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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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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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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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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92. 탑 (8)

DUMMY

“네가 사람이라면, 우리는 무엇이냐.”

“반대로 묻죠. 제가 사람이 아니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죠?”


육삼의 말에 나리아는 날카롭게 받아쳤다. 서로가 사람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두 시간 동안 질리도록 이어진 문답이었다. 그러나 방호복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나리아는 참을성 있게 그들과 말을 나누었다.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의 정의를 논하는 언쟁 속에서 나리아는 그들의 순수함을 느꼈다. 그들은 진심으로 사람의 정의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와 다른 몸을 지녔다. 옷을 입지도 않았다. 이 공간에서, 그것은 사람이 아님을 뜻한다. 어째서 너와 우리가 같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그럼 저기 있는 두 기사는요? 저들은 사람이 아닌가요?”


나리아가 한편에서 논쟁을 지켜보던 헌진과 린첸을 가리켰다. 육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듣기로는, 방호복들에게 기사는 나리아와 다른 존재로 인식되었다. 방호복이 바깥세상을 인지하는 수단은 불가사의했으나 그것만은 확실했다. 나리아는 제 나름대로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예컨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은 똑같은 물이지만 피어오르는 김과 피부에 닿는 온도로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런 식의 감지법이 방호복에게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리아는 기사와 다르고 방호복과 다르니 3구역에서 유일한 존재나 다름없다. 나리아에게는 그것을 해명할 의무가 있었다.


“육삼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 옛날, 당신의 몸을 떠올려보세요. 그때의 당신과 저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라고요.”

“······말을 할 수 있다?”

“고작 그거예요? 지금은 파괴된 옛 기계 일부는 스스로 말을 할 수 있었죠. 그럼 그 기계도 사람일까요?”


자신이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상대방과 자신이 사람이라는 공통요소를 논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은 당연히 사람이었고, 거기에 증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해소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장 몇 개나 말 따위가 사람을 증명하지도 않고, 사람을 아니게 하지도 않아요. 여기도 말을 못 하는 살덩이······사람들이 돌아다니잖아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늙지 못하고 어려지는 사람도 있어요.”


육삼은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서로 사람에 대한 합의를 보자는 것이 시작이었는데, 육삼이 간신히 꺼내는 말을 나리아는 부정하고 나섰다.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인가요? 징수관은 사람의 몸에 기계의 머리를 달았죠. 번식할 수 있다면 사람인가요? 10구역에는 불임인 사람이 수두룩해요. 그러면 뭐가 사람일까요? 당신과 저의 차이점을, 당신은 증명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켜보던 헌진이 린첸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게 논쟁인지 가르치려 드는 건지 모르겠구나.”


린첸은 나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저 논쟁에 답이 있다고 보느냐.”

“있을 리가요. 사람의 정의를 내린다? 저라면 기사로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요. 황제 폐하께서 허락한 생명만이 사람이라고.”

“지극히 기림 제국다운 논리로구나.”

“이건 법칙이에요, 헌진.”


헌진은 기껍지는 않았으나 린첸의 말에 동의했다. 황제를 대적하는 몸이었으나 그 말은 옳았다. 도시란 그런 법칙으로 가동하는 기계 장치였다. 도시의 입장에서 나리아는 불순물에 불과했다. 애초에 도시에 속하지 않은 것을 도시의 반례라고 들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겠네요. 그 어느 기사도 하지 않은 행위를 지금 저 애가 하고 있어요.”

“어떤 행위를 말하는 거냐.”

“설득이요.”


기사에게 설득은 불필요하다. 존재만으로도 황제의 의지를 대변했고 불가침을 증명했다. 사람을 넘어선 압도적인 무력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했다. 기사의 행위는 그 자체가 당위였다. 나리아가 하려는 합의는 기사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헌진도 그랬잖아요? 폐하를 베고 기사단을 벨 때, 그 어느 설득도 하지 않았죠. 그것이 기사니까요. 행위가 이유고 목적이에요.”


헌진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린첸은 알베릭처럼 헌진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기사됨에 확고한 의지가 있는 린첸이었기에 그랬다. 그것이 알베릭과 린첸의 차이였다.


“근데 그것에 저 애는 의문을 던지고 있네요. 저 애의 눈에, 저 같은 기사는 짐승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어요.”


헌진은 가슴을 손으로 쓸었다. 심장을 뽑아낸 자리는 거의 아물어갔다. 나리아가 정의한 사람에 기사가 속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일말의 불안감은 그 답을 듣는 것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소녀가 추구하는 사람의 도시에 기사의 자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헌진은 개의치 않았다. 기사가 나리아가 세우려는 법칙에 방해되는 존재라면, 오히려 사라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리아의 입으로 부정당하는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다. 헌진은 빈 심장의 공간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피를 지나치게 흘렸다.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자신에게 의문을 품는 자, 설계되지 않은 자신의 의지로 저항할 수 있는 자.”


약간의 졸음 사이로 그런 말이 들려왔다. 헌진은 나리아의 말을 끝까지 들을 자신이 없었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헌진은 사소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곁에는 린첸이 자리에 앉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회복이 막바지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어깨에 내려앉은 자그마한 무게감을 느꼈다.


나리아가 헌진의 어깨에 머리를 앉은 채 잠들어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자그마한 방호복이 서 있었다.


“일어났어요?”


팔하나였다. 헌진은 독기 탓인지 멍한 머리로 뒤늦게 떠올렸다. 탑 안을 안내해준 소녀였다. 헌진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소녀가 아닌 살덩이였다.


“탑이 흔들린다 했더니 머리가 날아갔대요. 밖에 나오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그리고 비번인 어른들이 당신들한테 다가가지 않도록 경계를 섰던데, 오랫동안 못 본 린첸 경이 있질 않나, 웬 벌거숭이가 있지를 않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하나가 나리아를 들여다보았다. 그 몸짓은 호기심을 머금고 있었다. 헌진은 하나의 의식이 붕괴하지 않을지 조금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나리아의 잠든 얼굴을 빤히 보는 모습은 온전했다.


“흐음. 이게 육삼 아저씨가 말한 벌거숭이군요?”

“너는 아무렇지도 않구나.”


3구역 사람들에게 착란을 일으키는 나리아를 앞에 두고도 하나는 태연했다. 하나는 헌진의 말에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네? 뭐 이상할 게 있나요? 그냥 벌거숭이잖아요? 그거 빼면 저랑 다를 것도 없죠.”


하나의 방호복 아래로 언뜻 얼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헌진은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나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 잠시였고, 그것은 곧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살덩이로 바뀌었다.


“하나!”


멀리서 육삼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하나가 육삼을 보고는 펄쩍 뛰었다.


“몰래 들어온 거거든요. 이만 가볼게요. 마저 쉬세요!”


하나가 육삼을 피해 뒤뚱거리며 달아났다. 헌진은 하나의 모습에서 나리아를 본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이내 머릿속에서 그 사실을 지웠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이리 아니었다. 3구역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그가 할 일이었다.


“나리아, 일어나라.”


헌진이 어깨를 조그맣게 들썩였다. 나리아가 뭐라고 웅얼대며 눈을 떴다. 그리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떠날 시간이다.”

“네? 벌써요? 아직 해도 안 떴는데요?”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위험하다.”


그와 함께 린첸도 눈을 떴다. 그녀는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멀쩡했다. 심장이 교체당한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헌진, 폐하를 알현해서 어쩔 셈이죠?”

“이제 와서 그것을 묻느냐.”

“저는 심장값으로 관문을 열어야 하는 몸이에요. 만약 제 행동이 도시를 파멸시킨다면, 저는 여기서 당신을 막아야죠.”


린첸은 그렇게 말했지만 싸울 의지를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저 황제에게 물음을 던질 뿐이다. 네가 걱정할 일은 벌일 생각이 없다.”

“그래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군요. 늘 그랬듯이.”

“한 가지는 약속하마. 탑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보겠다.”

“······좋아요. 적어도 루미스는 당신을 믿고 관문을 열었을 테죠.”


린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도 회복한 린첸은 옛날처럼 차분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구역이 갈라져 각자도생에 빠지고, 기사는 응답 없는 주인을 기다리는군요. 이것이 우리가 바라던 도시일까요?”

“지금은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황제 폐하만이 답할 수 있겠죠.”


린첸은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요. 오랫동안 탑을 비웠어요. 당신들을 보내고 저는 제 일로 돌아가야 해요. 서두르죠.”


헌진이 몸을 일으켰다. 내버려 두었던 수레를 이끌고 아직 졸음이 묻어나오는 나리아를 태웠다. 나리아를 보는 린첸의 시선이 유심했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린첸에게 나리아는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3구역에 속하는 자로서 나리아가 껄끄러워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논쟁은 어찌 되었느냐.”

“저한테는 논할 도리가 없어요. 뭐, 기회 되면 그 애한테 물어보세요.”

“그러도록 하지.”


2구역으로 가는 관문으로 향하는 동안, 린첸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이따금 나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관문이 열리고 헌진은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짧은 시간 머무른 3구역이었지만 많은 것이 지나갔다. 잠시 돌아본 곳에는, 윤곽이 흐리지 않은 린첸이 서 있었다.


작가의말

금요일입니다. 요새 백신으로 떠들썩하던데, 저도 얼른 맞고 싶네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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