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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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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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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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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2. 폐기물 (7)

DUMMY

말하자면 도시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지상의 도시와는 달랐다. 건물은 지상의 도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였고,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삶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잊힌 옛 도시의 흔적이었으며, 지상의 도시가 꿈꾸는, 그러나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이었다. 헌진은 낯설었지만, 이 도시의 모습을 알 것만 같았다. 도시를 보는 황제의 눈빛에 맺힌 과거의 상이 이러한 모습이었으리라.


다나는 도시를 바라보는 헌진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의 반응을 관찰하려는 눈빛이었다.


“이것이 도시가 갖추어야 하는 본래의 모습이죠.”


헌진은 무릎을 꿇고 옛 도시의 땅을 손으로 쓸었다.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늠하지 못할 세월이 느껴졌다.


이곳이 도시의 원본이라면, 지상은 이곳의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진은 이해했고, 그리고 영문 모를 감정을 느꼈다. 자신의 일생, 기사단의 존재 목적이 그저 가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어떠한 농락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너희는 이곳의 관리자로군.”

“관리는 도시가 스스로 해내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도시가 안배한 부산물에 불과하죠. 도시는 스스로 기능하고, 우리는 시스템에 속해있을 뿐이에요. 당신을 포함해서요.”

“······그렇군, 폐기물이란.”

“음,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아주 조금······복합적이에요.”


다나는 말을 고르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작은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말이었다.


“이 도시의 이치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폐기물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도시의 이치에서 벗어났으면서, 이 도시에 간섭하고 질서를 거스르려는 자들을 폐기물이라고 부르죠. 비유하자면, 그래요, 스스로 멈추거나 반대로 돌려고 하는 톱니바퀴라고나 할까요?”


헌진은 황제를 베려 했다. 황제가 주도하려던 질서는 도시의 백지화로 귀결되었다. 헌진은 도시를 지키기 위해 황제를 베어야 했다.


그것이 폐기물의 자격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헌진은 그 오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헌진이 느닷없이 다나에게 칼을 휘둘렀다.


“으악!”


칼은 역시나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다. 단숨에 터진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고, 다나는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그것 좀 그만해요! 저는 디나처럼 전투용으로 설계되지 않았다고요!”

“도시의 원본이 어쨌단 말이냐.”


헌진의 칼은 여전히 다나를 겨누고 있었다.


“내가 지켜야 할 도시는 변하지 않는다. 이곳이 아니라 저곳이다. 네놈들이 말하는 근본이 무엇이든 괘념치 않는다.”

“피차 그렇게 태어난 사람끼리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태어났다고.”

“그래요! 당신은 알고 있었을 텐데요, 헌진!”


다나는 헌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한 의문보다 먼저, 헌진은 문득 황제가 건넸던 옛말을 떠올렸다.


‘그 도시가 몇 번째 도시일 것 같으냐. 너는 또 몇 번째 헌진일 것 같으냐.’

‘너만은 알고 있었을 거야, 헌진.’


헌진이 부정했던 말이었다. 헌진은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의 삶은 황제로부터 비롯되었고, 도시에 바치기로 되어있는 것이다. 헌진에게 앎이 있다면 오직 그것뿐이었다.


“모르겠어요? 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거죠? 애초에 당신이 폐기물이라니!”

“설명해라.”

“그럼 그 괴상한 칼이나 먼저 집어치우시든가요!”


다나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고는 헌진을 노려보았다. 이내 따라오라는 손짓도 없이 화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헌진은 잠시 갈등했다. 이곳에 도시의 비밀이 있다면 알아야 했다. 그러나 시간 낭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헌진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대로 홀로 출구를 찾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그러나 영문 모를 부름이 들려왔다. 헌진은 발길을 잡아끄는 부름과 붙잡으려는 의지 사이에서 망설였다. 알 필요가 없지만, 그것은 근원적 물음을 품은 유혹이기도 했다.


발길은 이내 다나의 뒤를 따라갔다. 이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알 수 있다면 알아두고 싶었다. 헌진이 끝내 이해하지 못할 황제의 어느 부분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


다나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눈길 한번 안 주고 복잡한 길목을 헤쳐나갔다. 헌진은 이 고대의 도시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정신을 다잡았다. 이곳은 헌진이 속한 도시가 아니었다.


“······저희들의 역할은 폐기물들을 분석해서 오차율을 수정하는 거죠.”


다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화를 내는 듯했지만, 수다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지하에서 홀로 지낸 세월이 긴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헌진은 문득 과연 이 소년이 사람에 가까울지 기계에 가까울지 궁금했다.


“이번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서 애먹고 있는 참이에요. 그 원인은 아무래도······.”


다나가 헌진을 힐끔 돌아보고는 말을 끊었다.


“그래요. 헌진 당신에게 벌어진 일도 그 때문일지도 모르죠.”


다나의 발걸음이 이윽고 한 건물 앞에 멈추었다. 기이하게 생긴 건물이었다. 사다리와 닮았지만 두 축이 서로 꼬이며 지상을 찌를 듯 솟아난 건물은 효율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보면 당신도 이해할 거예요.”


다나의 손짓에 문이 열렸고, 헌진은 곧 이러한 형태는 어떠한 상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건물은 보관소였다. 헌진은 밀폐된 공간에 즐비한 작은 원통을 보았다. 투명한 유리로 뒤덮인 공간 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했다. 그러한 원통이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무수했다.


“준비됐을지는 모르겠네요. 자원은 유한하고, 회수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한 명쯤이라면?”


다나가 벽에 다가가 손가락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헌진은 그 행위를 이해했다. 메인프레임을 조작하는 모습은 황제가 황궁에서 줄곧 보여주던 모습이었다.


“보세요.”


손짓을 멈춘 다나가 헌진의 발아래를 가리켰다. 헌진은 시선을 내렸고,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 어쩌면 그것이 도시의 정체일지도 몰랐다.


바닥에 깔린 유리 아래에는 헌진의 몸이 있었다. 헌진은 그 몸을 보고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름 아닌 자신의 몸이었다. 얼굴에서 몸의 윤곽까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몸이었다.


“나인가.”

“그래요, 당신이죠.”


헌진이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댔다. 유리창 너머에 있는 헌진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것 역시, 나의 원본이라고 말할 셈이냐.”

“아뇨? 당신의 원본이라고 할 만한 건, 음, 저기 저쯤에 있을 걸요?”


다나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나열한 캡슐이 있을 뿐이었다. 헌진은 다나가 그중에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또 몇 번째 헌진일 것 같으냐.’


헌진의 머릿속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몇 번째. 헌진은 스스로 묻고 싶을 따름이었다. 도시가 복제됐듯, 자신 역시 복제된 것인가.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나는 제조된 삶에 불과할 따름이란 말인가.


헌진이 침묵하자 다나가 그의 곁을 맴돌았다.


“기사단은 특히 중요하게 설정된 인력이죠. 유전자의 순수성을 유지보수하는 게 주된 업무라고 해도 될 정도예요. 알다시피 지상의 도시 바깥에는 괴물들이 들끓고, 지난 역사에서 몇 번이나 습격당해 궤멸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헌진, 당신은 기사단장으로서 특히 중요했어요.”


다각도에서 헌진을 살피는 눈빛이 사뭇 날카로웠다.


“무슨 사고가 벌어졌는지 당신의 유전자 일부가 변형을 일으켰지만, 임무 수행에는 지장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이러한 형태로 나타났군요.”

“······나를 아는 척 굴지 마라.”

“하지만 진짜로 아는데요?”


헌진의 손이 유리창을 긁었다. 유리를 긁어내고 또 다른 몸에 닿으려는 듯한 손짓이었다.


“당신뿐만이 아니에요. 저는 기사단에 속한 모든 자를 잘 알고 있어요. 이름을 말해볼까요? 아니면, 그들의 특징이나 버릇, 성격 같은 걸 말해볼까요?”

“그들은 독립된 개체다. 훈련을 견뎌내고 기사단 시술을 견뎌내야만 기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지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란 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설정된 거라니까요?”


다나가 팔짱을 꼈다. 그 목소리에는 인내심이 묻어나왔다. 소년은 어디까지나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몸, 시술을 견뎌낼 수 있는 몸, 기사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경향, 그런 게 애초부터 설정돼있던 거예요. 도시를 유지하는 계획이 본래 그런 거란 말이죠. 그건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어요.”

“기사단에는 숱한 지원자가 있었다. 실패가 예정되었다면 그들은 어째서 지원을 했겠느냐.”

“그야 당연히 경쟁이 있어야 발달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솎아내야 잘 자라는 풀뿌리가 있는 법이죠. 개중에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지원자도 있긴 했지만, 뭐, 그 정도는 용납 가능한 오차율이랄까,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개량할 여지가 없어서 그렇게 신경 쓰는 유전자도 아니에요.”

“기사단을 우롱할 셈이냐.”

“듣기 안 좋네요.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데.”


헌진은 급격한 피로를 느꼈다. 다나가 말하는 것은 진실이었다. 이 불가사의한 공간에 들어섰을 때부터 헌진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믿지 않기에는 이미 믿을 수밖에 없는 광경들이었다. 이제까지 쌓아 올린 자신의 세계관을 비틀어놓는 말들 앞에서, 헌진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삶이 본래 그러한 것이라는 뜻이냐.”

“그럼요. 당신뿐만이 아니에요. 저도, 디나도, 도시의 모든 것들은 인류를 부흥시킬 프로그램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다나가 양팔을 벌리며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신이 난 것 같았지만, 광신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지상에서 도시를 테스트하고, 다시 회수하고, 개량과 자연의 변화를 예측해 다시 도시를 펼치죠. 까마득한 세월 동안 반복되었지만, 진전은 있었죠. 이번 도시는 유례없는 대기록을 세웠어요. 이만큼 길게 도시가 유지된 적이 없거든요. 처음에는 거의 즉시 전멸했는데 말이에요.”

“······황제 폐하는.”


헌진이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황제 역시 이들 관리자 중 일부인가. 그렇다면 황제는 그 모두를 알면서도 도시를 꾸리고 기사단을 꾸렸단 말인가. 세상의 끝에서 무너진 이유는 오로지 이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권태감에 불과했을 뿐이란 말인가. 헌진은 황제를 믿고 싶었다. 그것은, 황제 역시 도시를 위해 삶을 바치리라는 믿음이었다.


“황제요? 아하. 가장 통제력이 높은 사회체제를 꾸려야 할 필요가 있었죠. 그 유닛은 그렇게 선별된 존재예요. 가장 자유롭지만, 가장 본래의 인류에 가까우므로, 자유로울 수 없는 복잡한 도구죠.”

“······도구라고.”


그때 탑 안에서 맑은 종소리가 났다. 다나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벽에 다가가 메인프레임을 들여다보았다. 헌진은 멍한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은, 그 어느 사실보다도 근간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시간이 다 됐네요. 당신의 분석은 끝났어요. 다음 도시에서 활용될 자료죠. 이런 오차율이 반복될 일은 없을 거예요. 어차피 이번 도시의 수명은 얼마 남지도 않았고······.”


다나가 한껏 미소 지으며 헌진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 돌아가실래요? 남은 시간 잘 보내세요.”


헌진은 그 미소가 비웃음처럼 보였다.


작가의말


월요일은 부득이하게 쉬었습니다. 하루의 루틴 중 글쓰기에 들이는 시간이 제법 되다보니 피로가 누적되는군요. 연재가 계속되니 삐끗하기 마련입니다. 버릇이 되면 안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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