갈라테아가 벌떡 일어나자 한 대 맞을 걸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우려하던 폭력은 없었다. 페아르는 한쪽 눈을 살짝 떴다. 갈라테아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페아르의 곁을 떠났다. 페아르는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에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페아르는 돗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갈라테아를 찾아 떠났다.




페아르가 갈라테아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을 즈음 갈라테아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빗물이 그녀의 몸을 적시고 있다. 갈라테아는 눈앞에 보이는 돌멩이를 발로 찼다.




“나쁜 새끼.”




만약 페아르가 곁에 있었다면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페아르는 왜 자신이 나쁜 새끼가 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고, 갈라테아는 여느 때처럼 이유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갈라테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집까지의 거리를 재보던 갈라테아는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타는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멀리 보이는, 세상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집이 불타고 있다.




“엄마······?”




갈라테아는 집이 불타는 걸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 뛰지 않았지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갈라테아는 커다란 나무에 몸을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단순한 운동부족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녀는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즈음 치솟던 불길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갈라테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집을 응시했다. 그 순간 나무집이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불길에 갈라테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다리를 붙잡으며 걸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안 보이기에 진즉에 내뺀 줄 알았더니,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네.”




어느새 갈라테아의 곁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사내들 중 은회색 머리의 훤칠한 키를 가진 사내가 말했다. 그가 나무집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사내들 중 한 명이 갈라테아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회색 머리의 사내가 갈라테아를 바라보았다.




“오랜 여정의 종결이군. 살아만 있으면 상관없다고 했으니, 불필요한 팔다리를 잘라라. 괜히 도망치거나 버둥거리면 귀찮아질 테니까.”




“혀는 어떻게 할까요?”




“뽑아.”




“알겠습니다.”




사내들이 칼을 뽑았다. 갈라테아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거침없이 다가가 갈라테아를 자빠뜨렸다. 갈라테아는 거칠게 나뒹굴었다. 그녀의 팔다리를 자르려고 칼을 치켜든 사내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영 찝찝하네. 일이라도 이런 어린애 팔다리 자른다는 게. 몇 년만 더 지나면 끝내주는 미인이 될 텐데 말이야.”




“그 미인은 내가 찜했거든?”




사내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카로스와 비교해도 크게 신장 차이가 나지 않는 페아르가 서 있었다. 카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어린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이 보통이 아니다. 그리고 윈터펠과 같은 ‘뒤틀린 기운’이 느껴진다.




소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얼굴이다. 그렇다고 청년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앳되어 보인다. 그러나 페아르에게서 느껴지는 강인한 기백은 갈라테아의 팔다리를 자르려고 준비하던 사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페아르가 조심스럽게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멈춰.”




자세를 취하는 페아르를 향해 달려들려던 사내들은 움찔거리며 멈췄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카로스와 페아르를 흘겨보았다. 페아르는 카로스의 기백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렸다.




‘저 놈은 괴물이야······. 나머지도 대부분 나보다 아주 조금 약한 수준······. 조심해야해.’




카로스가 말을 이었다.




“가을린, 네 주도하에 목표를 데리고 복귀해라. 저 소년은 내가 맡지.”




“카로스 님! 저런 어린놈에게 무슨······.”




“하아. 룩이라도 데려올 걸. 말 더럽게 안 듣네.”




카로스의 몸에서 소름끼치는 기백이 뻗어 나왔다. 페아르는 물론이고 같은 겨울 소속의 용병들도 손을 벌벌 떨며 고개를 떨궜다. 카로스는 고개를 기이하게 꺾으며 말했다.




“저 소년이 칼자루에 손을 얹은 뒤로 흔적이 느껴진다. 너희한테 맡기면 시간만 질질 끌린다. 가라.”




카로스는 머뭇거리는 사내들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사내들 중 한 명이 갈라테아를 둘러메었다. 그리고 그들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페아르가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뭐하는 짓거리······!”




“소년은, 나를 상대해야 할 건데.”




카로스는 페아르를 가로막으며 칼을 휘둘렀다. 페아르는 곧바로 몸을 틀며 카로스의 칼을 쳐냈다. 손이 저렸다. 페아르는 카로스가 예상한 것보다 더 골치 아픈 상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뼈까지 저린다. 단순히 패기만 놓고 봐도 나는 상대가 안 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소년이 가진 초월기로 승부를 보면 돼. 그래서 내가 죽으면 소년의 승리고, 그렇지 않으면 나의 승리지. 간단한 거야.”




카로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페아르는 무척 당황한 얼굴로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카로스를 바라보았다. 카로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너무 온실 속에서만 커온 거 아닌가, 소년? 초월기가 만들어내는 흔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걸 보면 실전 경험은 별로 없는 모양이야. 설명해주는 건 내 취향이 아니기도 하고, 소년이 살아남는다면 흔히 겪게 될 일이니 따로 말하진 않겠어. 여기서 죽는다면 넌 그것뿐이란 거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한번 사용해 보라고.”




카로스가 사라졌다. 페아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에반스가 곧잘 사용하고는 했던 기술과 비슷했다. 카로스는 페아르의 뒤에서 나타났고, 기다리고 있던 페아르는 카로스의 칼을 쳐냄과 동시에 파고들었다.




‘실전 경험이······, 제법 있는 것 같군. 아니면 ‘고속이동’에 익숙한 탓인가? 어찌됐든, 이런 인재를 죽이긴 아깝지만 일이니까.’




카로스는 파고드는 페아르의 칼을 붙잡았다. 패기로 날카로워진 칼날이 투기로 단단해진 피부를 뚫기 직전, 그의 다리가 페아르의 몸을 걷어찼다. 페아르는 방어하기 위해 다리를 들었다. 순간 카로스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고, 페아르는 안면을 걷어차인 채 수 미터를 날아갔다. 카로스가 사라졌다.




페아르는 부러진 코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그러자마자 뒤에서 나타난 카로스가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도끼로 나무를 패는 것 같은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다리가 부러졌다.




페아르는 또 다시 쓰러졌다. 카로스가 칼을 바로 잡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페아르의 목을 향해 칼을 내려쳤다. 그리고 동시에 페아르도 카로스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지금껏 느껴지던 흔적이 부정시공의 초월기가 되어 카로스를 덮쳤다.




“······.”




카로스는 온 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든 페아르의 초월기에 침을 삼켰다. 페아르가 미숙했기에 직격당하기 직전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는 페아르의 초월기가 휩쓸고 간 지역을 노려보았다. 페아르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나무, 돌, 땅 하늘 등 가릴 것 없이 일대의 모든 것이 잘려나가 있었다.




‘가공할······, 위력이로군. 바람인가? 중력? 너무 빠르고 종류도 많아서 단정하는 게 쉽지는 않네. 한 번 또 보면 확실하겠는데······.’




페아르가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다리에 투기를 집중했다. 그는 코에서 흐르는 피를 무시한 채 카로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음 움직임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페아르를 보며 카로스는 피식 웃었다.




“그랬다간 한 번 죽을지도.”




카로스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더 이상 불길이 치솟지 않는 걸 보면 싸움은 윈터펠의 승리로 끝난 듯했다. ‘그러면 이 이상 놀 필요는 없겠지.’ 카로스가 사라졌다.




몇 번 얻어맞던 페아르는 카로스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 자리에 미묘한 느낌이 생긴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는 그것을 노리고 있었고, 카로스가 사라지고 미묘한 느낌이 나는 곳을 향해 초월기를 사용했다.




초월기는 칼이 휘둘러진 방향으로 모든 걸 잘라냈지만 카로스의 칼은 정확하게 페아르의 몸을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잘린 단면에서 장기가 흘러나왔다.




“허술하구나, 소년. 느낌을 잡아내는 건 잘했지만, 내가 그것을 떡밥으로 던질 거라는 생각은 못했나보지?”




카로스는 쓰러지지 않고 초월기의 힘을 버티지 못한 채 찌그러지기 시작한 칼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페아르를 향해 다가갔다.




“공간을 자르는 힘이라. 부정시공의 힘이니 어딜 가서도 최고로 쳐주겠지만, 경험이 부족한 게 탈이야. 결국 소년은 여기까지였군.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살아남아 복수를 하고 싶다면 찾아와라. 우리는 도망치지 않는다.”




카로스가 칼을 빠르게 휘둘렀다. 페아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을 때 그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곧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다가와 페아르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아야! 어? 스승님?”




“오냐, 네 스승이다! 참나. 간만에 노땅 얼굴이나 좀 보러 왔더니, 개판이네. 개판.”




카로스가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기이하게 꺾었다. 에반스는 카로스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적당히 해서는 안 될 상대라고 판단하곤 온 몸에 불길을 치솟게 했다.




카로스 또한 쉽게 승리를 장담할 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기백만 놓고 본다면 카로스의 배 이상의 강자다. 그가 페아르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자세를 잡았다. 카로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됐군.’




그런 카로스를 주시하며 에반스가 말했다.




“갈라테아 님은 이 스승이 구해놨어요. 저기 밑에 가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알겠죠?”




“······갑자기 웬 존댓말을······.”




“어물쩍거리고 있을 시간 없다. 집중해.”




“네, 네······!”




“그러면 빨리 시키는 대로 해. 가서 갈라테아 님 구하고, 바로 스승님 있는 데로 가! 스승님이랑 엘사 선배 데리고 다음 집결지로 가 있어!”




“예? 다음 집결······.”




에반스는 페아르를 무시했다.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카로스를 경계했다.




‘윈터펠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는데······, 저런 성가신 삼기 투사가 있을 줄은······. 패기, 투기가 모두 수준급이야. 쯧, 칠왕국 정도에서나 볼 수 있는 놈들이 둘 이나 있다니······. 저런 놈한테는 어중간한 초월기 따위는 박히지도 않고, 살기 특성이 몇 개나 열려 있는지도 모르니 섣불리 승부를 보는 건 힘들 거 같네. 일단 예열부터 시작해볼까.’




에반스의 눈과 머리카락이 울창한 숲속의 나무들의 몸뚱이처럼 짙은 갈색 빛을 띠었다. 그가 낮게 읊조렸다.




“나무.”




지금 연재하는 게 끝나고 새 작품으로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멈춰버린 시계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기억해주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21.03.11 92 0 -
72 경계. 10 21.10.08 28 0 16쪽
71 경계. 9 21.10.08 28 0 15쪽
70 경계. 8 21.10.06 30 0 18쪽
69 경계. 7 21.10.06 33 0 21쪽
68 경계. 6 21.10.06 29 0 20쪽
67 경계. 5 21.10.02 29 0 20쪽
66 경계. 4 21.09.07 32 0 14쪽
65 경계. 3 21.09.06 31 0 17쪽
64 경계. 2 21.09.05 32 0 13쪽
63 경계. 1 21.09.03 31 0 20쪽
62 epilogue. 여명 21.08.19 35 0 20쪽
61 epilogue. 암살의 대가 21.08.16 30 0 12쪽
60 epilogue. 루브타스의 경계 21.08.14 31 0 17쪽
59 epilogue. 게오르그 21.08.13 43 0 23쪽
58 epilogue. 강철 21.08.11 30 0 13쪽
57 epilogue. 피와 철의 사냥꾼 21.08.10 28 0 17쪽
56 epilogue. 붉은 달 21.08.09 28 0 10쪽
55 잿더미. 33 21.08.09 29 0 18쪽
54 젯더미. 32 21.08.07 33 0 22쪽
53 잿더미. 31 21.08.05 28 0 17쪽
52 잿더미. 30 21.08.03 34 0 14쪽
51 잿더미. 29 21.08.01 32 0 19쪽
50 잿더미. 28 21.07.31 34 0 12쪽
49 잿더미. 27 21.07.24 31 0 24쪽
» 잿더미. 26 21.07.24 31 0 20쪽
47 잿더미. 25 21.07.12 30 0 14쪽
46 잿더미. 24 21.07.12 30 0 9쪽
45 잿더미. 23 21.07.05 31 0 10쪽
44 잿더미. 22 21.07.03 30 0 18쪽
43 잿더미. 21 21.06.27 31 0 15쪽
42 잿더미. 20 21.06.25 30 0 14쪽
41 잿더미. 19 21.06.24 29 0 12쪽
40 잿더미. 18 21.06.22 32 0 14쪽
39 잿더미. 17 21.06.18 30 0 17쪽
38 잿더미. 16 21.06.17 31 0 16쪽
37 잿더미. 15 21.05.30 40 0 14쪽
36 잿더미. 14 21.05.23 40 0 15쪽
35 잿더미. 13 21.05.21 38 0 14쪽
34 잿더미. 12 21.05.17 37 0 15쪽
33 잿더미. 11 21.05.11 34 0 17쪽
32 잿더미. 10 21.05.08 34 0 16쪽
31 잿더미. 9 21.05.06 40 0 14쪽
30 잿더미. 8 21.04.27 58 0 12쪽
29 잿더미. 7 21.04.23 34 0 19쪽
28 잿더미. 6 21.04.21 35 0 20쪽
27 잿더미. 5 21.04.18 35 0 16쪽
26 잿더미. 4 21.04.16 36 0 14쪽
25 잿더미. 3 21.04.12 46 0 15쪽
24 잿더미. 2 21.04.11 36 0 17쪽
23 잿더미. 1 21.04.10 39 0 13쪽
22 겨울. 22 21.04.04 37 0 11쪽
21 겨울. 21 21.04.01 39 0 12쪽
20 겨울. 20 21.03.30 37 0 12쪽
19 겨울. 19 21.03.27 41 0 13쪽
18 겨울. 18 +1 21.03.26 39 1 12쪽
17 겨울. 17 21.03.25 33 1 12쪽
16 겨울. 16 21.03.24 37 1 13쪽
15 겨울. 15 21.03.22 48 1 14쪽
14 겨울. 14 21.03.19 42 1 11쪽
13 겨울. 13 21.03.14 42 1 11쪽
12 겨울. 12 21.03.13 40 1 11쪽
11 겨울. 11 +1 21.03.13 35 1 11쪽
10 겨울. 10 21.03.13 39 1 18쪽
9 겨울. 9 21.03.13 35 1 13쪽
8 겨울. 8 21.03.12 36 1 12쪽
7 겨울. 7 21.03.12 36 1 14쪽
6 겨울. 6 21.03.12 41 1 18쪽
5 겨울. 5 21.03.12 41 1 12쪽
4 겨울. 4 +1 21.03.12 38 1 14쪽
3 겨울. 3 21.03.11 38 1 11쪽
2 겨울. 2 21.03.11 51 1 13쪽
1 겨울. 1 +1 21.03.11 140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