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살자!-26-영입의 장4
영입의 장4
점심시간이 지난 라면집 안으로 들어서자 좌석이 20명 남짓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 크지 않은 가게였는데 일식집 형태가 그러하듯 스탠드바 형식의 자리와 테이블로 된 자리가 있었는데 상진 일행은 마침 테이블이 비어 있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주문을 할 수 있었다.
배가 고픈 상진이 미진의 도움을 받아 돼지 뼈로 우려낸 국물로 만든 라면을 대(大)자로 주문하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뭐라고 말을 하는데 미진누나가 통역을 해주었다.
일본 라면을 처음 먹는 것 같은데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보통으로 주문을 해도 양이 많으니 그냥 보통으로 주문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본다는 것이다.
대(大)자와 보통은 가격 차이도 제법 나는 것 같은데 손님이 주문하는 대로 팔지 않고 고객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물어 봐주는 주인장의 배려는 내심 고마웠다. 하지만! 보기 드문 미인들을 앞에 둔 스무 살의 사나이가 라면 대(大)자를 못 먹어서 물리는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는 자존심이 발동해 상진은 그대로 대(大)자를 고집했다. 일본인이 권하는 대로 따르고 싶지 않은 한국인만이 가지는 거부감도 조금 작용했으리라.
돌아서는 주인장의 모습에서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을 보았지만 상진은 설마 라면 한 그릇 못 먹겠어! 라고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다.
1986년의 지금 26살인 현수는 철원에서 군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 일직사관을 하고 있을 때면 소위 박봉을 털어 라면을 박스채로 사서는 행정반 난로에 있는 큰 주전자로 라면을 끓였는데 라면 10봉이 딱 알맞게 들어갔었다.
철원평야의 칼바람을 맞으며 동초 근무를 서고 얼어붙은 얼굴로 행정실로 들어서는 근무자들 식판 2개에 주전자를 부으면 라면 다섯 개 씩 식판이 찰랑거릴 정도로 딱 맞았다. 계급을 막론하고 철원평야에서 동초 근무를 마치고 들어와서 봉지라면도 아닌 주전자에 끓여 낸 라면 다섯 개를 못 먹거나 국물을 한 방울이라도 남기는 병사를 본 적이 없었던 현수다. 물론 김치 한 쪼가리 없었지만.
상진도 라면은 언제라도 2개 정도는 거뜬했다.
그랬는데.......주인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온 그릇은 거의 세숫대야 절반 만 하고 그 큰 그릇에 국물이 넘칠 듯 찰랑거리고 있었다. 보는 순간 질릴 정도였는데 물러 설 수도 없는 입장, 진퇴양난(進退兩難), 이판사판 공사판의 심정으로 젓가락을 들며 흘깃 두 미인을 보는데 표정이 어째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 입 주변이 씰룩거리고 있다.
“아 참지 말고 웃어도 됩니다. 그러다 입가에 주름생깁니다. 그냥 웃어요.”
“호호호호!”
“깔깔깔깔!”
상진이 용감하게 젓가락을 들었지만 처음에 구수하다고 생각했던 국물 맛은 어느새 참기 힘들 정도로 느끼하게 느껴졌고 면은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훈련 시절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에 식판에 있는 국이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은 빌어먹을 상황! 김치 몇 개 놓고 200원 가까이 하는 일본의 상술을 알면서도 김치를 세 접시나 더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미인들에게 자존심을 세우기는 애초에 물 건너 간 것이었다.
자존심 챙기다가 오바이트를 하는 모습은 보여 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포기를 선언했다. 대한의 군인들이 새삼 위대해지는 순간이었다.
불편한 속을 달래며 다시 커피숍에 앉은 상진은 약식으로 A4용지에 정미진, 장한별의 이력서를 적게 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장한별씨는 귀국일이 어떻게 되나요?“
“저는 3월2일 2시 비행기로 들어갑니다.”
“그럼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하겠어요?”
“3일 월요일은 수업이 없으니 3일에는 출근 할 수 있습니다.”
“귀국 바로 다음 날인데 출근이 힘들지 않겠어요?”
“이왕 시작한 일이라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미리 말을 해 놓기는 하겠지만 제가 없으면 어색할 테니 입학식이 끝나고 바로 가는 것으로 하고 장한별씨는 2시까지 사무실로 오면 되겠네요. 오실 때 정식으로 이력서를제출하면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훌륭한 인재를 뽑게 되어 오히려 회사가 고맙지요. 열심히 해봅시다.”
“그리고 정미진씨는 3일 오전까지 이력서를 회사 팩스로 제출해주세요. 장한별씨 같은 경우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하나하나 배워 가면 되지만 정미진씨는 아직 사회경험이 없어서 조금 걱정이 됩니다만 전공이 경제학이고 외국에서 오래 지낸 경력을 믿고 일을 맡깁니다. 사실 제가 직접 일본에 있으면서 살펴야 할 중요한 일이지만 제 입장이 그렇지 못해 누군가는 이곳에서 대신해줄 사람이 꼭 필요 했습니다.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은 아니지만 하루에 한 두 시간은 매일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말을 할 테니 적으면 좋겠군요. 장한별씨도 정미진씨 와의 중간 역할을 해야 하니 같이 적으면 되겠네요.
첫째는 이곳 만화상점에 매일 들러서 새로 나오는 만화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신간만화와 소년점프 같은 곳을 통해 새로 발표되는 만화 중에서 농구를 소재로 하는 만화가 나오면 즉시로 저에게 연락을 하면 됩니다. 밑줄을 쫙 그으세요! 농구만화!
잘못해서 빠뜨리면 안 되니 점원에게 미리 말해놓고 농구만화가 나오면 연락이 오도록 해야 합니다. 점원을 믿고 기다리기만 해서도 안 되고 반드시 하루에 한 번은 상점에 들러 확인 하세요. 또한 새로 나오는 만화와 잡지들은 모아서 한 달에 한 번 회사로 보내면 됩니다. 빠지는 만화가 없도록 주의하시고요.
둘째로 시간 나는 대로 만화출판사 중에서 인수가 가능한 곳이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세요. 경영이 어려워 자금난에 허덕이는 출판사 같은 곳이 있으면 좋겠지요.
셋째로 한자로 손(孫)정(正)의(義), 성은 아닐 수도 있고 이름으로 찾으면 되겠군요. 이 사람이 만든 <소프트 뱅크>라는 회사에 대해서 대략적인 것을 조사해서 보내주면 되겠군요. 원래는 제가 알아보려고 했지만 미진씨가 저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회사의 규모나 주식지분문제 매출규모 아이템이 어떤 것인지 정도만 알면 되니 자세하게 알고 싶군요. 손정의와 소프트뱅크에 밑줄 쫙!
넷째로 이곳에 지사를 내야 하니 적당한 곳을 알아 봐 주세요. 우선은 직원 5명 정도가 일할 수 있는 정도면 되겠군요. 이것도 급한 일은 아니고 7월말까지만 알아보면 되는 일입니다.
“첫째 일을 꾸준하게 하면서 둘째 일을 알아보는데 셋째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은 아니니 그것부터 대략적으로 먼저 처리하고 둘째와 넷째 일을 하면 되겠군요. 일의 진척사항은 두 사람이 서로 연락해서 저에게 보고를 하도록 하세요. 혹시 잘 못 알아들었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 질문을 하도록 하고요. 모든 일은 확실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아는 척 하다가 큰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모르면 주저하지 말고 물어 보세요. 두 분은 신입사원이지 베테랑이 아닙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이사님, 만화출판사 인수는 왜 하는지 알겠고, 손정의씨의 <소프트뱅크> 건도 투자회사니 투자를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고 사무실이야 필요하니 구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는데 만화의 경우에는 이사님 말씀을 들어 보면 농구를 소재로 하는 만화를 찾아 출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농구만화는 제가 본 적도 없을뿐더러 농구 자체가 축구나 야구에 비해 인기도 많이 떨어집니다. 야구만화의 경우에는 <터치>라는 만화가 대히트를 쳤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볼 정도의 작품이지요. 제 생각에 농구만화보다는 야구만화를 출판하는 것이 훨씬 성공 확률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구만화의 경우에는 이미 너무 크게 히트를 쳐서 그 작가의 작품이 아니면 다른 만화는 이제 히트를 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고교야구의 경우에는 갑자원이란 기반이 조성되어 있어서 히트를 칠 수 있었지만 다른 스포츠만화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농구만화의 경우는 5명이 주전으로 뛰는 경기이기 때문에 인물설정이 쉽고 점수가 많이 나기 때문에 결정적인 장면을 그려 넣을 요소가 많다는 겁니다. 축구가 2점 경기, 야구가 4,5점 경기라면 농구는 80점 경기입니다. 경기장이 아닌 만화로는 아주 좋은 조건이지요. 액션영화로 비유하면 실감나는 전투 장면이 많은 것 같은 거라 할까요. 박진감을 전달할 수 있는 스토리와 작가만 만나면 크게 히트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스타로 불리는 <마이클 조던>의 등장과 <나이키>라는 거대 스포츠용품 생산회사가 만들어 낸 농구 붐이 <슬램덩크>의 성공신화를 가져왔지만 현수는 그것이 아니어도 작가의 역량이 워낙 뛰어나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고 나름 정확한 견해를 피력하는 미진에게는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다. 미진이야 나중에 놀라운 선견지명과 시대를 앞서가는 판단력을 가진 남자로 인식되어져 눈에 콩깍지가 덮이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미진씨는 경제학과라서 그런지 정확한 상황판단과 예리한 구석이 있군. 뽑기를 잘한 것 같아! 그런데 한별씨는 항상 차분하고 빈틈이 별로 안 보이는군. 일과 사랑도 그렇게 할까?’
그날은 결국 저녁식사까지 같이 하고 늦게 헤어졌고 다음날 상진은 36년간 금수강산을 유린하고도 현수가 죽는 2012년도 까지 독도를 자기 땅이라 악착같이 우겨대던 일본 놈들의 땅을 떠나며 할 수 있는 최대한 털어먹겠다고 결심했다.
‘오늘이 3,1절 기념일이다. 기다려라! 원수를 갚아 주마!’
- 작가의말
쪽지를 주시는 분들의 나이가 다들 상진과 비슷하거나
심비어 현수보다 나이가 있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분들은 오늘 어린이 날 느긋하게 쉬고 계시겠죠?
그 아래 연령층에 계신 분들은 오늘 좀 고생하시겠고/
지내보면 그때가 가장 행족할 때인 것 같습니다.
어린이 날 고군분투 하실 독자분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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