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테즈 무리들
기말고사 기간이 되었다. 학점은 거의 신경쓰지 못했지만, 고은이를 비롯한 친한 동기들의 성화에 못 이겨 공강 시간 등 시간이 있을 때 마다 함께 공부를 했다. 학교를 마친 후에는 과외 때문에 거의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준비하고 시험을 칠 수 있었다.
수업 내용은 벌써 40년 전에 들은 거라 기억 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경영학 개론 수업은 실전과 이론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다른 공부가 필요 없었고, 나머지 수업들은 족보를 중심으로 시간 있을 때 마다 틈틈이 외워뒀다.
‘뭐 학고를 받으면 여러모로 곤란할 것 같으니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때만 해도 대학에서 성적표를 집으로 직접 보내곤 했던 시절이었다. 내 성적을 보고 부모님이 걱정 하지 않을 정도는 준비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각성자가 된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육체적인 피로를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젊은 이 몸뚱이는 밤에 아르바이트를 조금 했다고, 여기저기가 삐걱 거리며 버티질 못했다.
‘신기한 몸이구나. 욕망이나 의지는 전보다 훨씬 강한데, 체력이 전혀 따라오지 못하니.’
나는 새롭게 변한 내 몸에 적응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다가 자칫 과외를 잘 못하게 되면 큰일이 나지 않나. 대학이야 어떻게 되도 관계없지만, 과외를 잘 못하는 건 문제다.
독한 걸로 치면 누구보다 더 독할 자신이 있다. 다섯 번이나 사업에 망하고 실험체로 끌려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건 독해지지 않곤 버티질 못할 것이다.
내 시험은 대충 준비를 해도, 아이들의 시험은 철저하게 준비를 해주었다. 내가 맡은 과목은 수학이었다.
“너희들은 앞으로 1주일 동안 문제 푸는 기계다.”
“네?”
“따라해. 너희들은 앞으로 문제 푸는 기계다.”
“문제 푸는 기계다.”
“그래.”
수업에 들어가자 아이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했다. 나는 아이들을 성적에 따라 등급을 나눴다. 상급 과정에 있는 아이들은 약한 부분을 골라 내 그 부분을 집중 보완 했지만, 중급 과정에 있는 아이들은 기본 원리 문제를 수백 개씩 풀게 했다. 기본 원리가 끝나면 응용문제를 조금씩 깊게 넘어가는데, 기본 원리만 수백 개 씩 풀어도 수학 성적이 2~30점은 거뜬히 오를 수 있다.
다행히 아이들은 내 말을 잘 따랐다. 선생님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순진한 눈이 마음에 들었다.
한 동안 이면세계에서 호출은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편의점에 들려 컵라면을 하나 샀다. 맥주를 한 캔 사서, 편의점 의자에 앉아 컵라면과 함께 먹었다.
‘컵라면도 몇 십년 만에 먹는구나.’
돌이켜보면, 모든 게 새롭고 사무치게 그리운 일상의 풍경들이었다. 옛 세계에서 해보지 못한 것들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사치지..’
컵라면을 후르륵 들이키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상념이 몰려왔다. 일단 과외를 열심히 하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이면세계가 마음에 걸린다. 앞으로도 계속 이면세계에 소환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넋 놓고 있어도 되는 걸까.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편의점 앞으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대학생들이 보였다.
‘좋을 때구나. 진짜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좋을 때지.’
지난 생에, 내게도 안락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내가 순간의 판단력이 부족해 그 기회를 허공에 날려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 생에 성공해서, 지난 생에 못누린 호화로운 삶을 살겠다는 욕망은 들지 않았다. 그런 욕망을 갖기에, 각성자들의 등장 이후 변해버린 세계가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일단 살아남자. 할 수 있어.’
컵라면 국물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쌀쌀해진 공기에 어깨가 으쓱하는 걸 보니, 참 나약한 몸이다. 조금 더 몸을 단련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조금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 시험도 나름 마무리를 했고, 과외를 하는 아이들 시험 준비에 분주해지기 시작한 어느 날 나는 3번째로 이면 세계에 초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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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제법 서늘했고, 넖게 펼쳐진 초원 끝에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구름이 꽤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아마도 개마고원 같이 제법 지대가 높은 고원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작은 동물들이 비누방울 속에서 잠들어 허공에 둥둥 떠 있다.
“또 살아남았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고양이다. 녀석은 내 손에 들린 창을 보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마법이 걸린 무기라... 초원에서 찾았나?”
“그렇다.”
“역시 제법이야.”
고양이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내 머리끝 붙어 발끝까지 스캔하는 것 같다.
“성장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고양이가 몸을 휙 돌린다.
“이번이 마지막 시험이다. 살아남아라.”
그리곤 주변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고원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원 여기저기에 떠 있는 비누방울이 톡톡 터지며, 귀여운 동물들이 흉측한 괴물들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백 마리는 족히 넘어보였다.
‘바테즈...’
바테즈는 동물, 벌레, 괴수 등 각양각색의 모습을 띄고 있으며, 공통점은 모두 인간 처럼 이족보행을 한다는 것이다. 개별 몬스터들은 E급으로 분류되지만, 이 녀석들은 결코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없다. 이렇게 떼로 몰려다니며, 인간이 사는 지역을 황폐화 시킨다.
‘미친...’
이 정도로 몰려다니는 바테즈는 최소 B 등급의 상황으로 봐야 한다.
초원을 가득히 매운 바테즈들은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둘러쌓이면 죽는다.’
나는 강화신체로 몸을 보호하곤,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는 쪽으로 달려갔다. 산길이 나 있는 곳이면, 1:1로 상대를 하게 되니 사방을 포위당하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테즈의 속도는 나보다 약간 느렸다. 어쨌든 나 역시 각성자이기 때문에 일반인들 보다는 신체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 하위 몬스터인 바테즈에게 따라 잡힐 정도로 느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날개가 있는 곤충형 바테즈들이었다. 하늘을 날아오는 이 녀석들의 속도는 일반 바테즈보다 훨씬 빨랐고, 나를 곧 따라잡을 정도로 추격해 들어왔다.
‘기운을 다리로 보내면...’
최근에 강화 신체를 가능하게 하는, 내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이 기운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곤 했다. 곤봉을 사용 할 때 무기만이 아니라 팔과 어깨의 힘이 모두 강화 되는 것을 느꼈다. 혹시 그렇다면 다른 신체능력을 향상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몸을 감싸고 있는 기운을 집중해 다리쪽으로 밀어 넣어봤다.
‘된다.’
다리가 가벼워지기 시작하며, 온 몸이 하늘을 나는 듯 두둥실 뜨는 기분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속도가 빨라져 넘어질 뻔 하기도 했지만, 곧 적응을 하였다.
바로 등 뒤에서 나를 위협하던 바테즈들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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