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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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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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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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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8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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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도시의 배 (3)

DUMMY

갑판에 오르자 제법 세찬 바람이 불었다. 자그마한 언덕 위에 세워진 배에서는 4구역이 내려다보였다. 나리아는 저 아래에서 사격훈련을 벌이는 모습, 아마도 이곳 인부들의 거처일 조그마한 마을을 보았다.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면 상당한 숫자였다.


“아무리 징그럽고 끔찍한 것일지라도, 멀리서 보면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뿐이라네. 그렇지 않나?”

“저 사람들은 어디서 데려온 거야?”

“그대는 낭만이라고는 모르는군.”


페이가 투덜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낭만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나리아야말로 투덜거리고 싶은 말을 억눌렀다.


“기림 제국의 범죄자들일세. 내가 탈옥시켰지.”

“범죄자라니?”

“사상범이라고 불러야겠군. 이를테면 저기 있는 세하라.”


페이가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사람 한 명을 가리켰다. 피부색이 짙은 여자였다. 여자는 눈가에 손을 올리고 배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는데, 그 할아버지가 주변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했다네.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역사지. 자유와 의심이란 개념을 아이들에게 가르쳤어. 그 죄로 세하라, 저 아이까지 함께 투옥됐네. 내가 탈옥시켰을 때 할아버지는 아랫구역으로 추방당한 뒤였지.”


나리아는 7구역에서 벌어졌던 처형식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윗구역에서 후송된 죄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일이 과거에도 몇 번을 벌어졌을 테니, 드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나와 얘기를 나누었던 노인네는 시암이라고 하는데, 글쎄 성을 점거하려 했지 뭔가. 이유가 터무니없어 나도 모르게 웃었다네. 듣자 하니, 집정관은 태어날 때부터 집정관일 리가 없는데 자기라고 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는 게야. 우습지 않은가? 머리에서 나사 하나가 빠진 게 틀림없어!”


페이가 낄낄댔다. 나리아는 웃지 못했다. 웃음이 점차 사그라진 페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사람들뿐일세. 4구역의 목적은 생활. 그런데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생활 밖의 무언가를 추구했지. 나는 그들을 두고 볼 수 없었네. 그래서 이곳으로 데려왔지. 구역 각지에서 긁어모은 반역의 덩어리 같은 것일세.”


페이가 뱃머리에 발을 올렸다. 사람들을 굽어보는 모습은 얼핏 자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리아는 따질 수밖에 없었다. 페이는 지금 민간인을 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게다가 화약무기를 도입했다. 더 쉽고 더 많은 죽음을 몰고 올 셈이다. 이들의 억울함은 안다. 같은 돌연변이로서, 7구역에서 마린을 지지했고 6구역에서 루미스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들을 구하는 것과 전쟁에 내세우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였다.


“독립이 필요했다면, 이만한 네 능력으로 이 사람들을 그냥 조용히 살게 할 수 있었을 거야. 기사의 권력이라면 아랫구역으로 피신시키는 방법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을 테고. 그런데 왜 무기를 준비하는 거야? 전쟁을 벌여서 네가 구한 이 사람들을 다시 모조리 죽게 만들 셈이야?”

“나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반역자였다네.”

“······뭐?”


페이가 난간에 팔을 걸치고 나리아를 돌아보았다. 하늘 위에는 어느덧 먹구름이 꼈다. 희미한 햇살이 간신히 페이를 비추고 있었다.


“도시 제국은 나 같은 사람을 돌연변이라고 부르지. 이 도시에 의문을 품고, 이 도시가 규정한 사람됨에 질문을 던지며, 이 도시를 둘러싼 장벽 너머를 궁금해하는 우리 말일세. 그것은 이 도시에서는 곧 반란이라네.”

“어르신의 반란······.”

“그래. 헌진에게 들었나 보군.”


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 도시에 구역의 구분이 희미하던 시절이라네. 반란은 실패했지. 우리는 헌진을 비롯한 첫 세대 기사단에게 유린당했어. 기계의 반란에서 살아남은, 몇 안 남은 기계도 파괴당했고, 우리는 몰려났지. 나와 함께 했던 동지는 모두 죽거나 흩어졌다네. 나는 사로잡혀서 황제에게 기사로 임명 당했어. 웃으면서 기사가 되었지. 기사가 되는 순간,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도 모르고 말일세.”


페이가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그것은 기사가 되는 과정에서 뇌에 가해지는 시술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나를 알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네. 극복하기까지는 또 수십 년이 걸렸고. 그동안 나는 여러 차례 대원정에 참여했고, 새로운 기사를 길러냈으며, 꿈에도 그리던 장벽 바깥을 보고 왔지. 온갖 괴물들과 죽음의 땅, 세상의 끝을 보았다네. 그래, 저 장벽 너머에는 오직 어둠뿐이었어.”


페이의 말은 차분했다. 그러나 나리아는 그 속에서 끝 모를 깊이를 엿보았다. 나리아의 삶을 곱해도 가늠하기 어려운 세월이 저 자그마한 몸에서 배어 나왔다.


“그러면 왜······다시 반역을 꿈꾸는 거야?”

“어긋나기에 반이고, 거스르기에 역일세.”


배를 급히 올라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나리아는 페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대는, 무엇으로 그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

“나는,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오직 하나뿐이라고 정했네. 그것이 반역이라네.”


계단을 급히 뛰어온 사람은 배 아래에서도 본 여자였다.


“무엇이 그리 급한가, 세하라.”


세하라는 바삐 걸어오며 나리아를 힐끗 보았다. 구릿빛 피부에 검은 눈동자가 유달리 선명했다. 나리아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페이 경, 실례합니다. 숲지기들이 외곽에서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올려왔습니다.”

“헌진이겠군. 내버려 두게. 우리를 위협할 자는 아닐세. 적어도 이 손님이 여기에 있는 한은 말이야.”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흐음, 그럴 수도 있지.”


세하라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따라간 나리아는 움찔했다. 짧은 칼이 그녀의 허리에 매달려있었다.


그 순간 페이가 나리아와 세하라 곁에 끼어들었다. 페이의 손이 세하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뽑히려던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진정하게, 세하라. 자네의 칼은 지금 이 소녀를 베기 위해 벼려온 게 아닐세.”

“하지만 페이 경, 지금까지 이러신 적 없었습니다. 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 베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님을 맞이하는 건 지금까지 그랬듯 내 역할이지 않나. 그러니 믿어주게. 이들이 적이 된다면,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니.”

“그러나······.”

“세하라.”


페이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말투였다. 세하라는 페이와 나리아를 번갈아 보다가 손에서 힘을 뺐다.


“페이 경, 저희는 언제든지 준비됐습니다.”

“믿어 의심치 않네.”


페이의 미소에 세하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물러나기 전에 나리아를 잠시 노려보았다. 나리아는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세하라와 눈을 마주쳤다.


“미안하네. 그대를 놀라게 했군. 뭐, 말했다시피 성미가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네.”


페이가 먼 곳을 돌아보았다. 숲의 한가운데였다. 나리아는 페이가 무엇을 보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헌진이 있을 것이다. 페이가 난간을 손으로 힘껏 붙잡고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게 증거였다.


“자, 이제 돌아갈 시간일세. 모험은 끝났고, 놀다 지친 아이는 부모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지.”


페이가 배에서 내려가는 계단으로 나리아를 안내했다. 나리아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준 거야? 그리고, 내가 도서관 출신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건 한 가지 이유로 대답해줄 수 있겠군.”


페이가 손가락으로 나리아의 모자를 슬쩍 들추었다. 나리아는 놀란 발걸음을 물리지도 못했다. 페이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뿔뿔이 흩어진, 지금은 흙이 되었을 내 옛 동료 중에 도서관을 설립한 자가 있었다네. 그대의 머리카락을 보고 알았지. 그대는 그대가 얼마나 귀한지 알아야 해.”


나리아는 때때로 페이가 자상한 미소를 짓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친구의 먼 후예를 향해 짓는 미소였다.


“그 친구도 자네처럼 당돌하고, 아름다웠어.”

“그 사람은······.”

“서둘지 말게, 시간은 많다네. 적어도 그대에게는. 내가 모든 걸 알려주지 않아도, 그대의 여행이 계속된다면 싫어도 알게 될 거야.”


종소리가 울렸다. 멀리서는 도시에서, 가까이에서는 배 아래에서였다. 그것이 신호인양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모여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준비했다.


“자, 가세.”


배에서 내려와 숲 외곽으로 나아가는 동안, 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완곡한 거절로 보여 나리아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도면을 들고 질문을 던지러 오는 사람이나 자잘한 보고를 올리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페이는 걸어가면서도 그들의 말에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나리아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일종의 기시감을 느꼈다. 먼 기억이었다. 아직 도서관이 건재하던 시절, 간신히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나리아에게 남은 기억이었다. 노인들에게 몰려들어 세상 만물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결코 선명하다고 할 수 없는, 흐릿하기만 한 기억이다. 그러나 덕분에 나리아에게는 페이를 둘러싼 사람들이 낯설지 않았다.


“자, 여기까지일세. 이 이상은 아슬아슬하군.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간다면 헌진을 공격하고 말걸세.”

“······머릿속에 든 칩을 빼내면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어.”

“안 될 말이지. 솔직히 나는 황제의 의지에 저항하면서 기분이 좋거든. 변태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일세. 그리고 무엇보다, 헌진을 향한 내 적의가 이 칩 때문이 아니라면 자네들도 곤란하지 않겠나?”


페이는 어르신의 반란이 초대 기사단에게 진압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헌진은 최초의 기사다. 페이에게 심어진 증오는 단순히 황제의 의지 때문만이 아닐 수 있다.


“저항하는 것이 내가 갖춘 사람의 꼴일세. 그러니 나는 불만 없네. 이해해주게.”

“······알았어.”


나리아는 마지못해 수긍하고 페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갔다. 얼마간 걸어가다 뒤돌아보았을 때, 페이는 장난스럽게 소매를 흔들어주었다. 다시 걸어가다 뒤돌아보았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한데 모여 왁자지껄 식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리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헌진은 한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나뭇잎 색깔로 위장한 몇몇 사람들이 나무 위에서 헌진을 경계하고 있었다. 일부는 활을 빼 들고 그를 겨누고 있었다.


세하라가 말한 숲지기가 그들을 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리아는 그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듣고 있었나요?”


눈을 감고 있던 헌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듣고 있었다.”


나리아는 잠시 헌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먼 조상의 동료들이 헌진의 지휘 아래 살해당한 역사가 분명히 존재한다. 당시에는 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가 과거일 뿐이라면 사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헌진은 담담하게 나리아의 시선을 받아주었다. 그는 도망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나리아의 마음에 들었다. 지나치게 긴 기사의 세월은 지금의 헌진과 그때의 헌진을 다르게 했다. 지금 헌진은, 과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묻기 위해 황제에게 나아가고 있다.


“생각이 많겠구나.”

“네, 너무나도요.”


헌진의 말에 나리아는 피곤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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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89. 탑 (5) 21.06.15 24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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