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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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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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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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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탑 (3)

DUMMY

탑은 무너지고 있다. 도시가 세워지는 그 순간부터 지탱해온 열원의 수명이 다하고 있다. 그 사실을 고하는 린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황제는 탑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안 그래도 죽어가는 탑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탑을 맡은 린첸은 발악했다. 몇 번이고 황실에 구원요청을 했고 탑의 제어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탑에서 첫 번째 누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린첸은 인부들을 대피시켰다. 텅 빈 탑 안에서 린첸은 고군분투하며 고민에 빠졌다.


지원은 없고 탑은 무너지는데, 이대로 방치하면 도시의 생명은 궤멸한다. 공기를 정화하는 장벽만큼 탑은 필연적인 생명 유지장치다. 그러나 탑의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조차 벅차고, 일손은 더더욱 부족하다. 인부들을 물린 탑은 린첸에게 지나치게 넓었고 늘 급변했다.


린첸은 탑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깥에 있는 인부들이 초조한 얼굴로 린첸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방호복을 입지 않았다. 애초에 방호복이란 지하에서 근무하는 인부들을 위한 물건이었다. 준비된 방호복은 예비품을 끌어모으더라도 백 벌이 채 되지 않았다.


린첸은 그들을 탑에 투입하기로 했다. 탑을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모든 것이 안정되었던 시대의 끝이었다.


“후우.”


린첸은 이야기의 한 단락을 끝내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작업을 마쳤을 때였다.


“나머지는 인부들이 할 수 있겠죠. 그럼 위로 올라갈까요, 헌진. 슬슬 입구를 개방해야 하니까요.”


린첸이 헌진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흐릿해졌다. 헌진에게 말을 하지 않을 때면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살덩이도 아닌 다른 무언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헌진의 긴 삶에서조차 이렇게 심각하게 중독된 기사는 본 적이 없다. 그녀는 환상과 현실의 한중간에서 방황하는 듯했다.


헌진은 린첸을 따라 줄지어 나아가는 살덩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린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들의 정체는 더욱 구체화하였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방호복을 입지 못한, 선택받지 못한 인부들이죠. 모두는 아니에요. 이렇게나마 일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어요. 대다수는 그저 녹아 존재도 되지 못한 채 흘러내렸죠.”


린첸은 비틀거리면서 계단을 올랐다.


“저는 이 사람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구역으로 대피시킨다? 그런 방법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때는 너무 넓은 범위에 배치해야 했어요. 대피시킬 틈은 없었죠. 이런 식으로 진화한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인부들의 녹아내린 뇌에 남아있는 것은 탑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명뿐이다. 모든 생활 양식은 그것을 위주로 짜맞춰졌다. 본래 모습에 대한 의구심도, 다른 가능성도 그들에게는 희미한 문제였다. 이곳은 도시 속에 있지만 도시와 동떨어진 곳이며, 자신들만의 생태계를 구축한 곳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거느린 린첸도 마찬가지였다. 헌진은 지금의 린첸에게서 옛 동료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날카롭던 눈빛도 바람처럼 가벼운 몸놀림도 없다. 지금 당장에라도 린첸을 벨 수 있을 만큼 허점으로 가득했다. 헌진은 이 살덩이만큼이나 린첸 역시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헌진의 뒤를 거대한 그림자가 뒤를 따랐다. 인부들이 벽이라고 부르던 살덩이였다. 벽은 린첸에게서 인부들을 감추려는 듯 바싹 붙어 따랐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린첸의 바로 곁에 있는 헌진은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독을 머금은 린첸의 몸은 그 자체로 독을 내뿜는 또 다른 발원지나 다름없었다. 인부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 린첸은 스스로 인부와 격리해야 했다.


몇 개의 층을 지나자 최상층이었다. 탑이 상황을 총괄하는 계기판이 모든 벽에 깔려있었다. 벽이 입구를 틀어막자 최상층은 고립되었다. 린첸은 습관처럼 계기판을 일주했다. 여전히 모든 지표는 파멸과 생존을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었다. 금이 간 유리가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간신히 손으로 부여잡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린첸은 그것을 몇십 년 동안 해내고 있었다.


린첸은 최상층 중앙에 있는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의자 깊이 가라앉은 그녀는 피로해 보였다. 의자의 손잡이 좌우에는 두 자루 칼이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오랫동안 다듬지 않은 듯 겉면은 녹슬어있었다.


린첸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고요한 숨소리는 잠이 든 듯 편안해 보였다.


“피 냄새가 나는구나.”


헌진은 최상층에 들어섰을 때부터 느낀 독할 만큼 진한 피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린첸이 약이라고 부르던 액체, 하나가 식사시간에 섭취하던 가죽 주머니가 떠올랐다.


헌진은 반응 없는 린첸을 뒤로 하고 방 안을 거닐었다. 최상층의 한구석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냄새는 그곳에서 풍기고 있었다.


헌진이 가까이 다가가 휘장을 손으로 걷어 올렸다. 헌진은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곳은 붉게 빛나는 탑보다 더욱 붉은 공간이었다. 벽과 바닥을 물들인 붉은 색은 염료가 아닌 피였다. 독보다 진한 피 냄새에 헌진의 후각마저 마비될 정도였다. 헌진에게는 친숙한 기사의 피 냄새였다.


공간 안에는 커다란 나무통이 여러 개 있었다. 대부분의 통은 비어있었다. 오직 몇 개만 간신히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이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헌진이 망설이는 동안, 살덩이 하나가 헌진을 지나쳐 들어갔다. 린첸이 흘린 코피를 담은 바구니를 운반하던 살덩이였다.


살덩이는 통 하나를 기어오르더니 그 안에 바구니에 든 피를 쏟아부었다. 피의 저장고. 헌진은 이 공간을 그렇게 이름 붙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수단이었죠.”


헌진은 천장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들자, 천장에 매달린 어떤 몸이 보였다.


“기사의 정수, 재생의 원천인 혈액. 그것만이 저와 인부의 실낱같은 이성을 붙잡아줄 수 있는 연료에요. 그것이 인부의 몸과 융화되고, 일말의 인간성을 독기에 침식당하지 않게 해주죠. 저는 얼마간 괜찮았어요. 하지만 인부들은 며칠조차 버티지 못했죠.”


헌진은 천장에 매달린 몸을 알아보았다. 오랜 옛날, 그 역시 기사였다.


“점차 인간성조차 잃어버리게 되는 인부들을 되돌릴 방법을 고민하다가, 저는 제 피를 그들에게 보급하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도박에 불과했지만, 효과가 있었죠. 그때 이후로 저는 제 몸의 피를 뽑아냈어요. 이 최상층에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저는 피를 식사로 그들에게 공급했죠.”


살덩이가 피 담긴 상자를 운반했다. 그 끝에는 탑 바깥쪽과 연결되는 거대한 원통이 있었다. 살덩이는 그곳으로 피를 흘려보냈다.


“하지만 한계가 있더군요. 제 피 역시 서서히 독에 오염되었으니까요. 몇몇 인부들이 짐승처럼 다른 인부들을 덮치기 시작했어요. 제 피에 중독된 걸까요? 인부들에게 함유된 제 피를 갈구하더군요. 저는 제 피의 한계를 느꼈어요. 최대한 순정한 피를 뽑아내기 위해 온몸의 혈액을 빼내고 새로이 생성해냈지만, 그조차 임시방편이었죠.”


피는 원통을 타고 바깥으로 흘러 인부들에게 보급되었다. 그들은 피를 피라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식사라 여기며 섭취하고 있다. 하나가 들이마시고 있던 피 냄새를 떠올렸다. 그들에게는 기사의 혈액이 도시의 탑처럼 필수적인 요소였다.


“희석한 제 피로 십여 년, 원액으로 또 몇 년, 공업용 알코올을 섞어서 가까스로 버티기를 몇 년, 그럴 때 마침 그자가 나타났어요. 저희에게 내려진 또 다른 숨줄이었죠.”


새로운 피의 공급원은 천장에 매달린 기사였다. 헌진은 아직 그의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희미했다. 온몸이 파괴당한 그는 심장 두 개만 살아 하염없이 피를 뿜어낼 뿐이었다. 지혈되지 않도록 못 박은 부분에서 떨어지는 피가 통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그저 피를 흘릴 뿐인 주머니였다.


“그자는 저를 암살하러 온 기사에요. 이름이······.”

“단테.”

“아, 그래요. 단테. 그런 이름이었죠.”

“······네가 이끌던 유격대의 대원이었다.”

“그랬나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니, 그럴 수도, 그래야만 할 필요는······.”


헌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린첸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헌진을 향해 섰다. 그녀의 양손에는 두 자루 칼이 쥐어져 있었다. 린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헌진은 그녀의 선명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헌진, 당신이 우리의 보급품인가요?”


헌진은 망설이면서도 칼을 들었다. 전투를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저런 린첸을 상정하지는 않았다.


“오, 이 역시 황제의 은총이라.”


린첸이 고개를 들고 주머니를 자신의 입안에 모조리 털어 넣었다.


“도시의 연료가 그러하듯, 탑의 연료 또한 사람과 피, 그리고 목숨일지니.”


기사의 피를 들이마신 그녀의 눈빛은 지난 시절처럼 또렷하게 헌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입술은 붉은 피에 물든 채 일그러진 미소처럼 비틀려있었다.


린첸의 두 칼이 헌진을 향해 쇄도했다.




나리아는 문득 몸을 떨며 잠에서 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붉은 하늘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리아는 귓가를 두들겨보았다. 헌진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리아는 철창에 기대 바깥을 둘러보았다. 감시하는 방호복은 없었다. 육삼도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바쁘게 움직이는 방호복들이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탑이 있는 방향이었다. 나리아는 있는 힘껏 철창에 얼굴을 들이밀며 탑을 바라보았다.


탑의 최상층에서 거대한 울림이 느껴졌다. 마치 탑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진동이었다. 나리아는 직감했다. 저 높은 탑에서 그러한 행위를 벌일 자는 두 기사만이 유일했다.


“헌진.”


나리아는 헌진의 기척을 느끼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저는 모르겠어요. 무엇이 이들의 구원일지. 차라리 탑을 무너트리고 도시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 이들의 구원일까요. 아니면, 도시를 위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 탑에 붙들려있는 것이 이들의 구원일까요.”


나리아는 확신하지 못했다. 이 구역에서는 그 어떤 구원도 없어 보였다. 오직 그것만이 진실처럼 여겨졌다.


나리아의 간절함을 가로막듯 몇몇 방호복이 다가왔다. 그들의 걸음은 이상했다. 남들보다 더 비틀거렸고, 물주머니처럼 흐물거렸다. 나리아는 의아함보다 먼저 두려움을 느끼며 철창에서 몸을 물렸다.


“뭐, 뭐에요?”


천천히 다가오던 방호복들이 속도를 내더니 감옥에 달려들었다. 그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철창 사이로 뻗어왔다. 나리아는 가까스로 잡힐 뻔한 옷자락을 잡아 들며 구석으로 몸을 굴렸다.


“식사를, 우리에게 식사를!”


방호복 중 누군가가 외쳤다. 이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기괴한 마찰음이었다. 살덩이가 서로 쓸리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나리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작가의말

다음주에 뵙겟습니다. 좋은 주말 되시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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