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살자!-28-봉사의 장1
봉사의 장1
입학식을 끝내고 대학생활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듣고 곧바로 회사로 온 상진은 늦은 점심을 짜장면으로 해결하고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오늘 첫 출근을 할 신입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경씨 커피신공에 중독되었어요.”
“출장 다녀오느라 고생하셨는데 제가 해드릴 것은 커피 타는 것밖에 없네요.”
“세계 어느 나라엘 가도 미경씨 커피와 비교할 만한 곳이 없어요. 생각나서 혼났다니까.”
“커피 맛이야 우리 조미경씨 커피 따라올 데가 없지”
“사장님까지 오늘따라 왜 그러세요.”
“나도 커피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조금 전에 드셨잖아요.”
“김이사 마시는 것 보니까 이상하게 또 마시고 싶어졌어.”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바로 타 드릴게요.”
입사한 지 4달째인 조미경도 이제는 회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한 사람분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었다. 직원이래야 딱 세 사람 뿐인 회사인지라 빨리 친해질 수밖에 없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상사들이 워낙 좋은 성품을 가지신 분들이라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나무라기보다는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타입인지라 미경은 이 회사에 들어온 것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장님 말씀에 의하면 일본에 한 명, 회사에 한 명의 신입 여직원을 새로 뽑았다 했지만 일본에서 오전에 팩스로 온 이력서를 슬쩍 보고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나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연상이 아닌가. 그리고 누구보다도.
학벌이 쬐끔 신경 쓰이긴 했지만 학벌이 5살을 커버하진 못하리란 자신감이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늘씬한 키의 여자가 들어서기 전 까지는.
연한 코발트색 정장을 입고 살짝 화장까지 한 장한별이 들어서자 잠시 정적이 내려 깔렸다.
‘뭐 뭐얏! 저 여시같이 생긴 것은? 완전 구미호잖아. 분명 꼬리가 달렸을 거야.’
‘허! 상진이 놈 가슴이 내려앉았다기에 그런가보다 했더니만...... ’
‘우와! 치마 입은 모습은 더 환상이구나. 코트를 벗은 몸매는 ......할 말이 없네!!’
“안녕하세요. 장한별입니다”
“어서 오세요. 찾기가 힘들지는 않았어요?”
“이사님께서 그려 주신 약도가 워낙 알기 쉽게 되어 있어 한 번에 바로 찾았어요.”
“한별씨! 인사하세요. 여기 계신 분이 사장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한별이라고 합니다.”
“오느라고 고생했어요. 이리 와서 앉아요.”
“감사합니다.”
“커피밖에 준비된 게 없는데 괜찮겠어요?”
“커피 좋아합니다.”
“조미경씨 커피 한 잔 부탁해요.”
“............”
“조미경씨?”
“아, 예.”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이상하게 커피를 마시며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장한별의 표정을 제외하면 잠시의 대화 끝에 김사장도 흡족해 하는 것 같고 한별도 회사 여직원에게도 조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호칭을 불러주는 사장과 이사의 마음이 엿보여 나쁘지 않았다.
“하하! 이제 4명이 일하려니 사무실이 좁구나. 4월27일까지가 기한이니 건물 주인에게 이야기하고 회사를 옮겨야 하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손님이 찾아오면 밖에 세워 둬야 할 형편이군요. 이왕 옮기려면 금융회사가 밀집해 있고 학교나 이곳에서도 가까운 여의도가 어떨까요?”
“여의도 좋지. 내일부터 당장 알아 봐야겠구나.”
1986년3월3일 정미진과 장한별이 (주)송뢰의 새로운 식구로 합류하고 상진의 새내기 대학생활도 시작되었다.
신입생환영회에서 두주불사의 공대선배들과 맞서 이심일체(二心一體) 신공으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철벽 방어를 해내 역대 최고의 주당이 입학했다고 그 이름을 알리더니 수업중이나 도서관에서는 보지도 않으면서 일어회화 책은 물론 도교나 불교서적과 가끔 무협지까지 주기적으로 넘기고 있는 이상한 놈으로 찍혔다. 그뿐인가? 쉬는 시간이나 강의 틈틈이 잔디밭이나 나무 밑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행동으로 기인이라 불리기도 하고 간혹 관악산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 급기야 머리 깎고 출가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런데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 있었으니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옆에는 곱상하게 생긴 전기공학과 학생이 항상 붙어 다녀 둘의 관계에 대해 불측한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아주 사소한 것을 제외하면 상진은 정말로 평범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현수는 상진이 대학에 입학하자 수업시간이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때는 같이 일어공부나 동양철학 서적을 보며 지내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상진을 졸라 같이 명상을 했는데 이는 우연히 책을 보다가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는 문구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몸이 건강하면 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현수로 하여금 상진을 새벽6시에 기상나팔 같은 고함소리로 깨워 안양천을 달리게 하고 강의시간 중간 중간에 빈 시간이 생기면 관악산에 올라 명상을 하게 만들었다.
상진의 노력 덕인지 현수의 집념어린 정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너지효과를 내기 시작해 하루에도 현수의 활동반경이 거의 10m 이상씩 늘어가고 있었다.
벚꽃이 지고 라일락 꽃 향기 짙어지는 5월이 되자 현수는 거의 혼자서 1km 내의 관악산으로 찾아가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고 하염없이 명상에 잠기고 있을 정도였다.
3월 입학과 함께 일요일만 되면 상진이 찾아가는 곳이 새로 생겼는데 고양군에 있는 H아동복지회였다.
현수는 생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고쳐야 할 것으로 버려진 아동의 해외입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혼 전에는 지은에게 결혼하면 애들을 낳지 말고 입양해 키우자고 말했다가 헤어지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었다.
상진이 H아동복지회를 찾은 1986년도에는 사상 최대로 한 해에 8,000명이 넘는 아이가 해외입양 되는 기록적인 해였다.
거의가 미혼모가 버린 애들이거나 장애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국내입양 실적은 극히 저조하고 거의가 미국과 유럽으로의 해외입양이었다.
장애아인 경우는 더욱 심해서 거의 99% 해외입양이었고 입양되지 못한 장애아들을 이곳 고양군에 있는 H아동복지회에서 보살피고 있었다.
사랑해 줄 수 있어서 고맙다.
사랑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 고맙다.
나는 행복하다.
- 작가의말
상진의 군대문제로 고민입니다.
고아라서 군에 안간다는 의견도 있지만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3세 이후 고아는 군에 가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86년 당시의 복무기간이 30개월인데 안가도 되는 군대를 잘못된 정보로 보낼 수도 있으니 그 당시의 정확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현수가 안가도 되는 군대를 두 번 간다면 아마도 돌아버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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