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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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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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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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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4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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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7.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2)

DUMMY

기사단 양성소가 폐쇄된 날, 남은 후보생들에게는 제국군에 배속되는 길만 남아있었다. 몇몇은 법우가 은밀히 빼돌렸고, 대다수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모든 후보생이 그에 순응하지는 않았다. 재형은 몇몇 동료를 이끌고 그 모든 선택지에서 이탈했다.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처음에 그 이유는 길지 않았다. 재형은 10구역의 제국군에 복무했던 병사였다. 그는 병사에게 요구되는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기사단에 자원할 자격을 갖추었다. 그 욕구는 오로지 신분 상승에 있었다.


기사단에 들어가 그 어느 비천한 곳에서도 삶을 소모하지 않겠다. 그것이 그의 동기였다. 다른 병사들은 아랫구역 사람들의 삶을 유희와 우월감의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 비교하면 지극히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따라서 재형에게 제국군에 배속된다는 것은 원위치로 추락한다는 뜻이었고, 저항할 만한 이유였다.


기사단의 손길에서 벗어난 재형은, 그러나 의구심을 느끼고 말았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사항이었다. 기사단이 요구하는 순종에서 벗어난 재형에게 보인 것은 2구역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부족함도 장애도 없다. 그러나 훈련에 매진하는 동안 재형이 보지 못했던 결핍이 이들에게 있었다.


이들에게는 감정이 없다. 동시에 삶이 없다. 꼭두각시처럼 일과를 반복할 뿐이다. 그 기괴함은 재형이 그들과 마주했을 때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를테면 몸이 부딪쳐도 그들은 비틀거리다 지나갈 뿐이고, 칼로 몸 어딘가를 베어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말에는 반응했으나, 그렇다고 대화가 성립되지는 않았다. 그러한 모습들이 구역 전체에서 보였다.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풍경이라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순종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두 번 다시 도시에 안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분기점에서, 재형은 불운하게도 후자에 속하고 말았다. 그 어느 곳보다 처참하고 치열했던 구역 출신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재형은 이런 인형들을 위해 목숨을 갈아내고 있다면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재형은 돌연 말을 그치고 나리아를 노려보았다. 재형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나리아는 맥이 빠진 얼굴이었다.


“제가 뭘요?”

“지금 이 상황 말이다.”


그들은 지금 북부 구역에서 특히 복잡하게 꼬인 골목길 한편에 서 있었다. 재형은 문득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대관계인 베니가 데리고 온 소녀는 재형에게 대화를 요구했다. 그 당돌함에 혼란스러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리아가 그렇게 요구했을 때부터 응당 이렇게 되어야 했다는 자연스러움마저 느꼈다. 여전히 나리아의 곁에 선 채 살기를 뿌리는 베니가 없다고 하더라도, 재형은 이렇게 됐으리라는 확신을 했다.


“······무슨 힘이냐.”

“힘이라고요?”


재형이 가장 그럴싸한 이유를 입에 올리자, 나리아는 동그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돌연 피식 웃었다.


“그런 힘이 있다면 좋겠네요. 누구든 제 말만 따른다면 얼마나 편할까. 베니, 여기서 춤춰볼래요?”

“네······네? 나리아님, 뭐라고요?”


시종일관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던 베니가 당황하며 나리아를 보았다. 그러나 나리아는 팔에 턱을 괸 채 재형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봐요. 베니가 춤을 안 추잖아요. 저한테 그런 힘은 없어요. 아니면 재형, 당신이 춤 출래요?”

“······.”


재형은 코웃음을 쳤다. 물론 그가 춤을 추는 일은 없었다. 나리아가 그것 보라는 듯 턱짓을 했고, 재형이 품에 넣었던 손을 돌연 꺼냈다.


그 순간 나리아의 눈앞에서 불똥이 튀겼다. 나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새 뽑아 든 베니의 칼이 나리아의 코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짧은 단검 한 자루가 바닥을 굴렀다. 순간적으로 공격을 당했다. 나리아가 깨달은 순간에, 이미 베니가 재형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나리아님을 건드리면 죽인다고 했을 텐데.”


재형은 이미 다른 단검을 뽑아 베니의 칼끝을 밀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금방이라도 피를 흩뿌릴 듯한 대치 상태는 나리아가 끝냈다.


“베니? 전 괜찮아요.”


나리아가 베니의 허벅지를 두들겼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있었던 만류에 베니는 마지못해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나 칼날은 재형의 지근거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 알겠죠? 저한테 그런 힘은 없다는 걸.”


나리아는 괜스레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뒤늦게 밀려온 놀라움에 가슴이 요동쳤지만 애써 태연하게 보이려 했다.


“아니, 근데 칼을 던진 거랑 지금 말하는 힘이랑 무슨 상관이죠?”


나리아가 뒤늦게 버럭 화를 내자 재형은 쓴웃음을 지으며 도로 품속에 손을 넣었다. 나리아는 도대체 저 안에 뭐가 들었을지 궁금했다. 단검만 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과하겠다. 어차피 베니가 있는 이상 어림없는 일이었겠지. 그러니 너도 손을 물려라, 베니. 애들이 보고 있다.”


베니가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냈다가 손을 거두었다. 재형은 자신의 목덜미에 조용히 맺인 붉은 선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다음에 같은 장난을 한다면 확실하게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경고였다.


“너도 그 아이들처럼 기묘한 힘을 다루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아닌가 보군. 그 누구의 칼날도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으니.”

“그 아이? 아이들?”


나리아의 몸이 흠칫했다. 재형이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나리아도 당장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라면, 그런 소녀가 또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동시에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만난 적이 있나 보군.”


나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본 재형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나리아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지만요. 다른 아이가 또 있다는 말인가요?”


마고도 떠올렸지만 말하지 못했다. 나리아는 아직 마고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떠한 표현도 알지 못했다.


“이야기를 계속해야겠군.”


재형은 잠시 벽에 몸을 기댄 채 눈가를 찌푸렸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일을 겪고 그것을 표현해야 할 때 느끼는 막막함이었다. 나리아는 재형의 다음 말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재형은 신중하게 고심하고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나는 한 번 도시에게 회수당했다.”


재형이 정처 없이 뒷골목을 방황하던 때였다. 그때까지 그의 머릿속은 의구심이 지배하고 있었고, 반란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디나는 돌연 재형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디나.”


나리아는 되새기듯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재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겉보기로는 소녀에 불과했지만, 재형은 디나에게서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공포에 질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조차 작은 단 한 명을 앞에 두고, 재형은 모든 방위에서 그를 노리는 무수한 칼날을 느끼는 듯했다.


재형은 무턱대고 무기를 휘둘렀다. 겁에 질린 몸부림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어느 공격도 소녀의 몸에 닿지 못했다. 오히려 영문도 모른 채 몸 한쪽이 꿰뚫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두운 공간에서, 재형은 자신을 다나라고 소개하는 소년과 만났다. 디나의 이름을 안 것도 소년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재형은 다나에게 수집 당했다.


회수와 수집. 재형은 자신이 겪은 일을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디나는 재형을 회수했고, 다나는 그를 수집했다. 그것이 폐기물을 대하는 그들의 작업이라고 다나는 말했다. 앞으로 반복될 도시에서 발생할 오차율을 수정하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오차율.”


나리아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재형은 잠시 입을 다물고 나리아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그의 말을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없었다. 재형의 말은 평생 눈을 떠본 적 없는 사람에게 하늘을 묘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인식을 벗어난 말은 무의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리아는 재형의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 말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더군.”


재형은 작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 도시뿐만이 아니다. 나는 물론이고, 모든 삶마저 의도되었다. 도시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모든 요소가 빠짐없이 설계되었다.”

“어떻게······.”


지상에서 발생한 인류라면 나리아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몇 번이고 태양이 떨어진 세상에서 인류는 무에서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떠한 근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인류는 세대를 거듭해왔다. 그 모든 삶마저 설계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나리아는 디나와 마고를 떠올렸고, 그리고 불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렸다.


“폐기물의 오차율.”


나리아는 재형의 말을 곱씹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말속에 있을 것이다. 나리아는 모든 시공을 통틀어 그려낸 인류의 지도를 상상했다. 추상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런 가상의 도구는 근거가 될 만했다.


나리아는 짊어진 가방끈을 꽉 쥐었다. 과거의 유산일 뿐인 도서관은 발끝에도 못 미칠 도구다. 그런 것이 실존한다면 권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인류를 주무르는 힘이 될 것이다. 그만한 힘을 지닌 자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리아는 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들과 그들의 권능은 실체화된 인류의 운명이었다. 아직은 상상의 영역이었지만, 나리아는 그런 아득한 두려움을 상정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재형은 자신의 말이 나리아에게 갈무리되기를 기다리고 말했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나는 10구역의 삶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힘을 꿈꾸었다. 도시가 부과한 고통에서 벗어날 힘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아이들에게 부정당했다. 내가 저 아래에서 본 광경은, 도시의 원본은······그 어떤 자유도 허용하지 않을, 벗어날 수 없는 선로의 운명이었다.”


재형의 말이 다소 열기를 띠었다. 재형은 심호흡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영문 모를 소녀를 앞에 두고 보일 꼴은 아니었다.


재형은 베니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재형의 말이 다소 지루한 듯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에 뻗은 그녀의 감각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대다수의 옛 동료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군. 설령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도시의 삶을 살면서 그를 따르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니 왜냐고 묻지 마라. 이 말을 투쟁의 근거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과 섞을 말은 없다.”

“왜냐고 묻지 않아요. 물을 리가 없죠.”


나리아는 조용히 말했다. 재형이 기대하지 않은 말이었다. 눈앞에 있는 소녀는 차분하게 재형을 보고 있었다. 재형은 그 눈빛 속에서 잴 수 없는 깊이를 보았다.


“재형, 당신을 한발 앞서 만났다면, 저는 마고 앞에서 좀 더 확신을 지녔을 거예요.”


나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재형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리아의 미소는 어딘가 넋을 잃고 보게 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제 생각을 명확하게 하는 힘이 나리아에게 있었다.


“당신이 제 사람의 근거가 되겠군요.”


그리고 그러한 힘은, 사람을 이렇듯 안심시키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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