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붉은 달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구름은 바람을 타고 천천히 움직이며 땅을 주시하고 있다. 구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차 땅을 검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한두 방울에서 시작된 그것은 이내 거센 빗줄기가 되었다.
몇 달간 이어졌던 폭염은 숲을 메마르게 했다. 풀은 사그라졌으며 나무는 활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대지는 무미건조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게끔 변한 뒤였다. 그런 메마른 땅 위로 비가 내린다.
폭염을 밤과 달이 채 식히지 못해 뜨거워진 공기를 동쪽에서부터 온 찬 구름에서 내리는 빗물이 식히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땅의 열기에 증발하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곧 그 소리는 사라지고 빗소리만이 적나라하게 울려 퍼진다.
길었던 폭염의 끝을 알리는 빗줄기에 숨어 있던 동물과 곤충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밤나무의 잔가지 위에 앉아 있던 올빼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올빼미의 눈에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박쥐들이 보였다. 평소라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먹잇감에 불과했을 박쥐들이지만 올빼미는 쫓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은 수천 마리가 넘는 박쥐의 몸집이 하나같이 성인 남자보다 컸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저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몸을 숨겼다. 그리고 올빼미가 몸을 숨긴 밤나무 밑으로 한 여자가 숨을 죽인 채 걸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굉장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쫓고 있는 이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요 칠년간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는지 셀 수도 없다. 허나 빈번히 추격자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럴 때마다 감시는 심해지고 경계는 삼엄해졌다. 결국 이대로는 가망이 없다 생각한 그녀는 일 년 이상을 조용히 지냈다. 크게 눈에 띄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까지 기다렸다.
주시하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조금 풀어진 순간. 그리고 그녀의 언니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카트레아는 반성하라는 의미로 그녀의 언니가 잘라버린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탈출 하다 걸릴 때마다 조금씩 잘렸지만 아직 단발머리라고 불러줄 수준은 됐다. 그녀는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붉은 눈이 날아다니는 거대한 박쥐 떼를 주시했다.
저 박쥐 떼의 주인은 그녀의 언니 밑에서 오랜 시간 보좌하던 이다. 긴 시간 잠을 자던 카트레아와는 달리 언제나 깬 채로 그녀의 언니를 위해 일했다. 가끔은 언니의 분노로부터 카트레아를 지켜주기도 하던 이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탈출을 방해하는 일등공신이다.
카트레아는 수천 마리의 박쥐들도 창백한 피부의 말끔한 정장 차림의 사내들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성을 빠져나와 숲을 가로지를 수 있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녀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다. 허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박쥐 떼를 부리는 이는 카트레아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카트레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의 여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메말랐던 숲에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성이 하나 있었다. 밤하늘 아래에서도 붉은 빛을 띠는 성에는 높게 솟은 두 개의 첨탑이 있었다. 그중 더 높은 첨탑의 꼭대기에서 카트레아와 똑 닮은 여자가 도망치는 카트레아를 보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박쥐 떼를 부리는 이가 말끔하게 차려입고 딱딱한 자세로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
커다란 파라솔 아래에서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여자는 고된 일을 마무리하고 휴양을 나온 사람 같이 여유가 넘쳤다. 속이 비치는 반투명한 원피스가 비바람에 하늘거린다. 그녀는 와인 잔에 따라둔 석류차를 마셨다.
석류 특유의 맛과 향에 약간의 설탕이 내는 단맛이 무척 감미롭게 입안을 맴돈다. 그녀는 다 읽은 책을 덮었다.
카트레아처럼 빨갛지만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말아 올려 비녀로 고정시킨 모습은 무척 우아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녀가 자신의 눈동자와 같은 빨간 색으로 물든 석류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잔이 비어갈 때 즈음 비바람을 타고 담배 연기가 밀려왔다.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던 사내는 담배 연기가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허리를 숙여보였다.
“자기 안녕? 어머? 자기는 아직도 깨 있네? 자기네 종족은 주기적으로 자야 되는 거 아니었어, 뮈엘?”
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허락하기 전까진 말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아는 검은 머리의 여성 또한 그에게 더 말 걸지 않았다.
숲을 벗어나기 직전인 동생을 지켜보며 카트레나가 말했다.
“얘는 신경 쓰지 마. 뭐 세워놓고 싶었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 대신 세워둔 거니까.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그녀의 물음에 곰방대를 물고 있던 검은 머리의 여성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카트레나의 얼굴에 연기를 뱉었다. 카트레나는 검은 머리에 스산한 은색 눈동자를 가진 여성의 곰방대를 넘겨받았다. 카트레아는 검은 머리 여자의 얼굴에 똑같이 연기를 뱉어주었다. 검은 머리의 여성이 피식 웃으며 카트레나의 다리 위에 앉았다. 카트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리데, 이런 건 네 남편이랑 가서 해.”
“자기, 우리 여보 누천 년 째 얼굴도 못보고 있거든?”
“그러니까 누가 헛짓거리 하다가 마리아한테 엿 먹으래? 잘 됐지. 하루라도 못 보면 죽는 두 사람이 오래오래 떨어져 있는 모습, 참 보기 좋으니까.”
프리데가 뾰로통한 얼굴로 카트레나를 쳐다보았다. 카트레나는 괴롭히려는 목적이 다분히 드러나는 얼굴로 프리데를 마주보았다. 프리데는 카트레나의 얼굴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긁었다. 카트레나가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 그녀가 실눈을 뜨며 말했다.
“화장 안 해서 봐준다.”
“얼씨구? 자기, 언제는 화장 했어?”
“물론 내 아름다움에 화장 같은 인공적인 게 낄 자리는 없지. 난 완벽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욕심을 버리는 건 손해라고 생각해. 너무 완벽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잖아? 나 같은 존재도 약간의 결함 정도는 있어야 더욱 매력적이지 않겠어?”
“······자기를 한 대만 때려도 될까?”
“난 위에 타는 걸 좋아하지 깔리는 건 싫어하는데.”
카트레나는 고개를 살짝 꺾고 아랫입술을 물며 프리데를 올려다봤다. 프리데는 그런 카트레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프리데가 기지개를 켰다. 카트레나는 프리데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졌다. 무척 부드럽고 곱다. 카트레나는 프리데의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프리데는 카트레나가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에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문득 그녀의 눈에 숲을 빠져나가는 카트레아의 모습이 보였다. 프리데가 말했다.
“어머, 자기 동생 또 밖에 나가네?”
그러자 카트레나는 환하게 웃었다.
“참 한결같지?”
프리데가 카트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와 함께 몸도 돌리는 바람에 다 땋아 마무리 중이던 머리가 풀렸다. 아쉬워하는 카트레나의 입에 곰방대를 물려주며 프리데가 말했다.
“한결같은 건 자기도 마찬가진 걸? 언제까지 붙들고 안 놔줄 거야? 저렇게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데 이제 놔줄 때도 되지 않았어?”
카트레나가 악의로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절. 대. 안. 돼.”
프리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과장되게 이마를 짚었다.
“가엾은 리아! 언니 하나 잘못 만나서 평생 고통 받는구나. 나였으면 정말 잘 해줬을 텐데! 어쩌면 이런 변태를 친언니로 뒀니!”
카트레나는 프리데의 곰방대를 손에 든 채 정말 행복에 겨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카트레나의 손에서 곰방대를 돌려받은 프리데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따라 기지개를 켠 카트레나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두 여자는 넓은 파라솔 바깥으로 나갔다. 분명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젖지 않았다. 프리데가 연기를 내뱉었다. 서늘한 연기가 코끝에 걸린다.
카트레나는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다. 마치 물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허공에는 파문이 일었다. 그곳에서 손을 빼냈을 때 카트레나는 곰방대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잎담배가 다져진 곰방대의 대통 위로 집게손가락을 가져갔다. 엄지손톱으로 집게손가락을 찔러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피는 불꽃이 되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카트레나는 물부리를 통해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자기, 오래 쉬었으니 이제 활동할 때 됐지?”
프리데의 물음에 카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데가 마지막 연기를 내뱉었다. 그녀는 더 이상 태울 게 남지 않은 곰방대를 손에서 빙글 돌렸다. 그러자 곰방대가 사라졌다. 프리데가 말을 이었다.
“리나, 자기 흥미를 끌 재밌는 일이 하나 있어.”
“뭔데?”
“크샤르트와 어울리는 일이야.”
카트레나가 피식 웃었다.
“뒤틀린 제단에서도 배척받는 흑마법사 이름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그런 놈과 아름다운 우리 리데의 합작이라······.”
카트레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평화가 길었다. 그녀가 말했다.
“좋아. 마침 몸도 찌뿌듯했는데 잘 됐어. 너한테 손을 빌려주면 페스벤이 가만 안 있겠지?”
“응.”
“고작 셋이서 감당할 힘은 아닌데, 그래도 재미는 있겠네. 일 시작할 때 불러. 기다리고 있을게.”
카트레나의 말을 끝으로 프리데가 그녀의 뺨에 입 맞췄다. 카트레나는 답례로 프리데의 이마에 키스했다.
지금 연재하는 게 끝나고 새 작품으로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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