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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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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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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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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3. 2구역 (1)

DUMMY

“옛날옛날에 어떤 할아버지가 나뭇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었죠. 그 인형은 인간이 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인형은 인간을 닮고 싶은 나머지 거짓말을 일삼았고, 결국에는 영원히 코가 길어지는 형별을 당해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땔감으로 쓰이는 저주를 받죠. 그래도 인형은 만족했어요. 인형은 마지막에 할아버지를 향해 외치죠.”


나리아는 수레에 드러누운 채 허공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외쳤다.


“보세요, 아버지! 저는 드디어 사람이 되었답니다!”

“사람이 되고 싶은 인형이라, 가능한 일이냐.”

“기계의 시초인데 아무렴요. 인형을 만든 할아버지는 황제의 조상이 아닐까요? 그러면 이상할 것도 없죠.”

“그럴싸하구나.”


헌진은 묵묵히 수레를 끌다가 물었다.


“그래서 그 얘기가 3구역이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저는 몇 시간 동안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설득해야 했어요. 그러다가 그 옛날이야기가 문득 떠오르더라고요. 스스로 사람이라는 선언이 사람의 조건이라면, 그 인형은 말을 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얼마든지 사람일 수 있었죠. 하지만 영겁의 형벌을 받고 나서야 인형은 자신이 사람임을 깨달았어요. 어째서일까요? 결국은 인형인데 말이죠.”


헌진으로서는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형의 이야기는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황제로부터 비롯된 삶으로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사람이라는 것은 종족이나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행위라.”


헌진이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렇다면 인형은 자신의 행위에서 사람됨을 발견했을 것이다. 단편적인 설명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불명이었다. 고통을 받는다고 사람이라면 동물도 사람인 법이다. 헌진은 고통이 사람의 기준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헌진, 심장은 괜찮아요?”


나리아가 수레 밖으로 몸을 내밀어 헌진의 머리 위에 고개를 얹었다. 솜털 같은 무게였지만 헌진은 나리아가 흔들려 떨어질까 봐 수레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괜찮다.”

“저는 기사가 심장 하나를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요. 정말로,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심장 하나는 예비기관일 뿐이다. 독기를 견디게 해줄 뿐이지. 신체기능에는 문제없다.”

“린첸은······괜찮을까요?”


린첸은 기사의 심장 두 개를 모두 소모할 만큼 오랫동안 3구역의 독기에 노출됐다. 헌진의 낡은 심장이 얼마나 린첸을 견디게 해줄지는 모르겠으나, 헌진은 적어도 몇 년은 버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그 전에 3구역을 복원시킬 방법을 찾아보자.”

“······있을까요?”


나리아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럴 만한 권능을 지닌 자는 도시에서 황제가 유일할 것이다. 나리아는 물론이고 헌진도 황제를 움직일 방법을 모른다. 협상할 조건도, 협박할 방법도 없다. 어쩌면 3구역에서 한 약속은 덧없는 거짓말이 될지도 모른다. 나리아는 인형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의 코를 쓰다듬었다.


“방법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곳에 있을 거다. 지금은 쉬어라.”

“네?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헌진이 나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몸은 열을 띠었다. 헌진은 3구역의 열기로 몸이 달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법 서늘한 관문 복도를 걷는 지금도 나리아의 몸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면 됐다.”


헌진이 알기로, 나리아는 잔병치레를 하면서 숨긴 적이 없다. 숨기며 무리해봤자 더 큰 화를 부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해맑았다.


독기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 헌진은 몸의 이상을 깨닫기 전에 무너져내린 기사 몇을 떠올렸다. 독기란 사람마다 작용하는 방식이 달랐고 무너지는 속도도 제각각이었다. 헌진은 나리아에게 아무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했다.


외곽을 돌아 관문으로 직행했다면 일반인도 문제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탑 근처에서 지나치게 머물렀다. 헌진은 2구역에서 의료지원을 받을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보다 2구역 얘기 좀 해봐요. 2구역은 어떤 곳이에요?”


헌진은 나리아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말을 골랐다. 관문의 끝은 코앞이었다. 사실은 말로 쉽게 설명될 곳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순간 나리아는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헌진은 적당한 설명만을 덧붙였다.


“기사들이 양성되는 곳이고, 가장 전통적인 곳이고, 따라서 온전하지. 황제는 2구역을 일컬어 과거의 전시장이라고 했다.”

“전통? 과거의 전시장? 기림 제국이 허락하지 않은 것들뿐인데요?”

“모습만 그럴 뿐이다. 그것이 과거라는 인식도, 옛 모습이라는 인식도 없다. 물에 비친 풍경일 뿐이라고도 했지.”

“좋아요. 뭐, 제 눈으로 확인하죠.”


나리아는 이해를 포기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나리아는 문득 춥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코끝이 시큰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을 맴도는 움직이는 대장간은 아직 기체에 가까운 상태였다. 나리아는 피부를 간질이는 액체금속을 느끼며 그 의도가 궁금했다.


“2구역이다.”


헌진이 열리는 관문을 지나치며 말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나리아는 입을 벌렸다.


2구역은 도시였다. 그러나 도시의 정의를 나리아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서 찾아야만 했다. 눈앞에 보이는 2구역은 현재에 속한 곳이 아니었다.


도시는 그야말로 도시였다. 나리아는 도서관의 기록에서 보았던 인류의 마지막 평화기를 떠올렸다. 반들거리는 건물과 수많은 사람, 인류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 2구역은 그 풍경을 재현한 듯 과거에 충실했다.


“도시······?”

“도시다.”


나리아의 경악에 헌진은 담담하게 수긍했다. 과거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가장 현대적인 구역을 눈앞에 두고 나리아는 아찔했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땅은 지금을 살아가는 제국민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충격이었다.


“누, 누구시오?”


헌진은 관문 앞에 늘어선 경비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리아가 평생 보지 못한 재질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들고 있는 무기는 여전히 날붙이였다. 어쩐지 불안정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리아는 2구역의 광경을 이해하느라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기사다.”


헌진은 뻔뻔하게 병사들에게 고했다. 병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정말로 기사가 맞소?”

“관문을 통과했다. 그것 말고 그 어느 증거가 필요한가.”

“그대 같은 기사가 아랫구역으로 가는 걸 본 적이 없소.”

“네가 태어났을 때조차 나는 기사였다. 아니면, 따로 증명이 필요한가.”


헌진이 등에 짊어진 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움찔하며 몇 발자국 물러났다. 언뜻 모습이 보인 톱니칼은 그들이 알고 있는 무기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토록 괴악스러운 무기를 지닌 자는 확실히 기사들밖에 없었다.


“아, 아니, 하지만 ······.”

“지나가겠다.”


헌진이 수레를 끌고 병사들을 제쳤다. 몇몇이 어설프게 손을 내밀었다가 헌진의 단단한 몸에 부딪히고 튕겨 나갔다.


“기, 기사단에게 보고하겠소!”

“좋을 대로 해라.”


헌진이 태연하게 지나치자 당황한 병사들은 저들끼리 모여 상의하기 시작했다. 한창 넋을 놓고 침 흘릴 듯 도시를 바라보던 나리아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괜찮겠어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기사단이 온전하지 않을 테니 즉각적인 반응은 보일 수 없을 테지. 그것보다 지금은 조금 쉬고 싶구나.”


헌진은 나리아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나리아가 제 뺨을 쓰다듬었다.


“어디 갈 데가 있어요?”


헌진은 곰곰이 옛 기억을 떠올려보고는 말을 꺼냈다.


“지금은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절실하군.”




나리아는 아픈 목덜미를 주물렀다. 도시로 들어서면서 본 건물은 까마득히 높아 고개를 한껏 쳐들어도 부족할 정도였다. 개중에는 황궁에 버금가는 높이를 자랑하는 건물도 있었다. 외부는 세월에 다소 깎이고 긁혔으나 위용은 잃지 않았다. 유리창과 매끈거리는 돌로 뒤덮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명한 듯했다.


정보량을 소화하느라 자그맣게 한숨을 쉰 나리아가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새삼스럽게 헌진의 취향이 떠올랐다. 그는 대체로 금욕적이었고 무언가를 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식사는 오로지 합성식량만으로 섭취했고, 옷이나 놀이처럼 삶의 즐거움을 채워주는 어떠한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기호가 있다면 커피였다. 자연적이지 않은 물질로 조합된 커피일지라도 헌진은 여유가 있다면 마시고는 했다. 그리고 그러한 커피가 지금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우리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헌진이 느긋하게 커피잔을 입가에 댔다. 향기를 음미하듯 눈을 감은 헌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싫다는 거냐.”

“그런 건 아니지만요!”


나리아는 테이블에 나열된 빵 조각 몇 개를 입안에 욱여넣으며 대답했다. 싫을 리는 없었다.


혀가 녹아내릴 것 같은 단맛이 머릿속마저 녹아내릴 듯 황홀하다. 나리아는 이마를 짚고 신음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턱을 움직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이런, 어떻게 이런 맛이······.”


실성한 듯 중얼거리는 나리아를 보고 헌진은 피식 웃었다. 2구역에서 맛보는 커피는 오랜 결핍을 채워주었다. 헌진은 깊게 음미하며 커피를 비우고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낯선 손님들을 보던 종업원이 다가와 잔을 채워주었다.


나리아가 헌진의 행동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문득 접시가 비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리아가 테이블을 두들겼다. 그러자 종업원이 주전자를 다가왔다가 멈칫했다.


“무슨 일이니, 꼬마 손님?”

“어, 저기, 이거······.”


나리아가 조심스럽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종업원은 헌진과 나리아를 번갈아 보고 웃었다.


“그 신호는 음료를 다시 채워달라는 뜻이야. 너는 음료는 손도 대지 않았잖니. 그럴 때는 손을 들고 주문을 해야지.”

“아, 미안해요. 그럼, 이거 더 주시겠어요?”

“어떤 거를 말하는 거니?”

“이 떡 같은, 쫄깃쫄깃한,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거? 전부?”

“네, 네에, 다 주세요.”


나리아는 쩔쩔매며 황급히 주문을 마쳤다. 종업원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되돌아갔다. 나리아는 붉어진 얼굴로 헌진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드물게도 어깨를 조금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헌진!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줘요!”

“경험으로 배우는 법이 아니겠냐. 그건 도넛이라고 부르는 거다. 모양마다 이름이 다르지만, 그것까지는 관심이 없어서 나도 모르겠군.”

“도넛? 도넛이라고 했죠? 오늘 모조리 외워버리면 되죠!”


나리아는 씩씩거리며 대답하고 다시 놓인 접시에 손을 뻗었다. 헌진은 그 광경을 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 외곽에 자리한 카페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고, 그 어느 위협도 없어 보였다. 헌진은 이 짧은 평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바랐다. 창밖에서 느껴지는 어느 시선만을 제외한다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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