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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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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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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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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3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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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06.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1)

DUMMY

“후우.”


전력으로 달린 베니가 숨을 몰아쉬며 멈추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골목길이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베니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나리아님,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베니는요?”

“저야 물론 괜찮습니다만······.”


베니가 나리아를 내려놓았지만 나리아는 베니의 팔을 붙잡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베니는 자그마한 떨림을 느꼈다.


“나리아님?”

“네? 아, 네.”


베니가 넌지시 부르자 나리아는 황급히 몸을 물렸다.


“괜찮아요. 정말로.”

“왜 그렇게 떨고 있나요.”


베니는 한쪽 무릎을 꿇어 나리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의 두려움은 베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위협은 없었다. 베니는 한순간도 경계를 늦춘 적이 없었고 그것은 카페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겠어요. 엄청 불길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베니도 저도 위험해졌을 것 같아요.”

“그때, 그 노인을 베었어야 했습니까.”


베니는 마고와의 간격을 재고 있었다. 단숨에 베어낼 자신이 있었다. 나리아가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행동에 옮겼을 것이다. 노인은 비무장 상태였고, 단 한걸음 앞이었다. 여차하면 목을 베고 도망칠 자신도 있었다.


“아뇨, 도망치는 게 옳았을 거예요.”


나리아는 두 주먹을 꽉 쥐며 떨림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 자리에서 베어도 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베니는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리아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감각의 영역이든 지식의 영역이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리아는 그 앎이 내린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


“베어서 죽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면요?”

“······.”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베니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베니가 침묵하자 나리아는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베니에게는 한없이 약해 보이는 미소였다.


“일단은 북쪽으로 가죠. 다른 입구를 마저 찾아보죠. 얼른 헌진을 구해야겠어요.”

“너무 위험합니다.”


나리아가 법우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베니는 할 수 있으면 가능한 모든 지원을 받고 싶었다. 자신이 감지할 수 없는 위험을 나리아만이 느끼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 지켜낼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답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때로는 마땅한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 또한 기사의 마음가짐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법우의 저택에서 나설 때부터 말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베니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거 알아요?”


나리아가 발걸음을 떼며 베니를 돌아보았다.


“저한테는 이 세상이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나리아는 혼자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베니가 따라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발걸음이었다.


베니는 잠자코 나리아를 따라갔다. 여전히 나리아는 베니의 호위대상이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베니는 아직 기사가 아니었지만, 마음가짐만은 늘 기사도에 모자람이 없도록 추구해왔다. 나리아가 홀로 떠나려는데 베니가 쫓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설령 사지라도 나아가야 할 때였다.


나리아는 베니의 발걸음을 듣고 적잖이 안도했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숱한 고민이 떠올랐다.


‘그 할머니가 카얄란을 퍼트린 범인일까?’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확신은 없었다. 나리아는 고려해볼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장 그들을 적대할 수단은 없다. 그들과 싸워야만 한다면, 동원 가능한 수단이 갖추어질 때까지 뒤로 미뤄두어야 한다.


적이라면 어째서 놓아주었을까. 또 적이 아니라면 어째서 위험을 느낀 걸까. 나리아는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퍼지는 상상을 최대한 지우려고 노력했다. 확실한 것은, 나리아는 마고의 사상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보전의 가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명제의 확신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에 가까웠다. 나리아는 머릿속으로 마고의 말을 굴리면서 반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말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카페를 피해 먼 길을 돌아 북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바닥에 목이 굴러도 담소를 나눌 사람들을 지나, 나리아와 베니는 북쪽 구역에 이르렀다. 드물게나마 보였던 순찰병들도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여전히 사람들은 길을 오갔고 길은 밝았다. 그러나 베니는 수시로 칼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은 무언가에 반응하는 눈치였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적일 수도 있겠네요. 북부 구역으로 이탈한 후보생들, 강한가요?”

“헌진 경을 알고 그날 괴상한 힘을 지닌 소녀를 안 이상,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베니를 기준으로 말해주세요.”

“그렇다면 제가 더 강합니다.”


베니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상당한 자신감에 나리아는 오히려 믿어도 좋을지 의심스러웠다. 베니는 미심쩍은 눈초리에 허둥지둥하며 대답했다.


“어, 그러니까 제 말은, 혼자라면 밀리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실제로 대인전에서 저는 누구에게도지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요. 훈련 성적도 밀린 적이 없었고, 그러니까, 이건 오만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흐응, 뭐, 그래서 헌진이 베니를 고른 거겠죠.”

“그, 그렇죠?”


당황하는 베니를 앞에 두고 나리아는 빙긋 웃었다. 베니의 자신감에 거짓은 없다. 그렇다면 걱정해야 할 것은 적이 여럿일 때뿐이었다. 그리고 나리아가 걱정한 대로, 적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베니가 나리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것이 약속된 신호인 마냥 나리아는 자세를 낮추었다. 베니는 나리아를 자신의 범위 안에 두고 두 칼을 뽑아 들었다. 각각의 칼끝이 정면과 좌측을 향했다.


정면의 대로와 좌측의 골목길에서 대여섯씩. 모두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나리아와 베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리아는 빠르게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기사후보생이라고 짐작될 만한 사람은 셋에 불과했다. 그밖에 다른 사람들은 지나치게 후줄근했고 건들거렸다. 다듬어진 기색은 오직 그 셋에게서만 보였다.


“여전히 날카롭군, 베니.”


정면에서 베니에게 다가오던 남자가 말했다. 그는 얼마간 거리를 벌린 채 품 안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베니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너희들이 둔한 거겠지, 재형. 매복이라면 더 은밀해야 했을 텐데.”

“우리가 숨을 필요가 어디 있겠나.”

“그래? 그렇다면 길을 비켜. 당장은 너희들에게 볼일 없다.”

“당장이라고? 그렇다면 우리와 싸울 예정이 있다는 뜻이겠군.”


재형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쉽사리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직 경계할 뿐이었다. 베니가 그만큼 강하거나, 피해를 보기 싫다는 뜻이었다. 나리아는 둘 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이 소문난 외부인 꼬맹이로군. 이곳에는 무슨 볼일이지?”

“예의를 갖춰라. 너희 역적들이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다.”


재형은 역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피로해 보였다. 나리아는 그의 눈가에 짙게 깔린 그림자에서 반란의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힘겨워 보이는, 헤아릴 수 없는 짐을 짊어진 사람의 눈이었다. 나리아는 그동안 도시에서 갈고닦은 직감으로 헤아렸다. 재형은 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불명확한 적의를 품고 있을 뿐이었다.


“통행을 허가한다면 오직 그 소녀뿐이다. 법우의 끄나풀까지 들여보낼 이유는 없다.”

“허튼소리. 구역을 무단으로 점거한 것도 모자라 월권행위라니. 여기서 베여도 불만은 없겠지?”


베니의 칼날이 재형을 겨누었다. 베니가 살기를 머금자 분위기가 일순 험악해졌다. 양측의 눈치를 살피던 나리아가 벌떡 일어선 것은 그때였다.


“잠깐, 잠깐만요, 베니. 칼 좀 내려봐요.”


나리아가 베니의 칼 옆면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느닷없이 앞에 선 나리아 탓에 베니의 칼끝이 흔들렸다. 재형도 품에서 꺼내려던 손을 멈칫하며 나리아를 노려보았다.


“그쪽도 그렇게 보지 말구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폐기물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군요?”

“못하는 말이 없구나, 꼬맹아. 우리를 폐기물이라고 불러서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 그 건방진 입을 조심해야 할 거다.”

“재형, 너!”


나리아를 향한 위협에 베니가 반응했다. 그러나 나리아가 손을 들어 막아냈다.


“누가 제가 그렇게 부른댔어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하는 말이죠.”


나리아는 눈을 빛냈다. 폐기물이라는 호칭에 그들은 분노했다. 그 사실이 반가웠다.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게는 모욕을 받아들일 마음도, 자포자기한 심정도 없다. 오히려 당당함이 엿보였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구역을 반으로 갈라서까지 저항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나리아는 그 이유에서 얼핏 희망을 느꼈다.


“우리 얘기 좀 해요. 재형이라고 했죠?”


나리아의 말에 재형은 눈에 띄게 당황했고, 베니는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베니도 나리아의 고집을 알기에는 이 짧은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재형, 사람들이 당신을 폐기물이라고 부르는 사실에, 어째서 분노한 거죠?”

“폐기물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도 제가 비겁하게 말하고 있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다시 말하는데, 저는 사람들이 당신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만 알아요. 그러니 당신들의 말을 듣고 싶다는 말이에요.”


재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반박하면 변명으로 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재형은 나리아의 시선을 보고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변명을 요구하는 사람은 나리아가 처음이기도 했다.


“폐기물은 우리가 아니라 남부에 있는 녀석들이다.”

“그 이유가 뭐죠?”

“적어도 우린 사람이다.”

“그거에요!”


나리아가 대뜸 몸을 내밀었다. 베니가 미처 붙잡기도 전이었다.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나리아를 앞에 두고 오히려 재형이 뒷걸음질을 쳤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이 그거였다고요! 저는 이 구역에 오고 나서 자기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근데 이제야 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재형은 환희에 가까운 나리아의 반응에 말문이 막혔다. 베니의 칼날로도 막지 못했던 말문이었다. 베니가 나리아에게 다가와 경계태세를 취할 때까지, 재형은 나리아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모든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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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10.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5) 21.07.20 2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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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108.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3) 21.07.15 2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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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88. 탑 (4) 21.06.14 50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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