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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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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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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3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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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95. 2구역 (3)

DUMMY

헌진은 카페를 나서자마자 뒤를 따르는 기척을 느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거리는 멀었으나 다수의 기척이었다. 거슬린 헌진이 그들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자 법우가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게 살기를 내뿜지 말게. 저 아이들은 아마 숨도 쉬지 못하고 있겠지.”

“병사는 아니군요. 무엇입니까.”

“기사 후보생들이네. 기사단 양성소의 해체가 결정된 후, 각 구역의 제국군으로 뿔뿔이 흩어지려는 아이들 몇을 간신히 거두었지.”

“······사병을 기르신 겁니까.”


헌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법우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하든지 간에, 사적인 무력집단은 분란의 기초였다. 제국의 의지가 아닌 개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병력은 방심할 수가 없었다. 헌진은 법우의 의중을 아직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고 저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미지수였다.


“사병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소속은 제국군이지만, 나를 따르고 있으니 말이야.”

“제가 아는 한 무장장께서는 평생 대외적으로 나서는 법이 없었고 권력이나 무력 또한 탐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움직인 겁니까.”


나리아가 수레에 오르며 두 사람에게 귀를 기울였다. 헌진은 한 손으로 수레를 끌면서도 날이 선 기색이었다. 그는 아직도 법우를 적인지 아군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심정적으로는 법우를 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모든 구역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자네 때문이었어.”

“······.”


예상외의 지적에 헌진은 말문이 막혔다.


“자네가 폐하께 칼을 겨누고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했지. 자네의 은밀한 행동력은 잘 알고 있지 않나. 이 도시가 세워지고 숱하게 벌어진 어둠 속 사건들을 내가 모를 것 같은가? 처음에는 기사 몇을 뽑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니 후보생들을 데리고 꾸렸지. 독자적인 수사권, 사건 방지, 즉결 처형 등의 권한을 지닌 기사단 하위부대를 말일세.”


헌진을 경계한 움직임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어느 정도 독자적인 행동권이 부여된 법우라면 취할 만한 조치였다. 헌진은 언뜻 그의 행동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정식으로 황실에 제출할 구상안일 뿐이었네. 그러나, 폐하께서 대원정에서 돌아오고 각 도시가 고립되었을 때, 이변을 직감하지 않은 멍청이는 없었지. 그 결과물이 저들일세. 비상시를 대비한 보험이라고 해야 옳겠군.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지만.”

“기사단의 병기고가 저들에게 해방되었습니까.”

“설마. 기사단 시술을 몇 단계밖에 받지 못한 아이들뿐일세. 그것들을 다룰 만한 능력은 없지.”


인공조명이 곳곳을 비춘 2구역은 쾌적해 보였다. 나리아는 유달리 깨끗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2구역의 모든 환경은 도시의 긍정적인 부분만을 극대화한 것처럼 조성되었다. 주변은 밝았고,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는 깔끔했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허리가 꼿꼿했고 단정했다. 다른 구역에서 흔히 보기 일쑤였던 무질서하고 지저분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리아는 위화감을 느꼈다. 길거리에 늘어선 거대한 건물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 쭉 뻗은 차도로는 아무것도 달리지 않았다. 곳곳에 심어진 나무 아래에서는 흙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규격에 맞춰져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단순히 기사단을 양성하기 위한 구역이라면 불필요한 장식이었다. 나리아는 2구역에는 다른 목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구역을 조성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 적대할 필요가 없네, 헌진.”

“무슨 뜻입니까.”


헌진이 법우의 뒤통수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여차하면 칼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험악한 기세였다.


“자네는 이 도시를 지킨다는 기사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법우의 시선이 언뜻 나리아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리아는 영문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


“도서관의 아이야.”


나리아는 흠칫했다. 출신을 말한 적이 있었나? 카페에서 격하게 토한 탓인지 어쩐지 기억이 애매했다.


“네가 보기에 이 구역이 어떠하냐.”

“어······보기에 좋네요?”

“그래, 그렇겠지.”


법우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리아는 어쩐지 법우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은 인자한 얼굴에 호감을 느꼈지만, 점차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하시려는 일은 전례가 없었어. 자네가 말했듯, 이 도시는 유지되어야만 하지. 도시를 멸해야 한다는 것은 폐하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야. 그렇지 않나, 헌진.”

“······그렇습니다.”

“도시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일세. 자, 도착했네.”


의미심장하지만 잡담에 불과한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 법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도착한 곳은 주변과는 달리 납작한 건물이었다.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긴 장벽이 시야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비교적 낮을 뿐이지 몇 층인가로 이루어진 건물이었기에 위용은 만만찮았다.


“이곳에 짐을 풀게. 뒤를 따르는 아이들은 신경 쓰지 말게나. 어차피 자네를 상대할 만한 아이는 없고, 위협을 가하게 두지도 않을 걸세.”


건물에는 병사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법우에게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으나, 헌진에게는 긴장감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개중에는 가늘게 몸을 떠는 자도 있었다. 기사가 되지 못한 그들에게는 전설로 남아있을 헌진이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도래한 지금, 그들은 경외감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수레를 끌기에도 넉넉한 복도였다. 헌진은 때로는 수레를 들어 올리고 밀기도 하면서 진입했다. 벽이나 바닥을 사정없이 긁어대는 바람에 상처가 남았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 방일세.”


헌진은 법우가 지목한 방에 수레를 내려놓았다. 법우는 곧장 방을 나섰고 헌진이 그 뒤를 따랐다. 나리아도 수레에서 뛰어내리면서 헌진을 따라가려 했다.


“나리아.”


헌진이 나리아를 손을 내밀어 막아섰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짐을 먼저 정리하고 있어라.”

“네? 왜요?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죠? 저도 듣고 싶어요!”

“부탁한다.”


나리아는 불만 섞인 눈으로 헌진을 쏘아보았다. 때때로 헌진이 어린애 취급을 할 때는 일말의 배신감마저 느끼고는 했다. 그러나 나리아는 그 이상을 말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나리아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은 확고했고, 그것을 비틀 만한 힘은 자신에게 없었다.


“미안하구나, 아이야. 헌진을 잠시만 빌리자꾸나.”

“흥, 마음대로 하세요. 연체할 생각일랑 말고요.”


나리아가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헌진은 얼마간 나리아를 쳐다보다가 방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법우가 흐뭇한 미소로 말했다.


“쓸 만한 아이를 찾았군.”


법우의 평가는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헌진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건물의 구조와 나리아의 기척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겼다. 헌진이 의식하고 있는 이상 누구든지 이곳에 들어서면 감지할 수 있다. 헌진의 허가 없이 나리아에게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어른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할까.”


집무실로 보이는 곳에 들어선 법우가 넉넉한 의자에 앉았다. 깍지 낀 손으로 입가를 가린 법우가 헌진을 응시했다.


‘여전히 빌어먹을 늙은이로군.’


헌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법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옛날부터 그의 속은 알 수 없었다. 도시를 위해 헌신하기로는 여느 기사에 못지않았으나, 헌진이 황제에게 충성을 바칠 때부터 그는 음습한 구석이 있었다. 기사단의 시술을 창안한 것이 법우였고, 기사단의 머릿속에 헌진이 알지도 못한 장치가 뇌에 심어졌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했다.


황제가 도시 밖으로 나가려는 의지의 발현이라면, 법우는 도시에 움츠리려는 정체의 상징이었다. 그는 항상 대원정은 이른 시기라며 반대해왔다. 기림 제국은 안정되지 않았고 인류는 덜 억제되었다고도 했다. 헌진은 그의 말에는 늘 동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한 통제를 주장하는 그의 말에는 어딘가 인류의 성장을 저해하는 의도를 엿보았다. 누구보다 기사단에 깊이 연관된 자였으나, 때문에 헌진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임무를 완수했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의 아이를 발견했고, 도시를 멸하려는 폐하를 저지했어. 폐하께서 황궁에 들어서고 오랫동안 침묵한 이유는 자네에게 있지 않겠나. 도시를 대표해서 치하하는 바일세.”

“······.”


헌진에게 치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뿐이다. 헌진은 황제의 등을 베었지만 기림 제국을 베지는 않았다. 헌진은 충성과 배신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는 아직 도시에 바친 자신의 영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란 무엇입니까.”


화제를 돌리는 헌진에게 법우는 눈썹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헌진의 의도에 따랐다.


“이 도시의 절반이 오염돼있네.”

“독기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제염하면 그만이지. 2구역에 집약된 기술로 제염하지 못할 것도 아니니 말일세. 그러나 이곳에서 벌어지는 오염의 원인은 보다 물질적인 것일세.”


헌진은 팔짱을 끼고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존대를 잊지는 않았으나 옛 기사단장의 위엄은 무장장에게 손색이 없다. 법우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카얄란이라고 들어보았나.”


예상하지 못한 이름의 등장에, 헌진은 표정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


나리아는 짐을 풀다 말고 자리에 드러누워 아무 소리나 내질렀다. 넓은 방은 익숙하지 않았다. 법우와 헌진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지 상상하며 시간을 죽였다.


‘엿들어볼까?’


나리아는 귓가에 꽂은 통신기를 매만졌다. 헌진이 송신기능을 꺼두었을지도 모른다. 버튼을 눌러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버튼을 누른다는 행위 자체가 헌진에게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나리아는 망설였다.


나리아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헌진이라면 숨김없이 말해줄 것이다. 그렇게 믿는 마음이 더 컸다.


“1구역으로 갈 방법을 찾고, 3구역의 탑을 고칠 방법을 찾고, 헌진의 철혈을 고칠 방법을 찾고······.”


나리아는 손가락을 꼽으며 희망 사항을 열거해보았다. 꼽아보자니 끝도 없이 나왔다. 황제를 어떻게든 움직여 도시를 복구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아직은 요원한 바였지만 새삼 1구역, 황궁까지 한 관문을 앞둔 시점에서는 되새길 만했다.


‘일단은 할 일을 찾아봐야겠지.’


언제부턴가 나리아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생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소녀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기로 했다. 헌진이라면 자신이 어디에 있든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문을 여는 손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작가의말


현생때문에 내일은 쉴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과 쓰기를 반복하다보니 늘 하루하루가 빠듯하네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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