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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쑤심 님의 서재입니다.

멈춰버린 시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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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쑤심
작품등록일 :
2021.03.11 16:08
최근연재일 :
2021.10.08 21:4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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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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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잿더미. 27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DUMMY

“질기네.”




윈터펠은 클라이프가 앉곤 했던 나뭇등걸에 엉덩이를 깔았다. 그는 보급용 육포를 씹으며 공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을 지른 집이 타며 만드는 냄새가 코를 막는다. 윈터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에 떨어지는 빗물을 닦았다. 아직 비의 기세가 강하지 않지만 언제 변할지 모른다. 그러던 중 윈터펠은 마을에서 불의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세워두었던 칼을 붙잡았다.




앉은 채 칼을 두 손으로 쥔 윈터펠이 눈을 감았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기준으로 좌측과 정면에서 커다란 기백을 가진 자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강인한 기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셋이었다.




한 명은 삼십 년을 함께한 친구, 카로스였다. 나머지 둘 중 좌측의 기백은 용병단의 용병들 보다 강하지 않았다.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면의 기백은 윈터펠의 7년을 끌어온 의뢰의 종결로 들떠있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 정도로 강인했다. 윈터펠이 눈을 떴다.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정면의 상대에게 집중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윈터펠은 칼을 땅에 꽂았다. ‘지금은’ 전투의사가 없다는 걸 은연중에 내비친 그는 경계하는 사내에게 손짓했다.




“찾는 자라면 안에 있을 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가 초월기를 사용했다. 타오르는 집의 불길이 클라이프를 향해 모여들었고 동시에 거대한 불의 파도가 윈터펠을 덮쳤다.




윈터펠은 자신을 덮치는 불의 파도에서 신경질을 내며 빠져나왔다. 사내가 나무집을 향해 뛰어가는 게 보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윈터펠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다. 그가 어깨에 붙은 불을 꺼트렸다. 상대방은 분명 분노할 것이다.




“죽은 채로.”




클라이프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지와 머리가 잘려버린 엘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클라이프는 그대로 굳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시간이 멈추었다고 느낄 수도 있을 모습이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엘사······?”




괜찮냐고 묻는 어투였지만 사실은 그 스스로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내뱉은 비명을 대신하는 단말마였다. 클라이프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는 엘사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 전장에 발을 디딘 이후로 떨지 않던 손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떨린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엘사의 머리를 들었다. 두 눈이 잘려나가 있다. 클라이프는 엘사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 곁에 쓰러져 있는 새하얀 손잡이를 가진 칼 한 자루가 보였다.




저 칼은 일레나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사용하던 것이다. 그리고 갈라테아를 임신한 그녀가 가문의 일에 집중하게 되어 남편인 크라서스에게 주었던 것이기도 했다. 또 크라서스로부터 클라이프가 갈라테아가 성장했을 때 넘겨주기로 약속하며 맡아 두었던 물건이기도 하다.




클라이프는 이해했다. 어떤 이유가 되었던 적으로 만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했어야하는지에 대해 의문은 들었다. 그는 천천히 엘사의 머리를 몸의 절단면에 맞게 올려놓았다. 그가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칼을 끌어온 뒤 따스한 손길로 엘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클라이프의 몸에서 새하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엘사의 가슴에 생긴 상처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잘려나가 차갑게 식어버린 입술 위에 불타오르는 입술을 포개었다.




클라이프가 엘사와 입 맞추었을 때 그의 몸에서 타오르던 하얀 불꽃은 엘사에게 옮겨갔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칼의 서슬이 퍼렇게 물들기 시작했고, 엘사의 잘려나간 머리가 몸에 붙기 시작했다.




“클, 클라이프? 지, 지금 뭐한 거예요?”




“폭력의 화신 발라카스가 유일하게 ‘폭력’을 목적으로 만들지 않은 초월기라 알려진 기술. 그거 썼어.”




“야······, 야, 이 멍청아!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그건 네 남은 수명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거잖아!”




엘사는 칼라이프의 모습을 찾으려 두리번거렸지만 다 아물지 않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엘사는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죽은 사람한테 써봐야 살릴 수 없다는 것도 알잖아! 왜 그랬어! 대체 왜 그랬냐고! 멍청아! 다시 가져가! 제발 가져가!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잖아! 제발, 제발! 테아는, 우리 테아는 어떻게 해? 이러지마······. 당신마저 없으면, 우리 테아는······. 클라이프? 어디 가는 거야? 안 돼! 안 돼! 돌아와! 야!”




클라이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돌아섰다. 그는 자신의 발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기어오다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는 엘사를 애써 무시했다. 문턱에 선 채 윈터펠을 노려보며 클라이프가 말했다.




“왜 그랬냐고? 은혜 갚는 것보다도, 네가 더 소중해서. 너를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더 사랑해서 그랬다.”




나무집 주변으로 불기둥이 치솟았다. 불기둥은 벽이 되어 집을 에워쌌다. 클라이프가 윈터펠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기이하게 꺾은 채 클라이프를 기다리던 윈터펠이 미소를 지었다. 클라이프는 윈터펠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굶주린 괴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이라 이해했다.




“살아 있다고? 신기하네. 역시 목을 자르기만 하는 걸론 부족했나? 효수해 놓았어야 하는 것을······!”




윈터펠은 사나운 기세로 달려든 클라이프의 공세를 막으며 물러섰다. 클라이프의 과격한 공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막아내었지만 손이 저렸다. 윈터펠의 시선이 클라이프가 쥔 칼에 고정되었다. 부딪쳐 힘을 겨루고 있는 클라이프의 칼이 무겁다. 평범한 무기가 아니다. 이 칼은 엘사를 지키려 하던 룬이다.




‘정말이지 평범한 무기만 들고 싸웠으면 좀 좋겠네.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문득 서늘한 느낌에 그는 자신의 칼을 바라보았다. 클라이프의 칼과 부딪혔던 그의 칼에는 황금색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윈터펠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이것도 평범한 불같지는 않네. 오래 끌면 불리하겠어.’ 여유롭다는 듯 하품을 하는 윈터펠을 보며 클라이프가 말했다.




“네놈의 몸을 잘게 썰어 돼지들 먹이로 던져주마!”




“난 늘 그게 불만이었어. 그런 무서운 말 좀 안 쓰면 안 될까?”




윈터펠이 십 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던 클라이프를 향해 칼을 사선으로 그었다.




“난 겁이 많거든!”




클라이프는 윈터펠의 행동을 무시하며 파고 들다 무엇인가가 날아오는 소리에 놀라 칼을 들어 방어했다. 그러자 윈터펠이 휘둘렀던 그대로 바람이 날아와 부딪쳤다.




‘이건······?’




윈터펠은 클라이프가 당황하는 사이 꾸준히 거리를 벌리며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바람’은 윈터펠이 휘두른 칼의 연장선이 되어 클라이프를 덮쳤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던 클라이프의 모습이 불에 삼켜져 사라졌다. 윈터펠은 몸을 돌려 뒤에서 불길을 끌고 나타난 클라이프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클라이프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하지만 클라이프의 투기는 윈터펠의 그것을 상회했다. 윈터펠은 클라이프의 얼굴가죽을 조금 짓뭉개는 정도의 타격밖에 주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클라이프의 빠르고 강인한 발길질에 머리가 박살나는 걸 왼손을 버리는 것으로 막아야만 했다.




윈터펠이 혀를 찼다. 카로스였다면 저 투기에도 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부러진 왼팔에 투기를 집중적으로 모아 회복을 서둘렀다. 하지만 클라이프는 윈터펠이 회복될 때까지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윈터펠이 서 있는 땅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땅 전체가 황금색 불기둥이 되어 솟아올랐다. 직격당하기 직전 몸을 빼낸 윈터펠은 ‘감’으로 피할 곳을 미리 깨닫고 클라이프가 집어던진 불의 창을 쳐냈다. 창과 칼이 부딪친 곳에 다시금 황금색 불길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클라이프는 자신의 뒤에서부터 시작된 황금색 불의 파도와 함께 윈터펠에게 달려들었다. 파도는 순식간에 해일이 되어 일대를 집어삼켰다.




윈터펠은 파도를 넘어설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부정시공 초월기를 사용하면 파훼하는 건 간단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부정시공 초월기는 강력하지만 상대가 알게 된다면 반드시 경계하고 대응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단 한 번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그는 심호흡했다. 그리고 파도를 향해 달렸다.




황금색 불은 닿는 모든 걸 녹였다. 너무나도 위협적이지만 클라이프 본인을 녹이지는 않았다. 윈터펠은 초월기 사용자들이 으레 범하는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실수를 노렸다. 스스로가 사용한 초월기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적을 노린 곳보다 약하다. 특히 이런 광범위한 초월기를 사용할 때는 더욱이 그렇다.




클라이프는 바짝 달라붙는 윈터펠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눈앞의 검은 머리 사내의 전투경험은 너무 뛰어나다. 단번에 광역 초월기의 맹점을 파고든 것만 봐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초월기의 위력을 재분배해 스스로와 윈터펠 주변을 강하게 할 수도 없다. 그랬다간 클라이프 본인이 초월기의 힘에 녹아버릴 것이다. 윈터펠이 숨기고 있는 것이 뭔지 모르는 이상 함께 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녹아내린 쇳물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는 해일의 중심에서 두 사내가 칼을 맞댔다. 서로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고작 직경 5미터. 윈터펠과 클라이프는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투기장에서 이를 악물고 무기를 부딪쳤다.




클라이프가 황금색 불길이 이글거리는 칼로 윈터펠의 가슴팍을 노리고 찔렀다. 윈터펠은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칼로 공격을 흘리며 클라이프의 턱을 주먹으로 올려쳤다. 잠깐의 빈틈으로 윈터펠이 클라이프의 몸뚱이에 칼을 찔러 넣었다. 허나 룬의 힘으로 강해진 클라이프의 투기는 칼끝이 파고드는 시간을 늦춰주었다. 클라이프는 간발의 차로 몸을 빼냈다. 그가 윈터펠의 몸을 발로 찼다.




투기장 바깥의 황금색 불에 윈터펠의 옷가지가 닿았다. 윈터펠은 으르렁거리며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클라이프를 향해 던졌다.




클라이프는 로브와 윈터펠을 한 번에 잘라버릴 생각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럴 걸 예상한 윈터펠은 이미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클라이프의 칼은 허공을 갈랐다. 클라이프가 윈터펠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윈터펠은 비에 젖은 땅을 발로 찼다.




진흙이 튀었다. 클라이프가 눈에 들어온 이물질 때문에 눈을 감은 순간 윈터펠이 클라이프의 몸을 사선으로 베었다. 칼날은 깊게 들어갔지만 클라이프의 투기는 육체를 금세 회복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윈터펠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대로 땅에 양쪽을 번갈아 네 번을 패대기친 후 잔잔한 물결이 된 불의 해일을 향해 집어던졌다. 윈터펠은 별다른 저항을 해보지 못한 채 모든 걸 녹이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안심할 틈도 없이 윈터펠이 불길을 뚫으며 튀어나왔다. 몸 여기저기가 녹아내리고 있었지만 윈터펠은 개의치 않았다.




평찌르기 자세로 튀어나온 윈터펠은 클라이프의 몸을 찔렀다. 가슴팍을 꿰뚫은 그대로 클라이프를 불길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밀어 넣는 순간 클라이프의 몸을 발로 차 칼을 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일대를 뒤덮은 불길이 사라졌다.




“쯧.”




윈터펠은 회복이 더딘 몸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는 녹아내린 땅을 구른 클라이프를 바라보았다. 클라이프가 고개를 꺾으며 몸을 일으켰다. 용암이 클라이프의 몸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윈터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초월기로 만들어진 자연의 변화는 ‘초월기’가 아니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피해를 입힌다. 허나 클라이프는 자신의 초월기가 만든 용암에 닿고도 멀쩡하다. 저건 불이나 물과 같은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 가진 자신의 힘에 대한 저항력 때문일 것이다. 윈터펠이 녹기 시작한 자신의 칼을 흘끗 바라보았다. 더 길게 끌어서는 안 된다. 그가 심호흡했다.




황금색 불의 창이 하늘을 뒤덮었다. 비는 곳 없이 일대의 하늘을 전부 뒤덮어버린 창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수천에서 수만 개다.




그것들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윈터펠은 전부 요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1미터 정도의 장검을 사용하던 자의 손에 수 미터가 넘는 황금색 불로 뒤덮인 랜스가 들려져있는 모습을 보자 창을 떨어뜨리려는 마음이 사라졌다.




윈터펠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클라이프의 기력으로 나올 수 있는 초월기가 아니다. 그는 클라이프가 쥔 칼을 바라보았다.




‘룬이라······, 왜 카로스가 룬, 룬 입에 달고 사는지 알겠다. 균열이 더 쓸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같이 초월기가 보조 위주인 투사는 룬이 훨씬 좋군. 나도 저런 거 하나 구해야겠어.’




클라이프의 옆으로 평범한 불로 만들어진 말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가 한 번의 동작으로 말에 올라탔다. 그 모습에 놀라며 윈터펠이 악을 쓰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어느새 생겨난 불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윈터펠이 얼굴을 찌푸렸다.




‘좆같은 기병이었군.’




클라이프의 말이 땅을 박찼다. 발굽이 땅에 닿을 때마다 광폭한 불길이 치솟는다. 그리고 그 순간 윈터펠 또한 클라이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클라이프의 초월기를 ‘감’으로 피하고 막으며 쳐냈다. 하지만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여섯 개의 창이 몸을 꿰뚫었을 때 윈터펠이 말을 탄 클라이프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클라이프는 윈터펠의 ‘바람’을 막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 피어난 황금색 불길이 살아있는 것처럼 날아오는 바람을 모두 막아주었다. 덕분에 그는 방어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윈터펠의 몸에 클라이프의 거병이 틀어박혔다. 누가 봐도 클라이프의 승리를 점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클라이프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초월기로 만들어진 불의 랜스가 윈터펠의 몸에 가까워졌을 때 클라이프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점차 모든 게 느려지는 것을 깨닫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윈터펠이 초월기를 사용했다.




윈터펠의 칼이 클라이프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평범한 이가 휘두른 칼이었다면 단지 스치는 것으로 끝났을 테지만, 윈터펠의 칼은 ‘바람’을 동반했다. 그리고 바람이 닿기 전 클라이프의 몸을 휘감은 ‘느려진’ 불길을 윈터펠의 살기의 특성이 덧씌워진 패기가 밀쳐냈다. 이어서 바람이 옆구리를 완전히 도려냈다. 피가 뿜어져 나왔고, 클라이프가 타고 있던 말과 몸에서 이글거리던 불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바닥을 굴렀다.




윈터펠이 피를 토했다. 곧 그의 몸에 꽂혀 있던 여섯 개의 창이 시간에 풍화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구멍 난 몸은 평소처럼 완벽한 상태를 되찾았다.




숨을 돌린 윈터펠은 나무집을 둘러싸고 있던 불기둥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전의 공격이 단순히 살갗과 근육만을 자른 게 아니라 심장에 손상을 가져다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초월기 사용을 멈췄다.




칼을 몇 번 휘둘러본 윈터펠이 인상을 썼다. 칼날에 붙어 있던 황금색 불꽃이 칼을 잔뜩 녹인 뒤였다. 클라이프가 피를 토하며 일어섰다. 그의 모습에 윈터펠은 싸늘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내 초월기는 상대적으로 기력을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말이야. 당신처럼 마구잡이로 썼다간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힘들어.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만 사용하는 거지.”




클라이프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의 몸에서 다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지만 윈터펠은 그가 전투준비를 끝낼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초월기가 클라이프의 솟아오르는 황금색 불의 시간을 묶고 회복되는 육체의 시간을 빼앗았다.




윈터펠이 멀리서 칼을 휘둘렀다. 클라이프는 급하게 두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를 향해 날아간 바람이 손목을 자르며 가슴에 깊은 창상을 만들었다. 다시금 날아온 바람이 클라이프의 다리를 잘랐을 때 윈터펠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쉽게 됐어. 당신도 내가 초월기를 사용하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을 텐데, 내 초월기가 시간을 다루는 부정시공이라 말이지.”




윈터펠은 클라이프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분노에 가득 찬 눈이었다. 윈터펠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고, 그가 클라이프의 목 언저리로 칼을 가져다댔다.




피가 튀었다. 윈터펠은 칼을 클라이프의 머리 없는 몸뚱이에 꽂아둔 채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대충 닦았다고 생각한 그는 클라이프의 손을 짓밟아 떨어뜨려놓고 ‘룬’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일부러 건들지 않았지만 클라이프의 힘을 눈으로 보고 흥미가 생겼다. 그가 룬을 쥐었다. 칼날이 휘황찬란한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무거웠다. 삼기를 다루지 못할 때 흔히 느끼던 병장기의 무게보다도 훨씬 무겁다. 윈터펠은 칼을 몇 번 휘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마음에는 드는데 일이 있어서 지금은 안 된다고? 언제쯤 되는데? ······야 그 정도 시간이면 나 죽고 없을 수도 있겠다. 별 놈 다 보겠네. 아무튼 알았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클라이프의 칼을 바닥에 꽂았다. 그러고는 투덜거리며 클라이프의 몸에 꽂아두었던 칼을 붙잡았다. 칼이 잘 빠지지 않자 윈터펠은 신경질적으로 칼자루를 비틀기 시작했다. 피 묻은 장기가 튀어 나왔다.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칼집에 집어넣었다. 거센 빗줄기가 용암으로 가득하던 땅을 식히고 있다. 윈터펠이 고개를 들었다. 시원하다. 한참을 그렇게 비를 맞으며 서 있던 윈터펠이 옷가지를 벗어던졌다. 수많은 전장을 돌며 몸에 새긴 흉터가 꿈틀거린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땅이 녹으며 만들어진 용암이 모두 식어 돌이 되었다.




그의 감이 뒤를 돌아보라고 말했다. 윈터펠이 스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은발?”




윈터펠은 불멸자에게 들었던 인상착의를 다시금 떠올렸다. 알비노에 걸린 것 같은 백색에 가까운 은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빨간 눈동자를 가진 소녀. 의뢰를 받은 지 약 7년이 가까워오니 나이는 열한 살에서 열세 살, 왼쪽 눈 밑에 눈물점이 있다. 그리고 무척이나 아름답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윈터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피식 웃었다. 목표물이 제 발로 찾아왔다.




“카로스 이 새끼는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야?”




윈터펠이 초월기를 사용했다. 습격을 시작했을 그 당시로 자신의 옷가지를 되돌린 그는 로브의 후드를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들어올렸다.




소녀는 좌측에서 느껴졌던 신경 쓸 가치가 없던 기백을 가진 자에게 업혀 왔다. 윈터펠은 그가 소년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소년은 윈터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윈터펠은 더 이상 일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기에 칼을 도로 뽑았다. 그러자 소년이 소녀를 내려놓고 칼을 뽑았다. ‘용기하나는 가상하네.’ 윈터펠이 수십 미터는 떨어진 소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페아르는 움직이려다가 윈터펠의 주변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멈췄다. 그러자마자 바람이 날아와 그의 몸뚱이를 몇 미터 밖으로 날려 보냈다.




윈터펠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페아르를 유심히 살폈다. 칼과 함께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기백은 별 볼일 없었지만, ‘패기’하나만 놓고 본다면 수준급이었다. 흥미가 생긴 윈터펠이 페아르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음······, 소년? 제법 싹수가 있는 것 같아. 여기서 죽여두지 않으면 위험할 거 같아서 그러니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살아남는다면 언제든지 복수하러 와도 돼. 우린 피하지 않으니까.”




그가 페아르를 향해 다섯 발자국 걸어갔을 때 좌측의 숲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그 안쪽에서 카로스의 기백을 두 배는 웃도는 어마어마한 기백이 느껴진다. 윈터펠은 기겁하며 수 미터를 미끄러지듯 물러섰다.




‘정신 나간 위력이로군. 어째 오늘은 일이 잘 풀리는 거 같으면서도 아닌 것처럼 지랄이냐.’




타오르는 숲속에서 초월기의 압박감이 느껴지더니 곧 윈터펠의 곁으로 옷가지가 전부 타버리고 머리카락도 성한 걸 찾아보기 힘든 카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로스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잿더미가 되어버린 칼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그는 불길 속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에반스의 동향을 주시했다. 온 몸이 거뭇거뭇한 카로스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윈터펠이 말했다.




“바쁘냐?”




“그래, 씨발아! 보면 몰라? 넌 안 바빠서 지금 노가리 까고 있는 거냐?”




“어.”




“그럼 병신새끼야, 가만히 있지 말고 나 좀 도와!”




카로스는 으르렁거리며 윈터펠의 칼을 빼앗았다. 하지만 곧 칼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윈터펠에게 칼을 던져주었다. 윈터펠은 해맑게 웃더니 페아르와 갈라테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마저 일하러 갈게. 수고해.”




카로스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려는 윈터펠의 목깃을 붙잡았다.




“어딜 도망가?”




“이 미친 새끼야! 이거 안 놔? 누가 미쳤다고 저런 거랑 싸워?”




“야, 장난 아니야. 진짜 네가 도와줘야 상대를 할 수 있을까 말까 하다. 저 놈, 미쳤어.”




“무기도 없는데 뭐 어쩌게, 병신아. 맨몸으로 저거랑 붙을 거야? 난 절대 안 해. 그냥 여기서는 네가 희생해라.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수십 번 정도는 죽어도 되잖아?”




“네가 사람 새끼냐? 친구를 막 죽으라고 내던지고? 하여튼 이 새끼는 진짜. 야, 차라리 네가 잠깐 맡아봐. 내가 가서 륜 데리고 올 테니까.”




“미친, 내가 왜? 나도 지금 초월기 써서 힘들다.”




“며칠 앞에 거 끌어와. 그래도 안 되면 한 달 정도 더 끌어오면 되지. 산수 못하냐? 그래도 안 되면 ‘형벌’ 받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응, 친구 고기방패로 써먹으려는 새끼보단 내가 낫지. ‘처형’당하는 건 막아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시고. 어쨌든, 잠깐 맡아봐. 갔다 온다!”




“미친놈이? 야, 잠······깐.”




카로스가 사라졌다. 윈터펠은 허탈한 얼굴로 불속에서 걸어 나온 에반스를 마주보았다. 에반스의 ‘새파란’ 머리카락이 불길처럼 솟아 하늘거린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윈터펠을 주시했다. 그 순간 윈터펠이 서 있던 지역이 불로 뒤덮였다. 마치 넝쿨처럼 몸을 휘감으려는 불길 속에서 윈터펠이 이를 악물었다.




이 불은 클라이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의 감이 스치기만 해도 위험하다고, 어서 도망치라고 말한다.




윈터펠은 초월기를 사용하며 불바다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불길이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기 전에 빠져나온 윈터펠은 바로 눈앞에 나타난 에반스의 불로 만들어진 칼을 받아냈다. 손목이 뒤틀릴 것만 같은 충격에 윈터펠이 악을 썼다.




“버틸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에반스가 불길에 휩싸인 왼손으로 윈터펠의 칼을 붙잡았다. 그러자 윈터펠의 칼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칼이 사라지는 순간 불에 닿으면 위험하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한 윈터펠은 거리를 벌린 채 수십 차례 주먹을 내질렀다.




에반스를 향해 날아간 풍압은 그의 몸을 뒤덮고 있는 불길에 닿자마자 산들바람처럼 변해버렸다. 윈터펠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다.




“큰일났네.”




에반스가 사라지고, 잿빛 하늘에 거대한 불덩이가 떠올랐다.




지금 연재하는 게 끝나고 새 작품으로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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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시계추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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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경계. 10 21.10.08 28 0 16쪽
71 경계. 9 21.10.08 29 0 15쪽
70 경계. 8 21.10.06 30 0 18쪽
69 경계. 7 21.10.06 34 0 21쪽
68 경계. 6 21.10.06 30 0 20쪽
67 경계. 5 21.10.02 29 0 20쪽
66 경계. 4 21.09.07 32 0 14쪽
65 경계. 3 21.09.06 31 0 17쪽
64 경계. 2 21.09.05 33 0 13쪽
63 경계. 1 21.09.03 31 0 20쪽
62 epilogue. 여명 21.08.19 35 0 20쪽
61 epilogue. 암살의 대가 21.08.16 31 0 12쪽
60 epilogue. 루브타스의 경계 21.08.14 31 0 17쪽
59 epilogue. 게오르그 21.08.13 43 0 23쪽
58 epilogue. 강철 21.08.11 30 0 13쪽
57 epilogue. 피와 철의 사냥꾼 21.08.10 28 0 17쪽
56 epilogue. 붉은 달 21.08.09 28 0 10쪽
55 잿더미. 33 21.08.09 29 0 18쪽
54 젯더미. 32 21.08.07 33 0 22쪽
53 잿더미. 31 21.08.05 28 0 17쪽
52 잿더미. 30 21.08.03 34 0 14쪽
51 잿더미. 29 21.08.01 32 0 19쪽
50 잿더미. 28 21.07.31 34 0 12쪽
» 잿더미. 27 21.07.24 32 0 24쪽
48 잿더미. 26 21.07.24 31 0 20쪽
47 잿더미. 25 21.07.12 31 0 14쪽
46 잿더미. 24 21.07.12 30 0 9쪽
45 잿더미. 23 21.07.05 31 0 10쪽
44 잿더미. 22 21.07.03 30 0 18쪽
43 잿더미. 21 21.06.27 31 0 15쪽
42 잿더미. 20 21.06.25 31 0 14쪽
41 잿더미. 19 21.06.24 29 0 12쪽
40 잿더미. 18 21.06.22 32 0 14쪽
39 잿더미. 17 21.06.18 30 0 17쪽
38 잿더미. 16 21.06.17 32 0 16쪽
37 잿더미. 15 21.05.30 41 0 14쪽
36 잿더미. 14 21.05.23 40 0 15쪽
35 잿더미. 13 21.05.21 38 0 14쪽
34 잿더미. 12 21.05.17 37 0 15쪽
33 잿더미. 11 21.05.11 34 0 17쪽
32 잿더미. 10 21.05.08 34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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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잿더미. 7 21.04.23 34 0 19쪽
28 잿더미. 6 21.04.21 35 0 20쪽
27 잿더미. 5 21.04.18 35 0 16쪽
26 잿더미. 4 21.04.16 36 0 14쪽
25 잿더미. 3 21.04.12 46 0 15쪽
24 잿더미. 2 21.04.11 36 0 17쪽
23 잿더미. 1 21.04.10 39 0 13쪽
22 겨울. 22 21.04.04 37 0 11쪽
21 겨울. 21 21.04.01 39 0 12쪽
20 겨울. 20 21.03.30 37 0 12쪽
19 겨울. 19 21.03.27 42 0 13쪽
18 겨울. 18 +1 21.03.26 39 1 12쪽
17 겨울. 17 21.03.25 33 1 12쪽
16 겨울. 16 21.03.24 37 1 13쪽
15 겨울. 15 21.03.22 48 1 14쪽
14 겨울. 14 21.03.19 42 1 11쪽
13 겨울. 13 21.03.14 42 1 11쪽
12 겨울. 12 21.03.13 41 1 11쪽
11 겨울. 11 +1 21.03.13 35 1 11쪽
10 겨울. 10 21.03.13 40 1 18쪽
9 겨울. 9 21.03.13 35 1 13쪽
8 겨울. 8 21.03.12 36 1 12쪽
7 겨울. 7 21.03.12 36 1 14쪽
6 겨울. 6 21.03.12 41 1 18쪽
5 겨울. 5 21.03.12 42 1 12쪽
4 겨울. 4 +1 21.03.12 39 1 14쪽
3 겨울. 3 21.03.11 38 1 11쪽
2 겨울. 2 21.03.11 51 1 13쪽
1 겨울. 1 +1 21.03.11 140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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