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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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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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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마고 (1)

DUMMY

헌진의 복귀 소식은 이틀째 들려오지 않았다. 나리아는 까마득한 지하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베니에게 이끌려 복귀해야 했다. 법우는 밧줄에 매단 병사 몇을 내려보냈지만, 깊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빛이 들어오지 않으니 관측조차 불가능했다. 탐색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법우는 나리아에게 다른 길을 찾아보겠다는 약속만을 남겼다.


나리아는 방구석에서 쪼그려 앉은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상시 열어놓은 통신회선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리아는 때때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베니는 죽을 맛이었다. 나리아가 잡담을 걸지 않으니 주변을 경계하는 임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긴 침묵에 목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리아가 발랄하게 떠들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에 공기마저 무거워지는 듯했다.


기사라는 존재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베니로서는 헌진을 걱정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베니뿐인 것 같았다. 법우조차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저기, 나리아님?”


침묵을 견디지 못한 베니가 말을 걸었을 때도 나리아는 반응하지 않았다. 나리아는 헌진이 실종되고 이틀째가 되는 오늘까지 하는 일이라고는 사각형의 물체를 들여다보거나 멍하니 있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끼니는 거르지 않는다는 점만은 위안이었다.


나리아가 조작하는 물체는 소형 단말기였다. 베니는 기사단이 다루는 물건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일반인은 물론 후보생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물건으로, 기적에 가까운 온갖 기능을 보유한 기계들이라고 했다. 베니는 나리아가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믿기지 않았지만, 나리아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베니는 기사도 아니고, 황궁의 관리자도 아닌 나리아의 정체가 궁금해지고는 했다.


나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은 사건 이후 사흘째가 되는 날 아침이었다. 나리아가 쭈그려 앉은 채 잠이 든 것을 보고 베니도 선 채로 잠이 들었을 때였다.


“좋아!”


불현듯 외친 목소리에 베니는 칼자루를 쥔 채 자세를 낮추었다. 잠에서 깬 것은 그 다음이었다.


“나리아님?”


베니가 입가를 닦으며 눈을 깜빡였다. 나리아는 여느 때처럼 맑은 눈망울로 베니를 보고 있었다. 사흘 내내 몇 시간도 채 잠들지 못했을 텐데. 베니는 자신의 졸음을 감추며 자세를 바로 폈다.


“베니, 따라와 줄 거죠?”

“네?”


나리아는 이미 짐을 챙기고 있었다. 베니는 얼떨떨하면서도 짐을 들어주기 위해 나리아에게 다가갔다.


“어디를 가실 생각입니까?”

“헌진을 찾으러요.”


저번처럼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나리아가 베니를 올려다보았다.


“방에 앉아서 세상을 한탄하는 건 철학자의 준비운동이거나 무용함을 감수하는 우울한 사람들의 일이죠. 저는 충분히 한탄했어요. 그러니 이제는 움직일 때죠.”

“하지만······.”


베니가 헌진과 법우에게 명령받은 사항은 명백했다. 나리아를 호위하는 것. 이 외출이 위험이라면 만류해야 할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법우의 허가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나리아의 행동을 제한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리아는 이 구역에 속하지 않은 자다. 헌진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기사와 동등한 자격이다. 따라서 나리아에게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권리가 있었다.


“베니?”


나리아가 가방을 짊어지고 베니를 돌아보았다.


구역의 서열 관계를 곰곰이 따져보던 베니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나리아의 저 눈을 들여다보면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따라가겠습니다. 제 의무니까요.”


나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어쩌면 베니는 나리아 곁에서 기사답게 행동할 수 있는 순간을 즐기고 있을 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덕분에 나리아는 방을 나서는 걸음을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어요.”


나리아는 옆구리에는 단말기를 끼고, 무거운 가방에 다소 뒤뚱거리면서 나아갔다. 복도에서 마주친 후보생 몇이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나리아는 마주 고개만 꾸벅이고 그들을 지나쳤다.


“헌진이 추락한 그 건물 지하 말이에요. 그렇게 커다란 공간이 어째서 있는 걸까요? 도시의 설계도에서는 그런 공간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딱 봐도 불필요한 공간이잖아요? 오히려 그런 공간 위에 그렇게 커다란 물건을, 도시를 세우는 건 위험한 일이죠. 지반이 약하잖아요. 우연일 수 없어요. 이 도시, 기림은 계획 없이 성립된 곳이 아니거든요. 의도된 공간이라는 뜻이에요. 그것도 설계도에 실리지 않은.”

“······그렇습니까?”


베니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 뜻이 전해지지는 않았는지 나리아의 수다는 열을 띠었다.


“힌트는 있었어요. 설계도에서 일정한 건물들을 추려봤죠. 높이, 면적, 자재, 갖가지 특징별로 분류해보니, 몇 가지 기하학적인 형태가 나왔어요. 거기에 그 건물을 기점으로 정리하면······.”


나리아가 허공에 손짓했다. 나름대로 어떠한 형태를 그리려는 듯 규칙적이었지만 베니는 검술의 궤적보다 복잡한 곡선은 읽지 못했다.


“두 가지 중 하나에요. 소용돌이거나, 나선형이거나.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가 발생해요.”

“그렇군요.”

“입구와 출구가 없는 공간이란 있을 수 없고, 그렇다면 반드시 입구가 있을 텐데, 공간의 형태를 추론한 정도로는 입구를 알아낼 수가 없다는 점이죠. 뭐, 제가 생각한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건 지금은 제외하고 생각했을 때 이야기지만요.”

“그렇다면?”


베니는 맞장구라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나리아는 말을 통해 생각을 정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제가 가상으로 그려낸 형태를 모두 돌아서 입구를 찾아내야 해요.”


베니는 멍하니 끄덕였다. 그러나 뒤늦게 그 말뜻의 광범위함을 이해하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베니의 체력은 문제가 아니었다. 베니는 나리아의 배낭을 대신 짊어져야 할 이유를 그 속에서 찾아냈다.


“상당히 강행군이 될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해요.”

“네?”


베니는 의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니가 저보다 감각이 뛰어나잖아요? 공기의 흐름이라든지,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 같은 거,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런 게 있잖아요?”


베니는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리아가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는 불확실했다. 어쩌면 이러한 행동도 겨우 희망을 유지하려는 발악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야만 한다면, 베니는 응당 따라야만 했다.


“어딜 가는 길이냐.”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마지막으로 복도를 꺾었을 때였다. 나리아는 법우를 올려다보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법우는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고 있었다. 전장에서 정체불명의 힘을 마주하고 대책에 몰두하던 것은 법우도 마찬가지였다. 후보생 다수가 전사하고 헌진마저 실종됐다. 법우는 그런 상황에서 2구역 북부를 점거한 폐기물은 물론이고 그 영문 모를 힘을 상대해야 했다.


“바깥은 위험할 수도 있단다, 꼬마야.”

“헌진을 찾으러 갈 거예요.”

“헌진이라고? 어디 있는 줄 알고?”

“그걸 알아내러 가는 거죠.”


법우가 팔짱을 끼고 나리아와 베니를 번갈아 보았다. 베니는 꼿꼿이 선 채 나리아의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법우는 문득 한숨을 쉬며 자신의 목을 주물렀다.


“얘야, 헌진을 찾는 일은 내게 맡기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헌진을 대신에 너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의무요? 저는 저 자신을 지킬 방법을 알아서 찾을 거예요.”

“그게 베니뿐이란 말이냐.”

“아뇨, 물론 베니뿐만은 아니죠. 저도 저를 지킬 테니까요.”

“흐음.”


법우는 문득 실소를 머금었다. 당돌한 태도였다. 죽음이 몸을 스쳐 지나가는 감각을 알고 있을 텐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 안에 있으면 네 안전은 확실하다. 그러나 밖에 나서는 순간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어.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냐.”


나리아는 이 건물의 복도에서 마주쳤던 소녀를 떠올렸다. 법우가 말한 것처럼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 숱한 후보생과 헌진의 감각마저 속이는 힘이다. 나리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러냐. 그래, 헌진이 왜 너를 데리고 다니는지 알 것 같구나.”


법우는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고 두 사람을 지나쳤다. 베니를 지나칠 때, 법우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부탁하네, 베니.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야. 그리고 가능한 한 은밀하게 움직이게.”

“예, 무장장님.”

“그럼 나는 헌진의 철혈을 조금 손보도록 하지. 그래도 되겠나, 꼬마 아가씨?”

“좋을 대로 하세요.”


법우는 손을 내저으며 헌진의 수레가 보관된 방으로 향했다. 나리아는 잠시 그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앞서나가 대신 문을 열어주려던 베니가 나리아를 돌아보았다.


“나리아님?”

“저는 저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믿지 못하겠어요.”

“무장장님은 누구보다, 음, 기사만큼 이 도시를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요. 저는 도시를 지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중에는, 옳지 않은 방법도 있겠죠.”


베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얼굴을 젓고는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슬쩍 베니를 힐끔거리는 얼굴은 어딘가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안해요, 베니를 이용하려는 제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무슨 말씀을.”


베니는 나리아를 대신해 문을 열었다.


“이용당하는 것이 기사의 본질이고, 따르는 자가 나아가려는 길을 닦는 것이 기사의 역할입니다. 그것이 기사도입니다.”

“그래요?”


나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베니가 헌진과 기사도에 대해 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어딘가 낭만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베니라면 제법 재미있는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헌진의 권위 앞에서 그녀가 입을 놀릴지는 모르겠지만, 붙여볼 만한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는 옳은 길을 골라야만 하겠네요.”

“따르는 자가 걷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믿는 것 역시 기사의 덕목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나리아는 배낭을 고쳐맸다. 우선은 비교적 안전한 구역 남부를 돌아볼 예정이었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그 전에 헌진이 돌아온다면 다행일 테지만, 어쩐지 나리아는 까마득히 먼 길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나리아가 귓가를 두들겼다. 헌진과의 통신은 여전히 열어둔 채였다. 그러나 까마득한 지하에 있을 헌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7구역의 지하수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깊이다. 그 정도 깊이라면 통신이 통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실종된 헌진과 영문 모를 지하, 괴상한 힘을 다루는 소녀까지. 나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위기감을 느끼며 가까스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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