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둔 한 수
요즘 들어 약간 자신감이 생긴다. 회귀 후 아슬아슬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순조롭게 느껴진다. 젊은 몸이 있어서, 그리고 재능이라는 게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 때면, 빨리 이면 세계로 부터 호출이 있길 기다릴 정도니 말이다.
오늘은 김상철의 동생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직접 만나고 싶진 않았다. 우편으로 USB를 보내고 싶었으나, 주소를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어 직접 만나 전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신촌의 작은 까페에서 약속을 잡았다.
날이 제법 쌀쌀하다. 길에서 아직 앳된 애들이 큰 드럼통에 군고구마를 구워 팔고 있다.
“고구마 하나요.”
“네. 맛있게 드십시요.”
제법 큼직한 군고구마 하나를 받았다. 껍질을 까면, 노랗게 변한 부분. 입에서 부드럽게 녹는, 조금은 새콤하고 또 달콤한 부분이 무척 맛있다. 나는 돈을 건내줬다. 그런데 문득 아이들 뒤에서 양아치스럽게 껄렁거리는 놈들이 있다.
아마 가출한 아이들이겠지. 하루에 번 돈을 상납할 것이다. 내가 해결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그냥 내 갈길로 갔다. 하지만 내게 고구마를 건내준 아이가 “형님들~” 이라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혹은 약간은 비굴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잔상이 좀 남았다.
약속한 까페에 김상철의 동생은 미리 나와 있었다. 여동생, 옅은 브라운으로 염색한 긴 생머리. 두 눈은 크고 맑다. 단정한 이목구비는 이효리를 떠올리게 한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름은 김설진이라고 한다고 했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넘기는 김설진에게, 나는 USB 케이블을 건냈다.
“이게 뭐죠?”
“김상철선배가 전해달라고 했어요.”
“오빠는 지금 어디 있나요?”
김설진과 눈이 마주쳤다. 빠져들 것 만 같은 눈빛이다. 역시 너무 미인이어서 부담스럽다. 나는 눈을 살짝 돌렸다.
“저는 잘 몰라요. 갑자기 상철 선배가 제게 이걸 전해주라 하셔서, 연락드린 겁니다.”
김설진은 USB를 받으며 생각에 잠긴다. 김상철의 죽음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 그녀는 유가족이다. 그리고 김상철은 내 손으로 죽였다. 그런 그녀를 대하는 내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럼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게 김설진이 말한다.
“이건 혹시 패러럴 브라우저 인가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설마. 그녀도 각성자였단 말인가.
“이건 분명 오빠의 유품이겠군요.”
김설진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김설진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뻗어 나와, 내 몸을 감쌌다. 갑작스런 그녀의 살기에 놀라 나도 모르게 온 몸에 마나를 퍼트려버렸다. 하지만 나의 마나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의 몸은 그녀가 내 뿜는 무시무시한 마나에 잠식 당해버렸다.
‘이... 이런..’
김설진이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쟁이군.”
다시 차를 한 잔 들이키는 김설진. 그녀가 나를 슬픈 눈빛으로 나를 올려본다.
“앉아. 이야기 좀 나누고 가요.”
나 역시 몸에 퍼져나간 마나를 거둬들이곤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신다. 피가 마를 것 같은 침묵의 시간이다.
'이게 그녀석이 숨겨둔 한 수였나..'
김상철은 내게 김설진이 평범한 일반인이라 말했다.
'이런 괴물이?'
내가 김상철의 수에 걸려든 것 같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나를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동생에게 바통을 넘긴 것이다.
나는 쉴 새 없이 내가 살아 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 방법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이런 무력감도 20년 만이군..'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입술이 바싹 말라 타들어가는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파국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분하다..'
회귀를 하기 직전, 나는 아무런 야망이 없는 남자였다. 왜냐하면 사업을 하면서 해볼 수 있는 만큼 다 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했다. 그래서 각성자가 된 이후에는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에만 충실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이빨이 아득 아득 갈릴 정도로 분하다.
한 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설진이 입을 열었다.
“오빠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당신이지?”
“그래.”
“네가 죽인 건가?”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설진은 나를 노려본다. 맑은 두 눈이 눈이 붉게 변하기 시작하며, 살기가 점점 더 강하게 내 몸을 옭죄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김설진은 강하다. 회귀 전에도 이렇게 강한 각성자를 만나본 건 드물 정도였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크윽~’
어깨에 거대한 산이라도 놓인 것 같은 압력이 나를 짓눌렀다.
“치지직~”
내가 앉아 있는 의자와 건물 바닥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다. 종업원들이 웅성거린다.
“지.. 지진인가?”
“어.. 어떻하지? 일단 밖으로.. 꺄악~”
건물의 흔들림을 감지한 종업원들 근처에 돌덩이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천정의 일부가 무너진 것이다.
“도망쳐~”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왜 죽였는지는.. 묻지 않을게..”
슬픔에 목이 잠긴 듯한 말투였다.
“나도 널 원망하고 싶진 않지만.. 네가 먼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잖아..”
“크.. 크윽~”
내 입에서 꾹 참고 있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압력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건물의 여기저기가 붕괴되며, 돌이 떨어지고 창문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내가 이러는 거 이해하지?”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다리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강화신체로 이 정체 불명의 힘에게 저항하려 했지만,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양 무릎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리고 건물의 진동이 멎었다.
“평생, 두 다리를 쓰지 못할 거야. 이걸로 오빠의 원한을 대신 할게.”
까페의 바닥에 쓰러져 뒹굴고 있는 나를 무심히 바라보며, 김설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의 진동이 멈췄다. 통증 때문에 흐릿해져 가는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보 같이... 폼만 잡고 이렇게 가는 게 어딨냐구..”
------------------
흐린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고, 다시 눈을 떴다. 낯선 냄새, 공기 중에 떠도는 낯선 마나의 흐름들.. 여기는 이면세계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