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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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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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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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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94. 2구역 (2)

DUMMY

한 노인이 카페에 들어온 것은 나리아가 세 번째 주문을 마쳤을 때였다. 노인은 나리아와 헌진이 있는 테이블로 똑바로 걸어왔다. 앉아있던 사람들이나 종업원이 그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었다. 노인은 일일이 마주 인사를 주고받았다. 헌진은 노인이 카페에 들어섰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나리아는 헌진의 시선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노인이었다. 지팡이를 짚으면서 다가왔는데 필요 없을 만큼 정정한 걸음걸이였다. 나리아는 긴 수염만큼이나 반들거리는 옷감을 보았다. 아무래도 이 구역의 건물이나 옷은 저렇게 반들거리는 재료로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나리아는 얼굴이 비칠 만큼 매끈한 테이블을 보면서 생각했다.


지나칠 줄 알았던 노인이 나리아 앞에 멈추었다. 나리아는 도넛 한 개를 입에 욱여넣으면서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노인은 잠시 나리아를 들여다보다가 헌진을 향해 말했다.


“옆에 앉아도 되겠나?”


헌진은 커피잔을 기울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대뜸 나리아의 옆에 앉았다. 얼결에 밀려난 나리아는 입가를 우물거리며 도끼눈을 치켜떴다. 헌진의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헌진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말없이 교차하는 와중에, 종업원이 노인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어르신. 주문하시겠어요?”

“가장 쓴 음료로 부탁하네.”


종업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고는 돌아갔다. 나리아는 비좁아진 자리에 눈빛으로 헌진에게 항의했다. 헌진은 빈 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입니다, 법우 어르신.”

“보고를 듣고 믿지 못했다네. 자네를 보고는 내 눈을 의심했지. 그러나 자네가 확실하군, 헌진.”

“저 또한 그렇습니다. 황궁에 있어야 할 어르신이 어째서 2구역에 있는 겁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자네는 왜 여기에 있나.”


두 사람은 익숙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눈치만 살피던 나리아는 흠칫했다. 헌진과 지인이라면, 기사단일 것이다. 나리아는 더 물러날 곳 없는 구석으로 몸을 움츠렸다.


“기, 기사에요?”

“내가 기사로 보이느냐?”


법우가 나리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느긋해 보이는 주름이 깃든 얼굴이었다. 나리아는 그 미소를 보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얌전히 바닥에 누운 모습에서는 그런 흉흉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반갑네, 꼬마 아가씨. 기사단의 무장장 법우일세.”


법우가 나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리아는 멍청히 설탕 묻은 손을 대충 닦아내고 맞잡았다.


“기사는 아니란 거죠?”

“기사단에 속했지만, 기사는 아닐세. 머릿속에 싸움밖에 들지 않은 어린 것들을 뒤치다꺼리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나? 따라서 나도 대원정에 참여하지 못했지. 도시를 지킬 사람도 필요했으니 말이야.”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헌진은 법우에게 존대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나리아가 알기로는, 헌진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기사단에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 도시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태초의 기사가 존대할 사람이라면 나리아는 오로지 황제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법우는 헌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나이를 묻는 말은 오랜만이구나.”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 어르신이었다.”


헌진이 거드는 말에 나리아는 입을 가렸다. 그 말인즉슨, 법우는 적어도 황제에 버금갈 것이다. 도시를 건설한 사람 중에서 기록이 전해지는 사람은 오직 황제뿐이었다. 그만한 수명을 지닌 자를 나리아는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상 함부로 말을 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때마침 종업원이 다가와 법우에게 커피를 건네주었다. 법우와 헌진 사이에는 잠시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종업원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헌진이 겨우 입을 열었다.


“기사가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지금 2구역에는 자네를 상대할 만한 기사는 없네.”

“그래서 직접 오신 겁니까.”

“그래. 허나 몸 상태를 보아하니, 내가 올 필요조차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


헌진은 법우의 지적에 잠시 입을 다물고는 잔을 들었다.


“2구역은 기사단의 본거지입니다. 새로운 기사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원정 이후, 새로운 기사는 양성되지 않았지. 그나마 있던 후보생들마저 내쫓겨 난 처지일세.”

“기사가 없단 말입니까?”


헌진은 놀란 눈치였다. 2구역에 기사가 없다는 말은, 제국군에 병사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대원정 또는 반란에 대비해 최소한의 기사는 유지해야 했다. 기사가 이제 양성되지 않는다는 말은, 도시 밖으로 내뻗으려는 의지가 꺾였다는 뜻이고, 어떤 용도로든 쓸모가 있을 제국의 가장 큰 무력을 포기했다는 뜻이었다.


“딱 한 명 있긴 하지. 내가 알고 있는 기사단의 마지막 기사일세.”

“알고 있는?”

“1구역,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은 나도 알 수 없네. 모든 통신수단이 끊겼어. 언제부턴가 기사들은 그곳에 들어가고 다시는 나오질 않고 있지. 알베릭이 잠깐 불려 갔다 오기는 했지만, 고얀 놈이 내게는 아무 말도 안 해주더구나.”

“명령만 받고 나온 모양이더군요. 뭔가를 아는 정도까지는 아닐 겁니다.”

“만났나?”

“만났습니다.”

“······죽였나?”


헌진은 잠시 뜸을 들였다. 법우가 묻는 말이 살의에 대해서라면 긍정해야 했고, 행위만을 물었다면 부정해야 옳았다. 그러나 죽이려 했다는 말과 죽였다는 말은 자신에게 있어서 같은 말이었다. 헌진은 침착하게 말을 골라야 했다.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되었네.”


법우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서 멀뚱거리던 나리아는 그제야 진동하던 공기가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원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오로지 풍문으로만 알고 있을 뿐일세. 자네가 황제 폐하를 베었다는 사실 말이지. 그런 자네를 앞에 두고, 나는 어찌해야 하겠나.”

“황제 폐하는 이 도시를 멸하려······.”

“헌진.”


법우가 나지막이 헌진의 말을 막았다. 바닥에 놓여있던 지팡이가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렸다. 오직 헌진을 제외하고는 포착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그 이상은 신중하게 말해야 할 것이야.”

“황제 폐하는 이 도시를 멸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법우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얼마간 말을 잃었다. 나리아는 법우의 눈치를 살피며 앞에 놓여있던 접시를 슬며시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드실래요?”


마지막으로 남은 도넛이었다. 법우는 접시와 나리아를 번갈아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폐하께서는 다음을 준비하시려는 건가.”


헌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법우는 쓴웃음을 짓고는 나리아를 바라보았다. 언뜻 날카로운 눈빛에 나리아는 움찔했다.


법우가 느닷없이 손가락을 나리아에게 내밀었다. 나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다시 슬며시 눈을 떴을 때는, 그의 손가락 앞에 움직이는 대장간이 꿈틀거리며 모여있었다.


“대장간이로구나. 알베릭의 것일 텐데, 어째서 네가 갖고 있느냐.”

“어······빌렸어요.”

“빌렸다? 다른 것도 아닌 소유자에게 종속된 움직이는 대장간을? 훔칠 수도 없고, 빌릴 수도 없는 물건이다.”

“그게, 저기, 그냥 퍼내니까 퍼지던걸요?”

“퍼냈다?”


움직이는 대장간이 법우의 손가락을 휘감으며 흘렀다. 나리아는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되돌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호오.”


액체금속이 법우의 손가락에 고정된 채 조그맣게 움찔거렸다. 아주 사소한 반응에도 법우는 놀란 눈치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헌진도 눈썹을 조금 치켜들었다.


“그렇군, 재능인가.”

“뭐, 뭐에요? 그러는 영감님은 어떻게 그걸 다룰 수 있는 거죠?”

“잊었느냐? 나는 기사단의 무장장이다. 기사단의 모든 물건은 나와 황제 폐하의 손으로 빚어졌지. 내가 다루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액체금속이 흩어져 다시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나리아는 그것들이 자신의 피부와 콧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피부를 찌르고 목을 파고드는 느낌에 나리아는 몸을 떨며 거칠게 기침을 했다.


헌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법우는 한 손만을 내밀어 그를 진정시켰다.


“움직이는 대장간은 기사단이 생각하는 그런 무기가 아니란다. 이 도시의 근간을 세운 기술이지. 정신과 결합한 이 액체는 네가 생각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알베릭은 단지 무기로만 쓰는 모양이다만,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지.”


나리아의 몸에 침입했던 대장간이 기침과 함께 쏟아졌다. 그리고 나리아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몸에서 튀어나온 것은 대장간뿐만이 아니었다. 녹색과 검붉은 색이 얽힌 기괴한 덩어리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안색이 안 좋다 싶더니 독을 머금었구나. 조금 개운해졌느냐.”


나리아는 하염없이 기침했다. 심상찮은 기색에 종업원이 달려왔다. 법우는 대장간을 허공에 퍼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선수를 쳤다.


“아이가 허겁지겁 먹다가 체한 모양일세. 물 한 잔만 가져다주겠나?”


종업원이 나리아가 토한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뒷정리는 종업원의 몫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도로 자리를 떴다.


“너희들은 내가 상상도 못 한 여행을 해온 것 같군.”

“무장장께서도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법우가 품에서 비닐 주머니를 꺼내 나리아의 토사물을 담아냈다. 뒤이어 기묘한 냄새가 나는 액체를 테이블 위에 뿌려댔다. 독기에 반응한 액체가 보글거리면서 끓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대처하기도 힘겹다네. 옛날이 그립긴 하군. 황궁의 첨탑 위에서, 도시는 손바닥보다 훤히 들여다보였지. 지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루미스가 눈을 잃은 뒤에도 이런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군.”


한참을 기침하던 나리아의 호흡이 차츰 가라앉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결 몸이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헌진은 나리아의 안색을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진, 자네가 있으면서도 이런 일을 겪을 정도였단 말인가.”

“짧게 끝나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군. 그러나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겠지. 긴 세월을 살았지만, 불안한 예감을 앞두고는 여전히 초조한 법이로군.”


나리아가 종업원이 가져온 물을 황급히 들이마셨다. 기다렸다는 듯 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나누도록 하지. 듣는 귀가 있는 이런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닐 것일세. 그렇지 않나?”

“같은 생각입니다.”


법우가 자리를 뜨자 헌진도 따라나섰다. 나리아가 비틀거리면서도 그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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