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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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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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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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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1. 탑 (7)

DUMMY

“일어났나.”


린첸이 눈을 뜨고 처음 본 광경은, 잊고 있던 맑은 시야 속에서 헌진이 합성식량을 뜯어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린첸은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일깨워진 뇌에서 기억이 정립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살아있나요?”

“재밌는 질문이구나.”


린첸은 탑 꼭대기에서 헌진과 함께 허공에 떨어지는 것까지는 기억했다. 탑 일부가 무너지는 모습은 그녀의 지난 몇 십년간의 삶이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 망연자실한 자신의 가슴에 톱니칼이 꽂히는 것을 보았다. 기사답지 않은 싸움이었다. 애초에 지금처럼 녹아내리는 몸으로는 기사라고 부를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뚫린 심장을 더듬던 린첸이 몸을 일으켰다. 저릿한 고통이 가슴께에 맴돌았다. 몸이 녹아내리지 않았다. 타는 듯한 갈망도 없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온전한 몸의 윤곽은 또렷했다.


“헌진? 이건······.”


린첸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 낯선 심장 소리였다. 린첸은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의 존재를 직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내 심장이다. 한동안은 이곳에서도 버티게 해줄 거다. 소중히 다뤄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헌진에게 린첸은 황망한 얼굴이었다. 탑은 머리를 잃은 채였고, 이 감각은 꿈이 아니다. 린첸은 헌진의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굳은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엉거주춤했다.


“아서라.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대체 왜······이런 짓을 하신 거죠.”

“네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죠. 저는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데요.”

“지금 너는 나에게 살의를 느끼냐.”


헌진이 린첸을 응시했다. 린첸은 그 시선 너머로 흐릿한 경계심을 읽었다. 린첸의 손이 칼을 찾기 위해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 손은 뻗지 않았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어쩐지 헌진을 공격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거면 됐다. 이거나 먹어라.”


헌진이 쥐고 있던 합성식량을 반으로 갈라 린첸에게 던졌다. 간신히 받아낸 린첸이 생각 없이 그것을 입에 물었다.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고형물을 씹은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턱을 써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에 린첸은 희미한 감동마저 느꼈다.


“얼마 만에 섭취하는 음식인지 모르겠군요.”

“식량의 보급이 이뤄지지 않았나. 여길 지나가는 징수관을 보았는데.”

“보급은 끊긴 지 오래됐어요. 이런 땅에서는 자급자족도 할 수 없죠. 애초에, 저들에게 음식을 취할 방법이 마땅찮은 것도 아니니까요.”


린첸이 광장에 몰려든 방호복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들의 중심에는 나리아가 서서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방호복들은 반복하거나 소리를 질러대 제법 시끄러웠다. 열띤 토론 혹은 말싸움으로 보였다.


“보았다. 완전히 다른 종이더군. 발성 기관이 없는 자들도 있고, 내장이 완전히 녹아내린 자도 있다. 저런 자들을 규정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모르겠다.”


린첸의 시선은 나리아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저 소녀가 헌진이 말한 탑보다 중요한 아이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중요도는 높았다. 린첸은 저 소녀를 경계해야 할지,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린첸은 생각을 잇지 못하고 드러누웠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자신이 벌인 일은 멀게 느껴졌고, 헌진의 심장과 나리아라는 존재는 낯설다. 린첸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단테는.”


헌진이 잠시 탑을 올려다보았다. 탑의 피를 공급하던 죽은 기사의 이름에, 먼 기억이 린첸에게 몰려들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헌진은 린첸에게 분노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옛 동료를 죽인 몸이다. 탑과 구역을 유지하기 위해 옛 동료를 바친 린첸을 꾸짖을 자격은 없었다.


“······제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이야기에요.”


린첸은 괴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제 모든 피를 뽑아내고 형체를 잃어가던 때였죠.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내장은 녹아내리고, 뼈는 액화하고, 기억은 흐릿해졌죠. 아마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을 거예요. 그런 제 앞에 단테가 나타났어요.”


단테는 마른 몸에 걸맞지 않은 도끼를 들고 린첸을 겨누었다. 그의 눈동자는 형체를 잃은 린첸을 보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알던 린첸이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흉하게 무너지고, 꿈틀거리며, 그런데도 탑을 되돌리기 위해 애를 쓰는 린첸의 흔적이었다.


‘린첸, 저는 린첸을 죽여야 합니다.’


단테는 머리가 좋았다. 헌진은 린첸의 말속에서 그 광경을 떠올렸다. 아마 이해했을 것이다. 탑이 내뿜는 독기, 그 안에서 고립된 기사, 탑을 지키고 도시를 지키기 위해 기사라면 해야 했을 선택. 그는 자신의 임무조차 잊고 그것을 직시했다.


‘폐하는 어째서 제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겁니까? 제 손으로 이 구역을 끝장내라는 겁니까?’


단테의 의문을 풀리지 않았다. 녹아내리던 린첸은 말조차 잊고 단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죽음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것이 도시의 멸망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린첸.’


그리고 단테는, 탑에 자신을 바쳤다. 린첸이 단테의 피를 머금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뇌가 손상된 린첸으로서는 그 상황에 의문을 품지 못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 단테의 몸에서 피를 취했고, 탑의 구성품으로 받아들였다.


“바보 같으니. 차라리 심장을 주지.”


린첸은 자조하며 눈가를 훔쳤다. 헌진은 과거의 희생을 담담히 되새겼다.


“아니, 합리적인 일이다. 두 기사가 두 개의 심장으로 버텨보았자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었을 테지. 게다가 경각에 다다른 너를 포함해 구역민 전체를 유지 시키는 일이다. 임시방편으로는 훌륭했다. 적어도 내가 여기까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지 않았더냐.”

“그거참, 위로되는 말이네요.”


아무렇게나 주워 담은 말이었다. 헌진에게도 그것의 합리성을 잴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어쩌면 단테의 희생은 무의미했을 수도 있다. 더 나은 수단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가 사람인 이유는 모든 선택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헌진은 그저 짧은 애도를 표했다.


“헌진은 그날 이후로 대체 무슨 여행을 한 거죠?”

“몇 마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윗구역에서 온 건 아닐 테고, 아랫구역에서 왔나요? 관문을 어떻게 통과했죠?”


린첸의 질문에 헌진이 합성식량의 포장지를 구기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무르히의 머리를 따고, 루미스를 설득하고, 미르돈을 죽이고, 페이긴을 체포하고, 알베릭을 제압했다.”

“그들 모두를요? 지금의 당신이?”

“아니, 절반은 저 아이가 해냈다.”


나리아는 육삼의 유리창을 두드리며 뭐라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싸움이라도 날 기세였다. 그러나 육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죽은 모습이었다. 린첸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죠?”

“진담이다.”


린첸은 그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야말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네 머릿속에 작은 칩이 들어있을 거다. 알고 있느냐.”


헌진이 대뜸 물었다. 린첸은 무슨 소리냐는 듯 헌진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는지 자신의 옆구리를 더듬었다.


“이거 말인가요?”


린첸이 옷자락을 들추어내자 옆구리에 기계 칩이 솟아있었다. 다소 뜬금없는 등장에 헌진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몸이 녹아내렸을 때 머리에서 흘러내리더군요. 옆구리쯤에 고정돼있길래 잊고 있었어요. 뼈가 변형된 건가 싶긴 했죠.”

“그건······정말 의외로군.”

“아는 물건인가요? 필요해요?”


린첸이 옆구리에서 칩을 뽑아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헌진은 얼결에 받아든 칩을 내려다보았다.


“하.”

“지금 웃은 거예요?”

“삶은 마냥 논리적이지 않구나. 때로는 부조리에 가까울 정도로, 우스운 일이 벌어지는군.”


웃음이 나올 만큼 간단하게 뽑힌 황제의 의지에 헌진은 이마를 짚었다. 3구역에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린첸은 씁쓸한 얼굴의 헌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롱의 중점에 있던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황제의 의도를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헌진으로서도 가까워지는 만큼 멀어지는 황제를 느꼈다.


자그마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린첸은 누운 채 고개만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리아는 저들끼리 떠드는 방호복들을 뒤로 하고 헌진과 린첸에게 다가왔다.


“끝났냐.”


헌진이 지친 기색의 나리아에게 물주머니를 건넸다. 나리아는 그것을 들이키고 입가를 닦아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냐고요? 이제 시작이에요. 곧 대기시간이래요. 탑의 인부들과 교대할 거래요. 육삼은 남는다는 모양이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겠죠.”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냐.”

“듣고도 모르겠어요? 저 사람들이 저를 따라야만 하는 이유와, 사람의 정의에 대한 격한 토론이죠!”

“듣고도 모르겠더구나.”


헌진이 흘깃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독기가 퍼진 땅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나리아의 몸을 생각하면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리아는 의욕적이었다. 헌진은 어렴풋한 지식으로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의 한계치를 계산했다.


“당신이 린첸인가요?”


나리아가 헌진에게서 뺏다시피 받아낸 합성식량을 입에 물고 린첸에게 다가왔다. 린첸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나리아에요. 춥진 않은가요?”


나리아의 시선이 린첸에게 꽂혔다. 린첸은 그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을 가른 일격에 앞섬이 훤히 드러났다. 기사가 이 정도로 추위를 느낄 리는 없었다. 린첸은 나리아의 말이 농담임을 뒤늦게 깨닫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기사에게 농담을 건네는 일반인이라니?


“린첸이 탑을 유지하는 일에 대해서는 들었어요. 고생이 많았겠어요. 아니, 이런 말도 당신의 희생 앞에서는 주제넘을 테죠.”


린첸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노력을 희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나리아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위안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당연한 행동에 그 누구도, 하지 않을 말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현상 따위에 대견하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헌진과 함께하며 그 누구보다 기사를 이해하고 있는 소녀가 할 말은 아니었다.


린첸은 나리아의 서글픈 미소를 들여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린첸은 그것이 어떠한 애정처럼 받아들였다. 소녀가 방호복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눈이다. 어쩌면 나리아가 만인을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방호복과 기사를 동등한 격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린첸으로서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리아는 무언가 우물거리다가 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손을 흔들었다. 방호복들에게 돌아가는 소녀의 작은 뒷모습은 애써 씩씩했다. 린첸은 그제야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저런 나리아를 보고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기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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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90. 탑 (6) 21.06.16 29 2 10쪽
90 89. 탑 (5) 21.06.15 25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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