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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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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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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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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도시의 배 (2)

DUMMY

“반역?”


나리아는 되물었다. 바람 소리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기사의 입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설정되지 않았다. 헌진조차 이 여행에 반역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에게 이 여행은 오직 황제에게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것을 남들이 반역이라고 이름 붙일지언정, 도시를 지키기 위해 사는 기사에게 반역이란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었다. 무르히와 루미스는 물론이고, 뒤틀렸다지만 미르돈 또한 도시를 위해 행동했다.


“기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텐데.”

“그럼 하나 묻지. 이건 나무인가?”


페이가 나무 하나를 손으로 두들겼다.


“이건 풀인가?”


이번에는 풀 한 포기를 뜯어 내밀었다. 나리아는 영문을 몰라 대답하지 않았다.


“집중하게. 도서관의 아이라면 알 수 있을 걸세. 이곳이 정녕 그대가 아는 숲인가?”


페이의 충고에 그제야 나리아는 숲을 인식했다. 그러자 감각이 이곳의 이질성을 감지했다. 이곳의 숲은 그저 나무의 집합이 아니었다.


“······조용해.”


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풀과 나무를 스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리아는 풀과 나뭇잎을 한 움큼씩 뜯어 손가락으로 비벼보았다. 풀도 나무도 바스러졌지만, 즙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수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마른 종이에 가까운 감촉이었다.


“이건······만들어진 거야?”

“목재로 쓰일 수 있고 심어졌으니 나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걸세. 황제 폐하는 자연을 복구하려 하셨지. 이 땅에는 이렇게 흉내 내는 것만이 최선이었지만.”


그 말에 나리아는 이해했다. 이 숲은 그저 숲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자원의 집합이었다. 황제가 어떤 식으로 나무와 풀을 만들어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것은 나무의 모습을 본 따 만들어진 무언가였다.


“이 나무는 생명이 다할 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습을 유지한다네. 그야 당연하지. 애초부터 생명이 주어진 게 아니거든.”


나리아는 한동안 나뭇잎을 들여다보고, 찢거나 굴려보다가 심지어 맛을 보기까지 했다. 머릿속에서 알고 있는 지식이 이것과 일치하지 않아 잠시 혼란스러웠다.


“사물의 꼴이 그 사물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세. 바람은 불어서 바람이고, 사람은 살아서 사람인 법이라지만, 이것을 나무임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또는 긍정할 수 있겠는가? 그건 알 수 없지. 본질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흐트러지는 법일세.”


페이가 나리아를 이끌었다. 나리아는 손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도시에서 기사를, 무언가를 정의 내리지 말게. 사물은 그 행위로 가치가 부여되는 법일세. 삽으로 사람을 내리치면 무기이고, 사람으로 고기를 빚으면 재료일 뿐이지. 그대의 말은 한쪽의 주장을 옹호하는 것일 뿐, 증명은 되지 않아.”


페이는 웃으면서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나리아의 어깨를 두들겼다.


“가던 길이나 마저 가세. 우리는 잠깐 어른들을 피해 모험을 떠난 아이들일 뿐이지 않은가?”


페이가 나리아에게 손짓했다. 배의 끄트머리는 여전히 저 위에 있었는데 점차 가까워졌다. 나리아는 길을 걸으며 괜스레 나무를 두들기거나 발로 땅을 긁었다. 인공정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고, 숲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인위적이었다. 그 애매한 경계선은 쉽게 가를 수 없다.


6구역의 나무도 이러했나. 나리아는 볼프람과 함께 만끽했던 나무 그늘의 달콤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나무를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사와 나무는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파괴당하고 어설프게 다시 세워진 모형 속에서, 나리아는 어떤 말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동안 나아가자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기름이 튀는 소리 같기도 했고, 자갈이 구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짧지만 멀리 울리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나리아는 그 소리가 불길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직접 보시게.”


페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나리아가 미심쩍은 얼굴로 나아가자 넓은 공터였다. 그리고 소리의 정체를 목격했다.


한 무리가 일렬로 서서 긴 막대로 앞을 겨누고 있었다. 나리아는 그 생소한 모습을 머릿속으로 검색하고 곧 경악했다.


“화약 무기잖아!”


그와 동시에 사격이 시작됐다. 총성이 고막을 두들겼다. 나리아는 귀를 막은 채 페이를 돌아보았다. 페이는 성공적인 사격에 흡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기사단이 알면 어쩌려고······.”

“응? 이미 알고 있네만.”


기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리아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이었다. 다름 아닌 기사가 눈앞에서 함께 보고 있다.


사격을 지휘하던 노인이 페이를 돌아보고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페이는 소매를 허공에 흔들며 답했다.


“어떻게······어떻게 저걸 만들어낸 거야?”

“총의 설계도라면 내 머릿속에 있고, 화약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

“화약은 어떻게?”

“화약의 재료를 알고 있나?”

“황, 숯, 초석······.”

“황이라면 이 도시의 땅을 파내면 얼마든지 나오고, 숯은 우리가 있는 곳이 그 답이겠군. 초석이라면, 사람이 있는 한 재배할 수 있다네. 분변을 이용해서······흠, 더러운 이야기는 이만하지.”


요는 군대를 기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사람은 적어 보였다. 그러나 페이는 엄연히 한 세력을, 그것도 화약 무기로 무장한 집단을 이끌고 있다. 4구역의 병사들이 숲에 이르는 길을 통제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가세. 이제 곧일세.”


연이어 이어진 사격을 지켜보던 나리아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페이는 이미 저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허겁지겁 따라가며 온 길을 돌아보았다. 헌진도 어디선가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지 나리아는 궁금했다.


“전쟁을 벌이려는 거야?”

“전쟁이라, 그것이 탈출에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래야겠지.”


4구역의 군대가 이곳의 이상 현상을 알고 있으니 기사단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토벌당하지 않고 있다. 기사단의 침묵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기사는 기사를 감지할 수 있다고 들었어.”

“이래도 말인가?”


페이가 앞서 걸으며 제 얼굴을 매만졌다. 뼈와 근육이 일그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가 돌아보았을 때, 페이의 얼굴은 전혀 다른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런 것도 가능하지.”


페이가 나리아의 손을 잡아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댔다. 나리아가 겁에 질린 얼굴로 물러나려 했다.


“기사가 기사를 감지하는 것은 몸 때문일세. 심장 소리나 숨결, 기사의 몸이 내는 땀의 냄새라든지. 따라서, 장기 일부를 정지시키면 기척은 죽일 수 있지.”


페이의 몸에서 느껴지는 맥박은 조용했다. 심장 두 개가 요동치는 몸이 아니었다. 나리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페이의 몸 이곳저곳에 손을 댔다. 루미스가 알려준 장기의 위치를 떠올려 건드렸지만, 맥박은 조용했고 단 하나만 울렸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오직 헌진뿐일세. 몇십 년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지. 몇 번은 죽을 뻔도 했네. 자기 심장을 멈추는 법을 누가 나서서 배우려 하겠는가?”


페이는 나리아의 손을 잡은 채 싱긋 미소지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유롭고 천진했다. 그러나 나리아에게는 기괴하게 보일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일단 이건 개인적으로 발각되지 않은 방법이고, 이 집단이 아직도 무사한 이유는, 흐음, 제국이 그만큼 나태해졌다는 말일까?”


페이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길을 나아가면서 페이가 다시 얼굴을 매만졌다. 다시 한동안 끔찍한 소리가 들린 후, 페이의 얼굴은 나리아가 알던 얼굴로 돌아왔다.


“도착했네.”


페이가 나리아의 손을 놓고 거대한 나무 하나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배가 있었다.


아직 건조하고 있는 배였다. 나리아는 페이에게서 집중력을 돌리자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광경을 느낄 수 있었다.


톱이나 도끼를 든 제법 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였다. 그들은 목재를 운반하거나 다듬고 있었다. 모두가 바빠 보였는데 그 안에는 나리아 또래의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아이들도 자잘한 물건이나 음식물을 나르며 일하고 있었다.


부산스럽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활기였다. 내부가 훤히 드러난 배 내부도 사람들이 가득해 저마다의 일을 하고 있었다.


“배.”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나리아를 돌아보며 페이가 웃었다.


“저걸 배라고 부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또 없었는데, 역시 그대는 말이 통하는군그래.”


그 거대함이 불러일으킨 고대의 환상에 나리아는 잠시 몸을 떨었다.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어렴풋한 것이 이토록 선명하게 현실에 드러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페이는 흐뭇한 얼굴로 말없이 나리아에게 시간을 주었다.


페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페이는 노인네처럼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들 사이로 누군가가 바삐 다가왔다.


“페이긴 경, 잠시 괜찮으십니까?”

“페이라고 부르라 하지 않았나.”


험상궂게 생긴 노인이었다. 그는 손에 종이를 들고 있었는데, 제법 정교하게 그려진 설계도였다. 나리아를 보고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페이에게 설계도를 내밀었다.


“미안합니다, 페이 경. 중심축에 연결된 이 부분 말입니다. 멍청한 것들이 당최 이해를 못 하더군요.”

“어디 보게. 용골 말인가? 아니, 돛대로군.”


노인과 페이는 한동안 설계도를 붙잡고 씨름했다. 생소한 단어들이 그들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나리아는 그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물 위를 움직이는 이동수단이 지금은 숲 한가운데에서 건설되고 있다. 나리아는 처음에 옛이야기에나 나오는 방주를 떠올렸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과연 방주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배의 본질은 이동수단에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은 이제 푸르지 않다. 검은 물은 사람을 거부한다. 나무 따위는 우습게 녹일 것이고 사람 또한 뼈밖에 남지 않는다. 바다라는 물의 집합체를 뒤덮은 강한 산성은 그 아래를 보호하듯 공격적이다. 나리아는 배가 그 위에 뜨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었다.


페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배는 방주라기보다는 어린애가 떼를 쓰는 듯한 발악처럼 보였다.


나리아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이 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은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되는 법이다.


“감상은 어떠한가?”


페이가 논의를 마치고 다가왔다. 나리아는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말했다.


“불합리해.”

“어떤 점이 말이지?”

“검은 물은 건널 수 없다는 게 첫째. 도시 밖으로 이 배를 옮길 방법이 없다는 게 둘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나리아가 페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페이는 계속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그 모두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행하고 있는 너.”

“정확하네.”


페이가 감탄했다는 듯 팔을 벌렸다. 나리아의 지적에 발끈하는 기색은 없었다.


“갑판 위로 올라가 보겠나? 제법 상쾌한 곳이라네.”


손짓하는 페이의 모습은, 비밀기지를 친구에게 알려주는 꼬맹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리아는 헌진이 무사히 따라오고 있기를 바랐다.


페이의 정신이 의심스러웠다. 그도 미르돈처럼 어딘가 뒤틀렸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나눈 대화에서는 그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는 그저 기묘함을 사랑하는 궤변가처럼 보였다.


페이는 스스로 반골이라고 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이것은, 그저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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