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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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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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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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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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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3)

DUMMY




재형이 이끄는 북부군은 몇 명의 기사단 후보생과 몇십 명의 병사들이 고작이었다. 그런 병력으로 그는 남부군과 몇 차례나 부딪혔다. 나리아는 그 사실이 의아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다. 소수라는 사실은 그만큼 꼬리를 잡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재형의 손짓에 구역민처럼 위장했던 병사들이 위치를 옮겼다. 구역민은 어차피 그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니 섞이기는 쉬웠다. 거리에 있는 그들 곁에 자연스럽게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숲에 숨어든 나무와도 같은 모습에 나리아는 감탄했다. 극히 제한된 국지전을 벌인다면 이러한 형태로 지속할 법했다.


“저들은 왜 당신을 따르죠?”

“이유는 다양하지. 나와 마찬가지로 2구역에 진절머리가 난 놈들, 혹여 황궁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놈들. 도시가 의심스러운 놈들. 어떻게든 구역을 넘나들고 싶은 놈들.”


2구역의 사람들은 번식하지 않는다. 2구역의 제국군은 다른 구역에서 차출된 인원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근본은 가지각색이었고,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재형을 따랐다. 전체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만한 숫자가 따른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놈들은 아니다. 애초에 목숨을 걸 만한 의의가 이곳에는 없다.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지. 배신한 놈들도 몇 명이나 있다. 부릴 수 있으면 부리고, 싫다면 내버려 둘 뿐.”


조직이라고 부르기에는 퍽 괴상한 논리였다. 그러나 그런 느슨함 덕분에 유지될 수 있는 집단이기는 했다. 4구역에서 페이가 보이듯 압도적인 지식과 행동이 없다면 이 또한 방법일 것이다.


재형은 기억을 더듬어 지하에서 빠져나온 출구로 나리아를 안내했다. 나리아는 때때로 뒤를 돌아보며 길을 외워두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를 찌르는 말은 느닷없이 나왔다.


“재형, 카얄란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카얄란?”

“도시에서 암암리에 퍼지는 마약 말이에요. 당신도 봤죠? 넋을 잃고 좀비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이요.”

“좀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 것 같군. 그걸 카얄란이라고 부르나.”


재형은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불쾌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나리아는 재형을 지그시 바라보고 남몰래 안도했다. 아무래도 카얄란을 퍼트린 주범은 그들이 아닌 모양이다. 애초에 그럴 만한 조건이 아니기도 했다. 도망자인 그들이 풀을 재배할 수 있는 환경은 이 구역에서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그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추적하려 했지만 한계가 있더군. 그나마 내린 결론은······.”


재형이 베니를 흘깃 돌아보았다.


“남부 녀석들이 퍼트린 게 아닐까 하는 것뿐.”

“헛소리 마라, 배신자.”


베니가 당장 칼을 휘두를 듯 거칠게 말했다. 나리아가 베니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베니는 재형을 노려보다가 그 손짓에 혀를 차면서도 진정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라도 있나요?”

“우리가 처음 목격한 카얄란은 남부와 북부의 접경지역에서 발생했다. 그 후 발생지점은 점점 북상했지. 지금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이곳저곳에 퍼진 듯하다.”


재형의 설명에 베니가 발끈하며 나섰다.


“그렇게 따지면 너희들의 혐의가 더 짙어질 뿐일 텐데. 네놈들이 저렇게 북부 곳곳을 감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깊숙이 더 퍼질 수 있다는 소리지? 남부에서는 저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감히 우리에게 혐의를 돌릴 수 있겠어?”


재형은 대꾸하지 않았다. 피차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주장만 가능한 소모전일 뿐이므로 현명한 대처였다. 베니도 재형이 대답하지 않자 씩씩거릴 뿐 더는 몰아붙이지 못했다.


나리아는 법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카얄란을 퍼트렸을 리는 없다. 그런 낌새가 있었다면 그의 저택에서 헌진이 포착해냈을 것이다. 이유와 동기가 없기 때문에 내리는 결론일 수도 있었지만, 일단 나리아는 그에 대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결국은 헌진이 우선이다. 나리아는 가장 급한 일을 우선하기로 했다.


“저 앞이다.”


재형이 안내하는 끝은 북서쪽이었다. 나리아가 처음에 구상한 바에 따르면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을 지점이다. 나리아는 베니를 돌아보며 농담을 건넸다.


“재형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며칠 동안 노숙하면서 도착했을 지점이네요.”


베니는 못마땅한 듯이 혀를 찼다. 나리아는 빙긋 웃었다. 그녀를 놀리는 것은 제법 재미난 일이었지만, 나리아는 일단 말을 아꼈다. 지금은 재형과의 대화가 먼저였다.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베니에게 들켰으므로 그들은 더욱 교묘하게 숨어들 것이었다.


“재형의 계획은 뭐죠? 이대로 마냥 숨어있을 생각인가요?”

“지나치게 핵심을 찌르는군.”

“알려줘요. 어차피 여기까지 왔잖아요?”

“······.”


재형은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지하에서 같은 것을 본다면, 나리아 역시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자신과 같다는 법은 없지만, 지금껏 자신의 이야기를 모조리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재형의 목적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형은 어차피 그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목적을 입에 올렸다.


“오차율을 높인다.”


나리아가 시선으로 설명을 재촉했다.


“그놈들이 말하는 그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따라서 수단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서 그러한 개념을 찾아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발악할 뿐이다. 오직 그것만이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의 잘난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발생시킨 오차율로 그놈들을 엿먹일 수 있다면 걸어볼 만한 일이겠지.”

“엿먹인다고요?”


나리아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재형이 의아한 눈치로 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아, 비웃은 게 아니에요. 아랫구역에 있는 제 친구도 그런 말을 했거든요.”


나리아는 마린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모인 흐름이 도시에 이변을 발생시키고 있다. 어그러지지만 않는다면 그 흐름은 나리아가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 건물이다.”


재형이 가리킨 거대한 빌딩은 구역의 최외곽이었다. 나리아는 머릿속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끝자락을 떠올렸다. 중심이 가장 깊다면, 물론 저런 곳이 입구일 것이다. 가정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재형. 건투를 빌······.”


나리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빌딩 앞에 선 작은 그림자를 발견한 탓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이곳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소녀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상황은 급변했다.


“이런 제기랄.”


재형이 뒤로 물러나고, 베니가 나리아를 들어 올려 뒤로 물린 것은 동시였다. 소녀는 건물에 등을 기댄 채 느긋한 자세였다.


“재밌는 얘기를 나누더라, 너희들.”

“······디나.”

“내 이름을 알았네.”


디나가 나리아를 응시했다. 여전히 감정 모를 눈이었지만 나리아는 그 안에서 명백한 적의를 느꼈다.


“역시 너, 마음에 안 들어.”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끼어들지 마.”


디나가 내뱉듯이 말했다. 마치 나리아와 말을 섞는 것조차 기분 나쁘다는 듯했다. 나리아는 디나의 적의가 이해되지 않았다. 디나는 병사들을 도륙하며 지나갔을 때도 벌레를 짓뭉개듯 무심했다. 그만한 힘을 지닌 디나에게 사소한 존재에 불과한 나리아를 적대할 이유는 없었다.


“재형, 저 애를 상대해봤죠? 어떻게 하나요?”


나리아는 디나를 노려보며 재형에게 속삭였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상대할 생각을 마라. 그럴 만한 존재가 아니다. 도망칠 생각부터 해라. 가능하면 이대로 넘어가면 좋겠군. 변덕스러운 존재다.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해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이유 없이 공격해올 수도 있다는 뜻이지.”

“너.”


디나가 손가락으로 재형을 가리켰다. 재형은 몇 걸음 물러섰다. 디나의 공격방식을 이해하고 있는 그는 사방으로 감각을 뻗었다. 보이지 않으면서 빠른 공격을 해오니 거리를 벌리고 공기의 떨림을 감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베니도 그의 동작을 보고 의도를 이해했다. 두 칼을 느슨히 내리고 나리아를 지킬 수 있는 위치를 잡았다.


“너 따위가 오차율을 높일 수는 없어.”


명백히 재형을 깔보고 있는 말투였다. 재형은 발끈했지만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를 대신해 정면으로 나선 것은 오히려 나리아였다.


“오차율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수치일 텐데. 개인마다 그 수치가 측정된다는 거야?”

“그래, 맞아.”


디나는 비교적 순순히 대답했다. 재형은 놀란 눈치였다. 디나 역시 다른 의미로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존재였다. 2구역의 거주민들이 재형에게 무의미한 존재이듯, 재형 역시 디나에게 무의미했다. 재 일당은 디나를 피하기 급급했고 디나는 그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이니 하찮기는 매한가지였다.


“몇 퍼센트지?”

“뭐라고?”

“재형은 몇 퍼센트냐고.”


나리아의 태도는 명백했다. 디나가 말하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이제껏 다른 사람들은 시도조차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열 방법을 모르는 문에 맞을지도 모르는 열쇠를 들이대는 격이었다. 디나는 나리아의 말을 받았다.


“소수점 스물아홉 번째 자리 아래 정도.”

“······헌진은 몇 퍼센트였지?”

“헌진?”


디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태도에 나리아는 심호흡으로 화를 가라앉혀야 했다.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네가 지하로 떨어트린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라면 조금 높아. 소수점 열일곱 번째 자리 아래 정도.”


지극히 낮은 그 숫자가 사람의 가치를 대변하는 듯했다. 나리아는 영문도 모르고 디나에게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아무 의미 없다는 수치로 들리는데.”

“그래, 맞아. 쟤도, 그 사람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래도 그걸 파악하는 게 우리 일이고······.”


디나는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을 끌어내고 있는 나리아에게 거부감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근데 넌 그걸 왜 알려고 해?”

“이 도시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는 이 도시에 속한 존재도 아니잖아.”

“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리아가 반문했다. 이 도시에 뿌리를 두지 않은 인간은 없다. 그런 당연한 전제를 부정하는 디나의 말은 어리석을 정도였다. 그러나 디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리아와 디나가 서로를 응시했다. 기묘한 대치 상황에 재형과 베니는 오히려 당황했다. 얼핏 대등해 보일 만큼 두 소녀는 팽팽했다. 재형은 허리 뒤로 돌린 손으로 남몰래 신호를 보냈다. 여차하면 원거리 공격으로 시선을 빼앗고 전원이 동시에 물러서야 했다.


“그래, 이제 알겠다.”


나리아의 얼굴을 노려보던 디나가 느닷없이 말했다. 일종의 깨달음을 얻은 듯한 탄식이 딸려 나왔다.


“너 같은 사람을, 적이라고 부르는 거였어.”


그 순간 나리아는 흐릿한 바람 소리를 들었다. 베니가 영문도 모르고 팔을 뻗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허공에서 부딪힌 공격이 날카로운 소리를 터트렸다. 베니는 그 즉시 깨달았다. 지금은 행운에 가까운 우연으로 공격을 막았을 뿐이고, 다음은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그 판단과 함께 베니가 나리아를 끌어안고 몸을 굴렀다. 나리아가 서 있던 자리를 날카로운 무언가가 두들겼다.


디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은 사뭇 여유로웠다. 그러나 나리아를 향한 발걸음은 명확했다.


“너는 잴 수 없어. 잴 수 없는 건 기분 나빠. 그러니까 너를 죽여야겠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리아는 미처 반박하지 못했다. 베니가 끌어안은 채 사정없이 몸을 굴렀다. 혀를 깨물까 봐 나리아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러나 나리아는 디나를 노려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것은 나리아 역시 생에서 처음 디나를 자신만의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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