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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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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4,968
추천수 :
304
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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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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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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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100. 폐기물 (5)

DUMMY

헌진은 이 도시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무력집단을 알고 있었다.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이질적인 집단은 근원과 후계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도시 내에서 유래하지 않는 무력집단은 없다. 힘은 계승되기 마련이고, 모든 반란은 그 이전의 반란에서 한 줄기나마 비롯되는 것이 도시의 이치였다. 따라서 헌진은 모든 반란을 마주할 때, 그들이 지닌 무력의 근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소녀가 다루는 힘은 다르다. 고대의 병기도 아니고, 기사단에 속한 무기도 아니며, 제국군의 무기도 아니다. 헌진은 지금까지 마주하지 못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소녀의 기척은 놀라울 만큼 희미했다. 헌진의 바로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없는 듯했다. 눈을 감으면 존재가 사라졌고 떠야만 인식되었다. 기습이 벌어지는 순간까지 헌진이 깨닫지 못한 이유였다. 눈으로 붙잡고 있지 않으면 존재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너는.”


소녀가 허공에서 불똥을 튀기는 칼날을 응시하다가 눈동자만 돌려 헌진을 바라보았다. 공허한 눈동자는 정말로 헌진을 보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폐기물이구나.”

“허튼소리를 하는군.”


헌진의 칼날이 허공을 그었다. 후보생들조차 그 궤적을 똑똑히 파악할 수 없었다. 궤적 하나하나가 벽을 부수고 기사의 몸도 가를 위력이었다. 그러나 허공에 부딪히는 칼날은 소녀의 가느다란 목조차 갈라내지 못했다.


사정없이 몰아치던 칼날이 느닷없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때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헌진은 자신을 노리는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헌진은 자리를 박차고 거리를 벌렸다. 그가 있던 자리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움푹 파이며 바닥이 갈라졌다.


물러난 헌진이 즉시 자세를 취했다. 소녀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헌진을 향해 다가왔다.


“헌진 경! 가세하겠습니다!”


곁에 서려는 후보생의 옆구리를 헌진의 발이 걷어찼다. 그 즉시 후보생의 어깻죽지가 베였다. 헌진이 걷어내지 않았으면 목이 날아갈 참이었다.


저 멀리 굴러떨어지는 후보생을 일별조차 하지 않고 헌진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물러서라. 무장장에게 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이 이상 병력을 들이지 마라. 내가 상대하겠다.”


보이지 않는 공격이 사방에서 몰아닥쳤다. 헌진은 시선은 소녀에게 고정한 채 공격을 쳐냈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공기를 가르는 희미한 소리와 파동만이 공격의 전조이자 단서였다.


헌진은 소녀의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머릿속이 현재 상황이 아닌 소녀가 불러일으킬 영향을 분석하려 했다. 어떻게 발생한 이변인지도 알아야만 했다. 만약 이와 같은 자가 또 있다면 구역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항상 전투가 아닌 전쟁을 염두에 두는 것. 그것이 기사가 아닌 기사단장의 버릇이었다.


“서둘러라.”


헌진이 여덟 번째 공격을 튕겨낸 뒤에야 후보생들도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헌진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을 건물 밖으로 내몰았다. 입구에서 진입하려는 후발대와 물러서려는 선발대 사이에서 잠시 혼란이 벌어졌지만 이내 수습되었다.


공격은 차츰 잦아들었다. 헌진은 물러서는 병사들의 후위를 지킨 채 칼을 치켜들었다. 단둘이 남은 상황이 되자 비로소 소녀를 향해 오롯이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무슨 무기냐.”

“무기라고? 이건 언어야.”

“정체가 무엇이냐.”

“이름이라면 디나.”

“네가 폐기물의 수장이냐.”

“아니, 나는 폐기물을 수집하고 있을 뿐이야.”


소녀는 순종적이라고 할 만큼 고분고분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어떠한 윤곽도 밝혀내지 않았다. 헌진은 소녀의 대답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디나라는 이름만이 유효한 정보였다.


헌진의 질문이 멈칫한 틈을 비집고 디나가 물었다.


“너는 폐기물인데, 왜 저들이랑 같이 있는 거야?”

“······.”

“······마고 할매가 그랬어. 모든 폐기물은 함께 합쳐야 한다고.”

“폐기물이란 무엇이냐.”

“의문을 품은, 버림받은 자들의 모임.”

“그러냐.”


마고. 헌진은 그 이름을 뇌리에 새겨두었다.


“그렇다면 너와 나는 다르고,”


헌진의 톱니칼이 디나를 향해 조준되었다.


“따라서 너는 내 적이다.”


헌진의 발이 땅을 박찼다. 매끈하게 포장된 바닥이 갈라지고 헌진은 쏘아졌다. 여전히 공격은 보이지 않았지만 막지 못한다면 공격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러나 막을 수 있으므로, 헌진의 돌진은 거침없었다.


단 몇 걸음이면 충분하다. 헌진은 사방에서 엄습하는 공격을 쳐냈다. 두 번째 걸음을 내딛는 동안 지금까지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공격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디나의 공격은 이제 파악되었다. 공기의 흐름만 감지된다면 도착하는 지점에서 대비하기란 손쉬운 일이었다.


디나를 앞에 두고 단 한 걸음을 앞에 둔 지점에서, 헌진은 톱니칼을 휘둘렀다. 소녀는 그 순간까지 무감정한 눈빛으로 헌진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직도 모르는구나.”


톱니칼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헌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디나의 공격은 일정 수 이상으로 벌어지지 않았다. 어떤 힘을 기반으로 사용되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엄연히 제한이 있는 힘이었다. 그렇다면 빈틈을 찾아 더 빠르고 정확하게 휘두를 뿐이다.


“칼은 나를 벨 수 없어.”


헌진은 칼을 들어 머리 위를 막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오였다. 헌진은 칼을 치켜든 순간 직감했다. 헌진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공격은 이제까지 없던 거대한 규모의 파열음이었다.


공기를 찢으며 내리치는 강타는 상상 이상의 위력이었다. 그것은 마치 벌레를 내리치는 주먹과 같았다. 헌진은 이를 악물었다. 공격을 막아내는 순간 척추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디나가 힘겹게 견디는 헌진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는 숭배 받는 땅. 지하로 들어서지 못한 자들이 근본을 꿈꾸는 땅.”


헌진을 찍어누르는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디나는 영원히 쏟아질 것만 같은 폭포수처럼 헌진을 짓누르고 있었다.


“갔다 와.”


헌진은 단단히 디딘 발밑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디나의 공격을 바닥이 먼저 버티지 못했다. 공기가 지하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 아래는 거대한 공동이었다.


공동을 향해 헌진은 빨려 들어갔다. 헌진이 디나의 공격에서 해방된 것은 이미 허공이었다. 헌진은 속절없이 땅밑으로 추락하면서 디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허리춤에서 힘겹게 꺼낸 단검을 던졌을 때는, 이미 시야에서 디나가 멀어진 뒤였다.


헌진은 하염없이 떨어지는 감각을 느끼며, 도시로 돌아오기 위해 장벽을 뛰어넘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의 철혈이 마지막으로 펼친 강습기동 후에, 하반신은 으스러졌다.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음.”


디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쓸었다. 헌진의 단검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마고 할미한테 혼나겠다.”


디나는 중얼거리며 지하에서 시선을 돌려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는 아직 수많은 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디나가 회수해야 할 폐기물은 없다. 디나는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피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건물은 포위되었고, 디나는 길을 뚫어야만 했다.




멀찍이 물러선 자리에서 건물을 올려다보던 나리아는 상황이 심상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물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단순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비명과 소음이었다. 그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나리아의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분대원은 없었다. 베니 역시 긴장한 기색으로 칼을 쥐고 있을 뿐이었다. 피 칠갑을 하고 건물을 빠져나온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괴성과 함께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귀, 귀신입니다. 괴물이에요! 보이지 않는 칼이 목을 가르고, 사람을 찢으면서, 기사께서도······!”

“헌진?”


나리아가 뛰쳐나갔다. 베니와 분대원이 그 뒤를 황급하게 따라갔다.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나리아는 헌진의 이름을 불렀다.


“헌진! 대답해요! 괜찮아요?”


그러나 통신기 너머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희미한 잡음만이 들려왔을 뿐이었다.


“나리아님! 이 이상은 위험······.”


베니가 손을 뻗어 나리아의 앞을 가로막은 순간이었다. 나리아가 막 내딛으려던 곳에 피보라가 몰아닥쳤다.


“······!”


나리아의 눈앞에 수많은 사지가 떨어졌다. 바닥을 구르는 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실성한 듯 소리를 지르던 병사였다. 그리고 그 살육을 넘어 달려나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법우의 본거지에서 보았던 소녀의 얼굴이었다. 나리아는 그 얼굴을 보고 얼어붙었다. 소녀는 살육을 펼치며 그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딜 감히!”


나리아를 끄집어 뒤로 밀쳐낸 베니가 칼을 휘둘렀다. 두 자루의 칼이 소녀의 목과 허리를 노리고 그어졌다. 소녀의 시선이 얼핏 베니를 향해 돌아갔다.


“베니! 안 돼요!”


나리아가 베니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소녀의 눈길이 나리아와 일순 마주쳤다.


베니의 칼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그 위력만으로도 베니는 나리아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베니는 뒤늦게 자신의 목덜미에 도사렸던 진한 죽음의 흔적을 느꼈다.


소녀는 군대의 대열을 아무런 제지 없이 빠져나갔다. 지나가는 길목마다 병사들은 혼비백산해서 흩어질 뿐이었다.


“물러서라! 물러서!”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법우가 도착한 것은 한참 후였다. 그는 남은 사병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조차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리아는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에는 운이 좋아 이 자리에 없었던 사람과, 운이 나빠 바닥에 널브러진 고깃덩이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법우가 나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 누군가가 붙잡아주지 않으면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모, 모르겠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것만이 고작이었다. 법우는 비틀거리며 일어선 베니에게 나리아를 맡기고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헌진은 어디에······.”


나리아의 눈이 건물 입구를 향했다. 머릿속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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