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살자!-7-믿음의 장2
믿음의 장2
주말에 큰집 식구와 큰아버지에게 슬쩍 밑밥을 뿌려놓은 상진에게 내일은 겨울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방학시작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 현수의 기억을 덤으로 가지고 깨어난 일,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설정과 준비 등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이제 내일이면 학교에 등교해야 한다. 현수의 입장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현실이었지만 상진으로서는 약간의 설레임도 없지 않았다.
중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는 상진에게 대학시절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전 학년 장학금을 탔던 현수의 기억을 합치면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보너스로 현수는 영문학과를 졸업한 문과 출신이어서 영어와 국어 등 암기과목에 강한 편이었고 상진은 암기과목보다 수학, 과학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최상의 조합이었다.
머리만 뛰어난 남자와 얼굴만 예쁜 여자가 결혼했더니 못생긴 돌머리가 태어났다는 비극이 상진에게 발생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왜냐? 실제로 고2영어 교과서를 보니 모르는 단어가 없고 독해는 읽는 순간 저절로 된다. AFKN을 들어보니 어색함이 없다. 실제로 현수는 섬유회사의 무역파트에서 근무하면서 해외출장을 자주 다녔고 영어는 원어민과 무리 없이 대화가 가능할 정도여서 영어는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문법만 다시 한 번 훓으면 완벽 그 자체다!
“야호! 지긋지긋하던 영어는 끝이다. 영어만세!”
현수의 기억을 살펴보니 국어성적도 최상위권이어서 상진이 조금만 노력하면 좋은 성적이 가능할 것 같았다.
수학, 과학은 원래 잘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상진은 무협세계에서 말하는 ‘환골탈태’와 다름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죽을 위기에서 절벽에서 떨어 졌더니 기연을 얻었다’와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물론 육체가 아닌 정신의 영역이었지만 관계없었다.
무협세계와 달리 현대는 육체보다 머리 아닌가? 육체는 일주일째 계속하고 있는 헬스장운동과 봄 되면 시작할 런닝으로도 충분했다.
다음날 등교시간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한 상진은 교무실에 들러 담임선생님을 찾았다.
이광수, 국사선생님 42살, 전공답게 차분한 인상의 유부남이다.
“안녕하세요?”
“그래, 상진이구나. 고생 많았다. 몸은 좀 어떠니? 이제 다 나았니?”
“예 이제 다 나았습니다. 병원까지 오셨다는데 뵙지도 못하고 .....”
“괜찮아 그게 어디 네 잘못이니? 이렇게 다시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고맙다.
부모님이 그렇게 돌아가셔서 안타깝지만 사람생명이 인력으로 되는 일은 아니니.....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힘내야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이야기 하고“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주변에 계신 선생님들도 다들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인사를 마친 상진이 교무실을 나와 교실문을 열었다.
“드르륵”
“어! 상진아! 왔구나.” 활달한 김기환이 나를 보고 먼저 반긴다.
순간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진을 향한다.
독수리오형제 김 동진, 이 정수, 최 수종이 다가서고 다른 친구들도 하나 둘 다가 선다.
상진의 책상주변에서 반 아이들의 안타까움과 걱정이 가득한 인사를 듣기를 한동안, “드르륵“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시자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가고 아침조회가 시작되었다.
“차렷, 경례”
“안녕하십니까?”
“그래, 다들 방학 잘 보내고 공부 열심히들 했겠지?”
“예”
“너희들도 알겠지만 방학동안 김상진이 교통사고가 나서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다. 상진이도 크게 다쳤는데 다행히 이렇게 완치되어 학교에 나왔구나. 돌아가신 상진이 부모님을 위해서 우리 반이라도 애도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전부 일어~ 서” 선생님의 구령에 전체가 일어서고 상진도 일어났다.
“김 상진부모님의 명복과 평안을 위하여 묵념!“
급우들과 상진도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그만“ 하는 소리에 다들 고개를 드는데 상진은 벌써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졸지에 고아가 된 고등학생이 이런 상황에서 눈물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몇 명 친한 친구들도 눈이 붉다.
“자~ 자리에 앉고, 선생님이 상진이 사고소식을 듣고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병원에 갔을 때만 해도 의식이 없어 큰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열흘만에 깨어나 오늘 학교까지 온 상진일 보니 정말 장하다. 자~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친구를 위해 박수로 힘껏 환영해주자.”
“짝 짝 짝 짝 짝 짝.......”
끊이지 않는 박수소리에 상진이 일어나 목례를 하자 응원과 위로의 박수소리가 더 커진다. 가슴 뭉클한 시간이었다.
아침조회가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개학 첫날이라 숙제검사와 자습위주의 수업으로 하루가 끝났다.
다른 선생님들도 상진이 숙제를 안했다고 혼내지 않는 것을 보니 다들 상진의 소식을 알고 계신 듯하다.
하교 길, 독수리오형제가 교문을 나선다.
“친구들, 오늘 일찍 끝나고 내일은 선거로 학교도 쉬는데 지금부터 뭐하고 놀아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나겠냐?
노는 일에는 항상 선두를 놓치지 않는 김기환이 바람을 잡는다.
“아~ 배고파, 빵집에 가서 뭐라도 먹으면서 생각하자.”
언제나 배고픈 먹보 김 동진이 빵집으로 유도한다.
“돈은 동진이가 내나?” 이정수가 묻자
“내가 돈이 어디 있냐?, 같이 내야지.”
“야! 너는 두 배 내야 돼”
“아 치사한 놈, 먹는 것 가지고 따지는 놈이 제일 치사해.”
항상 이인 분 이상을 해치우는 동진의 너스레에 다들 헛웃음만 나온다.
빵집에서 단팥빵과 고로깨 그리고 우유로 배를 채운 녀석들이 향한 곳은 결국 우리 집이다.
책가방은 콜라와 도서대여점에서 빌린 만화와 무협지로 한 가득씩이다. 이때의 무협지는 엄청 야해서 책 곳곳에 이물질이 많이 묻어
있고 야한 장면은 뜯겨 나가고 없는 책도 많았다.
선거에 관심 없는 친구들은 만화 삼매경이고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빌려온 만화책과 무협지를 다 보기 전에는 움직일 생각이 애당초 없다.
결국 김치찌개가 저녁메뉴로 등장하고 미친놈 처럼 먹고 배를 두드리며 퍼져있더니 김 기환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야 우리 비디오 빌려보자”
“비디오? 재미있는 영화 있냐?”
“있지! 뼈가 타고 살이 타는 밤, 애마부인 바람났다, 대물이 못 말려,”
“19세미만 안 빌려준다.”
“우리도 이제 19살이다.”
“만으로 18세라 안 빌려 줄 텐데....”
“내가 책임지고 빌려 올 테니 돈이나 내라.”
이런 일에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기환의 호언장담에 다들 믿어보기로 했다.
기환이 상진의 사복으로 갈아입고 동진을 데리고 나간 지 20분정도가 흘렀을까?
기환이 의기양양하게 비디오를 들고 들어온다.
“짜식들! 형님 솜씨가 어떻냐?‘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징한 놈“
이상한데서 소리 없이 강한 놈이 있는데 기환이 그런 놈이다.
나중에 이 능력도 크게 쓰일 곳이 있을 것이라 상진은 생각했다.
19살의 남학생 5명의 콧김이 뿜어지는 뼈가 녹는 밤이었다. 결국 몇 놈은 밤을 새워 그 많은 만화책과 무협지를 다보고 일어났다.
물론 집에는 라면과 먹을 것은 동이 났다. 두루마리 휴지는 왜 이렇게 많이 줄었을까 궁금하다. 독수리오형제의 독수리오형제 때문이리라.
1985년2월12일 화요일,
제12대 국회의원선거는 국민의 엄청난 관심속에 치러졌다.
10,26과 12,12사태에 이은 신군부의 집권, 5,18광주민주화항쟁등의 정치암흑기를 보내다가 민주화인사들이 대거 복권되어 선거에 뛰어들었고 거물정치인 김영삼의 단식투쟁과 미국에서 귀국한 김대중의 정치활동재개로 인해 민주화를 위한 국민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선거였다.
그러나 선거개표결과는 호남지방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전원당선이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로 나타났고 결국 여당은 과반석을 확보했다.
상진이 큰아버지 한표에게 꿈에 보인다고 얘기한 그대로의 결과였다.
그리고 다음날 곧바로 터져 나온 <국제상사의 부도처리>는 상진의 꿈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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