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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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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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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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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폐기물 (6)

DUMMY

“후.”


헌진은 밭은 숨을 내뱉었다. 폐를 다쳤는지 만족스럽게 숨을 쉴 수 없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는 떨어졌던 곳의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하의 깊이는 생각보다 깊었다.


바닥은 도시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재질이었다. 돌은 아니었고 대리석도 아니었다. 매끈하기로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 단단함은 차원이 달랐다. 헌진은 이곳이 자신의 이해를 벗어나는 사실을 그 바닥만으로도 깨달았다.


다행히 몸은 부서지지 않았다. 헌진은 찬찬히 몸을 점검했다. 온전한 뼈가 없었다. 팔은 기괴하게 뒤틀렸고 다리조차 가죽만 남은 듯 흐물거렸다. 그나마 오른팔이 멀쩡했다. 무리한 낙법이나마 몸 일부를 보존할 수 있게 했다.


헌진은 조심스럽게 숨을 골랐다. 이와 같은 일은 처음이 아니다. 도시의 장벽을 뛰어넘었을 때도 겪었던 일이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헌진은 부러진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다.


우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억지로나마 뼈를 이었다. 그저 맞닿아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헌진의 작업은 담담하게 이어졌다. 부러져 튀어나온 뼈를 집어넣거나, 내장을 찌르는 뼛조각을 끄집어내는 작업이었다. 차단된 고통 너머로 눈앞이 몇 번이고 아득해졌다. 당장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머리를 억지로 각성시키며 헌진의 수술은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몸의 형태가 복구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헌진은 귓가에 손을 얹었다. 나리아와의 통신은 연결되지 않았다. 이 정도 깊이와 거리라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헌진은 모든 행동을 포기하고 숨을 몰아쉬며 회복에 전념했다.


이 공간의 끝은 가늠되지 않았다. 헌진은 도시 내에 이러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느닷없이 생겨난 공간이 아니다. 낡은 먼지의 냄새는 까마득히 먼 세월을 느끼게 했다. 헌진의 삶 이상, 어쩌면 도시의 시작부터 있었던 공간일지도 몰랐다.


“불찰이군.”


어쩌면 이 도시를 안다고 자부하는 것조차 자만일지도 몰랐다. 아랫구역의 반란과 정체 모를 짐승, 기사단의 변화와 디나의 위력부터가 이미 헌진이 아는 도시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도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화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도시를 거스르고 있는 자신과 나리아가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헌진이 유일하게 움직이는 손으로 칼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댔다. 모르는 것은 벨 수 없다. 헌진은 황제를 베어 이 도시를 지키려 했으나, 지금은 황제만을 베어서는 이 도시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베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막했다.


“다가오지 마라.”


헌진이 어둠 속을 향해 말했다. 그를 향해 다가오던 기척이 있었다. 눈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헌진의 눈은 어둠을 꿰뚫을 만했으나 이곳의 어둠은 간파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어둠을 조성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가오면 베겠다.”


헌진은 누운 채 오른팔만 들어 칼을 세웠다. 허세가 아니었다. 저런 자그마한 기척이 칼에 닿는 범위라면 능히 베어낼 수 있었다.


“추락하는 소리가 들려서 와봤어요.”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것이 방심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헌진은 이미 디나라는 소녀에게 당해 이곳으로 추락했다. 만약 저 소년이 같은 힘을 지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몰랐다.


“당신이었군요.”

“나를 알고 있나.”

“안다고 해야 할까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소년의 말은 디나처럼 모호했다. 그 화법의 목적이 무엇이든 헌진은 짜증을 느꼈다.


“그 아이와 한패냐.”

“디나를 만났나요? 그렇군요. 하긴, 디나가 아니라면 하늘을 뚫어 떨어트릴 리는 없었겠죠.”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네, 디나는 제 동생이에요. 음······, 유전적으로는요.”

“그렇다면 너 역시 내 적이다.”


기척이 헌진에게 다가왔다. 헌진은 위협용으로 허공을 향해 칼을 그었다. 찢긴 공기 사이로 먼지가 나풀거렸다.


“다가오지 마라.”


헌진은 슬그머니 몸을 긴장시켰다. 소년이 디나와 같은 방식으로 공격해온다면, 부러진 몸으로나마 반격에 나서야 했다. 기껏 맞춘 뼈를 다시 무너트린다면 단 한 번의 도약만이 가능했다. 그것을 위해 헌진은 힘을 끌어모았다.


“다치셨나요?”


순간 어둠이 옅어졌다. 헌진은 멀리서 어둠을 밝히는 은은한 광원을 보았다. 소년 너머 먼 곳이었지만 빛 일부가 이곳까지 닿았다. 그리고 헌진은 희미하게나마 소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하리만치 흰 피부가 특징적이었다. 평생 빛을 쬐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더없이 유약해 보였고, 헌진은 한 손으로 으스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치료해드릴게요.”


소년이 헌진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순간 헌진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디나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칼날은 허공에 부딪혀 튕겼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년의 반응이었다. 소년은 헌진이 칼을 휘두르자 흠칫 놀란 얼굴이었다. 심지어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가리기까지 했다. 순수하게 위협에 겁을 먹은 눈치였다.


소년의 반응에 도리어 놀란 것은 헌진이었다. 같은 힘을 다루는 것은 분명했는데 디나와의 반응은 천지 차이였다.


“제, 제가 놀라게 했나요?”

“다가오지 말라고 했다.”


헌진이 칼을 겨눈 채였다. 소년은 머쓱한 얼굴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럼 이 거리라면······.”


소년이 헌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헌진은 칼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한 손으로는 불안정했으나 그럭저럭 막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빈틈을 노려 달려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투명한 송곳도 느껴지지 않았다. 헌진은 자신을 감싸는 흐릿한 바람을 느꼈다. 그것은 물안개처럼 헌진의 몸속에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헌진은 급속도로 몸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비정상적인 속도로 흩어진 뼛조각이 맞춰졌고, 찢어진 근육이 재생성되었으며, 피부가 봉합되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 어떤 시술도 이러한 치료는 불가능했다. 몸의 재생력을 끌어올린다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강제로 몸을 짜맞추는 느낌이었다.


“무슨 짓이냐.”

“네? 치료하는 중인데요.”


어느덧 몸이 움직일 만큼 회복되었다. 헌진은 소년에게 칼을 겨눈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심장 하나로는 피를 생성하기에는 부족했다. 헌진은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벌렸다.


“괜찮은 모양이네요.”


헌진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헌진은 소년을 향해 되돌아가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느꼈다.


“디나가 당신을 보냈다면, 당신 역시 폐기물이라는 뜻이겠죠.”

“폐기물이란 무엇이냐.”

“안내해드릴게요.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소년이 등을 보였다. 헌진의 칼이 움찔했다. 빈틈을 보인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헌진의 몸이 움직이려는 순간, 소년이 문득 등을 돌렸다.


“참, 그거, 휘두르지 않으실 거죠? 깜짝 놀라거든요.”


그저 놀랄 뿐인 수준이라는 뜻인가. 헌진은 소년을 시험하겠다는 생각은 접어두었다. 지금 해야 할 최우선 목표는 출구를 찾아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공격이 통하지도 않을 상대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자기소개가 아직이네요. 제 이름은 다나에요.”

“그 힘은 뭐지.”


다나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기껏 자기소개까지 했는데 이름조차 듣지 못한 것이 무안한 모양이었다. 헌진으로서는 배려할 가치가 없는 사항이었다.


“힘, 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그냥 관리자 같은 거라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고 할머니는 옛 언어라고 하더라고요. 태양이 떨어지고 빛을 잃었을 때, 새로운 빛을 빚어낸 것이 이 언어고, 새로운 도시를 세운 재료 또한 이 언어라네요.”


다나는 설명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몰라요. 진짜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니겠죠. 이게 어떻게 언어겠어요? 어떠한 비유에 불과할지도 몰라요. 마고 할머니가 진지하게 설명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알아들으니까요.”


걸음은 끝날 줄 몰랐다. 헌진은 새삼 이 공간의 넓이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2구역 전체의 지하에 해당할지도 몰랐다. 감지되지도 않는 거리는 도시 전체에 미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을 했다.


오랜 명령으로 기림 제국은 지하를 금지했다. 지하로 숨어드는 행위 자체가 반란에 해당했다. 땅 밑에 들어서는 것은 땅 위에 선 자들의 행동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헌진은 막연히 그 명령이 반란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을 목격한 지금, 황제의 명령은 이곳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헌진이 침묵하자 다나는 뒤를 흘끔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오랜 시간을 걷는 동안 침묵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다나가 먼저였다.


“뭐 할 말 없으신가요?”

“지상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다. 그것뿐이다.”


지하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헌진은 이곳과 관련된 일은 뒷날로 미루기로 했다. 우선은 지상으로 돌아가 나리아와 합류해 디나를 저지해야 한다. 그러나 광활한 공간 속에서 밖으로 나갈 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의 흐름조차 갇힌 듯 답답했다.


“도착했어요. 떨어진 지점이 너무 동떨어져서 좀 멀리 돌아왔지만, 여기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봐야 하는 곳이에요.”


다나의 발걸음이 이윽고 멈추었다. 헌진은 눈앞에 있는 거대한 관문을 보았다. 구역을 나눈 관문과 닮아있었다.


“들어가죠.”


다나가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관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는 이제까지 맡아보지 못한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헌진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기억 너머에 있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나가 손을 펼쳐 관문 안쪽을 가리켰을 때, 헌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펼쳐진 또 다른 공간은 지금까지 있던 곳과 궤를 달리했다. 곳곳을 비추는 광원조차 구역 전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렴풋한 윤곽만으로도 그 정체를 가늠하게 했다. 이 지하에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이곳이 도시의 원본이에요.”


다나의 짤막한 설명을 헌진은 이해했다.


헌진의 눈앞에는 또 다른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작가의말

여기는 내일부터 장마철이라는군요. 다들 습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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