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이라는 아이
까페에 있는 서재에 여러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알랭 드골의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책이었다. 어렸을 때 폼을 잡는다고 읽는 책 했던 책이다. 이제와서 제목에 눈에 확 들어온다.
40년 만에 다시 읽는 소설이다. 책장을 넘겨보니 굉장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알랭 드골은 이때 다 떨쳐버리고 싶었구나..’
나 역시 회귀 전 마지막 몇 년간은 이 소설의 주인공과 비슷한 정서를 가졌던 것 같다. 나는 60평생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을 다 떨쳐 놓고 조용히 죽음을 맞고 싶었다. 하지만 회귀를 하고 젊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니, 전에 없던 욕망이 들끓었고 지난 생에 못했던 일들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다.
‘젊음이라 이건가.’
한창 독서에 몰입하고 있는데, 뭔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기분.
“아. 독서 하는데 내가 방해 한거야?”
익숙한 목소리. 고은이다. 그녀가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는다.
“여~ 어려운 책 읽는데? 이게 누구야?”
자연스럽게 내 자리 앞에 앉았다. 그녀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여긴 어쩐 일이야?”
“지나가는데 네가 보여서. 들어와 봤어.”
“오늘 한가한가보구나.”
“뭐? 너 말 좀 못댔게 하는구나. 나도 바쁘거든?”
각성자로 살다보면, 이렇게 직설적인 말들을 뱉는 것이 습관이 된다. 그리고 이런 말투가 2001년 세상에서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녀가 편해서 나도 모르게 여러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차 시켜도 되지?”
“응.”
“너가 사는 거야?”
“그래. 사줄게.”
“헤헤~ 여기 뭐가 맛있어?”
직원이 메뉴판을 넘겨줬다. 100여 가지가 넘는 전통차 메뉴를 보며 고은이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야. 너가 좀 골라주라. 난 자판기 커피만 마셔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음. 전통차는 마셔 본 적 있냐?”
“아니. 처음인데? 아! 녹차 마셔봤다.”
“그래? 그럼 무난하게 보이차로 시작해보는 건 어때?”
“보이차? 그거 맛있어?”
“응. 녹차랑 비슷한데, 조금 더 따뜻한 느낌이야.”
“따뜻한 느낌이라니. 이거 다 뜨거운 차 아니야?”
“마셔보면 무슨 말인지 알아.”
나는 보이차 하나와 치즈케익 하나를 추가하곤,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역시 넌 책을 좋아하는구나.”
“고은이 너도 좋아하잖아.”
“나야 뭐. 취향도 없고,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읽는데 뭘.”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넌 뭔가 좀 다른 거 같아.”
나는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데, 고은이의 차와 케익도 테이블 위에 올랐다. 고은이가 차를 한 모금 넘긴다.
“와. 따뜻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대견한데? 그걸 다 이해하고.”
“야야. 너 또 시건방져. 나이도 같은 주제에.”
“ㅎㅎ 미안해. 리액션이 좋아서 놀리고 싶네.”
“뭐야. 그게~”
고은이가 심퉁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곤 포크로 치즈케익을 잘라 입에 넣었다.
“아~~”
치즈케익을 한 입 입에 넣은 후,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감탄하듯 말한다.
“이거, 너무 맛있는데?”
“응. 여기 유명한 곳이야.”
“나 이런 거 처음 먹어봐. 신기하다.”
고은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치즈케익을 한 포크 더 잘라 입에 넣었다. 그리곤 다시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신다.
“아. 좋다. 너 완전 신선놀음 하고 있었구나.”
고은이는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다. 지적이고, 품위가 있다. 하지만 신입생 특유의 생기발랄한 귀여움도 잊지 않고 있다.
‘귀엽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미소를 보며, 그녀가 놀리듯 말한다.
“또또! 다정이 너, 언제부터 이렇게 음흉한 미소를 지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안되겠는데? 벌써 아저씨 같이 변해서 말야!!”
고은이가 다시 한 모금 차를 넘기곤,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교육시켜줘야겠다. 신입생답게 웃는 법 말야.”
“그.. 그게 뭐야.”
“교육비는 오늘 점심으로 할게! 이의 없지?”
“뭐야 너. ㅎㅎ”
“한가해서 그래. ㅎㅎ”
고은이는 내게 웃는 방법을 연습시킨다며, 이것저것 표정연기를 지도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술수에 넘어간 나는 그녀 앞에서 이것저것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고은이는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점심은 역시나 스파게티였다. 나는 약간 느끼한 음식이 당겨서 까르보나라를 시켰는데, 그걸 보고 고은이가 또 까르르 웃는다.
“야. 남자애가 그거 시키는 거 처음 봤어.”
“뭐야. 먹을 수도 있지.”
“그래. 그래. 많이 먹어.”
“누가 들으면 너가 사는 줄 알겠다야.”
“어머. 내 목소리가 그렇게 들렸니?”
점심시간에도 고은이는 내게 이것저것 표정 연습을 시켰다.
“이제 좀 낫다. 앞으로도 그렇게 웃는거야.”
“알았어.”
“그럼 보람이랑 인상이도 널 놀리지 않을걸?”
“그래? 거 참 고맙다야.”
“내가 좀 훌륭한 선생님이지? ㅎㅎ”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어제 게이트에서 느낀 불쾌한 감정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나가는 길에 식사는 고은이가 샀다. 어린 소녀에게 음식을 얻어먹는 것 같은 기분이 내가 사려 하자 고은이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남자가 다 사는 게 어딨냐.”
우리는 가게 밖으로 나와 학교 앞 도로 근처를 한 참 걸었다. 가로수로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울창하게 자라, 꽤 멋진 길이었다.
“다음에 독서 모임에 나오면 안 돼? 우리 같이 책 읽자.”
“아.. 미안해.. 요즘 정말 할 일이 많아서..”
“그래? 뭔가 좀 섭섭하데?”
고은이는 학교 도서관에 볼 일이 있다고 했고, 나는 도서관까지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40년 전에는 겪어 보지 못한 인연이 생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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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이의 일기
오늘 약속이 있어서 도서관에 가는데, 다정이가 까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했고, 뭔가 폼 잡고 있는 것 같아서 놀려주려 까페에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다정이 앞에 앉으니, 장난을 칠 분위기가 아니였다. 이 자식! 원래 이렇게 분위기 있었나?
처음보는 어려워 보이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보이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따라 보이차를 마셨다. 그리고 치즈케익을 시켜줬다. 정말 치즈케익은 반칙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맛이었다. 다정이는 참 신기한 아이다. 녀석을 따라하니까 기분이 좋았다. 난 문자로 도서관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고, 다정이와 놀았다.
갑자기 웃는 표정이 멋있어보인다.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서 새내기답게 웃는 법을 가르쳐준다며, 푼수처럼 웃는 모습을 알려줬다. 두 시간을 훈련시키니 썩 웃기는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이 또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갑자기 어른스러워져서 낯설다. 조금 더 그 친구를 알고 싶다. 다음에 데이트 신청을 해주면 좋겠다. 오늘 계속 힌트를 줬는데, 눈치 챘나 모르겠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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