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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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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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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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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8. 폐기물 (3)

DUMMY

전투를 대비하는 행군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나리아는 법우의 사병들과 제국군으로 이루어진 대열의 후미를 따르면서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뒤쪽에서 바라보니 흐트러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은 잡담했고 건들거리는 자세로 무기를 흔들었다.


흐트러진 군기를 다잡으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장교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아도 눈치만 줄 뿐 제지하지 않았다. 나리아는 선두 부근에서 법우와 함께 있을 헌진에게 보고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뭘까? 자신감?”


나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중얼거렸다. 후미에 있으면서도 서슬 퍼런 기세로 주변을 경계하던 베니가 되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냥요. 그것보다, 그러고 있는 거 안 피곤해요?”


나리아를 지키는 인원은 베니뿐만이 아니었다. 법우는 병사 대여섯을 나리아에게 붙여주었다. 후보생이 포함되었으니 소대라고 불릴 만한 전력이었다. 헌진이 안전을 당부해 최후미에 배치된 나리아에게는 과분할 만한 조치였다.


“어느 상황에도 방심하지 않고 만반의 대비를 하는 것이 기사······후보생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베니는 칼집에 손을 얹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노려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호들갑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찌나 살벌한지 나리아는 이따금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 기세가 마냥 위협용은 아니었다. 나리아는 자신의 반경 몇 걸음 안에 부주의하게 들어오는 병사들의 목덜미에 붉은 선이 그어지는 것을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새겨진 상처에 병사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기겁한 나리아가 화를 내자 소매가 잘려나가는 정도로 그치게 되었지만, 베니는 자세를 풀 줄 몰랐다.


멋대로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 자기 잘못일지도 모른다. 나리아는 겁을 먹은 병사들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베니는 그렇게 기사가 되고 싶어요?”

“무인으로 태어나 도시에 헌신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기사를 꿈꿉니다. 그러니 저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모두······힉.”


베니가 꼴사나운 소리를 질렀다. 나리아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찌른 탓이었다. 나리아는 베니와 지낸 지 겨우 며칠이지만 시종일관 진지하려고 노력하는 베니를 무너트리는 일이 즐거웠다.


“기습에도 익숙해지셔야죠, 기사님.”

“나, 나리아님. 그렇게 사람을 골리는 행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베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요.”


나리아의 대꾸에 베니가 시뻘게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베니를 만나고 나리아는 이제까지의 인간관계가 삭막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겁하다면 비겁한 행위였지만 베니와의 관계는 2구역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헌진을 비롯한 기사들과 만나온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베니에게서 들은 잡다한 이야기는 제법 쓸모가 있었다. 그녀는 이야기로만 전해져온 린첸을 동경해 두 자루 칼을 무기로 삼았다. 린첸과 만난 적 있다는 나리아의 말에 그녀는 눈을 빛내며 어린아이처럼 캐물어 왔다.


나리아는 3구역 붉은 탑의 정상에서 몸이 녹아내리는 병에 걸린 린첸을 떠올리고, 두루뭉술한 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린첸의 외모를 묘사하는 몇 마디 말만으로도 베니는 꿈에 부풀어 올랐다.


다른 후보생들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도 알았다. 사쿠마를 아는지 물었을 때도 얼굴이랑 이름만 기억날 뿐이라는 막연한 대답이었다. 기사단의 관계는 본래 그러한 것이라는 헌진의 말이 떠올랐다. 작전을 위해 서로를 도구로만 여긴다는 것은, 외과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가장 먼저 심어지는 장치일지도 몰랐다.


나리아는 군대의 행진을 구경하듯 서 있는 일반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한가롭게 손을 흔들어주거나 아이들을 들어 올려 병사들을 보여주었다. 준전시 상황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구역민들은 피난시키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나리아가 묻자 베니는 어느새 자세를 고쳐잡은 채 대답했다. 나리아는 그 모습에 불만 어린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저들은 자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만이 짊어진 의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안정적인 상태이므로 개입할 이유는 없습니다.”

“으음······.”


2구역의 생태에 관해서는 몇 번이나 들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활이 목적인 구역이라면 4구역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경제활동이라는 뚜렷한 수단이 있었다. 페이의 반란에도 모두 두려워하고 소리지르며 격하게 반응했다. 2구역에서는 찾아보지도 못할 광경이었다.


2구역의 구성법은 완전한 평등분배에 가까웠다. 이곳에는 부과된 노동이 없었다. 오직 자발적이거나 취미에 가까운 노동만이 가능했다. 식량은 원하는 만큼 배급받을 수 있었는데, 심지어 질조차 다른 구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노동문제와 식량문제에서 해방된 구역은 자유로웠다. 나리아는 도시에서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 있다면 2구역이라고 확신했다. 이렇게까지 느긋한 인상은 거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리아는 마린이 2구역을 보았다면 배알이 뒤틀린다고 일갈했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투가 벌어질 장소 인근 구역민들은 피난시켰겠죠?”

“필요하다면 그리 했을 겁니다.”


베니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애매한 대답을 했다. 나리아는 그 대답에서 어쩐지 불안감을 느꼈다.


나리아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나리아의 보폭을 따라가느라 엉거주춤하게 걷던 병사들이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처음에는 그들도 다른 병사들과 다를 바 없이 태만한 자세였지만, 베니의 칼 놀림을 보고 나자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소풍이라도 나서는 것 같은 형편없는 행군이었지만, 나리아는 그들을 보자 새삼 자신이 전투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6구역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휩쓸렸다. 그러나 지금은 제 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지. 나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베니는 비효율적인 나리아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물었다.


“무엇을 하는 겁니까?”

“네? 그야 설치 작업이죠.”


나리아는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줄 천리안을 행군하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설치했다. 때로는 골목길, 민가의 벽, 필요하다면 베니에게 부탁해 나무 위에도 설치했다. 느긋한 대열은 금방 따라잡을 수 있으니 속도에는 지장이 없었다. 베니는 나리아의 부탁을 곧장 들어주면서도 의문을 품은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리아님이 그렇게 무거운 가방을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베니가 나리아가 짊어진 가방을 가리켰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가방에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도구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베니가 돌아보자 멈칫했던 분대원들이 너도나도 대신 들겠다며 앞으로 나섰다.


“네? 그럴 필요 없어요. 아니, 제 허락없이 아무도 만지지 말아요.”


나리아의 단호한 거절에 베니는 다소 풀죽은 얼굴이었다. 나리아는 베니의 심경을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었다.


“베니한테는 이걸 주죠.”


나리아가 가방을 뒤져 자그마한 단안경을 꺼내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베니가 의아한 얼굴로 살펴보기만 하자 나리아가 직접 씌어주었다. 베니는 까치발을 드는 나리아에게 한없이 어색한 얼굴을 하면서도 허리를 숙였다.


긴 고리가 귀에 단단히 밀착되었다. 베니는 헐겁게 씌워졌다가 꾹 조이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베니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던 나리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리아는 귓가를 몇 번 두드리고 속삭였다.


“마이크 테스트.”


베니가 깜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동시에 귓가에서 나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음량 조절은 필요하겠네요.”

“나, 나리아님. 이건······.”

“들어본 적 없어요? 통신기에요. 원시적인 형태지만. 기사들도 쓰는 거잖아요?”


베니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단안경을 매만지며 당장이라도 벗으려는 눈치였다. 나리아가 붙잡지 않았으면 황급히 벗는 손짓에 어딘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다.


“이, 이런 건 기사단과 황제 폐하의 영역에 있는 물건입니다. 저따위가 어떻게 감히······.”

“뭘 그렇게 신경 써요? 이게 얼마나 효율적인 물건인데요. 오히려 잘됐어요. 쓸 날이 올까 싶었는데 이렇게 쓰게 되네요.”

“하지만 나리아님, 허락없이 옛 문명의 물건을 쓰는 것은 현재 도시를 수호하는 기사······후보생으로서······.”

“아이참, 지금은 제 명령을 따른다면서요? 제가 허락했으니까 됐어요.”


나리아도 비슷한 안경을 꺼내 썼다. 상태는 양호했다. 베니의 오른쪽 눈이 보는 광경이 나리아의 눈앞에도 비추어졌다. 눈높이가 다른 베니의 시선으로 보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남용하다가는 뇌가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나리아는 찡그린 얼굴로 사양을 조절해갔다.


“어때요?”

“······부담스럽습니다.”


베니가 쩔쩔매는 얼굴로 대답했다. 불필요한 준비일지도 몰랐다. 전방에는 헌진이 있고, 군대를 이끌고 있다. 반면에 나리아는 최후방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을 뿐이다. 이 행동이야말로 호들갑이었다.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나리아의 귓가에 헌진의 통신이 들려왔다.


[나리아, 지금부터 작전을 시작한다.]

“네, 넵!”


베니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소리질렀다. 주변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베니를 돌아보았다. 나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알았어요. 몸조심해요, 헌진. 적에 기사가 없다지만요. 아, 그리고 베니한테도 통신회선 열어뒀어요. 만일을 대비해서요.”

[베니에게? 알았다. 참고하도록 하지.]

“네, 참고로, 방금 베니도 힘차게 대답했어요.”

[······너무 놀리지 마라. 기사단에게 너는 너무 자극적이다.]

“누가 들으면 제가 나쁜 사람인 줄 알겠어요.”


헌진은 말없이 통신을 끊었다. 행동이 가까워졌을 것이다. 나리아는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럼, 저희도 주변이나 좀 둘러보죠.”

“네? 후방에서 대기한다는 계획이 아니었습니까?”

“전장을 파악하고 후방을 대비하는 것 또한 기사의 의무죠. 그렇지 않나요?”


나리아의 지적에 베니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자, 그럼 가죠. 나리아 분대, 이동하죠!”


나리아가 분대원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나들이라도 지시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어쩌면 구역의 여유로움이 옮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리아는 느닷없이 한기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헌진을 비롯한 선봉이 진입하기로 된 건물 옥상에서 시선이 느껴진 탓이다. 나리아는 기사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곳에 있는 기척을 감지할 만한 능력이 없다. 반응한 이유는 어떠한 이끌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증거로 베니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나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건물 옥상에서 작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악몽처럼 자신을 괴롭혔던 소녀가 분명했다. 그러나 저곳에는 헌진이 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나리아는 불안하게 요동치는 가슴께를 그러쥐며 자신을 다독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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